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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녀에게/ 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채로 기다리기엔 세울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만난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연인아.
바람의 노래 / 문병란 |
호수 /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수 없는 그리움이여
찬비 오는 저녁 /문병란
나이 들면
사람 만나기가 차츰 두려워진다.
사양지심과 자존심의
어느 중간쯤 서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기웃거리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아, 웃어야 할 대목과
성내야 할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순 여덟이 되어서야
눈과 눈썹 사이가 가까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나들며
그네 타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다.
5분간 연설이 끝난 저녁
그림자를 따돌리지 못하는 비극
하늘에는 별이 멀어 보이고
방앗간 앞에서도 나는 그냥 지난다.
이 시간 고독한 산보자는
루소의 남은 꿈을 빌려
비 내리는 오솔길에 길게 서 본다.
찬비 오는 저녁
찬비 맞아 얼어 자고 싶은 밤
찬비 같은 여자가 젖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아, 아직도 꽃을 보면
가슴이 뛴다고 귓가에 속삭이지 말라.
오늘밤도 찬비가 등뒤에서
내 쓸쓸한 발자국을 적셔두고 있다.
꽃 씨 /문병란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 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문병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없다.
더듬어 보면 우리가 만난 짧은 시간 만큼
이별은 급속도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사랑도 삶도 뒤지지 않고
욕심내어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서로에게 켜져가는 사랑으로
흔들림 없고, 흐트러지지 않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할 뿐이다.
외로움의 나날이
마음에서 짖궂게 떠나지 않는다 해도
내 너를 사랑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말을 하지 않겠다.
말로써 다하는 사랑이면
나는 너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환한 마음으로 너에게 다가갈 뿐이다.
조금은 덜 웃더라도
훗날 슬퍼하지 않기 위해선
애써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떨림 /문병란
입술과 입술이 서로 만날 때
꽃잎이 파르르 떤다
전 우주의 파장
낙엽 한 잎이 떨어질 때
전. 심. 전. 령이 전율한다
210볼트 전류. 전구가 깜박일 때
눈과 눈이 만나 하늘이 열리고
손과 손이 만나 땅이 무너진다
이 떨림 이 아픔
기쁨은 슬픔을 낳고
슬픔은 기쁨을 열매 맺는 눈물 꽃
물과 불이 만나는 소리가 들린다
영과 욱이 만나는 아픔이 꽃핀다
손과 손이 서로 붙잡을 때
너의 가슴과 나의 가슴이 만날 때
거기, 큰 하늘이 열리는 곳에서
나뭇잎이 흔들린다
호수에 물무늬가 번져간다
누가 지금 떨고 있는가
그 입술 그 손 그 눈
누가 지금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 몸둥이는 하나의 큰 그릇
퍼내어도 퍼내어도
샘물은 다시 솟는다
떨리며 떨리며 낙엽은 떨어져
우주의 중심에서 춤을 춘다.
벽돌과 황금 /문병란
벽돌이 벽돌일 때는
노동가의 일당이 된다.
그러나 그 벽돌이 집이 되어
부동산 문서 속에 들어가면
황금의 궁전이 된다.
벽돌은 꿈꾼다
나는 저 밤하늘을 날으는
한 마리 아름다운 새가 되고 싶다고!
그날 밤 백만장자는
벽돌로 쌓은 그 무덤 속에 누워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꿈꾸고 있다.
행복을 파는 꽃가게/ 문병란
내 친구의 꽃가게에서는
천 원에도 행복을 판다.
사람들은 천 원짜리 행복을 안고
종종걸음으로 거리 모퉁이를 돌아간다.
천 원짜리 행복이 진열된 선반 위에
울긋불긋 온갖 빛깔의 꿈들이
주인을 기다려 갸름히 눈을 뜨고 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겨울을 가린 창유리 너머로
빠끔히 뚫린 도시의 하늘이 찾아오고
수지운 안개꽃 빛 소녀의 눈동자 속에서
기다림에 물든 하루해가 저문다.
아직은 봄이 먼 창변
노오란 수선이 입술을 내미는데
내 친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천 원짜리 행복을 곱게 포장한다.
교단/ 문병란
판사도 검사도 의사도 아닌
나는 교사
교장도 교감도 주임도 아닌
누구보다 어떤 직위보다 보수가 적은
나는 평교사
두어 평 좁지만
세상을 굽어보는 교단에 서서
초롱한 눈들이 무서워
거짓말 못하는
내가 선 자리는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로 지킨 자리
김종직이 부관참시로 지킨 자리
사마천이 남근이 잘리면서 지킨 자리
오늘도 한 의인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 메고 오르는데
나는 봉급만을 기다릴 것인가?
앵무새 흉내나 내며
초롱한 눈들을 속여 거짓말을 하며
내 가늘은 모가지만
새삼 어루만지고 있을 것인가?
판사도 검사도 의사도 아닌
가벼운 월급봉투만 확인하고 있을 것인가?
한 스승은
살찐 돼지보다 차라리 독배를 택하라고 외치는데
남근이 잘린 사마천이
피투성이 교단을 지키며
거짓보다 진실을 택하라고 절규하는데
나는 오늘 부러진 백묵으로
이 칠판에다 무엇을 쓸 것인가?
치어다 보는 초롱한 눈동자 앞에서
나는 또 무슨 거짓말을 할 것인가?
- 민중 교육誌, 1985년 창간호에서.. -
목포 / 문병란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 거나
삼학소주 한 잔을 기울일 거나.
농민의 모습 /문병란
거지가 아니 올시다, 더구나
콩고江에서 붙잡혀 와
켄터키 목화밭에서 일하며
잘 사는 나라의 오물통에서 비게덩어리를 건져 먹는
그런 멋진 링컨의 흑인 노예가 아니 올시다
아니 올시다, 검둥이보다 더 서러운
우리는 또 하나의 이 땅의 검둥이
버림받고 소외 당한 이 땅의 농민
그러나, 가난해도 같은 형제끼리 모여
이 땅과 이 민족을 지켜온
우리는 사람, 두드리면 쏟아지는
그런 깨다발이 아니 올시다
양반들의 발길 아래 신음하던
곤장 밑에 모진 피꽃이 피는
슬픈 엉뎅이가 아니 올시다
서을에서 빰맞고 장성 갈재에서 눈 흘기던
전라도 개땅쇠, 丁哥 李哥 부동산 문서 속에 죽어가는
지지리 못생긴 함평 고구마, 무안 양파 다마내기,
그러나, 남의 것 훔치거나 놀고 먹지 않는
우리는 도둑놈이 아니 올시다
춘향이나 울리는 건달 이도령이 아니 올시다
외인 부대의 술상 머리에서 춤을 추는
화냥년 명월이 황진이가 아니 올시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
우리를 주장하고 우리를 지킬 권리가 있는
우리는 이 땅의 일하는 주인 올시다
오늘 누가 주인을 밀어내고 큰 소리 치는가?
오늘 누가 이 땅에 멋대로 법을 만드는가?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라고 말하라
우리가 이 땅의 왕이라 말하라
우리는 이 땅의 당당한 주인 올시다
우리 끼리 오손도손 모여
묵은 땅을 갈아 엎고 씨를 뿌리는
우리는 이 땅의 당당한 주인 올시다.
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엔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불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姓)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우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빰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尹東柱)를 외우며 이육사(李陸史)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序時)
한 점 부끄럽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흐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폐염전 /문병란
평생을 뻘밭에 바치고
대대로 소금 구워 먹던 김생원,
정든 고향의 뻘밭
폐염전만 길게 남겨 놓고
오늘은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뜨거운 유월의 햇빛 아래
미닥질로 익어가던 영롱한 보석,
산더미 같은 소금산 아래서
땀방울도 알알이 여물던
소금풍년 조개풍년 꼬막풍년
날의 어부가는 들리지 않는다.
만선 소식 감감한 남해바다
시름처럼 길게 누워 있는 뻘밭 위에
햇살만 너훌너훌 춤을 추는데
어깨 실한 돌쇠도
궁둥이 실한 갑순이도
가난만 남은 뻘밭을 버리고
오늘은 어느 공단으로 떠나갔는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검은 폐수 뿐
멈춰 버린 수차는 말이 없고
허옇게 죽어간 폐각 위에
기운 없는 갈매기만
폐촌의 적막을 쪼으고 있다.
공장 지어 번성한 땅 위에
소금까지 외국에서 사다 먹으니
실직한 김생원
뻘밭을 버리고 도시로 가서
오늘은 어느 공단 품팔이 되어
아스팔트 위에서 맥주를 마실까?
여기는,
여천 공단의 검은 연기가
간간 불을 뿜는
삼일만 가까운 어촌,
조개도 죽어가고
꼬막도 죽어가고
정든 갈매기도 죽어가고
마지막 김생원도 떠나간 마을.
주인 잃은 수차 위에
6월의 햇살만 눈부시게 곱고
근대화를 모르는
빈 뻘밭만 맨살로 타고 있다.
5남매 7남매 쑥쑥 뽑아내
아기 잘 낳아 자랑스럽던 아내
이제는 하나만 낳는 시대
그 누가 소금쟁이 어부를 낳을꼬?
먹는 입만 생각하고
일하는 손은 계산 안하니
새끼 낳는 것도 부끄러운 인생
바다는 옛정을 못잊어
뻘밭을 적시며 정답게 출렁거린다.
어매야 아배야
어디로 갔느냐
떠나간 사공의 배따라기도 없이
포구의 새악씨 이별의 손수건도 없이
멈춰 버린 수차 위에
병든 갈매기 시름없이 날 때
용왕님도 떠나 버린
텅 빈 사당 앞에
미쳐 버린 똥개만 컹컹 짖고 있다.
죽순밭에서 /문병란
죽순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밭에는
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올리는 대나무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 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 소리
사운사운 내리는 달빛 속에
달빛을 받아 먹고
이슬을 받아 먹고
천근 누르는 바위 밑에서도
만근 뒤덮은 어둠 밑에서도
쑥쑥 뽑아오르는 소리
마디마디 매듭이 지는 소리
이윽고 참대가 되고 왕대가 되고
유혈이 낭자하던 대밭
임진년(壬辰年) 의병의 손에서
원수의 가슴에 꽂히던 죽창이 되고,
갑오년(甲午年) 백산(白山)에 솟은 푸른 참대밭
우리들의 가슴을 뚫고
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
안개 속에서 달빛 속에서
어둠을 뚫고
굳은 땅을 뚫고
모든 뿌리들이 일제히 터져나오는 소리
죽순밭에는
뾰쪽뾰쪽 일어서는
카랑한 달빛이 흐른다
도도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묵은 끌텅에 새 순이 돋아
창끝보다 날카로운 아픔이 솟는다.
가슴이 막혀 답답한 날
대밭에 가서 창을 다듬자
왕대 곁에 서서
꼿꼿이 휘지 않는
한줄기 죽순을 뽑아올리자
응혈진 어둠을 뚫고
핏물진 연한 살을 뚫고
벌떼같이 내리는 햇살 속에서
낭자하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아 소리 없는 아픔이 솟아오른다.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 같이
양(洋)병에 가득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낀 일등 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메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 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 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 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혀 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켜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잘 넘어 가드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름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터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렛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켜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큼새큼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와이즈멘의 길 /문병란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느냐.
내가 나의 노예가 되느냐.
이 중대한 물음
앞에 와이즈멘이 되고자 하는 사람
최고의 실천 표어는 봉사이다!
일하는 손과 더불어 아침에 뜨는 해
일하는 손과 함께 저녁에 저문다.
갈고 닦고 일하는 곳에서
머리와 가슴은 충만할지니
감사하는 마음
지니고 사는 사람들에겐
한 송이 꽃, 한 마리 새도
우리 마음 열어주는
하늘의 열쇠가 된다.
주어라. 바쳐라. 버려라.
노예의 곳간에 쌓인
금은보화 보다
바친자의 가슴에 쌓인 용서와 사랑
그것은 가장 값지고 빛나는 은총이다.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자 하는 자
모이라. 합치라. 손잡으라.
지구가 둥글 듯이
섭리의 하늘도
사랑도 평화도 모두 둥글둥글
세계의 와이즈멘 손에 손 맞잡고
나누는 문화 함께하는 문화
빵은 단 한개여도 쪼갤 수 있다.
욕망의 노예로 들끓는 세계 위에
주인이 되는 봉사의 길 넓이고
사랑과 평화의 샘물 솟구치게 하자
오 빛나는 소금이여 와이즈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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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란(文炳蘭, 1935 ~ ) 시인 소개
1935년 3월 28일, 전남 화순군 출생
1961년에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62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6년 5,18 기념재단 이사 역임
2000년 조선대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2년 조선대 명예교수
2003년 구례군 평화문학상
2001년 문학춘추사 한림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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