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코리안을 통한 일본선교의 가능성
들어가는 말 : 재일증후군(syndrome)
전화벨 소리가 나서 들어보니 재일코리안 2세인 집사로부터의 전화였다. 일본 최고 학부인 국립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까지 받고 젊은 나이에 연세대학교수까지 역임한 경험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그동안 자만심과 교만된 마음으로 술을 너무 즐기다가 그만 그 술에 빠져 알콜의존증 환자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고백을 하였다. 아내가 뇌졸증으로 입원을 하고 자기는 다년간 알콜의존증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또 술을 마신 후에 옆에 식칼을 놓고 지금 당장 자살 할 양인듯이 전화를 통해 울먹이면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밤1시든 2시든 상관없이 술을 마시면 고민 끝에 내게 전화를 하곤 했다. 때로는 나도 지쳐서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도록 권면을 하였다. 그러나 병원의 원장 앞에서는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로 그럴듯이 말해 곧 퇴원을 허락 받아 정상으로 회복이 된듯이 보였다. 그러나 얼마를 지나면 식사도 하지 않고 또 술을 계속 마시고 마는 결과를 보아 왔었다. 나는 하나님 그가 자살하는 일이 없도록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를 드렸다.
여기서 재일코리안의 한 인생의 단면을 보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갈등과 현상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소수자라는 입장과 역사적 전통에서 재일코리안은 특이하다고 간주된다. 상황과 그 다양성은 일본에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거주하는 올드커머(old Comer)와 전후 이주자인 뉴커머(NewComer)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올드커머 중에서도, 그 문화적 배경과 입장에 의해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된다. 올드커머로서의 재일 코리안 1세는 세월의 경과와 함께 점점 줄어들고, 현재는 그 후손인 2세, 3세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재일코리안 1세는 문화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한국/조선(북한)에 가깝지만, 2세, 3세는 일본에서 출생하여 일본에서 성장하였기에 구조적인 동화는 안되었지만 문화적인 동화의 면에서 즉 생활습관과 정서는 일본에 가깝다.
또 하나는 귀화해 일본국적을 취득한 자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한국/조선계 일본인이라고 불리는 그룹으로 근래에 급증하고 있다(매년1만명). 또한, 최근에는 국제 결혼이 급증하여 그 자녀그룹(이른바 더블)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는 상태이다. 최근에는 뉴커머(New Comer)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대표로 유학 생활을 거쳐 일본에 정착한 자들과 결혼으로 인한 한국인 여성들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이렇게 재일코리안은 일본사회에서 그 아이덴티티 성립이 상당히 특수한 과정을 거쳤다. 그들의 아이덴티티는 이하의 3부류로 들 수 있다.
제1부류는 과잉 적응하려는 부류이다. 유형,무형의 압력에 의해 과잉 적응한 결과 한국/조선적인 것(의식주를 비롯해 그것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은폐하고 일본적인 것을 취하고 그것에 동일화된다. 일본식이름(통명)을 말하고 일본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한국/조선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심각한 갈등과 열등감이 생겨난다. 괴로운 나머지 부모에게 왜 재일코리안으로 태어나게 했냐며 반항하기도 하는 모습도 드물지는 않다.
다음 제2의 부류인 반동의 부류가 있다. 이는 과잉 적응의 반동으로 자기회복 (자아발견)을 꾀하려는 성향을 나타낸다. 극단적으로 반일적이 되어 민족의식에 눈을 뜬다. 재일코리안의 모임에 참가하며 민족명을 말하고 민족의 문화, 역사, 언어, 습관을 익히기에 노력한다. 일본인이 아닌 코리안으로서의 자기를 의식하고 과잉적응에 의한 갈등을 극복하려고 한다.
다음 제3의 부류는 통합의 부류이다. 민족적인 자각만으로는 반일적 태도로는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부류이다. 스스로 재일 코리안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면서 일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입장에 서서, 일본 사회와의 공생을 지향한다. 이 경우에는 양국의 중간 역할에 기여하려 한다.
이상의 3가지 부류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제1부류, 제2부류이다. 이들 시기의 갈등은 인생의 사춘기에서 청년기에 해당되며 심각한 체험이 이뤄진다. 이것은 심각한 아이덴티티 위기를 초래하기 때문에 인격 형성에 일그러진 영향을 끼치는 일이 많다. 아이덴티티 위기의 영향으로, 재일코리안의 정신장해에는 몇개의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병원이나 시설에서 소위 치료 곤란의 경우가 많다. 인격장해, 성격신경증, 알콜의존증 등의 진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불면,불안,초조,우울증등의 정신 증상이 나타나 입원하는 이도 적지 않다. 병원에서는 규칙 불이행, 방자함등의 이유로 강제퇴원을 당하기도하고 병원 진료를 받은 후, 리허빌리를 겸하여 받기도 한다. 유소년기에 왕따(이지메)를 당한 체험과 더불어 결손 가정에서 자란 Adult Children의 경향도 주목된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1)주위에만 신경을 쓰기때문에 자신의 욕구나 요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2)상대방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자기 주장을 못한다. (3)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4)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이 없고 막연한 불안감, 공허감을 느끼며 자기를 부정하는 감정이 강하다.Adult Children은 대인관계에서도 심각한 삶의 문제를 끌어 안고 있다. 재일 코리안은 Adult Children적 심성을 지닐 확률이 높다고 평가된다.
(1)어린시절에 반복된 왕따(이지메) 체험, (2)결손가정에서의 성장, (3)민족적 패배 이미지의 내면화, (4)사회적 인간관계면에서의 어떠한 삶의 어려움이나 굴절된 감정을 실감. 이것들의 요인을 안고있는 상황을 재일 증후군(syndrome)이라 부를 수 있다.
1.재일코리안과 재일대한기독교회
1-1. 재일코리안의 상황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1923년9월1일에 발발한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과연 얼마나 많은 재일코리안들이 학살당하고 유족들로부터 소식이 끊긴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가? 그리고 전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권의 차원에서 차별을 받은 재일코리안의 존재를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조국 땅에 가서 살 수도 없는 상태의 주변인(Marginal)이라고 불리는 재일코리안들은 일본사회에서 동화를 강요당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본에 재류하는 외국인의 역사적 경위를 갖는 재일코리안의 비율이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차별과 배외성은 아무런 변화가 없고 공생의 테마가 아닌 관리의 테마로, 주민과 시민의 관점이 아닌 값싼 일회용 노동력의 관점으로 일본 정부는 재일외국인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 다문화 다민족의 공생사회를 제안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치는 재일 외국인을 일본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떠한 권리 보장을 하여 왔는가를 통하여 개방성과 성숙도를 확인하는 명확한 시금석이 된다.
우리는 전쟁을 막고 평화에의 희망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평화와 안전에 관해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경우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소수자로서의 상징적인 재일 코리안의 존재를 어떻게 둘 것인가가 중요한 시점이 되리라고 본다. 기류민의 인권 인격권, 생활권 보장의 테마는 기류민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지역 전체의 시금석도 된다.
2002년 9월 17일 조일정상회담에서 밝혀진 납치문제는 확실히 일본사회를 크게 뒤흔든 것이었다. 납치문제 보도는 당초 북일회담의 테마였던 아시아 평화 에의 공헌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을 뿐 만아니라 일본의 과거 침략에 대한 반성, 사죄와 배상에 대한 일편의 자기 심문도 없는 사실은 놀라움의 경지를 넘어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명과 해결을 요구하는 감각이 있다면 그와같은 감성과 정의감을 가지고,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며,사죄와 국가에 의한 피해자 배상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당치않은 일이지만 재일 조선인학교의 어린이들이 9월 17일 이후, 악질적이고 저질스런 놀림과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일본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배외주의가 드러난 듯한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이며 전체주의적, 폭력적인 배외주의는 전시중에 그 침략 전쟁을 가능케 한 본질이며 또한 멘탈리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재일 코리안으로 그 아픔과 고뇌를 또다시 받게하니 일본사회의 변함없는 배타적 체질을 역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납치소동과 연쇄하여 재일코리안의 어린이들에게 가해지는 협박과 박해 행위는 파트너로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떨어진 사회인 것을 드러냈다.
1-2.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특징
첫번째로 초교파성 즉 에큐메니칼적이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의 합동 (Uniting)을 이룬 교회로서 형성되어 왔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장/감/성 연합의 교회로 전도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동안 타교파와의 선교 협력과 협약을 체결하는 일로 여러가지 신앙 스타일이 교회 안에서 초교파성을 지니면서 하나가 되어왔다.
이어 두번째로 소수성(minority)을 들 수 있다. 재일로서의 존재와 피차별의 체험으로부터 오는, 인권·인간 존엄에의 대처이다. 이것이 아픔을 안고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다양성(diversity)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제2차 세계대전시에 강제로 일본에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온1세와 그 후손인 재일2세부터 5세까지 있는 재일의 세대와, 최근에 도일한 소위 신1세, 그리고 일본국적을 지닌 자와 재일코리안 국적을 지닌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더블, 한국에서 건너와 일본인과 국제 결혼하여 사는 분, 한국인이나 한국에 흥미를 가진 순수한 일본인 등 다양한 구성원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에 따른 사용 언어의 이중성, 아이덴티티의 문제등이 있지만 그것들을 풍부함으로서의 다양성으로 일본선교의 원동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본다.
1-3. 새노래로 주를 찬양하는 청년들
재일대한기독교회는 현재 출석 세례교인수 7천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96년의 역사를 지닌 소수자(Minority)공동체의 교단이다.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 통치 역사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국적의 일본군으로 전쟁터에 끌려가 피흘려 죽어간 선배들의 역사가 서려있다. 1945년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의 투하로 인해 무조건 항복을 하였던 일본은 1947년에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기 전일에 최후의 천황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했다. 1952년에는 외국인등록법과 출입국 관리령에 의해서 재일코리안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시대에는 일본인으로 취급하고 이름도 언어도 빼앗던 일본이 차별과 편견의 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와 지문의 압날을 강요하여 왔다.
이에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는 1980년대부터 지문압날의 철폐 운동을 양심있는 교회와 세계 교회와 연대하여 전개해왔다. 그러한 운동의 결과 일본에서 지문압날 제도가 폐지되었던 2000년4월1일에 뜻을 같이했던 형제 자매들은 주를 향해 찬양의 새 노래를 불렀었다.
일본에 있는 재일코리안들은 성서를 읽을 때에 처해진 상황에서 특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성경의 구절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특히 출애굽기12장 이하에 나타난 유월절의 장면과 출애굽기14장의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른 찬양의 소리를 연상해본다.
이어 한 여인의 고통을 그린 사무엘상1장에 나타난 한나의 설움과 아픔 속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으로 사무엘의 탄생과 그 기쁨의 찬미 소리가 이땅에서도 들리는듯 하기도하다.
최근에는 많은 기독교단체와 협력하여 외국인주민기본법 제정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법이 일본 땅에서 제정됨으로 외국인이 살기좋은 일본은 일본인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는 희망을 안고 있다. 희망을 가지고 언제인가 외국인주민 기본법이 제정되는 그 때에 우리는 또 다른 새 노래로 주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 하리라 믿는다. 작년 말에는 도쿄교회를 중심으로 한 재일대한기독교회에 소속된 유학생들과 일본에서 태어난 2세, 3세의 청년들이 마하나임이란 찬양 팀을 조직했다. 습관및 언어 문화가 다른 배경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찬송을 연습하며 좋은 교제를 나누며 청년전도대회및 찬양집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재일대한기독 교회의 새로운 비젼을 볼 수 있었다.
2. 재일대한기독교회의 교육적인 과제
재일대한기독교회는 2008년이면 일본땅에서의 선교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재일대한기독교회의 교육은 단지 성서의 지식을 교육하는 것만이 아니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관계의 교육신학을 제안하는 교육을 모색하고 있다. 교회는 어떻게 지역 주민들과 연대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함께 공생의 텍스트를 구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역사와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 나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2-1. 참된 지혜를 지닐 수 있는 교육
학생들이 즐기는 만화나 게임 센터의 장난감들 내용이 마음에 걸린다. 격투기로 서로가 상대를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거나 죽이는 장면들이 너무나 많다. 부모로서 어린아이들이 생명의 귀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오사카시의 공원에서 작년에 홈레스인 노숙자 4명이 소년들에게 습격을 받아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소년들은 홈레스인 노숙자와의 사이에 말싸움이 있어서 습격했다는 진술을 하였다. 공원 내의 휴게소에서 자고 있던 남성4명을 쇠파이프로 때려, 노숙자인 남성(59세)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1개월의 중상을, 그리고 다른 3명에게도 머리나 팔에 부상을 입힌 혐의이다.
나는 이 사건과 동시에 게임룸 장난감의 버튼을 리세트하면 몇번이고 등장 인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 게임기 안에 있는 허구의 생명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연상하게 되었다. 이런 아이들에게 생명의 귀중함과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을 어떻게 하면 실감나게 전할 수 있을까? 먼저 생명이 있는 것과의 만남이다. 토끼등의 애완 동물을 기르는 일이나 식물을 재배하는 일 혹은 자연 속에서의 활동에 참가하는 일을 통해서 직접 여러가지의 생명체와의 접촉을 통하여 체온의 따뜻함을 느끼는 일도 중요하다고 본다.
때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엄숙한 장례식 죽음의 자리에 입회하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실감을 하는 기회가 된다. 또 보육원이나 양로원의 자원봉사에 참가함을 통해 성장과 삶의 중요성을 체험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하여 더욱 깊이 그리고 좀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기회를 어린아이에게 지닐 수 있게 하는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최근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을「정보화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정보와 지식의 무지혜화」와 지식이 악의 단순한 도구로 전락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증가하는 정보지식과 감소하는 지혜의 문제이다. 지식이란 총체적으로 조직하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요구하여 얻는 판단의 체계이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적절한 처리를 하는 능력이다. 지혜에 관한 구약의 유명한 인물중에 솔로몬 왕이「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구한 기도는 구약성서 열왕기상 3장 9절 에 나온다. 이 분별력을 지혜라 말할 수 있다. (discerning heart , understanding mind)
지금은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동시에 편리함을 만끽하지만 공백 상태 속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할 위험도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여기 교육에 있어서「모범」이 되는 운동의 확산이 오늘날 이 세상을 올바른 방향 즉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전환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미래의 비젼으로서의 교육은「신중심의 세계관 교육」이다.(사45:5-7) 과학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역사적인 사고에 있어서 번져가는 영향을 생각하며 지금이야말로 신중심(Godcentric)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교육을 해나갈 때이다. 이는 바로「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비젼을 안겨주는 교육이다.
2-2. 전자시대의 어린아이들
6월초에 충격적인 초등학생의 살인사건이 일본에서 일어났다. 아직 11살인 6학년 여자 아이가 동급생인 여학생을 커터 나이프로 목을 베어 사망케 하였다. 초등학생이 학교의 교실에서 일으킨 비참한 사건으로 사회 전체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친구들과 같이 지내고 있던 여학생의 생명이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사라져 함께 공부하던 동급생들이 받은 충격은 헤아릴 수가 없다. 점심 급식의 준비가 갖추어져 담임선생은 두 명의 학생이 자리에 없어 찾고 있던 참에 잠시 후 여학생 1명만 피투성이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사건은 낮의 급식 시간에 교실과는 다른 학습 룸에서 일어났다. 가해자는 피해 자인 동급생을 의자에 앉게한 후에 뒤에서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커터 나이프 로 목을 베었다고 한다. 칼날은 사용법을 잘못하면 상처 입혀 생명과 관계된다는 것을 아이들 에게 재차 가르칠 필요가 있다. 상대를 상처 입히면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를 제대로 알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통감한다.
동급생인 둘 사이는 컴퓨터의 채팅으로 친한 관계였는데 사소한 악평의 메일이 살인사건의 발단이었다. 지금까지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이번 사건의 원인을 알아보니 4월경부터 피해자등 3명의 초등학생이 인터넷의 게시판으로 메일 교환인 채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5 월 중순이 지날 무렵부터 메일 교환의 채팅에서 자기에 대한 악담을 읽고나서 불쾌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불쾌한 감정을 누군가에게 상담하지 않고 혼자서 고민하다가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살해했다는 것이다. 가해자인 여학생은 14세 미만이기에 형사법의 죄로 추궁당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현대 사회에 컴퓨터가 가져온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컴퓨터상의 채팅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 대화나 목소리를 듣는 전화와는 다른 기능이 있다. 면담이나 전화로 말하기 어려운 내용을 편지로 전하는 문화가 점차 퇴색되는 사회변동의 문제가 있다. 편지로 인한 무언의 커뮤니케이션은 육성이 가지는 힘이나 난폭함을 완화시켜 주는 면을 볼 수 있다. 상대방에게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도 감정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다.
반면 컴퓨터에 의한 채팅이라는 대화는 소위 즉석 배달하는 편지의 연속이다. 대담한 내용도 문자로라면 쓸 수 있다고 하는 편지의 특성이 배달의 시간이 사라지는 상태로 노출된다. 면담이나 전화 이상의 힘이 숨겨져 있음을 인식하며 그 대책을 세워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젼이나 컴퓨터 게임이라고 하는 하나의 미디어에만 빠져 있는 것을 막으려면 여러가지 즐거움을 체험하도록 어린이 문화의 형성으로 아이들을 위한 연극회나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즐기는 놀이나 야외에서 자연을 즐기는 게임 등 폭넓은 활동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가족 공통의 체험으로서 마음 속에 남게되어 각각의 가정에서 길게 화제로 되어 갈 수 있다.
3. 일본선교의 가능성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이었음이니라(출애굽기22:21)
3-1. 이방 땅의 나그네들
4년전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일본인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미야가와 라는 목사님의 초대를 받아 가족과 함께 뉴라이프쳐어치라는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오오사카에서 태어난 아내와 딸과 아들 우리 4명의 가족은 함께 그곳을 방문하여 좋은 경험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는 일본인 교회도 고령화 사회가 되어 2세나 3세의 젊은이들은 모두 영어부예배에 참석을 하는 형편이었다. 일어부예배는 고작 20여 명인데 영어부 예배는 200여명의 인원이 모여 같은 시간에 예배를 나누어 옆에 있는 다른 넓은 챠펠에서 드리고 있었다. 옆에서 드럼 키타의 찬양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일본어예배에 임하게 되었다. 처음의 인상으로 그들은 우리가 코리안이기는 하나 일본에서 왔으니 따뜻하게 환영을 해주는가보다라고 생각했었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분들이 참으로 반갑게 우리들을 맞이하여 주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일본에서 온 자기들의 친척을 대해주듯이 우리를 맞이하여 준 것이다. 사실 언어 면에서는 일본 출생인 아내와 아이들의 쓰는 일본어는 100퍼센트 일본인과 다를 바가 없는 완벽한 일본어라는 점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들 가족을 환영해 준 다른 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도 이방 땅의 나그네 삶 속에 같은 아픔을 겪어왔구나 하는 점이었다. 그분들 중에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 생활을 했었고 심한 차별을 받아왔다는 것을 대화 속에서 알게 되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어릴 적에 자기의 부모가 배려해 주어서 일본으로 귀국하여 일본의 중학교에 다닐 때 당했던 이지메(왕따)의 경험도 말해 주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래도 부모는 모국이라고 일본에 보내 주었건만 학교의 학생들이 미국인 티가 난다고 매우 놀려대며 심한 차별을 일본에서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체험담은 재일코리안의 모습과 흡사한 데가 많다고 말했다. 그분들도 일본에 사는 재일코리안은 우리들과 같은 처지라고 하면서 마치 같은 동포를 만났다는듯이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코리안 /일본인 이라는 감각을 잊은 채 외국의 이방 땅에 사는 나그네로서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나누는 간증의 시간을 식사 시간에도 공유할 수가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결코 하나로 클로오즈업이 될 수 없는 듯한 두개의 국적이 미국 땅의 이방 나그네로서 만나게 될 때 국적의 벽이 없어 지고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이야기 가운데 두분의 노인이 같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시에 우리들은 서로 적으로 싸웠답니다 라는 말을 해 주었다. 한 분은 일본군으로 한 분은 미국 군인 으로 전투했던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교회에서 주님을 믿으면서 즐거운 신앙생활을 나누는 친구라면서 말을 해 주는 것도 인상 깊은 일이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 가운데 여호와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람들이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언어 소통이 안되는 인간이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로 그 말이 다르고 국적이 다른데도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다양화되면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고마는 코리안들로 보이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열쇠는 역시 성서 가운데 숨기워 있다고 본다.
3-2. 야생 원숭이의 마음을 누가 알랴
아사히신문에 나온 기사 중에 “사람이 주는 먹이로 낚을 수없는 원숭이의 마음”이란 글을 읽으면서 몇해전에 오오사카에 있는 공원에 유학생들과 야외 예배를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교오또에 있는 입명관대학에 유학온 학생 부부의 어린아이가 과자봉지를 들고 공원에서 놀다가 갑자기 달려온 야생 원숭이에게 과자봉지를 빼앗겨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리며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원래 원숭이는 나무 열매를 채취하여 먹고 사는 동물인데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살다보니 나무열매를 채취해먹는 노동보다는 던져주는 먹이에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즉 일할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그러한 원숭이가 새끼를 낳고 또 자라서 그 다음의 새끼를 낳다보면 손자원숭이 대에서는 일하여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보다 자기보다 연약하게 생각되는 여자나 아이의 먹을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먹이를 빼앗는 강도원숭이가 되고만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먹이를 던져달라고 보채고 요구하는 거지원숭이로 전락해서 일생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거지원숭이나 강도원숭이에게 있어서는 먹이를 주지 않는 인간이 나쁘다고 보기에 훔치거나 빼앗는 행동을 하게 된다. 지금 일본의 산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다.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와는 달리 야생동물은 눈앞에 보이는 먹이를 먹어도 좋은지 나쁜지를 분별하지 못해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음식물 찌꺼기나 먹이를 야생동물들이 먹게 됨으로 점점 더 먹이를 구하려는 본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에게는 먹이를 공급하지않고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파괴되어 가는 야생동물의 생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보지 않을수 없다.
경제회복의 대명제를 등에 업고서 예외없는 규제 완화를 통한 시장원리의 관철이라는 일련의 조류는 오늘날의 사회, 경제의 모든 것을 휘감아 크나큰 소용 돌이를 일으키며 진행되고 있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도 예외없이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위급한 사태가운데 이르게 되었다.이러한 정황가운데서 교회는 교육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나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사랑이요 자비의 마음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인데 오늘날의 상황은 사람들로부터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소멸시켜 나가고 있다. 그대신 탈취해도 된다는 정신구조가 일반화된 사회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취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려도 된다는 마음을 은연중에 심어놓은 사회구조로 인하여 이런 어른들의 심적상태를 보고 자란 어린아이들도 이윽고 어른이 되면 같은 맥락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교육시키고 있다. 이렇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요구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하게 상실된 상황으로 변질되어감을 우려한다.
나가는 말 : 종말의 날에 나타난 하나님의 후한 처사
나는 성탄절과 아울러 연말을 맞이할 때에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역사의 종말, 인생의 종말을 연상하곤 한다. 그런데 종말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 개개인의 문제에 비춰볼 때에는 불안과 두려움도 엄습해 오곤 한다. 그것은 죽음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 속에서 저질렀던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태복음20장1절~16절에 나타난 천국의 비유인 <포도원의 노동자> 비유 말씀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다루어 주시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포도를 수확하는 계절을 맞이하여 포도원의 주인은 품군을 얻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섰다. 질 좋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는 포도송이가 충분히 익어야 하나 동시에 너무 익기 전에 따야만 한다. 포도 수확은 일각의 유예도 있어선 안된다. 그러기에 많은 품군이 필요한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몇번이고 장터에 가서 품군을 고용한다. 여기서 예수의 시대에도 실업자가 있었고 노동자는 생활을 위해서 임금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녁이 다되어 해가 기울어지는 오후5시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섰는지라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섰느뇨>라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한 이들이 노인이었는지 병들어 있는 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보기에 품군으로 쓰기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듯한 사람들이었던 것같다. 그러나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해 주었다.
여기서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노동의 생산성보다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다. 그런데 해가 저물매 품군을 불러 품삯을 마지막에 들어온 자부터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그 때 노동을 했던 모두의 눈이 주인의 손에 집중이 되었다. 아니! 마지막에 들어와 겨우 한시간만 일한 품군에게 하루치의 임금인 1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이 아닌가! 주변의 품군들 사이에 흥분된 분위기가 나돌았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들어와 땀흘려 고생하며 일한 품군들의 마음 속에 당연히 자기들은 몇배 더많은 품삯을 받을 수가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나누어 준 것은 오직 1데나리온 뿐이었다. 그들은 흥분하여 심히 노하며 주인을 원망하며 불평을 터뜨렸다. <마지막에 들어온 자들은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소이다. 뜨거운 태양 빛 아래서 땀흘려 고생하며 일을 하루종일 한 우리에게 저들과 같은 대우를 한단말이오> 그것은 열심히 일한 자를 희생시키는 일이요 게으른 자들을 우대하는 주인의 변덕스런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한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1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내가 다른 연약한 자에게 후하게 줌으로 네가 질투하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능률화, 조직화, 합리화, 효율화라고 하는 목표 지향의 현대 산업 구조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을 읽을 수 있다.
포도원 집주인이 되는 하나님이 약속한 하루의 품삯인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공의 즉 예수님 그 자신이었다. 아무런 일도 못한 무익한 자라고 여겨지는 자에게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아무런 공로도 없이 무익한 종과 같이 생각되는 자를 죄인인 그대로 그리스도의 속죄,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후한 처사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 예수는 우리들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을 계시해 주셨다. 역사의 종말에 나타나는 그것은 <하나님의 후한 처사>이다.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