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사기열전 79- 소진열전
소진의 '닻 내림(Anchoring)' 유세
물 위를 달리는 선박들이 잠시 멈춰야 할 때, 선원들은 닻을 내립니다. 두 터운 밧줄에 마치 낚시 바늘을 대칭으로 붙여놓은 듯한 커다란 철덩이인 '닻'을 묶어 바닥으로 내려 고정시키는 방법입니다. 무게에 의해 바닥으로 내려간 닻은 어딘가에 걸리게 되어 배가 물의 흐름에 따라 이동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같은 원리로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흐름을 어느 한 곳에 묶어 두고, 일관된 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에 과거의 일이나 경험을 쉽게 잊곤 합니다. 그것이 강한 인상으로 자리잡았을 때는 비교적 오래 기억되며 영향을 미치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집니다. 또한 사람들은 변화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는 특성이 있기에 사회가 복잡해지고, 일이 분주해지면 지난 일들을 쉽게 잊곤 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좋은 인상을 상대에게 오래 남기기 위해,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은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그 사람의 선택을 고정시키려는 방안을 늘 연구합니다. 정치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유권자의 선택을 얻는 것이 생존하는 방법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긍정적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상대의 생각이나 느낌을 고정하기 위한 '닻 내림'은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협상에 임할 때, 상대의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특히 몇몇 대형 매체들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가 지나고 누구든 간단한 조작으로 정보를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주목을 받고, 생각을 고정시켜, 결국 선택에 이르게 하는 '닷내림'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유투브 채널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처음 노출되는 '썸네일'영상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죠.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긍정적이고,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택이나 결정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에 닻내림의 방법론은 끊임없이 연구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면,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학창시절 커피숍에 가면 테이블에 설탕과 프리마(정확한 명칭은 '크림'이라는 흰색 고운 가루로 프리마는 상표명)이 한쌍의 그릇에 담겨있고, 커피를 주문하면 가루커피에 뜨거운 물을 갖다 주곤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기호에 따라 설탕과 프림을 추가하여 마셨죠. 소위 '다방커피'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좁고 길다란 봉지에 적당량의 커피와 설탕, 그리고 프림이 추가된 소위 봉지 커피가 등장했습니다. 혹시 그 제품을 선전한 광고를 기억하시는지요.
국민들에게 친숙하고, 배려심 많은 이미지를 남긴 국민배우가 아내와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서 커다란 유리문을 통해 꽃이 만발한 정원을 바라보며 웃고 있습니다. 조용한 선율이 흐르면서 맑은 하늘에 마치 두 사람이 연회에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영상이 중년부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마냥 행복하고 여유있는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광고의 영상은 대충 이랬고, 아마 대부분 맞을 겁니다. 복잡하게 물을 끓이고 이것저것 반복된 동작을 하지 않아도 봉지커피 하나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는 이미지를 배려심 깊은 국민배우의 이미지를 동원해서 각인하려 한거죠. 이런 이미지의 닻내림은 봉지커피를 먹지 않으면 '배려심이 결여된 남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나란히 앉으면 '부부가 아니죠' 중년쯤 되보니 서로 열이나서 옆에 오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사실 식당에서도 마주앉고 택시를 타도 앞 뒤로 탑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는 중년의 남녀가 부부일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하는 남편들의 손에는 간혹 커다란 봉지커피 박스가 들려있었죠.
이런 이미지의 닻내림은 어떤 근거를 먼저 제시하고 상대의 생각을 조작한 후 고정시키려는 데 효과적입니다. 정부의 정책이나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조성하려면 같은 사건의 데모 사진에서도 상반된 사진을 부각시킵니다. 정부를 공격한다면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하는 사진을 올려서 공권력 남용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닻을 내리고 정부의 강한 조치에 대해 불만과 저항을 조장합니다. 반면 한 지역이나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사람들이 경찰을 구타하는 사진을 싣죠. 그렇게 한 후에 그 집단과 관련된 사건들을 다룹니다. 사진의 이미지에 따라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다음 기사에 대해 객관적 판단보다 감정적 판단을 유도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소진은 이러한 닻내림 효과를 유세에 적절히 활용합니다. 소진이 계획한 '합종'(강력해진 진의 세력이 동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위해 세로로 늘어선 6국이 공동전선을 형성하는)의 관건은 당시 6국의 군주들이 진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신하의 지위를 선택함으로써 진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생각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진은 두 개의 이미지를 선택합니다. 하나는 마치 크렘린 궁앞이나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앞에서 건국 기념일에 거행되는 군사퍼레이드의 이미지나 활기차고, 풍족한 생활로 인해 행복한 노래가 넘쳐나는 이미지입니다. 소진의 6개 나라 유세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국가의 풍부한 자원, 지형상의 이점, 강력한 군사력, 든든한 재정에 대한 부각은 설득하려는 군주에게 '강력함과 이미 넉넉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고정관념을 부여합니다. 타지에서 온 일개 유세가가 알 정도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이런 강력함의 이미지는 군주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효과와 함께, 이를 포기하고 신하의 굴종을 선택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을 '고정'하는 것이죠.
두 번째 소진이 사용한 '닻내림'의 이미지는 설득하려는 군주의 비교대상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어리석음)를 떠올리게 하여, 설득상대와 차별화하는 방법입니다. 소진은 조나라 숙후에게 봉양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정(anhoring)'합니다.
"천하의 재상 및 관료들과 심지어 벼슬이 없는 인재들 조차 모두 현명한 군주의 의로운 행동을 우러러보고 가르침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였으나 봉양군이 시기하고 막았기에 빈객과 유세가들이 자신의 능력을 모두 펼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봉양군이 돌아가시고 (드디어)군주께서 이제 다시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으므로 신이 감히 어리석으나마 생각한 바를 아뢰고자 합니다."
인재들의 충성과 능력을 시기하던 봉양군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설득의 대상인 숙후는 봉양군과 다르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 빈객과 유세가의 의견을 받아들수밖에 없는 이미지를 고정합니다. 이제부터 소진은 마음놓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개진할 수 있으며, 숙후는 이 의견을 수용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구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위나라에 양왕에게 유세할 때는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을 군주를 위협하는 무리들로 이미지화 시킵니다. 이들은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진나라와 결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군주를 겁박하는 비열한 무리라고 주장합니다. 소진은 이들을 "죄로 말하자면 이 보다 더한 죄가 없는" 범죄의 무리라고 이미지화함으로써 만약 군주가 이들의 말을 따르면 같은 그릇됨을 인정하는 자가 되는거죠.
소진의 유세과정을 보면 6국의 모든 군주들에게 공통적으로 "군주의 나라는 천하의 강국이고, 왕은 천하의 현명한 왕입니다(天下之彊國也 天下之賢王也)"라는 문장이 정확히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부여받았고,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으로 풍요로움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이미지와 함께, 이것은 바로 군주의 현명함에 결과하고 있다는 이미지로 설득 대상인 군주의 생각을 고정시키는 전형적인 '닻내림'(anchoring)입니다. 그러니 진나라에 굴종의 태도나 그들과 비굴하게 신하의 모습으로 타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진과 적대적 관계있는 나라들이 손을 잡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 소진 유세의 핵심입니다.
소진의 예상대로 6국의 군주들은 입을 모아 "삼가 그대의 뜻을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신의 무지(어리석음이라기 보다, 기존의 잘못된 인식)를 깨우침에 대한 감사의 보상도 잊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나라 왕은 소진의 말을 듣고 '안색이 바뀌더니 팔을 휘두르며 눈을 부릅 뜨고 검을 꽉 눌러잡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까지 하며 기존의 생각을 고쳐잡습니다.
소진에 의해 시도되고, 사마천에 의해 '체계적으로 서술되고 구도화된 닻내림의 효과는 그후 약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서야 몇몇 행동경제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수많은 기업과 국가의 설득과 협상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래도 사마천의 <사기>를 공부하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는 이미 사마천의 위대한 유산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왜 스스로 나약하고 무기력하고, '좌불안석이되어 먹어도 맛을 모르고, 마음은 깃발을 장대에 매단 것처럼 흔들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寡人臥不安席 食不甘味 心搖搖然如県旌而無所終薄)있을까요...
장대비가 내리는 이 아침에 다시한 번 사마천의 깊은 통찰과 지혜에 감사와 감격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