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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은 어떻게 생겼을까? Ⅱ-경복궁
3. 경복궁 옛 사진
궁궐(宮闕 )과 신하가 정무를 보고 거처하는 궁(宮) 궁을 지키는 궁성, 성루, 성문을 가르키는 궐(闕)쳐진 말이다. 서울에는 5대 궁궐이 있지만 이중 4곳(창덕궁,창경궁, 덕수궁,경희궁)의 궁궐은 궐의 개념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는 하기 어럽다. 이에 반해 경복궁의 출입문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돌로 된 육축 위에 누각이 세워진 성문의 형태를 하고 있고 동남, 서남 모서리에 파수를 보는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다. 궁궐의 제도를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은 경복궁 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복궁은 여러 궁 중에서 규모도 가장 크다. 면적을 따지자면 창독궁과 창경궁을 합친 동궐이 더 크지만 후원이 숲이 대부분의 영역을 이루고 있고 원래 건물의 칸수나 건물의 규모 면에서 경복궁이 월등하게 우위에 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후원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광대한 여역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듯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으로 왕조의 엄중한 위엄을 상징하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 대부분의 전각이 훼절되기 전까지 경복궁의 규모는 7481칸으로 상당히 컷지만 당시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없고 일부의 자료로만 볼 수 있늘 뿐이다. 그 중 병합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은 <복궁의 건물배치도>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의 경복궁의 평면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복궁의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면 중심축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고 있다. 중국 고대 예법인 주례에 나오는 궁궐의 격식에 따라 지어졌다. 넓은 평지에 중심축을 잡고 거기에는 일렬로 문과 중요한 건물이 놓여지고 그 주변으로 부속적인 건물이 놓여진다. 중심축에 따라 주요 건물이 배치된다는 점에서 자금성과 비슷하지만 거의 완벽한 동서 대칭 구조의 자금성과 달리 비교적 자유롭고 유기적인 배치는 한국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자는 오문삼조, 제후는 삼문삼조의 구성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경복궁이 어디에 속하는지는 해석의 차이가 있다. 삼문이라면 바깥 문인 고문(皐門), 가운데 문인 치문(稚門), 안 쪽 문인 노문(路門)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각각 광화문, 근정문, 향오문이다. 오문이라면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稚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을 말하는 것으로 광화문, 홍례문,근정문, 사정문,향오문이다.
삼조는 정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곳으로 광화문에서 근정정 사이에 있는 궐내각사가 있는 권역인 외조, 임금이 정치를 하는 정전과 편전이 있는 근정문과 향오문 사이이 권역을 치조, 임금의 개인생활을 하는 강녕전과 교태전 권역을 연조로 나뉘어 진다.
또 전조후침이 격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을 치르고 정치를 하는 곳인 조정이 앞에 놓이고 임금과 개인적으로 기거하는 침전은 뒤에 놓인다는 것으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을 구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충 가로로 선을 그어보면 좌측 그림 6.7,8번 뒤쪽이 조정과 침전이 경계라고 항 수 있을 것이다.
좌측 그림으로 경복궁의 각 영역과 기능을 나누자면 가운데 빨간색으로된 부분이 '외전' 영역이다. 5번 근정전이 경복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국가이 공식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그 위쪽 노란색은 '내전'영역으로 6번 사정전은 왕의 집무실이라고 할 수 있고, 9번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 10번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다. 8번,9번은 개인적인 공간이지만 나라의 지존인 왕과 왕비가 머무는 만큼 공적인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쪽이 보라색 부분은 22변 자선당과 23번 비현각을 중심으로 하는 '동궁' 영역으로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자기 왕인 세자가 머무르는 곳으로 공부를 하고 대신들과 회의를 하는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회색은 신하들이 머무르며 근무하는 '궐내각사'로 14번 수정전은 중심으로 지금으로치면 왕의 비서실, 내시본부, 도서관, 회의실,병원 등의 건물이 밀집 하고 있다. 경복궁 서남쪽 모서리에 마구간, 가마 보관소 용도의 건물이, 동남쪽 모서리에는 궁궐의 경비와 군사 용도의 건물들이 모여있다.
뒤쪽의 가장 넓은 주황색 부분은 '생활기거공간' 으로 왕의 가족들이 머무르는 전각들이 있다. 왕의 어머니인 대비, 왕의 후궁들, 왕자와 공주들이 머무르고 주변으로는 이들의 시중을 담당하기 위한 공간으로 궁녀들이 머무는 방, 창고, 주방 등이 있고, 28번은 역대 왕의 그림인 어진를 봉안하는 선원전이다.
서쪽의 38번 문경전, 39번 회안전 그리고 그 위쪽이 태원전까지 포함하는 영역은 장례를 위한 공간으로 왕실의 가족이죽으면 릉에 가기 전까지 시신을 안치하고 위패를 모셔두는 용도 등으로 사용한다. 가장 뒤쪽에잇는 초록색 부분은 '후원'으로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연못도 있고 동산도 있는데 이 영역은 궁궐 담장 밖으로 확장된다.
1896년 사직동 부근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모습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광화문,흥례문,근정문, 근정전 지붕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서십자각이 보인다
경복궁 전경
현재 삼청동 뒤쪽에 있는 언덕에서 찍은 사진으로 189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건물이 철거되기 전의 궁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좌측 큰 2층 건물은 근정전이고 오른쪽 큰 지붕의 건물은 경회루다. 1876년 화재로 강녕전과 교태전 등 건물이 불타고 아직 중건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1880년대 지금의 정독도서관 서북쪽 근처 쯤에서 촬영한 경복궁 전경.
강녕전, 교태전을 비롯한 내전영역이 빈터로 남아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1865년 중건을 시작하여 1868년 완성한 것이다. 고종은 1863년 창덕궁에서 즉위하여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1868년 경복궁으로 이어한다. 1873년 섭정인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친정을 선포하면서 건청궁을 짓는데 그 해 강녕전 뒤쪽 교태전 등 내전 일곽 369칸을 태우는 화재로 창덕궁으로 다시 이어한다.
고종은 아직 복구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경복궁으로 돟아와 공사를 재촉하여 1876년 불탄 전각들이 준공되지만 같은 해 이전 보다 더 큰 불이 나서 강녕전을 비롯한 800여칸을 태워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1877년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한 고종은 1885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왔고 1894년 4월~5월 잠시 창덕궁에 머무른 것을 제외하고 1896년 아관파천 이전까지 경복궁에 머물렀다.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소비해가며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세웠건만 경복궁이 사용된 기간은 21년 정도로 그렇게 오래되지 않는다.
고종이 경복궁에 머무른 기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정도 머무르다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지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크게 수리하여 황궁으로 삼으면서 이전까지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이후 쭉 빈 궁궐로 남게된다.
1910년 일본에 병합되면서 일제는 경복궁의 4000여칸 전각들을 헐어 민단에게 매각하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여 그 빈터에 여러 가건물과 남아있던 전각을 전시장으로 사용하였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강녕전을 비롯한 내전 영역의 건물들을 헐어 복구에 사용하였다.
그 후 경복궁은 근정전을 비롯한 몇몇 전각들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빈처에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하여 직원관사, 총독부 박물관, 총독부 미술관, 일본식 정원, 야구장, 잔디밫 등으로 채워지게 되엇다. 아래의 사진등 지금 남아 있는 전각을 비롯해 전각이 훼손도기 전과 훼손되고 있던 과정의 경복궁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대부분은 1930년에 발행된 <조선고적도보 10>의 사진들로 아마도 병합 이전 부터 1920년대까지 촬영한 사진들로 보인다. 그 외의 나머지 사진은 일제시대 이전에 외국인 등에 희해 촬영된 사진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1396년 창건 때는 사정문이었으나 세종 때 광화문으로 명명되었다. 광화문 앞에는 지금과 달리 땅 보다 높은 월대가 놓여있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더 했다.
광화문 앞의 해치상
해태는 해치라고도 하는데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 속의 동물로 화재와 재앙을 물치친다고 믿어졌기 땨문에 흉배나 건축물의 장식물로 많이 쓰여졌다.
광화문 앞의 해치상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복원) 3개의 홍예로 괴어 있는데 가운데 큰 문은 왕이 사요하는 어문 동ㅉ동쪽은 문관이 사용하는 동협문 , 서쪽은 무관이 사용화는 서협문이다.
(좌) 경복궁 안쪽인 홍례문 앞에서 바라본 광화문 뒷 모습
광화문의 동측면
광화문 두공
광화문 누상 내부 두공
광화문 누상 내부 두공
신무문 전면
신무문 안쪽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현존 : 1930년경) 신무문 밖으로 후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청와대 자리다
신무문 서쪽 작은 문
경복궁 안에서 본 신무문
신무문으로 가는 통로 끝에서 찍은 것으로 서쪽에는 빈전인 태원전이 있고 동쪽에는 향원정 연못이 있다.
신무문 문루 내부 천정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바로 앞은 전차의 종점으로 전차의 진동으로 추정되는 담장의 붕괴로 인해 1926년 철거되었다. 이후 1975년에 다시 세워지지만 지금보다 남쪽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의 위치가 아니다. 궐내각사와 가까웠기 때문에 대신들이 많이 이용한 문이다.
(좌)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불완전 복원)
사진은 1926년 전차의 진동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담장이 무너진 모습이다.
영추문 안쪽
영추문 문루 남면 작은 문
영추문 문루 내부 천정
(우)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현존) 좌측에 멀리 보이는누각이 동십자각이다.
건춘문 전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안쪽에서 촬영된 사진
왕족, 척신, 상궁이 주로 드나들던 문으로 안으로 돌아오면 바로 앞에는 세자궁인 동궁이있었다.
건춘문 바깥에서 본 모습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건춘문 앞에 중학천이 있었고 그 뒤로는 종친부가 있었다. 중학천은 광화문 동쪽 의정부 뒤로 사학 중에 하나인 중학이 이 하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동측 담장 이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건춘문과 동십자각 사진
앞에는 동문인 건춘문과 동측 파수각인 동십자각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중학천이 흐른다
중학천 건너에서 바라본 동십자각의 모습
현재 연결되어 있던 궁궐 담장이 잘려나가고 올라가던 계단도 없어지면서 도로 한가운대 고립된 섬처럼 남아 있다.
경복궁 동십자각 병합 이후의 모습 같은데 남측의 경복궁 궁장이 아직 잘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대한제국 병사인데 동십자각 계단 앞에서 찍은 것으로 보아 파수병인 것 같다. 위의 사진과 달리 계단의 난간이 남아있다.
경복궁 동남우루(동십자각) 내면
경복궁 동남우루(동십자각) 외면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십자각(현존). 병사가 파수를 보는 누각으로 지금은 담장이 잘려진 상태다. 사닞상에는 남쪽의 담장은 헐려 청창이 있는 상태이 있는 상태지만 아직까지는 계단이있고 동측 담장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다.
광화문 근처에서 본 서십자각(미복원)
동십자각과 대칭되는 서남쪽 모서리에 세;워져 있었자만 전차 공사로 헐려 남아 있지 얺다.
영추문 근처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 서십자각의 모습
광화문을 중심으로 동쪽의 동십자각과 대칭되어 궁궐 남쪽 모서리에 있었던 서십자각, 군사가 궁궐의 경비를 서던 망루로 1923년 전차 선로가 영추문까지 연장되면서 철거돠었다.
광화문 다음 두번째 문인 흥례문(복원) 이문을 통과하면 금천이 흐르고 그것을 건너는 다리인 영제교가 있다.
흥례문을 통과하여 영제교를 건너 좌측에 있는 유하문(복원)
서쪽의 궐내각사와 통하는 문이다. 유화문 오른쪽에 보이는 조그만 정면 2칸짜리 건물은 기별청으로 관헌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중아에서 결정한 사항들을 베껴 지방관헌들에게 발송한다. 일종의 관보발행소라고 할 수 있다.
근정문으로 가는 다리인 영제교(복원)
경복궁 금천교석란간 및 석수
慶福宮 永濟橋 天鹿
금천교 남북 양쪽으로 네마리의 천록이 조각되어 있다.
이 주변으로는 벽을 두른 행각이 두러져 있어 이곳에 내병조,정색, 마색, 결속색의 관청이 있엇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안쪽으로 벽을 마들지 않고 북도와 같은 텅빈 회랑처럼 복원되어 있다.
慶福宮 勤政門 外側 斜面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현존) 정면
근정문 양쪽으로 동쪽에는 문관이 다니는 이화문, 서쪽에는 무관이 다니는 월화문이 있다.
근정전 월대 위에서 남족으로 바라본 근정문 뒷 모습
영제교와 근정문
홍례문을 지나면 금천이 가로 지르고 그 위에 영제교가 놓여 있었다. 이 다리를 통과하면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연결된다. 이 주위 행각에는 기별청, 내병조 정색, 마색, 결속색이라는 관청이 있다 1916년 총독부를 세우면서 철거되어 2001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근정문 무랑(행랑) 외부
근정문 측면 및 무량 내면
근정전 전경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2층의 월대 위에 2층의 목조건축물이 놓여있는 조선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국왕 즉위나 대례 등 국사 공식행사가 열리던 곳이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현존)
임금이 신들의 조회를 받고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2중의 월대 위에 중층 전각으로 황조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다. 그 앞으로 양쪽으로 9개식으 정 1품에서 종9품의 관헌들이 서있던 자리에 품계석이있고 넓은 조정에 화강암 박석들이 박혀있다.
1904년 근정전
동남쪽 회랑 근처에서 본 근정전
동측 회랑 남쪽에서 바라본 회랑의 열주들
근정전 월대와 남쪽 계단
가운데가 왕이 다니는 답도로 가운데 봉황이 새겨져 있고 층계석에도 당초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방의 계단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조각상이 있고 월대에는 장식잉새겨진 난간에 방위마다 십지조각과 섟가 놓여있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근정전 정면 월대 정면 기단 석계단(석폐)
근정전 정면 월대 석계단(석폐)
근정전 현판 및 상.하층 두공
근정전 상,하층 처마(헌 : 軒) 및 두공
경복궁 근정전 월대(2단) 돌난간 기둥머리 사신조각 중 현무(북쪽)
경복궁 근정전 월대 (2단) 돌난간 가둥머리 사신조각 중 청룡(동쪽)
경복궁 근정전 월대 (2단) 돌난간 기둥머리 사신조각 중 주작(남쪽)
경복궁 근정전 월대(2단) 석난간 기둥머리 사신조각 중 백호(서쪽)
경복궁 근정전 월대(2단) 석난간 기둥머리 석수
경복궁 근정전 월대(2단) 석난간 기둥머리 석수
근정전 기단 석란주두석수
근정전 기단 우 차수상석수
경복궁 근정전 월대 돌난간 기둥머리 석수
경복궁 근정전 월대(2단) 석난간 기둥머리 12지신조각
경복궁 근정전 월대 (1단) 돌난간 기둥머리 12지신조각 중 쥐
경복궁 근정전 월대(1단) 돌난간 기둥머리 12지신조각
경복궁 근정전 월대(2단) 석난간 기둥머리 십이지신조각
경복궁 근정전 월대(1단) 석난간 기둥머리 12지신조각
경복궁 근정전 월대(2단) 석난간 기둥머리 12지신조각
경복궁 근정전 월대(1단) 돌난간 기둥머리 12지신조각
경복궁 근정전 월대(1단) 돌난간 기둥머리 12지신조각
근정전 월대의 동정
근정정 내부의 어좌
왕이 앉아 신하들의 하례를 받던 곳으로 뒤에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어좌 위에느 ㄴ보개가 있고 구름무늬와 여러 장식이 있어 장엄함과 위엄을 더해준다.
근정정 내부의 어좌
근정전 어좌 천정 조정
근정전 어좌 일월오봉도병풍
근정전 어좌 후 곡병
근정정 어좌 어탑 일부
어좌와 근정전 내부의 가구
근정전 외부는 2층이지만 내부는 통칸으로 트여 있어 기둥과 천정이 높은 장엄한 모습이다.
근정전 내부 두공
근정전 내부 두공
근정전 천정 조정
근정전 진찬도
근정전 뒷편 사정전의 정문인 사정문(현존)
근정전 뒷편 사정전의 정문인 사정문(현존) 뒷면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현존)
그 동쪽으로는 보조 집무실인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기전에 이 세건물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서정전 세부
사정전 뒤에 있는 문인 향오문(복원)
강녕전 앞에서 본 향오문의 뒷 모습
오른쪽의 건물이 왕의 침전인 강녕전의 일부와 경성전 전면
용을 상징하는 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므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강녕전 좌우로는 연생전, 경성전이 있었고 뒤쪼 좌우로는 연길당. 응지당의 부속건물이 있어 왕의 다양한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내전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 : 복원)
대전이라고 하는데 다른 내전 전각들와 달리 앞에 월대가 있어 이곳에 차양을 치고 왕이 공식행사를 치르거나 그 가족들과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관람하면서 연회를 즐겼다. 주변으로는 4개의 보조 침전이 있으며 교태전과 함께 유이하게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다.
강녕전 처식
강녕전 헌(軒) 및 두공
강녕전 내부 대청
강녕전 대청 천정 세부
강녕전 천정 격간문양
강녕전 진찬도
강녕전 진찬도
강녕전 동방 연생전 정면
경복궁 강녕전 뒤에 있는 양의문(복원) 정면
문 양쪽으로 강녕전 굴뚝이 있는데 벽돌로 무늬를 새겨기능성은 물론 조형적으로도 훌륭하다.
교태전 앞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양의문의 뒷 모습
교태전((交泰殿 : 복원) 정면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정면 중앙부
중궁전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왕비를 중전이라고 한다. 강녕전과 달리 좌우로 행각이 붙어 있으며 이곳에 궁녀들이 기거하며 시중을 담당하였다.
교태전 및 원길헌 일부
교태전 뒷면 및 동익각인 건순각
교태전의 뒷면 및 서익각(西翼閣)-익각이란 궁중안 정당 좌우편에 딸려있는 전각을 말한다
교태전 및 서무(西廡 : 서쪽 행각)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마당에서 촬영된 것이다. 경회루의 지붕이 보인다. 교태전은 내명부의 최고 우드러리이자 안주인의 거처였기 때문에 중궁전, 중전이라고 불렀다. 뒤편에 있는 아미산 굴뚝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교태전 박공 장식(처식 : 妻飾)
교태전 헌(軒 : 처마) 및 기둥머리 공포(栱包)
원문에는 두공(斗栱)으로 표기됨- 큰 규모의 목조건물에서 지붕의 하중을 받칠 목적으로기둥머리에 짜 올린 나무쪽들의 총체를 공포(栱包)라 한다
교태전 내부
교태전 원길헌의 천장- 원문에는 조정(藻井-아름다운 그림,조각,문양으로 장식한 중국 전통건축물의 천장)
교태전 원길헌 조정 두관문양 전개도
교태전 대청(大廳) 천장 세부
대청은 한옥 몸채(여러채로 된 살림집의 주 되는 건물)의 방과 방사이의 큰마루를 지짗한다
교태전 천정 문양
교태전 지추 문양전개도
교태전 비첨문양 전개도
교태전 건순각 서쪽 외부
교태전 건순각 대청 세부
교태전 동쪽 건순각 안뜰 벽돌담(塼墻)
교태전은 여성의 공간인 만큼 이곳 저곳에 아기자기하고 예쁜 디레일이 살아있는데 담장과 문 또한 붉은 벽돌과 회로 아름다운 무늬를 연출하였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자경전이다.
교태전 건순각 동쪽 연휘문
교태전 뒷쪽 후원인 아미산은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쌓은 언덕으로 이 곳에 화계를 조성하고 화초와 돌로 아름답게 꾸몄다.
교태전 후정 아미산 온돌연출
교태전 후정 아미산 굴뚝(현존)과 작은 문- 건순각 뒤뜰의 굴뚝
교태전 뒤로 4개의 굴뚝이 있는데 육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취,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여 매우 아름답다, 아미산 굴뚝은 보물 제 811호이다
교태전 뒤뜰 아미산
교태전 뒤뜰 아미산- 굴뚝과 석지(石池-물을 담아 여꽃 따위를 심는 함지모양의 돌그릇)
교태전 뒤뜰 아미산 식석 및 석지(石池)
교태전 뒤들 아미산 식석(飾石 : 보석보다 품질이 낮은 장식용 돌) 및 석지(石池)
교태전 뒤뜰 아미산 '함월지(涵月池 : 달을 머금은 연못)'라 새겨진 석지(石池)
교태전 뒤뜰 아미산 석지
경복궁내 석조물-원문에는 경복궁내 식석과 석지로 소개되어 있다
경복궁내 석조물-원문에는 경복궁내 식석과 석지로 소개되어 있다
교태전 및 함원전 무(행랑) 서측면
1917년 창덕궁 화재로수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인위적 파괴를 자행하여 함원전을 비롯한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 헐어서 그 부재로 창덕궁을 재건축하였다 현재 함원전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병합 후 얼마되지 않아 철거되고 잡초가 무성한 소주빙 터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경복궁의 모습
왼쪽 큰 지붕이 강녕전, 가운데 측면으로 보이는큰 지붕이 경회루, 오른쪽이 교태전 이다. 이곳 내전 일대는 이후 1917년 철거되어 화재로 없어진 창덕궁 전각의 복구에 사용된다.
교태전 동측 건순각
원길헌
교태전의 동쪽 전경-왼쪽 부터 원길헌- 교태전- 건순각
연생전 근정전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원길헌 건순각
북쪽에서 바라본 내전 일대 . 앞으로 교태전의 북측면, 강녕전,근정전이 나란히 있다.
자경전 남쪽 행각(무랑) 건물 전면
자경전 서쪽 부분. 문자를 도안한 문양과구워서 만든 식물 무늬로 담장이 아름답게장식되어 있다.
자경전 청연루 협경당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현존) 전면
고종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조대비의 거처로 조대비는 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로 고종을 양자로 들여 왕으로 즉위시킨다. 자경전은 복인당,자경전,청연루, 협경당으로 구성되어있다.
자경전 청연루,협경당
자정전 서쪽 외부
자정전 북측면 외부
자정전 후정 작은문 및 벽돌담
경복궁 자경전 서측 꽃담
慶福宮 慈慶殿 西側 花墻
경복궁 자경전 서측 꽃담
慶福宮 慈慶殿 西側 花墻
경복궁 자경전 서측 꽃담
慶福宮 慈慶殿 西側 花墻
慶福宮 慈慶殿 西側 花墻
경복궁 자경전 서측 꽃담
慶福宮 慈慶殿 西側 花墻
경복궁 자경전 서측 꽃담
자경전 후정에 있는 십장생 온돌 굴뚝(현존) 보물 제 810호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교태전과아미산 굴뚝과 함계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다
왕실 가족의 침전 용도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제수합(현존)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국립민속박무관 앞에 덩그라니 남아 있다.
침전 용도로 쓰였던 건물인 만경전(미복원).
조대비의 팔순잔치가 열린 곡으로 1917년 창덕궁 화재 때 철거되어 창덕궁 재건축에 부재가 쓰였다.
만춘전
천추전
왕의 어진을 봉안하였던 선원전(미복원). 앞변
원래 지금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는데 1932년 창충공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로 이전 고리(일본식 사찰의 주지 거처 및 창고로 쓰이는 건물)고 활용되다 해방후 화재로 소실된것으로 추정된다.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흥복전(미복원).
흥복전은 주변으로 많은 행각들로 둘러싸여 내면부에 적절한 소임을 주고 각 전에서 배속시키는 본부 역할을 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만나는 편전으로도 활용되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중건을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되고 이곳에 일본식 정원이 조성되었다. 최근에 복원되었다.
향원정 연못 남쪽에 위치한 함화당(현존) 전면. 집경당과나란히 있는데 후궁의 처소로 보인다.
함화당 전면
향원정 남쪽 함화당 동쪽에 있는 집경당(현존) 및 함화당 앞면
남족의 전각들이 창덕궁 화재로 모두 철거되었지만 총독부박물관 사무실 용도로 사용된 덕분에 남아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함화당을 제외하고 주변의 담장과 행각은 모두 철거되었기 때문에 경복궁 1차 복원사업 과정 중에 복원되었다 .
융문당 정면
원래 청와대 자리에 있던 문화재로 1928년 일본 불교종단인 진언종에 무상으로 대여된 후 해체되어 용산 한강로 주변에 위치했던 일본 사찰인 용광사로 옮겨졌고 해방후 원불교 서울교당의 법당으로 스인 용문당은 2007년 전남 영광군에 있는 원불교 영산성지로 이전 복원되었다.
융문당 정면
외국 사신 접대와 궁중 연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 경회루(현존) 정면
태종 때인 1412년 완공되었는데 돌기둥에는 용무의가 새겨져 있어 화려했다고 한다.
1904년 경회루
테종 때 처음 창건되었고 흥선대원군 때 중건되었다. 48개의 화강암 돌기둥 위에 세워진 장려한 건축물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돌기둥에 용이 새겨져 있는 화려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2층 내부에는 높이를 달리하는 3겹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외국사신을 접견하거나 왕과 신료들이 어울리는 연회가 펼쳐졌던 곳이다.
1901년 첵코인 브라즈가 경회루 남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경회루 동쪽면
경회루 2층 내부
경회루 2층 내부 상광연
경회루는 넓이가 300평 정도로 1200명이 모여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경복궁에서 가장 낣으 건물이며 우리나라에서 면적이 가장 큰 누각이다. 48개의 높은 화강석 기둥 위에 떠있는 누각 내부는 3층으로 놓이르 달리한 마루가 깔려 있고 누각 둘레에는 계자난간이 있으며 기둥 사이에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병풍이 되어 북악산, 인왕산의 풍경과 연못,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의 풍경이 빨려 들어 온다.
경회루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경복궁의 모습
이 방향으로 경회루로 3개의 돌다리가 놓여 있으며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밖으로는 함원전, 흠경각, 교태전,강녕전, 사정전을 비롯 그 주위를 둘러 싼 행각들이 모두 제대로 남아있다. 오른쪽에는 근정전이 보인다. 이 일대가 대부분 철거되느 ㄴ1917년 이전에 촬여된 사진으로 보인다.
경회루 다리 너머에서 바라본 사진으로 좌측의 건물은 함원전(복원),오른쪽이 흠경각이다
세종 때는 불당으로 사용되었고 단종이 머물렀던 건물이다. 우측의 건물은 흠경각(1995년 복원)으로서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불시계인 옥루기론이 설치되었던 건물이다. 바로 위의 사진과 달리 경회루 사이에는 담장이 없어져 있어 이후의 사진으로 보인다.
경회루에서 북쪽을 바라본 모습
담장 너머로는 아미산 서쪽에 있던 장방과 원역처소 건물이 보인며 북쪽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다.멀리 북악산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시대 이전 1900년대 초반에 찍은 경회루 연못
연못에는 연잎이 가득한 것으로 계절은초 여름으로 보인다. 머리 보이는 산이 인왕산이다.
경회루 남쪽에 있는 수정전(현존) 보물 제 1760호
수정전 측면
세종때는 집현전이었으며 세조때에는 예문관이었다 궐내각사 영역에서 남은 유일한 건물로 원래는 좌우로 행각이 연결되어 있었다. 정면 10칸에 측면 4칸으로칸수가 경복궁 내에서 가장 많은 건물이다. 감조농민운동 이후 이곳에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갑오개혁을 반포한다
사진의 각도상 관문각 위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바로 아래 보이는 지붕이 건청궁 장안당이며 그 앞에는 향원정이 있다. 향원전으로 가는 다리는 건청궁 쪽인 북쪽에 세워져 있는데 지금의 남족에 잇는 다리는 한국전쟁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그 알으로 희미하게;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이 보이고 그 끝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은 근정전이다.
향원정 전경 보물 제 1761호
건청궁의 앞 정원으로 세워진 행원정(현존) 섬에는 육각정자가 세워져 있어 이곳에서 왕과 왕비가 휴식을 즐겼다.
향원정 전경
<조선고적도보>의 향원정. 아래 사진에는 섬을 두르고 있는 축대가 목책이지만 이 사진에서는 돌로 되어있다
1890년대의 향원정과 향원지 . 연못에는 왕이 사용하는 배가 떠 있고 뒤로는 관문각이 보인다.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1881년 세워져 고종의 서재로 쓰였던 집옥재(현존)
양식이 다른 건물 3개가 복합된 형태를 하고 있는데 가운데 건물은 양 옆으로 벽돌을 쌓고 장식 또한 중국풍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집록재 - 협길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옥재 팔우정
집옥재 뒷면
집옥재 전면 석폐(石陛 : 돌계단)
집옥재 내부
잡옥재 천장(조정)
집옥재 헌(軒 : 처마) 및 두공
집옥재 전랑
집옥재 문 짝 및 난간(欗間)
통풍 및 채광을 위하여 문 혹은 미닫이 위의 상인방(上引枋)과 찬장 사이에 교창(交窓) 따위를 붙여 놓은 부분을 나간이라 한다. 사인방인란 창문 또는 문들으 위쪽을 가로지르는 인방을 일컫는 말로 창이나 문 윗부분 벽의 하중을 받치는 역할을한다.
집옥재 뒷면 창
집옥재 앞을 지나 광임문을 통과하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나온다. 이곳으로 쭉 가면 경복궁의 후원으로 왕이 친히 농사를 짓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새원진 경농재, 과거를 시행한 융문당과 윤무당 등이 있었다. 일제 시대 모두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세우는데 광복 이후에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자금 이 문을 나가면 1990년 신축한 청와대가 바로 보인다.
건청궁(복원)과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의 모습
건청궁은 친정을 선언한 고종이 왕의 판공비인 내탕금으로 지은 건물으로 궁궐 건축과 달리 민가 건축양식으로 지은 것으로 사랑채인 자안당과 안채인 곤녕합 등 여러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887녀 건청궁 앞에우리나라 최초의 전기등이 가설되었다. 뒷 쪽에 보이는 서양식 건물은 1891년 세워진 관문각이다. 양관이라고도 불렀던 이 건물은 고종이 외국 외교관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부실공사로 10년만에 헐린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건청궁 앞에서 촬영한 사진
건청궁은 고종이 개인적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서 만든 것으로 이 앞은 우리나라에서 전기가 처음 들어온 곳이다. 촬영자의 오른쪽에 향원정 연못이 있고 사진의 좌측 큰 문으로 들어가면 건청궁이 나온다. 오른쪽에 보이는 문이 녹산과 통하는 문으로 예전에는 여기에 사슴같은 동물을 풀어 놓아 기르던 곳이다.
첵코인 브라즈가 1901년 신무문 위에서 경복궁 안쪽을 향해 촬영한 사진 좌측에 경복궁 내에 유일한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의 시계탑이 보인다.
우측은 일제시대에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일본인들이 신무문을 배경을 찎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경복궁 동북쪽 부분
지금의 청와대 춘추관 앞 도로이다. 담장 옆 하얀 가리가 춘생문 사건으로 유명한 춘생문 자리이다. 이때에는 문이 없어진 상태지만 원래는 문과 담장이 있어 일반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궁궐의 후원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지금 후원 자리 안에 청와대가 있다.
경복궁 동북쪽 궁장 부분
지금의 삼청동길과 갈려지는 곳에서 좀더 올라가면 나오는 부분으로 청와대로 가는 길이다. 담장안의 숲이 경복궁 녹산이고 계단을 올라가면 춘생문이 있어 경복궁 후원으로 연결된다.
경복궁 쪽 궁장 부분
위의 사진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들어가면 나오는 부분으로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다. 오른 쪽의 조그만 문은 광무문이고, 왼쪽 담장 밑에 보이는 구멍들은 물이 안쪽으로 흘러가는 수문이다.
[출처] 조선시대 서울은 어떻게 생겼을까? Ⅱ- -경복궁|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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