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행 5 -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더 고귀하게 여겼던 손양원 목사의 깊은
신앙심과 끝없는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순교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기념관에는 성화 7점, 사진 액자 98점, 옥중편지 등 8점, 기타유품 5종 100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손양원목사 기념비 및 3부자 묘지, 모교로 목회했던 성산교회가 있어, 매년
전국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순례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손양원목사 생애
1902.6.3 경남 함안 출생,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1939.8.22 여수시 율촌면 애양원교회 부임하여 나환자들을 위해 목회 생활
1940.9.25 일본신사참배 거부로 여수경찰서에 투옥되어 6년간 옥고를 치룸
1945.8.17 출옥후 애양원교회에 귀교하여 애양재활병원 원장으로 취임
1948.9 여순사건 당시 장남, 차남인 두아들(동인, 동신)이 안재선 등 폭도들에게 순교
당하였으나 폭도인 안재선마저 그리스도 사랑으로 양아들을 삼았으며1950.6.25
사변때 모교에서 끝까지 남아 목회를 하다가 1950.9.13 공산군에 투옥되어
9.28일 여수시 미평동에서 순교당함
두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형장에서 살려내 양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
2004년5월26일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손양원 목사 유적지 테마파크 개발
구상으로 6월23일에는 성산교회(애양원)에서 여수시장을 비롯한 다수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유적지 개발계획을 발표하여 총공사비 500여억원규모로 여수시는
2005년3월까지 설계와 발주를 마치고 현재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이 위치한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원에 손양원목사 유적 테마공원 5만m2, 테마전시관 연면적 6천m2
각3동을 짓고, 휴양 문화시설로는 기념 광장 1만m2등 상업시설, 편의시설,등이 들어
섰습니다. 이 사업에 대한 공사비로 민자 138억원을 포함해 486억원이었습니다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던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습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고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습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
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습니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8·15
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간,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습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습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습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입니다.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습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
하였습니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습니다.
한센병환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 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릅니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릅니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합니다.
그당시 쓰시던 오르간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 책, 1937년 발행 관주성경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성구가 첫 장에 써있습니다
손목사님 십일조 내역
손 목사님의 설교노트, 1925년도
옥중서신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에는 이곳에 올려져 있는 사진 이외의 많은 사진들과
손양원목사님의 친필 설교 노트, 옥중편지, 성경 등 많은 유품이 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손양원목사님이 활용하셨던 고서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옥중편지
손양원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실때, 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습니다. 그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습니다. 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날 손양원목사님의 막내아들 유복자 손동길 목사님께서 직접 이곳을 설명하셨습니다.
6. 25 전쟁시 인민군이 율촌에 진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우들은 손양원 목사를 부산으로
피난시키기 위해서 이 앞에 있는 뚝방으로 갔었습니다. 거기 해변가에 배를 준배해 놓고
함께 기도하는 사이에 손양원 목사는 아멘 하는 그 사이에 그곳을 빠져나가 강대상 밑에서
기도하다가 결국 인민군에 체포되어 여수 미평 들역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옷이 손양원목사님의 의복이었는데 워낙 체구가 외소하였다고 합니다.
첫댓글 사랑 ! 사랑 ! 사랑 !.....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의 얼굴을 볼수 없습니다.(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사랑 ! 사랑 ! 사랑 ! ......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 오는데 70년이 걸렸습니다.(김수환 추기경 님)
사랑의 한국말은 하나지만 헬라어(Greece어)에는 사랑의 단어가 여러가지입니다.
1.에로스:남녀간은 사랑
2.필레오: 친구간의 우정(사랑). 그래서 필라델피아는 필레오+아돌피아(친구) 합성어입니다.
3.하나님의 사랑은 무한정 으로 목숨을 인류 위해 버리는 아가페 입니다.
아마도 추기경께서 아가페 사랑을 느끼고 깨달음이 오래걸렸다는 뜻일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