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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칠서는
<손자병법>이외에 吳子, 司馬法, 위료자, 이위공문대, 황석공3략, 육도를 합쳐 말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손무와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중국은 물론 세계 군사사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다.
孫武는 병가의 성인이란 뜻으로
'병성(兵聖)' 또는 '무성(武聖)'으로 추앙받고,
그 저작은 병가의 바이블이란 뜻의 '병경(兵經)'으로 불릴 정도다.
손자병법은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計(계)編 - 전쟁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해야할 것으로 서론에 해당됨
2. 作戰(작전)편 - 전쟁에서의 군비문제와 동원 보충 등의 계획
3. 謀攻(모공)편 -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
4. 形(형)편 - 攻守(공수)의 태세
5. 勢(세)편 - 태세에서 나타나는 軍勢(군세)
6. 虛實(허실)편 - 그것을 이어받아 전쟁의 주도성 파악
7. 軍爭(군쟁)편
8. 九變(구변)편
9. 行軍(행군)편
10. 地形(지형)편
11. 九地(구지)편
12. 火攻(화공)편
13. 用閒(용간)편
군사 모략학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손무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모략의 대가이기도 하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손무는 자가 장경(長卿)이고,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 낙안(樂安, 지금의 산동성 혜민현) 사람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신흥 지주계급이라 할 수 있는 군사 전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 진완(陳完)은
원래 진(陳)나라(지금의 하남성 회양 일대) 공자로 내란 통에
제나라로 도망와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다.
손무의 할아버지 전서(田書)는 거(莒)를 공격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제 경공이 낙안을 근거지로 주고 동시에 '손(孫)'이란 성까지 하사했다.
가정 분위기 때문에 청년 시절
손무는 병법에 큰 관심을 보였고 검술도 잘 했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는 가족을 따라 오(吳)나라로 이주했다.
이후 20년 동안 손무는
"병법을 깊이 탐구하면서 산간 벽지에 숨어 사는" 생활을 보냈다.
이 기간에 그는 『손자병법』을 저술했다.
그뒤 오대부 오원(伍員)의 추천을 받아
"병법으로 오왕 합려(闔閭)를 만났고,
이어 장군에 임명되어 오가 초를 격파하는 전쟁에서 중대한 공을 세웠다."
만년의 손무에 대한 기록은 부실하기 짝이 없어
그저 죽어서 오현에 묻혔고,
그 자손은 부춘(富春)에 정착했다고만 되어 있다.
동한 말기 부춘 사람 손견(孫堅)이 자칭 '손무의 후손'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면 손무는
생애 대부분을 오나라에서 보냈던 것 같다.
그의 주요한 공헌은 먼저 『손자병법』을 남긴 것이고,
다음으로는 협려를 도와 초를 격파한 것이다.
『손자병법』은
손무의 군사 이론서로
기원전 512년 손무가 오나라 장군에 임명되기 전에 완성되었다.
시간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2천5백 년 이상 전이었다.
세계사에서 현존하는 군사 이론서 중에서 가장 이른 바이블 같은 저작이다.
『손자병법』은 문장이 간결하고 생동감 넘치며, 내용은 넓고 깊다.
분량은 5천9백여 자에 지나지 않지만 군사과학 각 분야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고서는
춘추시대 이전 역대 군사사상과 전쟁경험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하고 이론화한 책으로,
기본적으로 전쟁의 일반법칙을 제시하면서
군사작전의 원칙을 정교하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논리 속에는
소박한 유물주의와 변증법 사상이 충만하여
고대 군사과학의 기초를 닦았을 뿐 아니라
일반 철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동시대 철학가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손자병법』의 출현은
군사과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사회과학 영역에 출현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 군사사에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2천 년 넘게 『손자병법』은
'병경'으로 존중되어 오면서
뛰어난 장수를 기르고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일본과 유럽 등지로 전파되어
세계 군사과학의 발전에 굉장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 이후로는
더욱 넓게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일본의 군사 평론가인 소산내굉(小山內宏)은 이렇게 『손자병법』을 평가했다.
『손자병법』은
전략론일 뿐 아니라 의미심장한 뜻을 품은 전쟁철학이며,
심지어 현대 전략전술에도 대단히 훌륭한 계시를 준다(『현대전략론』 1972년판).
또 미국의 군사 이론가인 존 콜린스(John Collins)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손자는 고대에 처음으로 전략사상을 수립한 위대한 인물이다."
"오늘날 전략의 상호관계, 고려해야 할 문제 그리고 받을 수밖에 없는 제한 등에 대해
손자보다 더 심각하게 인식한 사람은 없다.
그의 관점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 상황에서 여전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대전략』 1973년판)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는
『손자병법』이 밝힌 전쟁 지도원칙을
국가전략과 군사정책 수립 등에 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업관리에도 활용하고 있다.
전쟁은 인류사회의 특수한 활동으로
국가·민족과 정치집단의 성패존망과 관계되는
교전 쌍방의 실력과 지혜의 전면 경쟁이다.
따라서 전쟁 지도자의 모략사상과 지휘술에 대한
가장 신속하고 무정한 시험장이 된다.
자각한 능동성은 인류의 특징이다.
인류는 전쟁에서 이런 특징을 강력하게 표출한다
(모택동, 『지구전에 관하여』 중 '전쟁에서의 능동성').
전쟁의 객관적 법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장악하느냐,
인간의 자각적 능동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 등은
역대 군사 전문가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었다.
손무 군사사상의 두드러진 특징과 우수한 점은
이론상 이 문제를 초보적으로나마 해결했다는 데 있다.
즉 전쟁을 이끄는 데 있어서 객관적 규칙성과 주관적 능동성을 통일시킨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손무는
정확한 철학 언어로 표현해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학설 전체를 관통하면서
군사사상의 철학적 기조를 이루는 데는 성공했다.
손무의 군사모략 사상은 그의 군사사상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제 그 주요 사상을 알아보자.
'먼저 승리한 다음 싸운다'는 사상이다.
손무는 전쟁의 승부는
교전 쌍방의 실력대결에서 결정날 뿐 아니라
전쟁을 정확하게 이끌었느냐 여부에서도 결정난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싸우지 않고 묘산(廟算)하여 이기는 사람이 승리할 공산이 크다.
싸우지 않고 묘산에서 이기지 못하면 승리할 공산이 적다.
가능성이 크면 이기고, 적으면 진다.
하물며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야 오죽 하겠는가"(제1편 '시계(始計)').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긴 뒤에 싸움을 찾고,
패하는 군대는 먼저 싸운 뒤에 승리를 구한다"(제4편 '군형(軍形)').
따라서 손무는 전투에 앞서
전략과 대책수립 그리고 전쟁 중의 모략투쟁을 중시한다.
이에 따라 '묘산'(국가 최고통치자의 군사정책과 결정)을
군사활동의 첫머리에 두고
모략으로 승리하는 '벌모(伐謀)'를 가장 좋은 투쟁방식으로 꼽는다.
그리고 '지(智)'를
장수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으로 제시한다.
총 13편의 『손자병법』에서
'시계' 편이 처음에 안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손무가 군사모략을 대단히 중시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절묘한 안배다.
손무는 군사상의 정책결정과 지도방향의 중요성을 논증했을 뿐 아니라
결정된 정책을 정확하게 실행하는 기본방법도 제시한다.
따라서 다섯 가지 일로 경영하고,
일곱 가지 꾀로 헤아려 그 정황을 찾아낸다(제1편 '시계').
이른바 다섯 가지 일이란
뜻의 '오사(五事)'란
도(道)·천(天)·지(地)·장(將)·법(法)을 가리킨다.
손무의 해석에 따르면 이 오사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도란
백성이 지도층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게 하는 것이니,
함께 죽을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기에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천이란
음과 양, 추위와 더위, 시기를 말한다."
"지란
멀고 가까움, 험하고 평탄함, 넓고 좁음, 죽음과 삶을 말한다."
"장이란
지(智)·신(信)·인(仁)·용(勇)·엄(嚴)이다."
"법이란
곡제(曲制)·관도(官道)·주용(主用)을 말한다."(이상 '시계')
손무가 말하는 '오사'란
정치·기후·지리·장수·군제와 후방 등 전쟁의 승부에 영향을 주는 기본 요소들을 말하며,
이 요소들을 종합해서 관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다음 따지고 비교하는데,
"누가 주도권을 쥐는지,
어느 쪽 장수가 유능한지,
기후와 지리는 어느 쪽이 장악했는지,
병졸의 숙련 여부는 어느 쪽이 나은지,
상벌은 누가 분명한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교전 쌍방은 이 7개 방면(훗날 이를 '칠계(七計)'라 불렀다)의 조건을 비교해서
승부의 가능성을 분석·추출하고 실제에 적합한 정책을 결정한다.
이전 군사가와 비교해서
손무가 이 방면에 남긴 공헌은
군사상 정책결정과 모략투쟁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지위와 작용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군사 정책결정의 기본 요소와 방법을 제기하여
초보적이고 단편적이었던 이전 학설을 계통화하고 이론화했다는 데 있다.
손무는 교전 쌍방의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적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전제조건이자 정확한 정책결정의 객관적 기초로 보았다.
『손자병법』에서 손무는 반복해서 이 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와 장수가 움직여 승리를 거두고 출중하게 성공할 수 있는 까닭은
먼저 알기 때문이다(제13편 '용간(用奸)')."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승리하여 위태롭지 않고,
기상과 지리를 알면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제10편 '지형(地形)')."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상대를 모르고 나만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
상대도 나도 다 모르면 싸웠다 하면 진다(제3편 '모공(謀功)')."
손무는 규칙성을 갖춘 과학적 진리를 내세우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제대로 아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귀신에게 물어 알아서는 안 되며,
다른 일을 본받아서도 안 되며,
기타 천문 따위를 보고 추측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사람을 통해 적의 정황을 알아야 한다(제13편 '용간')."
이는 다시 말해 귀신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며,
주관적 판단에 따라 억측해서도 안 되며,
정찰과 간첩 등의 수단을 통해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치·군사가들은 몸소 전략을 수립하고 정찰하여
1차 정보를 얻은 다음
이를 군사행동의 근거로 삼으라는 것이다.
둘째, 현상을 통해 본질을 간파할 것을 강조한다.
제9편인 '행군(行軍)'에서
손무는 두 군대가 진지를 사이에 두고 교전하는 중에 나타나는 열두 가지 표면적 현상을 통해
적군의 진정한 의도를 간파할 것을 강조하고,
적이 만들어낸 가상에 현혹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도 지적한다.
셋째, 유리한 요인과 불리한 요인에 대해 다각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손무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이익과 손해를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이익을 생각해야 일에 힘을 쓸 수 있고,
손해를 생각해야만 근심거리를 풀 수 있다(제8편 '구변(九變)')."
"따라서 용병의 해로움을 다 알지 못하는 자는
용병의 이로움도 다 알지 못한다(제2편 '작전(作戰)')."
이상에서
우리는 손무의 모략사상에 번득이는 유물론과 변증법의 빛을 볼 수 있으며,
일부 논리는 전쟁의 객관적 규율을 반영하고 있어
지금까지 강력한 생명력을 과시한다.
모택동은 "손자가 내세운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규칙은
과학적 진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상대를 끌고 다녀야지 상대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제6편 '허실(虛實)')'는
이 사상은
손무의 군사모략 사상에서 아주 이채롭고 빛나는 부분이다.
그 기본정신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아
적과 나의 형세를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데 있다.
"잘 싸우는 사람은 상대를 끌고 다니지 상대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따라서 공격을 잘 하는 자는 적이 어디를 지킬지 모르게 하며,
잘 지키는 자는 적이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모르게 한다.
아주 미세하고 형체도 없으며 귀신같이 소리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적의 생사를 쥔 '사령(司令)'이 될 수 있다."(이상 제6편 '허실')
용병에 능하여 미묘하고 신기한 경지에 이르면
자신은 주도적 위치에 서는 반면
적은 피동적 상황, 심지어는 적이 나의 조종과 지휘를 받게 만들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손무는 '임세(任勢)'와 '궤도(詭道)'를 든다.
'임세'란
형세에 따라 이익을 끌어내어 적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두는 것을 말한다.
손무는 전쟁은 그 자체의 특수한 운동법칙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군대의 모습은 물과 같다.
물은 높은 곳을 피하여 아래로 흐르고,
군대는 튼튼한 곳을 피해 허술한 곳을 공격한다.
물은 땅을 봐가며 흐름을 만들며,
군대는 적의 상황에 따라 승리를 창출한다.
따라서 군대는 정해진 형세가 없고, 물 역시 정해진 모양이 없다.
적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여 승리하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제6편 '허실')."
"기세에 맡긴다는 '임세'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싸움을 나무와 돌을 굴리듯이 한다.
나무와 돌의 성질은
편안하면 조용하고, 위태로우면 움직이며,
모나면 멈추고, 둥글면 굴러간다.
따라서 잘 싸우는 사람의 기세는
마치 둥근 돌을 천 길 산 위에서 굴리는 것과 같다(제5편 '병세(兵勢)')."
용병에 능숙한 사람은
전쟁의 객관적 규칙에 따라 자신의 전법을 결정한다.
예컨대 "가두어둔 물을 천 길 골짜기에 떠놓은 것과 같다"거나
"둥근 돌을 천 길 산 밑으로 굴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자각적 능동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양군이 교전에 앞서 "적이 이길 수 없는 태세를 갖추고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이상 제4편 '군형')
"패하지 않는 위치에 서서 적의 패배를 놓치지 않는다(제4편 '군형')."
양군이 교전에 들어가면
"적의 날카로운 기운은 피하고 느슨한 기운을 공격하여"
"자신을 다스려 적의 혼란을 기다리고, 차분하게 적의 소란함을 기다리며"
"짧게 이동하여 먼 길의 적을 기다리며,
쉬면서 적의 피로를 기다리며,
배불리 먹고 굶주린 적을 기다린다."(이상 제7편 '군쟁(軍爭)')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자신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고
적의 약점을 이용하여
내게 유리하고 적에게 불리한 형세를 조성하여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한 것이다.
다음 '궤도'는 속임수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가장한 모습을 보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적을 조종한다는 뜻도 있다.
손무는 교전 쌍방의 강약, 우열, 주동과 피동 모두가 상대적이어서
어떤 조건에서는 서로 뒤바뀔 수 있다고 본다.
"혼란은 평온에서 생기고,
겁은 용기에서 나오며,
나약함은 강함에서 생긴다(제5편 '병세')."
정확한 모략을 운용하면
약세를 강세로 열세를 우세로 피동을 주동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손무는 이렇게 말한다.
"적을 잘 움직이게 만드는 자는
가상으로 적을 반드시 따라오게 만들고,
적이 반드시 취하게 될 이익으로 유혹한다."
손무는 이러한 전환을 실현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본 방법도 제시한다.
첫째가 '시형(示形)'으로
가상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할 수 있으면서 못하는 척,
활용할 생각이면서 그렇지 않은 척,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것처럼,
멀리 있으면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제1권 '시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도와 행동은 은폐하여
적을 착각하게 만들거나
적의 의표를 찔러 "무방비 상태를 공격하고 불의의 기습을 가하는(제1권 '시계')" 것이다.
아군의 수가 적고 적이 많은 상황에서는
"상대는 잘 드러나게 하고,
나는 잘 보이지 않게" 해서
먼저 "내 쪽은 하나로 뭉치고 적은 갈라놓아"
"아군이 많고 적은 적게" 보이는 우세를 조성한 다음,
계속 전략상의 우세로 발전시킨다.
또 하나의 방법은
'이익'으로 적을 유혹하고
손해가 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적을 조종하는 것이다.
"적이 흙을 높이 쌓고 도랑을 깊이 파고 수비에 들어가도
나와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적이 반드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을 내가 공격하기 때문이다.
내가 싸우지 않으려면
땅에 선만 그어놓고 지켜도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까닭은
의표를 찔러 적의 목적과 어긋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상 제6편 '허실')
따라서 적의 장점과 약점을 겨냥하여
"이익으로 꼬드기고, 어지럽혀 취하고, 튼튼하면 대비하고,
강하면 피하고, 성나게 만들어서 혼란스럽게 하고,
낮추어 교만하게 만들고, 편안하면 수고롭게 만들고,
친밀하면 떼어놓음으로써(제1편 '시계')"
전쟁의 형세를 내게 유리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손무의 '상대를 끌고 다녀야지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사상은
전략전술의 본질과 핵심을 움켜쥐고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능동성의 통일을 실현하고 있다.
이는 군사모략 사상의 정수다.
당 태종 이세민과 저명한 군사가인 이정이
"모든 병서들을 놓고 볼 때 손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손자병법』 13편은
'허실' 편을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나,
"수많은 말들이 결국은 '상대를 끌고 다녀야지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구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이위공문대』)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이 사상은
손무의 군사모략에서 또 하나의 빛나는 부분이다.
손무는 전쟁의 이해관계를 전면적으로 가늠하여
전쟁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즉 단순히 군사적 수단에만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실력을 소모하는 것으로,
자신의 전략의도를 실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다."
"용병에 능숙한 자는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고
공격하지 않고 성을 무너뜨리고,
오래 끌지 않고 적국을 깬다.
희생 없이 온전하게 천하를 다툰다.
따라서 군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이익을 온전히 지킨다.
이것이야말로 꾀로 싸우는 방법이다."(이상 제3편 '모공')
이 같은 기본 관점에서 출발하여
전쟁방식의 선택이란 문제에서
손무는 "군대를 쓰는 최상의 방법은 '벌모'이며
다음이 '벌교(伐交)'이고
그 다음이 '벌병(伐兵)'이고,
가장 낮은 것이 '공성(攻城)'이다"라고 말한다.
'벌모'와 '벌교'는
정치와 외교수단으로 적의 전략의도를 깨는 것으로
피 흘리지 않고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책이다.
'벌병'은 전쟁을 통해 적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취할 만하다.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때 취하는 전법이다.
당시 조건에서
공성전은 병력과 물자를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으로
득보다 실이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는 손무의 사상은
강상이나 관중의 비슷한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한 단계 더 승화시켜 이론화함으로써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주도적 사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현실적 의의를 충분히 담고 있는 사상이다.
오나라를 중흥시키고 초나라를 멸망시킨 전쟁은
손무 최초의 성공적인 군사상 실천활동이었다.
이 전쟁은 적고 약한 군대로
많고 강한 군대를 격파한 전쟁이자
모략으로 승리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손무는
주요한 정책 결정자이자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전략수립과 사전준비는 물론
결전 시기의 선택, 공격 방향의 확정 등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자신의 모략사상과 지휘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손무는
오자서와 함께
오왕 합려를 도와
"서쪽으로는 강력한 초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제·진에게 위세를 과시하고,
남쪽으로는 월을 복종시키는" '강국패왕'의 전략을 수립했다.
초는 땅이 넓고 병력이 막강하여
제후국의 패자가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북쪽 중원을 공략함과 동시에
동남에서 일어난 오를 공격하여
후방의 근심거리를 해소하려 했다.
이에 따라 초는 오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초는 해마다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오를 공격하는 바람에
백성은 지치고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오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 손으로 갖다 바치려는 상황이었다.
이에 오는 초를 주요 공격목표로 삼아
초를 소멸시키기 위해
일련의 전략을 수립하고, 정치·경제·군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준비해가기 시작했다.
정치 방면에서는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고
백성들에게는 물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을 통해 민심을 얻었다.
경제 방면에서는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장려하고 토지를 개간했으며,
성곽을 쌓고 창고를 넉넉하게 하여 생산을 발전시키는 등 경제적 번영을 꾀했다.
군사 방면에서는 군대를 확충하고 장비를 개선했다.
군사들에 대한 훈련강화도 잊지 않았다.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오의 경제·군사력은 크게 늘어
기본적으로 초와 맞설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기원전 512년,
오는 대외적으로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먼저 초와 연합하여 자신을 공격했던
북쪽의 종오와 서국(지금의 강소성 숙천현 이북)을 멸망시키고,
초와 연맹했던 남쪽의 월을 격파한 다음,
초의 서·육·잠·소(지금의 안휘성 서성·육안·곽산·합비 일대) 등 속국과 속지를 공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손무는 오자서와 함께
신중하면서 과감하게,
그와 동시에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결전의 시기와 공격 방향을 결정했다.
기원전 511년,
초와의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합려는 초의 수도인 영까지 곧장 쳐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손무와 오자서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두 가지 조치를 합려에게 건의했다.
하나는
초의 실력을 좀더 약화시켜 결전 조건을 한결 유리하게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즉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초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초를 지치게 하자는 것이었다.
상대가 나오면 도망치고,
상대가 도망가면 나와서
뒤쫓아 공격하여 초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고,
이로써 초의 국력은 크게 소모되었다.
또 하나는 외교였다.
북방의 당·채가 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이용하여
이들과 연합으로 초를 공격함으로써
초를 약화시키고 오를 키우는 목적을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서 우회하여 초를 공격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기원전 506년,
손무 등은 결전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유명한 '백거지전(柏擧之戰)'을 발동했다.
손무는 장거리이지만 공격 방향에서 우회하여 공격하는 노선을 오왕에게 건의했다.
즉 오나라 북부에서 출발하여
초의 방어가 약한 동북쪽에서 공격함으로써
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강한으로 곧장 쳐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이런 기발한 공격으로
오군은 거의 저항 없이 초의 내지까지 깊숙이 들어왔고,
마침내 백거(지금의 호북성 마성)에서 초군과 결전을 벌였다.
결국 전투의 결과는 초의 대패로 끝났고,
오군은 승세를 몰아 다섯 번 전투를 잇달아 승리하고
수도 영성(지금의 호북성 강릉 서북의 기남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강한에 둥지를 틀고 중원을 호령하던 초가
한순간에 낙화유수의 꼴이 되었다.
반대로 오는 위세를 크게 떨쳤고,
중원 제후국들은 눈을 씻고 오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후 오는 북으로 제·진을 제압하는 겨루기에서 승리하여 기세를 한껏 올렸다.
기원전 494년,
애릉전투에서는
제나라 군을 대파했고,
기원전 482년
오왕 부차는 황지 회맹을 통해 진을 이어 패주 자리에 올랐다.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오가 이처럼 큰 승리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손무와 오자서의 탁월한 모략사상과 지휘술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가 초·제·진을 제압하고 제후들 사이에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손무의 힘이 컸다고 지적했다.
손무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그는 이론을 먼저 성취했고 실천은 나중이었다.
그리고 이론적 성취가 실천에서 얻은 것보다 훨씬 컸다.
이 때문에 손무의 사상은 어디서 왔으며,
'이론은 실천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과학적 논리와 과연 맞아떨어지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역사발전의 요구에 대응하는 이론이 탄생하려면
두 가지 객관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앞사람들이 축적해놓은 사상적 자료이며,
또 하나는 사회역사 조건, 즉 사회경제 기초 및 그 상부구조다.
현재 남아 있는 관련 자료로 볼 때
손무의 군사사상은
탄생을 위한 객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먼저, 제나라는 '병가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강상(강태공)의 봉국으로,
강상의 군사 저작과
서주의 다양한 저작들인 『군정(軍政)』·『군지(軍志)』·『사마법(司馬法)』 등이
제나라로 들어왔다.
손무는 이 저작들 중에서 우수한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손자병법』의 내용과 문장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군쟁' 편에 보면
『군정』의 "말로는 서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꽹과리와 북을 만들었다.
서로 모습을 확인할 수 없기에 깃발을 만들었다"는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다음으로 제나라는 중원 지구에 위치해 있어
'사방이 전투지'다.
전설시대 치우와 황제의 '탁록전', 상탕과 하걸의 '명조전',
주 무왕과 은 주의 '목야전',
제·노의 '장작전',
진·초의 '성복전' 등과 같은
역사상 유명한 전쟁들이 모두 제나라 부근에서 일어났다.
손무는 이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전쟁들에서 간접 경험을 얻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를 통해 손무는 전설시대 황제부터 춘추시대 중기에 이르는
역대 전쟁의 경험과 교훈을 섭취하고 종합했던 것이다.
이 또한 『손자병법』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허실'·'행군'·'구지'·'용간' 편 등에는
황제, 이윤, 강상·조예 및 전저·오월 등의
구체적인 군사 사례들이 열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무는 이런 사건에다 자신의 관점으로 논증까지 덧붙이고 있다.
이상 두 가지 객관적 조건에다
귀족 가문이자 군사 전문가 집안의 출신이라는 손무의 출신 성분
및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개인적 자질까지 고려한다면
그가 과거의 사상적 자료와 간접 경험을 결합하여
수준 높은 군사이론을 창조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에 관중, 사마양저, 오자서, 오자서, 손빈 같은
걸출한 군사 전문가들이
모두 제나라와 그 부근에서 출현한 것도
이러한 객관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론에서 실천을 끌어낸 천재 군사 전문가,
병학을 철학적 단계로 승화시킨 손무는
병가의 영원한 교과서를 남겼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다 오나라에 머물며 몰래 병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뒤 오왕 합려의 눈에 들어 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손무는 궁녀들을 시험대상으로 삼아 조련시키면서
명에 따르지 않는 궁녀의 목을 베어
군기를 즉시 잡는 일화도 남겼다.
그뒤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여
'오전오승'하고
초의 수도 영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 북으로 제·진을 위협하고
남으로는 월을 굴복시켜 제후국들에 그 명성을 떨쳤다.
손무의 『손자병법』은
중국 최초는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세계 최초의 전문 병법서이자
군사철학서로서
'병학의 바이블'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역대 군사·병법서만 종합해놓은 『무경칠서』에서도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개혁의 일환으로 군사 방면에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으며,
특히 자신의 직접 경험이 아닌 앞사람들의 간접 경험을 종합한 이론을 먼저 수립한 다음
이를 실전에 적용한 천재 모략가였다.
- 김영수 역, 5000년의 중국 50인의 모략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