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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찍는데 관음전이 나오면 안되잖아
4월 4일 부산에는 벚꽃들이 흐드러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날렸다.
햇빛 아래는 뜨거웠지만 그늘에서는 여전히 추웠다.
오랜만에 올라오시는 문수선원 앞 언덕에서 스님들이 한 번씩은 그 자리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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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선원에 큰스님이 계실 큰 방 침대 앞 탁자에, 법문을 하실 법상에 플라스틱 가림막이 세워졌다. 이번에 법회를 준비하시면서 큰스님께서 주문하시고 미리 내려오셔서 점검도 하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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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에 건당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건당을 받으실 아홉 분 스님 중에는 함께 공부하지 않은 분들이 계셔서 큰스님께서 민족사에서 나온 화엄경 교재를 주문하시고 일일이 4권 한 질씩을 노란 보자기에 싸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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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만에 공부하러 오신 스님들이 속속 들어오셔서 인사를 하고 나가셨다.
건당받으실 스님들도 들어와 인사를 하셨다.
자현스님과 지은스님도 함께 오셔서 큰스님께 삼배 올리셨다.
“난 이거 철조망 쳤으니까. 백련암도 아닌데 철조망 쳤어.”
하고 큰스님은 가까이 오라고 하시면서 궁금한 점들을 물으셨다.
지은스님은 서울 안암동 대원암과 보타사를 10년간 운영하시면서 불사를 많이 했다고 하셨다. 지은스님은 승가대에서 화엄사상과 선을 가르친다고 옆에서 자현스님이 말씀하셨다.
“늘 스님 뵙고 공부합니다.”
지은스님은 새로 맡으신 강의를 위해서 매일 큰스님의 여러 책과 법문을 공부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저는 영광입니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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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스님은 ‘월정사’라는 책을 가져오셨는데 ‘손 한 번 지나가면 책 한 권이다’ 하시면서 큰스님은 화보가 많은 책이라 비용이 많이 들었겠다고 하셨다.
“불교 사회문제 연구소에서 정부예산 받아서 만든 겁니다. 월정사 관련해서 총정리한 것이고 스님 얘기도 뒤에 조금 들어가 있습니다.”
자현스님은 생각같아서는 교구본사를 다 그렇게 책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세월도 있는데 얼마든지 하지. 이런 책은 월정사에다가 잔뜩 쌓아놓고 팔기도 하고 선물로 주기도 하면 좋겠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노란 보자기에 싼 화엄경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오늘 공부하는 교재라. 자현도 없지? 이거 가져가. 우리가 그걸 가지고 지금 10년째 공부하고 있어. 한 15년째인데 그동안 법화경하고 임제록 했고, 화엄경을 ‘세월아 가거라’ 하고 하는데,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로 읊조리고 하면서, 살아가는데 사유로써 하는 거니까 그리 알고.”
바쁘지만 오늘 강의시간에도 참석해 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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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오신 불교방송 방송부장님께서 빛이 반사되니 법상의 플라스틱 가림막을 치우고 촬영하면 어떻겠는지 물어오셨다.
“역사를 찍는 거니까, 대웅전 찍는데 관음전 나오면 안되잖아. 이거 평생에 한 번 있는 일이지 항상 있는 일도 아니야.”
하고 큰스님은 그냥 두고서 찍으라고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四十五
阿僧祗品 第三十
*如來의 殊勝힌 德이 無重함을 表함
四. 所數之德無盡
2. 佛德의 深廣을 普賢이 窮究함
청량사 법안스님이 한석봉 천자문 이것을 줄기차게 공양 올려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법공양으로 한 권씩 돌아갔다.
천자문은 내가 어려서 잘 외워둔 것이지만, 별로 뜻을 깊이 알고 외우지는 못했고, 근래 이 책을 받으면서 뜻을 한 번 음미해 보고, 그 의미가 얼마나 심오한지 내 나름대로 또 공부해보니 아주 대단한 경이다.
불자가 경문을 우선 공부해야 되는 것은 사실인데, 이 천자문도 사실은 등한히 할 책이 아니다. 시간 내서 일부러라도 이것을 가능하면 외우면 좋고 또 입에 익숙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법안스님이 수술하고 다치고 하면서 지금 한 이년 째 못나오고 있다. 이 스님은 이것을 또 주변 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이런 데에 법공양을 많이 했다.
그다음 자주 법공양을 올렸는데 <가사체 약사경과 한문 약사경 사경> 경북대학교 조현춘 교수가 늘 책을 낼 때마다 나한테 증의(證義)를 받고 해서 벌써 몇 권째 책을 냈는지 모른다.
그리고 염화실지는 벌써 석 달 전에 공부한 기록인데 책은 벌써 만들어졌는데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공부를 못해서 이제사 우리 손에 돌아왔다.
사실 조금 잦아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오늘도 공부할 계제는 못된다.
그런데 아시는 스님들은 알지만 4월 8일날 건당식(建幢式) 관계로 오늘 예비 모임을 갖기 위해서 ‘이 법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지금 15년째 이렇게 전통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한 번 보여드리려고 일부러 무리를 하면서 법회를 열었다. 덕택에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아이고 웬일이냐, 날씨도 좋은 데 잘됐다’하고 쫓아온 분들이 또 많다.
강원에서 졸업식을 할 때마다 내가 격려사 같은 것을 자주 하는데, 주로 안빠뜨리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옥스퍼드나 하버드 같은 데서 그렇게 유명한 학자가 많이 나오고 또 노벨상 받은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했지만 원효 의상이 출현했다는 소리는 아직 나는 듣지 못했다, 나는 줄기차게 이 전통 강원에서 원효나 의상 같은 사람이 출현하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강원 공부를 시켰고 또 강원에서 언제나 그런 성인이 배출되기를 늘 희망하고, ‘금년에나 나올까 내년에나 나올까 저 후년에나 나올까 그런 꿈을 가지고 강원교육을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전통 경학 공부라고 하는 이런 공부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순수불교다. 불보살님들이 설하신 이 경전을 그대로, 어떻게 하더라도 그대로 우리가 답습을 하고 그것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거기에서 눈을 뜨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공부, 그야말로 원효나 의상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그런 꿈을 안고 하는 공부다.
그래서 상강례(上講禮)도 전통식으로 한다. 지금 상강례를 하는 데가 강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줄기차게 전통을 고수하면서 상강례를 한다.
우리는 2600년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공부하는 것이고 2600년 전에 불교에서 꿈꾸었던 바로 그러한 인물이 배출되기를 바라면서 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철저히 옛것을 익혀가는 공부다.
그래서 건당식에 참석할 사람들에게 ‘여기서 어떤 공부를 그동안 해왔는가?’ 하는 것을 한 번 보여주려고 오늘 오라고 했다.
8일날은 2시에 간소하게, 아주 간소하게 형식적이나마 건당식을 할 것이다. 이번에는 여기와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2019년도에 건당식을 먼저 시작해서 그 일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이렇게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니까, 공부를 15년 동안 다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이다.
*
오늘은 지난 시간의 아승지품, 지금 우리 교재 132페이지(화엄경 제3권 민족사刊) 저 위에서 두 번째 줄부터 공부할 차례다.
화엄경 세 번째 권 132쪽인데 15년만에 드디어 처음 교재를 받은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줄기차게 공부를 하는 스님들도 있다.
불교공부라는 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잘 아시는 바대로 그야말로 불교공부라는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무시무종이라고 하는 이치에 맞게 우리가 줄기차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공부한다고 하는 것, 그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11) 廣修十波羅蜜行
修行於施不可說이며 其心過去不可說이며
有求皆施不可說이며 一切悉施不可說이며
持戒淸淨不可說이며 心意淸淨不可說이며
讚歎諸佛不可說이며 愛樂正法不可說이며
成就諸忍不可說이며 無生法忍不可說이며
具足寂靜不可說이며 住寂靜地不可說이며
起大精進不可說이며 其心過去不可說이며
不退轉心不可說이며 不傾動心不可說이며
一切定藏不可說이며 觀察諸法不可說이며
寂然在定不可說이며 了達諸禪不可說이며
智慧通達不可說이며 三昧自在不可說이며
了達諸法不可說이며 明見諸佛不可說이며
修無量行不可說이며 發廣大願不可說이며
甚深境界不可說이며 淸淨法門不可說이며
菩薩法力不可說이며 菩薩法住不可說이며
彼諸正念不可說이며 彼諸法界不可說이며
修方便智不可說이며 學甚深智不可說이며
無量智慧不可說이며 究竟智慧不可說이며
彼諸法智不可說이며 彼淨法輪不可說이며
彼大法雲不可說이며 彼大法雨不可說이며
彼諸神力不可說이며 彼諸方便不可說이며
入空寂智不可說이며 念念相續不可說이며
無量行門不可說이며 念念恒住不可說이로다
보시를 행하는 일 말할 수 없고
그 마음 지나간 일 말할 수 없고
구하는 대로 다 보시함을 말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보시함도 말할 수 없네.
계행(戒行)이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
마음이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
부처님 찬탄함을 말할 수 없고
바른 법 좋아함을 말할 수 없네.
참는 일 성취함을 말할 수 없고
생사(生死) 없는 지혜를 말할 수 없고
고요함 갖춘 일을 말할 수 없고
고요한 데 머무는 일 말할 수 없네.
큰 정진 일으킴을 말할 수 없고
그 마음 지나간 일 말할 수 없고
물러나지 않는 마음 말할 수 없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 말할 수 없네.
일체 선정의 창고 말할 수 없고
모든 법 관찰함도 말할 수 없고
고요히 정(定)에 있음을 말할 수 없고
모든 선정 통달함을 말할 수 없네.
지혜로 통달함을 말할 수 없고
삼매에 자재함을 말할 수 없고
모든 법 아는 것을 말할 수 없고
모든 부처님 밝게 봄도 말할 수 없네.
한량없는 행 닦음을 말할 수 없고
광대한 서원 내는 일도 말할 수 없고
깊고 깊은 경계를 말할 수 없고
청정한 법문들도 말할 수 없네.
보살의 법력(法力)을 말할 수 없고
보살의 법에 머무름을 말할 수 없고
저들의 모든 바른 생각 말할 수 없고
저들의 모든 법계(法界) 말할 수 없네.
방편 지혜 닦는 일 말할 수 없고
깊은 지혜 배우는 일 말할 수 없고
한량없는 지혜를 말할 수 없고
끝까지 이른 지혜 말할 수 없네.
저 모든 법의 지혜 말할 수 없고
청정한 법륜도 말할 수 없고
저 큰 법의 구름도 말할 수 없고
저 큰 법의 비도 말할 수 없네.
저 모든 신통의 힘 말할 수 없고
저 모든 방편들도 말할 수 없고
공적한 지혜에 들어감도 말할 수 없고
생각 생각 계속함도 말할 수 없네.
한량없는 수행(修行)의 문 말할 수 없고
생각 생각 머무름을 말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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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십바라밀행(廣修十波羅蜜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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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십바라밀행 ‘십바라밀행을 널리 닦다’ 라는 제목하에서 세존이 심왕보살을 위해서 설한 경문이다. 세존께서 화엄경의 두 품만 설했다는데 그중에 아승지품은 심왕보살을 위해서 설한 게송이다. 마음 심(心)자 왕이라고 하는 왕(王)자다. 의미심장하다.
심왕보살이라고 하는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우리는 화엄경을 풀 수 있는 큰 힌트를 얻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리는데 화엄경은 잘 이해가 안되거든 세 가지 열쇠를 들고 있다가 한 번 열어봐라. 그것이 무엇인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열쇠,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고 하는 열쇠,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이라고 하는 소동파 게송의 열쇠다.
이 세 가지 열쇠를 가지고 열어서 안 열리는 화엄경은 없다.
대승경전의 가르침은 그 속에 상징하고 있는 상징성이 아주 중요하고 그 의미를 알려고 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글을 쫓아가고 말을 쫓아가면 도대체 이것이 누가 누구에게 무슨 뜻으로 한 소리인지, 이것이 과연 여기에 해당되는 말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의미를 우리가 잘 캐치해야 이해가 가는 내용이다.
여기도 세존이 심왕보살을 위해서 설했는데 심왕보살이 누구며, 그 심왕보살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글을 이해했는가, 이런 것들을 연관시켜서 생각하면 풀지 못할 문제가 하나도 없다.
아주 술술 잘 풀리게끔 되어 있다.
이 화엄경이 거의 반이 넘은 이 마당에서 새삼스럽게 이야기를 안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내가 또 이런 말을 한마디씩 하고 넘어가야 뭔가 조금 찝찝한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나아가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이다.
여기 보면 십바라밀을 잘 알 것이다. 6바라밀에서 방편(方便)하고 원(願)하고 서원 그다음에 힘 력(力)자 력(力) 법력이라고 하는 뜻이다. 역 그다음에 지(智) 지바라밀 육바라밀에서 지혜바라밀은 반야라고 한다. 그래서 중복도 되지만 그래도 화엄경은 언제나 숫자로서 상징하는 것이 있다. 숫자로써 완전무결하고 원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엄경 과목을 만들어보면 열 개 과목, 아홉 개 과목, 열 한 개의 과목, 열 두 개의 과목 그렇게 되는데 모두 열 개의 과목 취급을 한다.
거기에서 화엄경의 뜻을 잘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그 숫자가 이미 답을 하고 있다. 숫자에서 무슨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늘 놓치지 말라고 내가 자주 이야기 한다.
화엄경은 십십법문(十十法門)이다. 원만하고 완벽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원만하고 완벽한 것인가?
모든 존재가 원만하고 완벽하다.
그래서 내가 화엄경 사구게를 지었다.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인 것을!
그 네 구절에서 답을 다 했다.
또 거기에서 우리 실천적으로 어떻게 나가는 것이 좋겠는가? 할 때
다 옳다.
다 맞다.
다 좋다.
좋다 다 좋다
맞다 다 맞다
옳다 다 옳다.
라는 말을 했다.
옳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맞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결국 답은 다 맞고 다 옳고 다 좋다. 그것밖에 답이 없다.
제가 깨닫고 보니까 그렇다.
원융무애(圓融無碍)다. 원효스님은 화쟁(和諍)사상을 거기에서 건졌다. 불교교리상의 각양각색 주의주장들을 화쟁 융화시키는 뜻을 밑에 깔고 있지만 단순하게 불교 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 또 요즘은 세상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들여다 보고 있어서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는지 무슨 문제가 생겨나는지 그런 것들도 결국은 화엄경의 화쟁사상 이것만이 해결책이라는 데에 귀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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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어시불가설(修行於施不可說)이며 : 여기는 열 가지 바라밀을 낱낱이 짚어 간다. 보시로 수행하는 일, 보시가 불교 보살 덕목의 제1조다. 수행 덕목의 제1조다. 그것을 나는 ‘배려다’라고 이야기한다.
보시에 대해서 구구하게 설명이 많지만 배려라고 하는 것,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이타심, 이타행 그것이 도대체 얼마나 배어야 될까? 이타행 이타심 남을 먼저 배려하는 일이 도대체 얼마나 필요할까? 수행어시불가설이다. 말로 다 설명할 길이 없다.
이 한 구절만 하더라도 정말 화엄경답다. 보시를 얼마만치 한다? 불가설이다.
기심과거불가설(其心過去不可說)이며 : 그렇게 살아온 수많은 보살들의 과거, 그것도 얼마나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것 또한 불가설이다. 기심과거불가설이다.
유구개시불가설(有求皆施不可說)이며 : 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베푼다. 무엇이든지 다 베푼다.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리 양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로에 운전하고 가다가 빵빵거리면 그거 한 번 잠깐 서서 ‘그렇게 바쁘면 어제 가시지 왜 오늘 지금 가느냐’고 혼자 중얼거리며 양보해주고 가는 것 그것 또한 불가설이다. 유구개시불가설이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베풀어준다.
이런 말을 자꾸 우리가 읊조리고 마음에 새기고 농담으로라도 하면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자리를 잡지 않겠는가. 철옹성 같은 내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애(我愛) 아견(我見)이 그런대로 쓰윽 녹아나지 않을까, 나는 늘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유구개시불가설이다.
일체실시불가설(一切悉施不可說)이며 : 일체를 다 보시하는 것도 얼마나 보시해야 다할는지 그것 또한 불가설이다. 이것이 우리들 중생마음에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보살 정신이 어느 정도 구축이 되면 이것이 그냥 무릎을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하고 수긍이 가진다.
우리가 십회향품을 공부했는데 얼마나 그 선근회향이 많았는가?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선근을 회향했다.
60종의 보시는 한 가지 보시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화엄경 80권 중에서 무려 세 권이나 보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것들에서 ‘부처님의 보살사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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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계청정불가설(持戒淸淨不可說)이며 : 이 지계청정도 몇 개 조항, 5계 10계 48계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지 못해서 기록한 조항들이고 그야말로 지계청정은 불가설이다. 그 문제도 가히 설명할 수가 없다.
심의청정불가설(心意淸淨不可說)이며 :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도 말로 가히 설명할 길이 없다. 불가설이다.
찬탄제불불가설(讚歎諸佛不可說)이며 :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고 찬탄하고 아무리 찬탄해도 도저히 다 찬탄할 수 없는 것도 불가설이다.
애락정법불가설(愛樂正法不可說)이며 : 불법이 좋다. ‘아 불법, 세상에 이렇게 불법같이 좋은 법이 있을까’ 하고 밤낮없이 읊조리고 칭찬해도 그것 또한 다 설명할 길이 없다. 이것은 그냥 소리내어 읊조리면서 음미하고 흥얼거리고 거기에 심취하고 춤을 추고 그렇게 하는 공부지 달리 무슨 다른 설명을 하면서 따져가면서 하는 공부가 아니다.
그저 읽고 흥얼거리는 것이다.
글을 못 새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야말로 이것은 흥얼거리고 읊조리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하면서 거기에 젖어드는 내용이 이 아승지품이다.
이것은 부처님 당신이 당신보고 설한 것이 아닌가?
세존이 심왕보살에게 설했다는데, 당신이 당신에게 설한 것이다. 당신이 깨달으신 그 경지를 흥겨워서 쭈욱 읽어보면 전부 그런 의미다.
‘너무 근사하다. 야, 내가 이러한 이치를 알았구나’ 하고 흥겨워하면서 설한 것이 이 아승지품이다. 그래서 계속 불가설 불가설 불가설이라는 말이 나온다.
‘부독화엄경(不讀華嚴經)이면 부지불부귀(不知佛富貴)라’ 화엄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 마음 부처가 얼마나 부귀한지를 알지 못한다. 내가 얼마나 부귀한 사람인지를 알지 못한다. 화엄경을 읽어봐야 내가 진실로 부귀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저 마음이 푸근해지고 넉넉해지고 그 무엇도 아쉬울 것이 없는 이런 이치를 이 아승지품 같은 것을 읽으면서, 특히 아승지품 게송을 읽으면서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애락정법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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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제인불가설(成就諸忍不可說)이며 : 모든 인욕을 성취하는 것도 불가설이고, 무생법인도 불가설이다. 여기서 인(忍)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를 의미하는데 제인(諸忍)을 성취하는 것이 불가설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이렇게 풍부하고 넉넉한데도 이것을 다 내가 받아들인다, 인수한다는 뜻이다.
내가 자주 말씀드렸다. 인수(忍受)한다. 참고 받아들인다. ‘내가 수용한다’ 그 수용하는 경전의 이치를 어떻게 다 설명할 길이 있을까?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이 성취제인불가설이다.
무생법인불가설(無生法忍不可說)이며 : 무생법인은 생멸이 없는 진리라고 이야기 하자, 그 역시 불가설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고 해서 ‘그 해석이 맞게 해석하느니, 틀리게 해석하느니’ 그거 너무 그렇게 따질 것도 아니다.
구족적정불가설(具足寂靜不可說)이며 : 적정을 구족하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 선정이다. 적정한 경지를 구족한 것 그것도 얼마나 내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야 그것이 다 설명이 가능할까? 구족적정불가설이다.
주적정지불가설(住寂靜地不可說)이며 : 적정한 경지에 머무는 것도 또한 불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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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정진불가설(起大精進不可說)이며 : 큰 정진을 일으킨다. 적정하고만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큰 정진을 일으키는 것도 불가설이며
기심과거불가설(其心過去不可說)이며 : 그 마음, 과거에 얼마나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는가, 이 또한 기심과거불가설이며
불퇴전심불가설(不退轉心不可說)이며 : 퇴전하지 않는 마음 불가설이며, 정진이니까 퇴전하지 않는 마음 불가설이며
불경동심불가설(不傾動心不可說)이며 : 경동하지 않는 마음 불가설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퇴전하지도 아니하고 정진, 정진 계속 끊임없는 정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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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정장불가설(一切定藏不可說)이며 : 일체 선정의 창고 얼마나 그 창고가 깊고 깊은지 그 또한 불가설이며
관찰제법불가설(觀察諸法不可說)이며 : 제법을 관찰함도 또한 불가설이다.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이 시대에 2022년 이 순간에 우리들 성정에 딱 맞도록 풀고 해석하고 느끼는 것 ‘어떻게 풀고 어떻게 해석해야 그것을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공부하면서 과제로 남은 일이다.
적연재정불가설(寂然在定不可說)이며 : 고요히 선정에 있는 것도 불가설이며
요달제선불가설(了達諸禪不可說)이며 : 모든 선정을 요달하는 것도 또한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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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통달불가설(智慧通達不可說)이며 : 지혜 통달 불가설이며, 이것은 소위 반야다.
삼매자재불가설(三昧自在不可說)이며 : 삼매가 자재함도 불가설이며
요달제법불가설(了達諸法不可說)이며 : 제법을 요달함도 불가설이며
명견제불불가설(明見諸佛不可說)이며 : 모든 부처님을 환하게 이해한다. 그것도 또한 불가설이다.
우리가 부처님을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한다. 엄청 잘 이해하고, 잘 이해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그 설명이 다 가능할까? 명견제불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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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무량행불가설(修無量行不可說)이며 : 한량없는 행을 닦는 것도 불가설이며 이것은 원(願)에 해당한다. 일곱 번째 원에 해당된다.
발광대원불가설(發廣大願不可說)이며 : 광대한 서원을 발하는 것도 불가설이며
심심경계불가설(甚深境界不可說)이며 : 심심경계가 불가설이다. 저는 불교를 꽃으로 비유할 때 원(願) 대원의 꽃이라고 한다. 원은 아주 생기있고, 활기 넘치는 꽃을 원의 꽃이다 라고 본다. 색깔 좋고 아름답고 향기가 있는 것은 좋은 꽃인데 그렇다고 생기가 없다면 그 꽃은 또 문제가 있다.
우리가 꽃을 살 때 시든 꽃은 잘 안 사지 않는가. 시든 꽃은 안 산다. 물론 생기가 있어야 향기도 있고 보기도 좋다. 그래서 사람도 꿈이 있어야 된다. 그 꿈이 무엇인가? 희망, 원, 대원 이것이 원의 의미다.
청정법문불가설(淸淨法門不可說)이며 : 청정 법문이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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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법력불가설(菩薩法力不可說)이며 : 보살법력불가설이다. 이것이 역이다. 법력 십바라밀 중에 방편(方便) 원(願) 력(力) 할 때의 역이 법력이다.
보살법주불가설(菩薩法住不可說)이며 : 보살이 법으로 머무는 것이 불가설이며
피제정념불가설(彼諸正念不可說)이며 : 저 모든 정념이 불가설이다. 요즘 남방불교가 들어와서 사띠 예의주시하는 것, 이것이 정념(正念)이다. 경전에서는 정념을 이야기 하는데 참 많이 알려졌고 소개가 많이 되었다.
뉴스에 보니까 전통 간화선(看話禪)을 선양한다고 하면서 여러 스님들이 동참을 많이 해서 봉암사에 명상센터를 완성했다. 며칠 뒤 내일 모레 개원식을 하고 여기 범어사 방장스님이 개원법회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명상센터가 되었든지 아니면 전통 간화선 운동을 위한 것이든지 수백 억을 들여서 건물을 지어서 했는데 결국은 결론은 무엇인가? 설법이다.
간화선도 없고, 간화선이라고 따로 할 것이 없고, 명상이라고 할 따로 무엇이 없다.
명상이라고 할 따로 무엇이 없다. 전통 간화선이라고 할 것이 또 없다.
천년이 넘는 간화선 역사에 저렇게 돈을 많이 들여서, 어마어마하게 광고를 하면서, 지금 개원식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보니까 ‘그러면 간화선은 뭐냐? 명상은 뭐냐?’ ‘설법이다’ 거기에서 정답이 있다.
설법 그 자체가 명상이고 설법 그 자체가 간화선이다. 그 외에는 없으니까, 설법외에는 없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선사들 일곱 명인가 명단을 올렸다. 지금 최고가는 선사들 명단을 올렸는데 그 사람들은 간화선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간화선은 아니다. 간화선을 이야기하는 설법이다.
간화선은 아니고 간화선을 이야기하는 설법이다. 우리 방장 스님도 마찬가지다. 그 칠 팔 명의 선사가 한결같이 당신 나름대로 간화선을 가지고 이야기하든지 명상을 가지고 이야기하든지 간에 전부 이야기다. 이야기지 선은 아니다.
그러면 뭔가?
이야기가 선이다. 이야기가 선이다. 그것이 정답이다. 내가 이번에 큰 거 하나 깨달았다.
‘아 저렇게 공을 들여서 수십 년 한국 간화선 역사에서 뭔가 결론이라고 도출해서 지금 내놨는데 보여줄 것이 결국은 뭐냐? 설법이다’
설법이 결론이다. 설법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승찬에도 ‘언어즉시 도’다 그랬다.
언어가 즉시 도다. 말이 도다. 말이 도지 다른 것 없다. 말 이외 것을 공연히 그렇게 ‘혹시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나?’ 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언어즉시대도(言語卽是大道)다.
명상센타를 그렇게 근사하게 지어놓고 결론이 결국 언어다. 언어잔치다. 말잔치다. 그 외 뭐가 있는지 한 번 알아보라.
언어잔치 외에 뭐가 있는가?
대단하지 않는가? 그것이 대단한 것이다. 시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이 답이고 결론이다. 저는 거기서 그것을 보았다.
피제법계불가설(彼諸法界不可說)이며 : 저 모든 법계가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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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편지불가설(修方便智不可說)이며 : 방편의 지혜를 닦는 것이 불가설이며
학심심지불가설(學甚深智不可說)이며 : 매우 깊고 깊은 지혜를 배우는 것도 불가설이며
무량지혜불가설(無量智慧不可說)이며 : 무량 지혜도 불가설이며
구경지혜불가설(究竟智慧不可說)이며 : 구경 지혜도 불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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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제법지불가설(彼諸法智不可說)이며 : 저 모든 법의 지혜 또한 불가설이며
피정법륜불가설(彼淨法輪不可說)이며 : 저 모든 청정한 법륜 청정한 법의 수레바퀴 그것 또한 불가설이다.
피대법운불가설(彼大法雲不可說)이며 : 저 법의 구름도 불가설이며
피대법우불가설(彼大法雨不可說)이며 : 저 모든 법의 비도 불가설이며, 여기 그대로 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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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제신력불가설(彼諸神力不可說)이며 : 피제신력도 불가설이며
피제방편불가설(彼諸方便不可說)이며 : 피제방편도 불가설이며
입공적지불가설(入空寂智不可說)이며 : 공적한 지혜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설이며
염념상속불가설(念念相續不可說)이며 : 염념상속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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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행문불가설(無量行門不可說)이며 : 무량행문도 불가설이며
염념항주불가설(念念恒住不可說)이로다 : 염념항주불가설이로다.
제가 이야기 한 것이 금방 이해가 안되겠지만 잘 기억해 뒀다가 ‘언어의 잔치가 간화선이다’ 간화선의 결론으로서 언어의 잔치, 그다음에 명상잔치, ‘명상의 결론이 결국은 언어의 잔치더라, 그 외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아마 ‘야 그 말이 정말 맞다’ 하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나 혼자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옛날에 선지식들이 한 소리 속에도 다 그것이 들어있다. 그런 줄 모르고 그저 자꾸 뭔가 새롭게 해야만 되는 줄로 아는 것 거기에 함정이 있다. 뭔가 새롭게 해야하는 줄 아는 것이 함정이다.
(12) 遊刹自在行
諸佛刹海不可說이며 悉能往詣不可說이며
諸刹差別不可說이며 種種淸淨不可說이며
差別莊嚴不可說이며 無邊色相不可說이며
種種間錯不可說이며 種種妙好不可說이며
淸淨佛土不可說이며 雜染世界不可說이로다
모든 부처님의 세계해를 말할 수 없고
거기마다 나아감도 말할 수 없고
모든 세계의 차별함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청정함도 말할 수 없네.
차별한 장엄들도 말할 수 없고
그지없는 색상들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섞인 것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기묘함도 말할 수 없네.
청정한 부처님 국토 말할 수 없고
물든 세계들도 말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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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찰자재행(遊刹自在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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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노니는 자재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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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찰해불가설(諸佛刹海不可說)이며 : 제불찰해 불가설이며
실능왕예불가설(悉能往詣不可說)이며 : 다 능히 왕예하는 것도 불가설이며
제찰차별불가설(諸刹差別不可說)이며 : 제찰차별 불가설이며
종종청정불가설(種種淸淨不可說)이며 : 종종청정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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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장엄불가설(差別莊嚴不可說)이며 : 차별장엄도 불가설이며
무변색상불가설(無邊色相不可說)이며: 무변색상도 불가설이며
종종간착불가설(種種間錯不可說)이며 : 종종간착도 불가설이며
종종묘호불가설(種種妙好不可說)이며 : 아름답고 잘 꾸며진 것도 불가설이며
청정불토불가설(淸淨佛土不可說)이며 : 청정불토가 불가설이며
잡염세계불가설(雜染世界不可說)이로다 : 잡염세계도 불가설이며, 어느 분야로 이야기하든지 다 불가설이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다.
옳다 다 옳다
맞다 다 맞다
어느 것이 안 옳은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안 맞는 것이 어디 있느냐?
(13) 調伏衆生行
了知衆生不可說이며 知其種性不可說이며
知其業報不可說이며 知其心行不可說이며
知其根性不可說이며 知其解欲不可說이며
雜染淸淨不可說이며 觀察調伏不可說이며
變化自在不可說이며 現種種身不可說이며
修行精進不可說이며 度脫衆生不可說이며
示現神變不可說이며 放大光明不可說이며
種種色相不可說이며 令衆生淨不可說이로다
중생들을 잘 앎을 말할 수 없고
그 종성(種性)을 아는 것도 말할 수 없고
그 업보(業報)를 아는 것도 말할 수 없고
마음과 행을 아는 것도 말할 수 없네.
근성(根性)을 아는 것을 말할 수 없고
지혜 욕망 아는 것도 말할 수 없고
더럽고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
관찰하고 조복시킴도 말할 수 없네.
변화가 자재함을 말할 수 없고
온갖 몸 나타냄도 말할 수 없고
수행하고 정진함도 말할 수 없고
중생을 제도함도 말할 수 없네.
신통변화 나타냄을 말할 수 없고
큰 광명 놓는 일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색상들을 말할 수 없고
중생을 깨끗하게 함도 말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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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복중생행(調伏衆生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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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조복하는 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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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중생불가설(了知衆生不可說)이며 : 중생을 요지하는 것이 불가설이며
지기종성불가설(知其種性不可說)이며 : 지기종성도 불가설이며
지기업보불가설(知其業報不可說)이며 : 그 업보를 아는 것도 불가설이며
지기심행불가설(知其心行不可說)이며 : 그 심행을 아는 것도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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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근성불가설(知其根性不可說)이며 : 지기근성도 불가설이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50년을 살았든지 60년을 살았든지 70년을 살았든지 살아보니까 전부 불가설이다. 답이 없다. 끝까지 답이 없다. 그야말로 말할 수가 없다.
말할 수 없다. 불가설이다. 오로지 불가설일 뿐이다. 지기업도 불가설이며 지기심행도 불가설이며 지기근성도 불가설이다.
지기해욕불가설(知其解欲不可說)이며: 지기해욕도 불가설이다. 그 이해와 욕망을 아는 것도 불가설이다.
잡염청정불가설(雜染淸淨不可說)이며 : 잡염청정
관찰조복불가설(觀察調伏不可說)이며 : 관찰조복 전부 불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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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자재불가설(變化自在不可說)이며 : 변화자재가 불가설이다.
이것은 보살의 경지에서 이야기한 것이라서 얼른 납득은 안간다 하더라도 내가 가끔 말씀드렸듯이 ‘화엄경은 어느 정도 소견이 났다 생각하고 읽어라’ 어느 정도 ‘깨달았다’라고 생각하고 ‘깨달았다’ 라는 차원에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완벽한 깨달음은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생각하고 읽으면 뭔가 상당히 재미가 있고 어떤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현종종신불가설(現種種身不可說)이며 :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이 불가설이다. 이 구절 하나만 보더라도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이 불가설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오늘 하루만 내가 어디서 어떤 몸을 나타냈는가? 불가설이다.
수행정진불가설(修行精進不可說)이며 : 수행정진 불가설이며
도탈중생불가설(度脫衆生不可說)이며 : 중생을 도탈하는 것도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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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신변불가설(示現神變不可說)이며: 신통변화를 시현하는 것도 불가설이며
방대광명불가설(放大光明不可說)이며 : 방대광명도 불가설이며
종종색상불가설(種種色相不可說)이며 : 종종색상도 불가설이며
영중생정불가설(令衆生淨不可說)이로다 :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는 것도 또한 불가설이로다.
이런 글을 자꾸 소리내서 읊조리고 흥얼거림으로 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화가 다 된다. ‘영중생정불가설이다. 영중생정불가설이다’ 자꾸 읊조리면 결국은 정화가 된다.
(14) 三業深淨行
一一毛孔不可說이며 放光明網不可說이며
光網現色不可說이며 普照佛刹不可說이며
勇猛無畏不可說이며 方便善巧不可說이며
調伏衆生不可說이며 令出生死不可說이며
淸淨身業不可說이며 淸淨語業不可說이며
無邊意業不可說이며 殊勝妙行不可說이며
成就智寶不可說이며 深入法界不可說이며
菩薩總持不可說이며 善能修學不可說이며
智者音聲不可說이며 音聲淸淨不可說이며
正念眞實不可說이며 開悟衆生不可說이며
具足威儀不可說이며 淸淨修行不可說이며
成就無畏不可說이며 調伏世間不可說이며
諸佛子衆不可說이며 淸淨勝行不可說이며
稱歎諸佛不可說이며 讚揚無盡不可說이며
世間導師不可說이며 演說讚歎不可說이로다
하나하나 모공을 말할 수 없고
광명그물 놓는 일을 말할 수 없고
광명에서 내는 빛을 말할 수 없고
부처 세계 비추는 일 말할 수 없네.
용맹하여 두렵지 않음을 말할 수 없고
방편이 공교함을 말할 수 없고
중생을 조복함을 말할 수 없고
생사에서 벗어남도 말할 수 없네.
청정한 몸의 업(業)을 말할 수 없고
청정한 말의 업도 말할 수 없고
그지없는 뜻의 업도 말할 수 없고
수승하고 묘한 행도 말할 수 없네.
지혜 보배 성취함을 말할 수 없고
법계에 들어감을 말할 수 없고
보살의 모두 지님[總持] 말할 수 없고
닦고 배움 잘하는 일 말할 수 없네.
지혜로운 이의 음성 말할 수 없고
음성의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
바른 생각 진실함을 말할 수 없고
중생을 깨우침도 말할 수 없네.
위의를 갖추는 일 말할 수 없고
청정하게 수행함을 말할 수 없고
두려움 없음 성취함을 말할 수 없고
세간을 조복함도 말할 수 없네.
모든 불자 여러 대중을 말할 수 없고
청정하고 훌륭한 행 말할 수 없고
모든 부처님 찬탄함을 말할 수 없고
끝없이 칭찬함을 말할 수 없네.
세상의 안내자를 말할 수 없고
연설하고 찬탄함을 말할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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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업심정행(三業深淨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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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모공불가설(一一毛孔不可說)이며 : 일일모공 불가설이며
방광명망불가설(放光明網不可說)이며 : 광명 그물을 놓는 것도 불가설이다.
여러분들 방광 많이 한다. 우리가 학인 때 어쩌다가 서로 의견이 안맞아서 화를 버럭 내면 ‘아이 저 사람 방광했다’고 ‘방광했다’고 했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성질내는 것이 방광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진짜 방광이다. 지금 60년 전 학인 생활을 돌이켜 보니 ‘야 진짜 방광이다. 근사한 방광이다’ 방광명망 불가설이다.
광망현색불가설(光網現色不可說)이며 :광명의 그물이 색을 나타내는 것도 각양각색이지 않은가. 방광도 여러 가지 방광이 있다.
보조불찰불가설(普照佛刹不可說)이며 : 불찰을 보조하는 것도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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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무외불가설(勇猛無畏不可說)이며 : 용맹무외 불가설이며
방편선교불가설(方便善巧不可說)이며 : 방편선교가 불가설이며
조복중생불가설(調伏衆生不可說)이며 : 조복중생도 불가설이며
영출생사불가설(令出生死不可說)이며 : 생사로 하여금 벗어나게 하는 것도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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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신업불가설(淸淨身業不可說)이며 : 청정신업도 불가설이며
청정어업불가설(淸淨語業不可說)이며 : 청정어업도 불가설이며
무변의업불가설(無邊意業不可說)이며 : 무변의업이 불가설이며
수승묘행불가설(殊勝妙行不可說)이며 : 수승묘행도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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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지보불가설(成就智寶不可說)이며 : 성취지보 불가설이며 지혜의 보배가 불가설이며
심입법계불가설(深入法界不可說)이며 : 깊이 법계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설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으로 납득이 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읽어서 읊조려서 계합이 되는 수밖에 없다. 누가 무슨 설명을 교묘하게 해서 심입법계불가설이라고 하는 도리를 알 수 있겠는가? 그냥 느끼는 것이다.
보살총지불가설(菩薩總持不可說)이며 : 보살총지가 불가설이며
선능수학불가설(善能修學不可說)이며 : 선능수학도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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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음성불가설(智者音聲不可說)이며 : 지자음성 불가설이며 지혜로운 사람의 음성이 불가설이며
음성청정불가설(音聲淸淨不可說)이며 : 음성이 청정도 불가설이며
정념진실불가설(正念眞實不可說)이며 : 정념진실이 불가설이며
개오중생불가설(開悟衆生不可說)이며 : 중생을 개오함도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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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위의불가설(具足威儀不可說)이며 : 구족위의가 불가설이며
청정수행불가설(淸淨修行不可說)이며 : 청정수행도 불가설이며
성취무외불가설(成就無畏不可說)이며 : 성취무외가 불가설이며
조복세간불가설(調伏世間不可說)이며 : 조복세간이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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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자중불가설(諸佛子衆不可說)이며 : 제불자중 불가설이며
청정승행불가설(淸淨勝行不可說)이며 : 청정승행이 불가설이며
칭탄제불불가설(稱歎諸佛不可說)이며 : 칭탄제불이 불가설이며
찬양무진불가설(讚揚無盡不可說)이며 : 찬양이 다함이 없는 것이 불가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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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도사불가설(世間導師不可說)이며 : 세간도사 불가설이다. 세간에 웬 도사가 그리 많은지 참 세간도사 불가설이다.
연설찬탄불가설(演說讚歎不可說)이로다 : 연설찬탄 불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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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무시무종이라고 하는 이치에 맞게 우리가 줄기차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공부한다고 하는 것...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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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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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