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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 한반도로 대거 이주한 중국인들은 어디에?
[국보의 자취]
중국인들을 스스로를 한족(漢族)이라 말하며 한족 정체성의 출발점인 한나라(BC 206~AD 220)를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1968년 중국 하북성 만성의 유승(劉勝)묘, 1970년 호남성 장사시 교외의 고분에서 한나라 문물이 쏟아지기 전까지 한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유물이 나왔던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이 아닌 한반도였다. 평양 근교 대동군 대동강면을 중심으로 한 낙랑 고분군에서다. 낙랑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한나라 제7대 무제(BC 156~BC 87)가 BC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식민통치기관인 한사군 중 하나이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낙랑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낙랑 직전의 국가인 고조선이 어디에 있었느냐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재야 쪽에서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라는 '사기-태강지리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요서설'을 제시한다. 낙랑의 서쪽 국경에 갈석산이 있다는 것이다. 갈석산은 북경 근처 요서지방에 있는 산이다.
반면 마지막 고조선의 왕조인 위만조선의 수도가 현재 북한의 평양이었고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한 뒤 낙랑이 들어선 곳도 평양 주변이라는 게 주류학계의 보편적 입장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집중적으로 발굴된 평양 일대의 낙랑유적을 증거로 제시한다. 일본 학자들이 주장해온 '낙랑 평양설'을 계승하는 입장이다.
▲ 낙랑시대 점제현 신사비(평안도 용강군 소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곡식이 풍성하고 백성이 모두 편안하기를 신에게 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이 발견했다.
낙랑유적은 평안도와 황해도 일원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일제강점기 조사보고서에서 평양 근교와 황해도에 걸친 낙랑고분은 총1400여 기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발굴조사작업은 동경제국대 조교수 세키노 다다시(1867~1935)가 주도했다.
1909년 10월 고적조사차 평양에 들른 세키노는 대동강 남안인 대동강면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들이 몰려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조수 2명을 데리고 조사해 보니 과연 오래된 무덤이 널려 있었고 그중 2기를 골라 시굴에 들어갔다. 벽돌로 꾸민 무덤방에서는 거울을 비롯해 무기, 토기 등 한나라 시대 유물이 발견됐다.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듬해 가을 또 다른 낙랑고분에서도 많은 발굴품을 찾아냈다. 이어, 1911년 10월 황해도 사리원 근처 조사에서는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과 대방군의 관청터(治址)가 발견된다. 1913년 9월에는 평안도 진남포와 황해도 봉산군의 유적·고분을 파내 한대의 와당, 복식품, 동기, 도기, 칠기, 옥석기, 무기 등 풍부한 부장품을 챙겼다.
1912년 4월 동경제국대학 전시회를 소개한 당시 고고학 잡지는 "세키노 일행이 조선에서 가져온 것으로 종류가 너무도 풍부하여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다"면서 "낙랑시대의 고분지역인 대동강면 상오리 석암동의 한나라 거울, 오주전(五鑄錢·한나라 동전), 시루, 봉산군 미산면 오강동의 사군대방태수장무이(使君帶方太守張撫夷) 명문 묘전, 안학궁지 기와, 강동 한왕묘 유물이 중요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 국보 제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일명 낙랑 금제 띠고리).
섬세한 순금 세공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한대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 발견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키노는 탁지부 차관인 아라이 겐타로(荒井賢太郞·1863~1938)의 지원을 받아 정식 발굴대를 구성하고 평양 근교의 낙랑고분 10기를 발굴한다. 여기서 막대한 양의 부장품과 함께 예상치도 못한 대수확을 건진다. 대수확은 제9호 고분에서 수습된 금제 띠고리(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를 말한다. 띠고리는 버클이다.
1962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던 유물 116점을 한꺼번에 국보로 등재하면서 국보 제89호에 지정됐다. 섬세한 순금 세공에 비취를 박은 교구는 한대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발견이라는 찬사가 쇄도했다. 길이 9.4㎝, 너비 6.4㎝이며, 금실과 금 알갱이로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여섯 마리를 만들었다. 용과 용 사이에는 꽃잎 모양의 윤곽을 만들고 그 속에 비취옥을 끼워 넣었는데 현재 7개만이 남아 있다. 금실을 이용해 장식하는 누금(鏤金)세공의 수법이 매우 뛰어나며, 용 7마리의 배치도 율동적으로 표현됐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낙랑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는 엉뚱한 소문이 퍼진다. 낙랑고분이 '지하의 정창원(일본 동양미술품 보고)'으로 불리면서 1920대 초중반 불법 도굴업자들이 난무하는 최악의 '대난굴 시대'가 전개된다. 오죽했으면 평양시민으로서 낙랑 거울과 낙랑 토기항아리 한 개쯤 없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낙랑고분 조사보고서도 "1400기의 고분 중에서 도굴을 면한 것은 겨우 140기뿐"이라고 기술한다.
재야 쪽에서는 한반도 서북부에서 쏟아져 나온 한대 유물, 즉 낙랑의 유물을 부정한다. 세키노 다다시가 한대의 도굴품 등을 중국에서 들여와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두 점이면 몰라도 유물은 추정이 힘들 만큼 엄청난 양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된 출토품의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도 수장고에 수많은 낙랑유물을 보관 중이며 그 가운데 대외에 공개하고 있는 것만 3000점이 훨씬 넘는다. 특히나 낙랑출토품 중에는 광복 이후의 것들도 적지 않다.
낙랑에 평양에 있었듯, 고조선도 평양에 있었을까. 고조선의 중심지를 놓고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는 설, 요하 유역에 있었다는 설, 처음에는 요하 유역에 있었다가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침입을 받고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 대립된다.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과 역사서 관자, 전국책, 위략 등에서 고조선을 소략 언급하지만 부정확하며 후대에 고쳐진 흔적도 발견된다. 기자가 동래해 고조선을 세웠고 고조선이 주왕실을 받들었다는 식의 이들 사서 기록은 한나라 초 이후 윤색된 것들로 학계에서는 본다.
▲ 낙랑예관명 수막새.
낙랑시대 기와로 당시 낙랑군에 예관이라는 관직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도드라진 글자, 구름 무늬 등 무늬의 형태나 제작기법이 모두 중국 내륙의 것과 동일하다.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고고학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비파형 청동검을 살펴보면 고조선의 영역을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은 물론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 다양한 동이계 부족들의 산물이다. 길림 장춘에서 한반도 남단, 서로는 북경까지 장대한 지역에서 출토된다. 국내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경식(短莖式·자루 부분이 짧은 검)은 요하 동쪽에서 주로 발굴되며 특히 요녕성 지역에 집중된다. 학계에서는 이 단경식을 고조선 것으로 평가한다. 요녕성 신금현 쌍방(雙房)과 요양의 이도하자(二道河子)에서 발견된 동검은 기원전 12세기 무렵의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통해 기원전 1100년 고조선은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요하를 그 중심지로 단정하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단경식 청동검은 세형 동검으로 변해가는데 이는 후기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로 평가된다. 기원전 3세기 고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연나라 소왕(BC 311~BC 270)이 조선의 서방을 공격해 2000리 땅을 빼앗았다고 중국 측 사서는 서술한다. 이 시기 고조선의 지표유물인 세형 동검 출토지의 북방한계선은 서(西)북한 지역이다. 따라서 기원전 4세기까지는 고조선이 요동을 장악하고 있었던 게 확실하며 이후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영토가 크게 축소되고 곧이어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강탈당했다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침공을 받고 역사에서 사라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낙랑유물이 다량 발견된 것에 대한 해답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세키노 등이 한반도 고대사를 조작하려고 시도했으면 오히려 일본서기에 기술된 임나일본부설(야마토 왜가 서기 400년 후반부터 2세기간 한반도 남부에 관청을 두고 다스렸다는 가공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부의 가야 유물을 위조하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데는 문헌 이상으로 고고학의 중요성이 높다.
한대 고분이 평안도와 황해도에 폭넓게 조성된 것으로 미뤄 한나라의 대대적인 사민(徙民)정책에 따라 2000여 년 전 다수의 중국인들이 한반도 서부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한나라가 자신의 백성을 집중적으로 옮겨 살게 할 만큼 역사적으로 고조선이 그들을 괴롭혀온 강대국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낙랑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중국화하기는커녕 우리 땅에서 우리 조상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민족의 일원이 됐다. /배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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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성씨(歸化姓氏)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절반가량은 귀화성이다. 한국의 외래 성씨를 크게 나누면 중국계, 몽고계, 여진계, 위구르계, 아랍계, 베트남계, 일본계의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요즘에는 동남아나 서양에서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대부분이 중국에서 건너왔다. 그러나 연안인(印)씨와 대구빈(彬)씨는 몽고(蒙古)에서, 청해이(李)씨는 여진(女眞)에서, 덕수장(張)씨와 경주설(卨)씨는 회족(回族)인 위구르에서 왔다. 화산이(李)씨와 정선이(李)씨는 월남(越南)에서 왔으며, 우록김(金)씨는 일본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귀화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엽이다. 그때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송(宋)나라 사람을 비롯하여 여진(女眞), 거란(契丹), 안남(安南 : 베트남), 몽고(蒙古), 위구르, 아랍 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명(明)나라와 일본인(日本人) 등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귀화하였다.
이들이 한국에 귀화하게 된 동기는 대체로 정치적 망명, 표류, 종교, 투항, 구원, 상업, 피란, 정략결혼,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 등이다. 귀화인들은 대개 당시의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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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중국이나 북방 지역에 전쟁이나 대홍수, 가뭄 등의 재해가 있을 때마다 해당 지역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실제로 중국의 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시대, 당나라가 몰락할 때, 발해가 멸망할 때, 송나라가 멸망할 때, 임진왜란과 명. 청 교체기에 대규모 귀화가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적극적인 귀화 정책을 폈던 고려의 경우, 귀화인에 대해 집이나 논밭, 물품 등을 증여하는 등 귀화인을 적극 수용하였다. 고려의 국력을 키우는데 도움을 받고, 필요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부족한 인력을 받아들여 국방력을 키우거나 농업 인력을 늘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귀화인 우대 정책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이는 여진족에 대한 포섭과 격려, 결혼 정책, 강제 이주, 인질 등으로 주로 북방 경계를 지켜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귀화인들을 통해 북방의 정보를 얻고 여진과 적당한 교섭, 통상을 계속했다. 유사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방비책으로 귀화인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현재 국내 성씨의 46%는 귀화 성씨이다. 전체 인구의 30%에서 절반까지가 귀화인들의 후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인도, 유구(오키나와), 베트남, 몽골, 여진, 위구르, 거란, 흉노, 발해 유민, 네덜란드, 등 실로 많은 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와 '한국인'이 된 것이다.
오히려 '귀화인'이라 불린 새로운 집단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었다. 우리 땅의 역사를 새로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었다. 이들은 중원(中原)의 승자(勝者)가 바뀔 때마다, 전란과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난을 피해 한반도로 들어왔다. 사실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집계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들은 수천 년에 걸쳐 한반도에 이주해 온 귀화인들이다.
귀화(歸化)란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을 말한다. 동양의 왕조 국가에서는 형식상 왕의 어진 정치에 감화되어 그 백성이 된다는 뜻이었고, 향화(向化) 또는 왕화(王化)로도 나타낸다. 반면 적국의 국민 또는 적대적인 인물이 귀화하는 일은 귀순(歸順)이라고 한다.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발표를 보면 귀화 성씨가 폭증하고 있다. 2000년에는 전체 성씨 728개 중 귀화 성씨가 442개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주민등록상 전체 성씨가 5582개에 이른다. '한자가 없는'성씨만 4074개에 달한다.
일단 '한자 없는 성씨'의 절대수가 귀화인일 가능성이 짙다. 가또.가루시아.짠투이.코비.와비린.마치.레지나.즈엉.리샤.오안.핏 등은 분명한 귀화인의 성씨다. 귀화인이 한자 성과 본적을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국광광공사 사장을 지낸 이참(베른하르트 크반트)은 독일 이씨, 국제변호사인 하일(로버트 할리)은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됐다.
태국 태씨. 몽골 김씨. 대마도 윤씨. 길림 사씨 등도 있다. 서촌(西村). 석원(石原). 신곡(新谷) 등 일본 성씨를 그대로 등록하는 경우도 있다. 해마다 귀화인의 창성창본(創姓創本) 신청 건수가 7000건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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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성씨 歸化姓氏
2003년 일본국립유전자협회가 발표한 한국인의 DNA 분석 결과는 흥미롭다. 한국인 고유의 DNA 타입은 40.6%에 그쳤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중국인(21.9%)·오키나와인(17.4%)·아이누인(1.6%)의 DNA 타입을 지녔다. 한국인에게 주로 중국인과 일본 오키나와 및 아이누인의 피가 섞였다는 얘기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불분명한 DNA 타입’도 18.5%에 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피가 한국인에게 흐른다는 뜻이다.
신주처럼 신봉해왔던 ‘단일민족’이 허상임은 이미 입증된 바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277개 성씨 가운데 절반쯤인 130여개 성씨가 귀화 성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기야 중국에서 전쟁 같은 격변이 일어나면 갈 데가 어디 있겠는가. 중국 외에도 멀리는 네덜란드(박연), 베트남(이용상), 인도(허황옥)에서 가깝게는 여진(이지란), 일본(김충선)에서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발표를 보면 귀화 성씨의 폭증세가 놀랍다. 2000년에는 전체 성씨 728개 중 귀화 성씨가 442개로 파악됐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지금 주민등록상 전체 성씨가 5582개에 이르고, 그중 ‘한자가 없는’ 성씨만 4074개에 달했다. 물론 귀화 성씨가 몇 개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한자 없는 성씨’의 절대다수가 귀화인일 가능성이 짙다. 새롭게 등록된 가또, 가루시아, 짠투이, 코비, 와비린, 마치, 레지나, 즈엉, 리샤, 오안, 핏 등은 분명한 귀화인의 성씨다. 귀화인이 한자 성과 본적을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낸 이참(베른하르트 크반트)은 독일 이씨, 국제변호사인 하일(로버트 할리)은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됐다. 이 밖에도 태국 태씨, 몽골 김씨, 대마도 윤씨, 길림 사씨 등도 있다. 아예 서촌(西村), 석원(石原), 신곡(新谷) 같은 일본 성씨를 그대로 등록하는 경우도 있다.
해마다 귀화인의 창성창본(創姓創本) 신청 건수가 7000건을 넘는다. 귀화인 스스로 시조가 되는 ‘본(本)과 성(姓)’이 기하급수로 는다는 얘기다. 중국(2600개)을 넘어 일본(10만개)을 추격할 판인가. 단일민족이란 말을 폐기 해야 할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