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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과 충주
글,사진 / 김경식
사는 일이 때로 힘겨울 때가 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고 자신은 불행함을 느낄 때 불현듯 고독이 스멀거리며 찾아든다. 이 고독을 슬퍼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조용히 자신을 찾는 기회로 활용하며 여행을 떠나보자. 가방에 한 권의 시집과 메모수첩을 준비하며 길을 떠나자.
우리들이 한때 잊고 지냈던 고향마을의 오롯한 추억이 묻어 있는 시집을 읽다 보면, 유년과 청소년기의 상큼한 그리움이 눈발처럼 휘날리게 될 것이다. 이럴 때 한 편의 시를 읽어보라, 그리고 살아 온 날과 살아 갈 날을 생각하며 눈을 감아보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시다. 인간의 삶을 이보다 짧은 언어로 함축한 시를 아직 나는 만나지 못했다.
* 신경림 시인의 고향마을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고 바라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황홀하고 행복한 순간이 일생에 몇 번이나 되겠는가. 많은 세월 동안 흔들리며 눈물 흘리고 길을 가는 것이다. 울면서 흔들리고 알 수 없는 곳을 가는 것이다. 이 시는 인간의 실존은 고독이며, 비극적인 삶의 인식이 주제다.
때로 실존에 회의가 들고 삶이 자신의 방향으로 가지 못할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 이 시를 탄생시킨 시인의 고향, 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1리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북충주IC로 나와 약15분을 달리면 닿는다. 면소재지 마을이며 초등학교까지 마을인데 시간이 정체 된 듯 한산하다. 시인이 청년기까지 보냈을 골목길을 걷고 노은초등학교 운동장을 거닐어 보라. 신경림 시인을 일약 유명 시인으로 만든 '농무'라는 시집의 대부분은 이 마을이 배경이기 때문이다.
시집의 제목이 된 시 '농무(農舞)'는 노은초등학교가 무대다. 농무란 말은 '농민들이 추는 춤'을 말한다. 춥지만 시 '농무'를 읽으며 학교 부근을 걷는다.
* 노은초등학교 (신경림 시인 모교)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1960년대 근대화의 물결속에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이미 농촌은 몰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농촌에는 '농무'를 추며, 오랫동안 마을의 전통을 이어오던 놀이문화가 존재했다. 신경림 시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큰 의미는 당시의 농촌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였다는 것에 있다. 다른 문인들이 농촌을 외면적인 아름다움과 멋으로 농촌을 이야기 할 때, 그는 몰락하는 농촌의 현실을 가슴과 슬픔으로 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균형 경제발전 모델인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농촌은 당연히 몰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난하고 소작을 하던 이들부터 농촌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돈 푼께나 있는 사람들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들이 살던 고향을 등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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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인의 생가
도시로 이주하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당한 농민들은 그때부터 침묵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0년대의 농촌인구의 비중은 약 80%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 전체 국민 중 농촌의 인구비중은 7%를 밑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것을 반영하듯 농촌마을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의 농촌은 10년후가 지나면 사라질지 모른다. 농촌을 살릴 대안이 시급하다.
주변의 산에는 잔설이 남아 있고 겨울바람이 차다. 신경림 시인의 생가를 찾아 들었다. 신경림 시인은 이미 40 년 전에 이사를 했고 그 집에는 정사분(80세)이라는 할머님께서홀로 살고 계셨다. 시인이 간혹 이 집을 들렸다 간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이 곤고함을 전한다. 집은 퇴락하여 수리할 곳이 많았지만 할머니는 손을 볼 수 있는 경제적 상황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시인이 태어난 방과 공부하던 방에 들어가 앉아 보며 정사분 할머니로부터 시인의 마을과 집에 얽힌 비화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신경림이가 이 고장에서 태어나 서울로 갈 때 우리한테 집을 팔았어유, 그 집 형제들은 모두 대학을 나왔지유"
"저 국민핵교 앞에 그들 논이 많았는데 그때 다 팔았시유, 오래전에 신경림의 처가 죽어 광산 가는 입구에 있는 산에 묻혀 있지유"
* 신경림 시인 생가에서 살고 계신 정사분 님
생가입구를 걸어 나와 먼 산을 본다. 그곳에 광산이 있다고 했다. 그의 시에 유독 광산이야기가 많은 연유를 알았다. 그의 부인이 사망하였을 때, 가난으로 제대로 고향마을 사람들을 대접할 수 없었던 것을 고백한 글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난다.
신경림 시인 아내의 무덤은 생가 근처에 있는 소방대 뒷산에 있다. 신경림 시인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실업자 생활을 하였다. 일거리를 찾아 허다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때는 이 마을 저 마을로 약을 팔러 다니는 떠돌이 약장수도 했다. 당시에 대학을 나온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연유로 번듯한 직장을 잡지 못하고 고향 근방을 떠도는 일은 그에게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잘 나타낸 '눈길'이란 시 몇 줄을 읽는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개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켜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한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때
아득한 옛날부터 한반도의 중앙에서 민족의 심장이 되어온 곳이 있다. 충청북도 충주다.
이 지역 사람들은 바람이 잘날 없던 민족의 수난사에서 온갖 시련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인내와 끈기를 지녔으며 평화를 지향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전쟁터에서는 용감하게 적에 대항하였다.
삼국시대에 이미 백제, 고구려, 신라의 두 번째 큰 도시로 번창하였던 충주의 위세는 오히려 현재가 초라할 정도로 대단했다. 신라시대에 서라벌에 살던 우륵이 충주 탄금대로 거처를 옮기면서 충주는 아름다운 예향이 된다. 우륵이 타던 아름다운 가야금 소리는 숫한 전쟁으로 많은 눈물을 만들었다. 이 눈물이 모여 영월에서 단양을 거쳐 흘러오는 땟목꾼의 강인하지만 슬픈 노래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 고장 사람들의 약간은 느리고 겸손한 언행은 어제 오늘 만들어지지 않았다. 충주는 멀리소백산맥의 웅장한 봉우리들이 남서방향으로 앉아 있다. 가까이에는 대림산을 주산으로 연꽃같이 분지를 만든 산들이 도시를 보호한다. 이 호젓한 땅을 남한강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간다. 기름진 땅을 적시며 수수만년을 흘렀다.
중원고구려비에서 신라의 중앙탑으로 가는 길에서 당신은 아마 역사의 아련한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그 소리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이 지방의 소리는 슬픈 가락 속에 나직한 음성이 제격이다. 이런 노래의 가사는 당연히 시인의 몫이 되리라. 충주가 고향인 신경림 시인이 이 지역을 가장 잘 표현한 시를 썼다.
* 목계나루터
이쯤에서 그의 시 "목계장터"를 읽어보자.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는 충주시 목계리 남한강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1910년대까지만 해도 중부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였으며 남한강변의 많은 나루터 중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곳이다.
오래전에 나룻배는 사라지고 큰 다리가 건설되어 나루터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는 모습이 되었다. 이미 사라진 목계장터의 풍경을 상상하며 건강한 삶의 흔적을 더듬었다.
*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작가의 고민이 이곳의 산과 강을 보며 고민한다.
이 시를 읽다보면 유랑과 정착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남한강가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억센 생명력이 잘 나타나 있다. 유랑을 나타내는 방물장수와 구름, 잔바람은 방랑의 언어다. 잔돌과 들꽃은 정착의 상징어와 어울림이 친근하다.
1979년 발견되어 당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고구려비가 있다. ‘중원고구려비’다. 이 비는 고구려 장수왕이 남한강 지역의 몇 개의 성을 개척한 후 그 기념으로 세웠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비다.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비석을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비문이 훼손되어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다. 돌기둥 모양으로 크기는 작지만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다. 그 형태만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지금은 모조비를 만들어 놓고 해설까지 있어 이 비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문은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로 시작되는데, 고려는 고구려를 칭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처럼 '고모루성(古牟婁城)' 등의 글자가 보인다. '모인삼백(募人三百)', '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나타낼 때 쓰던 단어를 확인하면, 이 비석이 고구려비임을 확인 하게 된다.이 비는 최남단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정한 석비(石碑)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차지하고 고구려의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증명한다.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들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비석으로 한반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고구려비다. 신라가 통일을 한 후 이 비석을 훼손하지 않은 것이 궁금하다.
* 중원고구려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에 있는 이 비석은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다투다가 화해 기념으로 새겨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비석에는 고구려가 형님이 되고 신라가 아우가 된다는 내용이 있으며 국경의 경계는 조령과 죽령이었다. 삼국시대의 중원(中原) 충주는 본래 마한에 속한 지역이다. 근초고왕 때 백제가 마한을 정벌하고 충주는 백제의 국토가 된다. 이 때 지명은 '낭자곡성(娘子谷城)'이다. 광개토대왕(혹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장수왕 63년(AD 475)때 '국원성(國原城)'이라고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이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다. 지명을 국원성이라 한다. 신라 땅이 된 후 진흥왕 때 소경(小京)을 설치한다. 문무왕 때 성을 쌓았으며 주위가 2천5백92보다. 경덕왕 때 지명을 '중원경'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충주이다."
신라의 북진 정책으로 진흥왕 14년(A.D 553) 신라의 땅이 된다. 경주의 귀족 자제와 6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하였다. 진흥왕 34년(A.D 573)에는 소경부(小京府) 또는 사천성(四川省)이라 불렀다.
충주는 양질의 철이 생산된 우리나라 3대 철산지 중의 한 곳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충주는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중원고구려비 근처에 ‘탑평리7층석탑’으로 중앙탑을 세운다. 여러 가설이 있지만 이곳이 신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설이 아직은 유력하다.
* 중앙탑
신라 원성왕 1년에 건립된 석탑으로 높이가 14.5m다.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다른 이름은 '탑평리7층석탑'이다. 탑의 아랫부분은 받침돌 기단이다. 2층 기단 위에 7층의 탑 돌을 올려놓았다.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먼 곳을 조망하기가 수월하다.
충주박물관에서 충주의 역사를 인식하고 중앙 탑과 남한강의 물줄기를 보면 한결 이 지역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정리된다. 탄금대로 가는 국도 옆에 창동리가 있다. 이곳에는 마애석불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 마을은 일제시대 유명한 시 메밀꽃의 시인 정호승(1916~)선생의 고향마을이다. 태어난 곳은 충주시 교현동 이지만 오랫동안 이 마을에 조상들이 뼈를 묻은 곳이다.
비록 월북을 하여 우리에게는 잊혀진 시인이다. 정호승 시인하면 동명이인(同名異人)의 현재의 유명시인으로만 알고 있다. 아마 그가 월북하지 않았다면, 지금 정호승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만큼 서정성이 깃든 시를 훌륭하게 썼던 시인이다. 얼마 전까지 그의 부인이 생존하면서 집을 지키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창동마을 의 마애석불을 답사한다. 마애석불을 찾아 산에 올라가 북으로 떠나간 시인 정호승 선생을 생각하면서 마을을 내려다 본다.
연대가 밝혀지지 않아서 그냥 고려시대라고 추정되고 있는 이 마애불은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마애불을 찾아 가는 돌계단 길은 아름답고 호젓한 길이다.
* 창동마애석불
강가 절벽에 새겨진 마애석불을 본다. 메밀꽃이 필 시기는 아니지만 그의 대표시를 메밀꽃을 읽어본다.
어느 여인의 슬픈 넋이 실린 양
햇쪽이 웃고 쓸쓸한 모밀꽃
모밀꽃은 하이얀 꽃
그 여인의 마음인 양 깨끗이 피는 꽃
모밀꽃은 가난한 꽃
그 여인의 마음인 양 외로이 피는 꽃
해마다 가을이와 하이얀이 피어나도
그 마음 달랠 길 없어 햇쪽이 웃고 시드는 꽃
세모진 주머니를 지어 까만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담어 놓고
아모 말없이 아모 말없이 시드는 꽃
정호승 시인은 1916년 충주에서 출생했다. '조선문학' 발행인 겸 주간으로 활동했다. 1939년에는 민족의 시련과 농민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담은 시집 '모밀꽃'을 발행한다.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 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가 투옥된다. 일제 때에 친일하지 않은 작가 중의 한 분이다.
남한강과 달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인 대문산에 탄금대(彈琴臺)가 있다. 비록 산은 작지만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강쪽으로는 기암절벽이다. 이곳에는 신립장군순절비,우륵선생추모비,탄금대비,탄금정,열두대,충혼탑 등이 있다.
가야금 소리가 숲에서 들리는듯하여 돌아보면 조용하다. 솔숲을 걷다보면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시를 썼던 던 권태응(1918~1951) 시인의 '감자꽃' 이란 시비가 서 있다.
* 권태응 시인 시비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민족의 영원무궁함을 느끼게 한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그는 탄금대 아랫동네 칠금동이 고향이다. 시인은 일제가 아무리 우리말과 혼을 바꾸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 시 한편으로 대변했다.
탄금대란 지명은 우륵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가야금을 연주한 곳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륵은 태어남과 죽음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이다.
우륵은 대가야국(大伽倻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가야왕 가실왕(嘉實王)의 뜻에 따라 12현금 (絃琴:가야금)을 고안한다. 551년(진흥왕 12) 신라에 항복한다. 진흥왕은 그를 국원, 지금의 충주에서 살게 배려해 준다. 충주 탄금대 인근에 살면서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등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전수하였다. 진흥왕에 의하여 가야금곡이 궁중음악이 된다.
충주 탄금대가 유명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이곳이 왜군과의 큰 전쟁을 벌인 곳이기 때문이다. 1592년 4월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달려왔다. 이에 선조임금은 두만강 변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던 명장 신립장군에게 왜군을 물리칠 것을 명령한다.
신립장군은 유성룡이 마련해준 병사80명을 모아 충주에 도착하였다. 충주 인근에서 군사를 모아 8,000명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부하 장수들은 협곡이 있는 문경새재에서 왜군과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이곳 탄금대가 적격 장소라고 생각했다.
결국 남한강과 달래강이 만나는 이곳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을 맞아 싸웠다. 적들은 유명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이 주축이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당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조선군은 죽음을 당한다. 신립장군이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12번을 오르내렸다고 하여 열두 대 라고 한다. 끝내 자신도 전쟁의 참패의 책임을 지고 강물로 뛰어 내려 자결한다. 그 곳에 신립장군 순절비가 서 있다. 이 전투의 실패로 한양의 민심은 흉흉하였다. 결국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다.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과 기타 궁궐을 불태우게 된다.
* 탄금대 열두대
6,25 당시 이 지역에서 숨진 1566명의 위패가 모셔진 충혼탑을 지나다 보면 탄금대는 역사의 숨결이 곳곳에 살아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직접 쓴 충혼탑(忠魂塔)은 전쟁의 참담함을 일깨우고 있다. 이런 참담한 분위기를 대흥사의 9층 석탑과 겨울 하늘을 보며 달랜다.
탄금대에서 충주역을 지나 수안보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충렬사가 있다. 달래강이 휘돌아 나가고 대림산이 올려다 보인다. 충렬사는 임경업(1594~1646)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숙종 23년(1697)에 건립하고 영조대왕이 충렬사란 사액을 내렸다. 정조 15년(1791)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 '어제달천충렬사비'이다.
1978년에 성역화를 하였다. 경내에는 사당, 강당, 비각 외에 추련검, 고지 등이 전시된 유물전시관이 있다. 충민공 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 충주에서 태어났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등 나라에 충성하였다.
인조 30년(1642)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위협을 받게 되자 명군과 협력해 청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런 계획이 알려지게 되어 청군에게 포로가 된다. 청나라는 장군에게 여러 제의를 하면서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끝까지 숭명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646년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관되어 청국에서 소환되어 와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한다.
충주 충렬사는 이 땅의 명장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죽어가야 했는가를 잘 나타내는 곳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포로로 잡혀 청나라의 옥에 갇혀 있다가 모반에 연루되어 소환되어 고문으로 죽어간 임경업 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싶다. 조선의 운명이 이 때 다하지 않은 것이 기이한 일이다. 조선은 많은 인재들을 스스로 죽이며 유지 되어온 시대였다. 그 희생자들의 넋은 늘 이렇게 사당을 지어 위로할 수밖에 없었는지 의문을 갖는다.
어둠이 내리고 있다. 새벽에 서울을 떠나 충주를 기행하다 보니 가뜩이나 짧은 겨울 낮이 빠른 강물처럼 흘러갔다. 서둘러 떠나갔다.
달래강에 놓인 달천강을 건넌다. 민족사의 상흔이 서리고 아름다운 우륵의 가야금 타던 소리가 강가에 울리는 듯하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 군인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임진왜란 때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죽어간 넋들도 위로하고 싶어진다. 정호승 시인과 권태응 시인을 비롯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중주 출신 작가들의 이름도 불러본다. 충주를 떠나며 다시 신경림 시인의 시 갈대의 한 구절을 읽어본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