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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은 조선조22대 임금인 정조의 첫째 아들로 세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다섯 살에 죽은 문효 세자의 무덤이다. 당시 기록에 보면 고양 율목동에 묻고 효창원이라 이름했고 했다. 이 효창원의 크기에 대해 동으로는 주교 대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공덕리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율곡정 삼성현에, 북쪽으로는 봉학정 에 이르렀다 했으니 지금효창동뿐 아니라 청파동.신공덕동까지를 포괄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세자의 무덤을 넓게 잡았음은 정조가 세자의 죽음을 슬퍼 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조선조의 제도로서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자와 왕자비가 묻히면 '원(園)'이란 호칭을 썼고 폐위당한한 임금의 무덤이나 공주,옹주,후궁, 등의 무덤은'묘'라 했던 것이다. 그후 효창원에는 문효 세자의 무덤 말고 문효 세자의 어머니인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무덤과 23대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 그리고 숙의 박씨의 소생인 순조의 맏딸 영온 옹주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효창원의 동남쪽에 일제 때 세운 비행기 발상지 비라는 게 서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때 죽은 일본 시라가와 대장이 칙서한 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이 바로 세계 최초의 비행기 발상지인지라 뜻 있는 분들이 이를 기념하고자 이곳에 비를 세운다." 갑오개혁이 일어나던 해 이 효창원에는 일본군의 혼성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여단 야전 병원 약제사로 니노미야라는 재간꾼이 비행기의 설계를 하여 발주를 청원하였다. 당시참모장이던 나가오카가 미친 수작이라 거들떠 보지 않았는데 그런 지 몇 년 후에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여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일본 정부에서는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그 설계를 검토시켰더니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이치나 구조나 설계보다 발전된 것임을 확인하고 비행기 개발을 시작한다. 비록 우리가 발명해 낸 것은 아니지만 효창원의 옛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또 효창원과 더불어 기억될 일로 동쪽 언덕의 구릉에 있었던 오포(午砲)를 들 수 있다. 대포를 쏘아 그 포성으로 정오를 알리는 것이 오포이다. 오포의 제도는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야포대에서 쏘기 시작한 것으로 한국 사람에게 겁을 주기 위해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포는 일본에서 만들어 들여 온 일제였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 대포를 만든 포장들이 백제 때 건너간 한국 사람들의 후예라는 점이다. 포상에 이 오포를 만든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중'백제청치랑. 백제승치랑. 백제직치랑'이라는 백제 성(姓)의 삼형제 같은 이름이 나온다. 일본 사람으로 백제 성을 지녔다면 백제 귀화인의 후손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그 후 이 오포를 경성부청이 일본 군부로부터 인계했는데 대포 소리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인상이 좋지 않다 하여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광화문 소방서에 사이렌을 달고 정오마다 사이렌을 틀어 시각을 알렸던 것이다.
이규태 의<600년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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