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내용은 2002년 학술진흥재단 지원과제인 <역사와 기억 : 과거청산과 문화정체성 문제에 대한 국가별 사례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팀이 만든 사이트 "역사와 기억"에서 가져온 것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설명)
1945년 11월 20일에 시작한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6년 8월 31일 피고인들의 마지막 진술을 끝으로 그 심리절차를 마쳤고, 9월 30일에 시작된 판결문 낭독이 10월 1일까지 이어져 비로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재판부는 영국인 판사 로렌스를 재판장으로 하는 4명의 재판관(미국의 비돌, 프랑스의 드파브르, 소련의 니키첸코)으로 구성되었고, 총 218일의 재판과정에서 모두 360명이 증언했다. 피고는 도합 24명이었다.
그 가운데 라이(Ley)는 구금 중에 자살했고, 기업가인 크룹(Krupp)은 병으로 판결이 연기(후에 사망)되었기 때문에 판결은 22명에게만 내려졌다. 그 결과는 교수형 12명, 종신형 3명, 10년 징역 1명, 15년 징역 1명, 20년 징역 2명, 무죄 3명이었다.
또 기소된 나치조직 여섯 개 가운데 세 조직(나치당, SS, 그리고 게슈타포 및 안전기획부)이 범죄집단으로 인정되었다. 10월 15일 괴링은 자살했고, 나머지 사형수들에 대한 교수형이 바로 그 다음날 집행되었다. 이들의 시체는 화장되어 강가에 뿌려졌다.
원래 계획했던 추가 국제군사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뉘른베르크에서는 미군정의 후속재판이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열려서 정치가, 군부, 경제지도자, 의사, 법률가, 외무성 관리 등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와 비슷한 재판이 프랑스 점령지역, 영국 점령지역, 소련 점령지역에서도 있었다. 아래 내용은 유대인 학살에 관한 것이다.
(판결문)
(…)
독일 나치정부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일은 이 법정에서 아주 자세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이 법정은 이 비인간적인 행위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
전쟁 이전에도 나치는 유대인을 가혹하고 심하게 박해한 사실이 있지만, 이는 전쟁 중에 독일점령지에서 시행된 정책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이것은 이전 독일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과 유사했습니다. 곧 유대인들은 따로 등록해야 했으며, 게토에 살도록 강요당했고, 노란색의 별 표식을 달아야만 했고, 노예노동에 혹사당했습니다.
그러나 1941년 여름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풀어줄 정책으로 마련된 소위 "최종해결"은 달랐습니다. 곧 "최종해결"이란 1939년 히틀러가 이미 위협한 바 있던 유대인의 멸종을 의미한 것이었으며, 전쟁발발의 결과 이 정책은 게슈타포 특수부대가 제B4국의 책임자인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중심으로 수행했습니다.
유대인을 멸종시키려는 이 계획은 소련을 침공한 후 곧바로 가시화되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은 자신들 후미에 있던 지역에 치안경찰 및 안전부의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그곳 주민들이 독일군에 저항하는 것을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이 부대는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멸종시키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
유대인 수감자들이 살해되는 과정에서 이들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는 명확한 증거로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여성 희생자들은 죽음을 당하기 전에 머리카락이 모두 잘려졌으며, 그 잘려진 머리카락은 독일에 보내져 매트리스를 만드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수감자들의 의복이나 금전, 그리고 귀중품은 따로 수거되어 적당한 중계업자에 보내져 처분되었습니다. 이들이 살해되고 난 후, 금으로 된 치아 등 그들 시신에 있던 금붙이는 제국은행에 보내졌습니다.
화장되어 재로 된 시신은 거름으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희생자의 시체에서 기름을 빼내 판매용 비누를 만드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어느 집단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유대인을 찾아내어 "최종해결"을 하고자 했습니다.
독일인들은 헝가리와 불가리아 등과 같은 위성 국가에게까지 손을 뻗쳐 유대인을 말살하는 수용소를 건립했으며, 1944년 말까지 헝가리로부터 유배된 40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증거에 의하면, 루마니아에서는 유대인 "청소"를 위해 약 11만 명이 추방되었습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이 계획을 시행하고 감독한 아이히만은, 이 정책으로 약 6백만 명이 살해되었고, 그 중 4백만 명이 바로 이 말살정책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