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 암살; James Hausman and Robert Brew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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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it against the CIA re US Involvement in the 1979 Assassination of South Korean President Park Chung-hee - PM Press
UNITED STATES DISTRICT COURT FOR MASSACHUSETTS – BOSTON DIVISION GEORGE KATSIAFICAS Plaintiffvs. U.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Defendant COMPLAINT FOR INJUNCTIVE RELIEF I. Preliminary Statement 1. This is an action under the Freedom of Informat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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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29일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웬트워스 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는 미국 정보 자유화 법에 근거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사건과 5.16 쿠테타 와 괸련된 미중앙정보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건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미국 연방법원에 냈다. 그는 2001-2002년 전남대 5.18연구소 교환교수를 지낸 한국민중운공사 전문 연구자이다. 2010년 3월에 두 사건에 관련된 문건 공개를 미중잉정보국에 공식 요청 했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여순사건에서 부터 5.16, 10.26 암살 까지 박정희와 미국의 관계는 베일에 싸여 있다. 군 남로당 조직책이었던 박정희 구명 이후 미국은 박정희를 보호 하여 5.16 쿠데타 까지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10.26 박정희 암살도 미국이 관여 했다는 소문이 파다 하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고소장에는 미국 정보요원 제임스 하우스만과 밥 부루스터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고소장 중 “역사적인 배경”을 번역 기재한다.
16. 이차 대전 직후 미군정은 남한을 지배 했다. 일년도 안되어, 남한은 가아, 콜레라 전염, 그리고 친일 경찰의 압제로 인한 미군정에 반대하는 항쟁이 일어 났고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많은 병력이 동원 되었다.
17. 1948년 대한민국이 미국의 지도와 지지로 건국 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18. 이차대전후 초기, 남한에서 미군 장교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는 한국 육군 전투 조정자 겸 미군과 한국군 간의 레이장(연락) 역할을 했고 결국은 자신을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했다.
19. 이승만 정권은 야당을 초토화 시키는 정책을 쓰는 독재를 했다. 1948년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14 사단을 파견 했다.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기 전에 14사단 군인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여수에서 시작하여 남한의 가장 남쪽 지방을 점령 했다.
20. 1948년에 이러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자 미군정 본부는 하우스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신생 한국 정부가 흔들리고 있다. 어떤 대가를 치루더러도 여수를 다시 찾아야 한다.” 는 내용이었다. 하우스만은 개인적으로 한국 15개 경찰 경비중 10개 사단을 지휘하여 도시들을 하나 하나 시민에게 어떤 피해가 가든 상관하지 않고 포위하고 점령 했다.
21. 하우스만과 능력 있는 미군 장교들의 감독과 그들이 동원한 월등한 화력으로, 한국군은 반란 진압에 성공 했다. 한국군 지휘관은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군에서 근무한 경럭이 있었다 대부분이 봉천 군관학교 출신으로서 빨치산 토벌을 훈련 받았다.
22.미국 요원들은 한국에서 미국이 지배하는 데 일본 훈련을 받은 경찰과 군인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경찰과 군장교들은 앞으로 수십년간 한국의 정치 기반의 중심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미국과 같이 일했다. 후에 1961년 부터 1979년 까지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도 이와 같은 전 일본 장교 였다. 그러나 대통령 박도 여수 반란군 편 이였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23. 1948년 8월2일, 하우스만은 개인적으로 이승만에게 말하여 대통령 박정희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박은 일본군대의 정보정교였고 김일성을 찾아서 죽이려고 했다. 1948년에 그는 여수 반란에 참여 했지만, 자기의 전 동지를 고발했다. 그의 부하였던 김종석은 박과 같은 시기에 체포 되어 처형 되었다.
24. 그 후 30년 동안 하우스만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미군연락장교(liaison)였다.
25. 1960년에, 시민운동으로 이승만이 하야 했다. 그리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다.
26. 1961년5월16일, 박정희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권을 무너트렸다. 쿠프는 1961년5월16일 밤 열두시에 군대가 시내로 들어 오면서 시작 되었다. 5월17일 오전 3시30분에 장면 총리가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에게 전화하여 쿠프를 진압 할 것을 요구 했으나 미군당국은 한국정부의 요구를 거절 했다.
27. 제임스 하우스만은 쿠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 했다.
28. 하우스만은 1961년에 박정희와 그의 동지들이 군 독재자가 된 것을 환영 했다. 여수 반란 진압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는 데 효율적이었다는 공로로 US legion of Merit citation 을 받았다.
29. 쿠프가 일어난지 20년 후, 하우스만은 주한 미군 사령관 John Wickham 장군으로 부터 Meritorious Civilian Service Award를 받았다. 감사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박 대통령과의 가까운 친분을 통해서, 그는 군사혁명정부를 설득하여 미국의 심려를 덜어주는 향동을 취하도록 했고 새로 등장한 군사지도자들의 배경과 야망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그로 하여금 미국 관리들이 이 지도자들 통치하에 한국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치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발전 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했다. 1948년에 하우스만이 개인적으로 이승만에게 부탁하여 박정희를 구해 주었음을 상기 한다면, 1961년에 박은 하우스만에게 빚을 갚아야 했다.
30. 1978년 6월, 미중앙정부는 “한국 연 정부(박정희 정부)는 평양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가지는 데 집착하고 있다….”라는 비밀보고를 모으고 있었다.
31. 1978년10월말에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Robert Brewster와 주한 미국대사윌리엄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와 만났다. 그라시스틴 대사, 리처드 홀부르크, 그리고 미 각료들은 한국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인권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 했다.
32. 1979년 9월26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중앙정보부 한국 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 는 박과 그의 비판세력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만났다.
33. 1979년 10월 중순, 박은 선출 된 야당 지도자 김영삼을 국회로 부터 축출 했다. 이에 대응 하여, 주한 미대사관은 “미국은 공개적으로 김영삼에 대한 박의 행동을 비난하고 주의를 주기 위해서 주미 한국 대사를 소환 한다.”는 성명을 발표 했다.
34. 1979년10월 중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부산에서 시작하여 마산으로 퍼졌다. 1979년10월18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혼란을 막기 위해서 탱크가 들어 갔다. 10월20일에는 마산에 계엄이 선포 되었다.
35. 또 10월18일에 글라이스틴 대사와 워싱턴에서 온 국방장관 브라운이 박을 만났다. “브라운은 정치탄압에 대한 대가를 말하여 박에게 주의를 주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위크함도 모임에 참석 했다.
36. 위크함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을 다음과 같이 묘사 했다. “한국군의 창설자인 그는 군에서 은퇴 한 후, 한미 연합군, 유엔군, 그리고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의 특별 부관으로 일 했다.”
37. 1979년 10월 말, 위크함 장군은 하우스만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후에 “하우스만은 모든 고위 한국군 장교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였고 한국 지도자들에게 필요하면 솔직한 의견을 전할 수 있었다.”고 말 했다.
38. 박은 1979년 10월26일 김재규에게 암살 될 때 까지 한국을 통치 했다.
39. 1979년10월27일, 위크함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주한 미대사관에서 만났다. 글라이스틴은 “미중앙정보부 한국 지부장 밥 부루스터가 한국중앙정보부장에 의해서 계획된 사건이라고 결론 내릴 만한 충분한 증거를 모았다”고 말 했다. 위트함 장군에 의하면, 전은 오랜동안의 밥 부루스터의 친구였다.
40. 또 1979년 10월27일, 아주 긴장된 회의에서 전두환은 박 암살 사건의 수사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친구, 중앙정보부 지부장 밥 부루스터가 미국은 한국 주둔을 증가 시킬 것이라고 말했음을 지적 했다.”
41. 1979년11올 말,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가 심문에서 전 미대사가 박 대통령이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 했다고 말 했다고 했다는 군 정보기관 보고를 받았다.
42. 1979년12월12일, 전두환 장군은 군사 쿠프를 주도 했다. 전은 비밀재판이 그를 유죄로 판결한 후 김재규의 처형을 명령 했다. 그리고 190년 5월 24일 김재규가 교수형으로 처형 되었다.
43. 1981년, 하우스만은 잔두환으로 부터 한국에서 오랫동안 공헌 했다는 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하우스만은 위크함으로 부터 “Meritorious Civilian Service Award”를받았다. 감사장 내용은 29 참조.
44. 미국이 박의 암살에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은 파다 하다. 그래서 글라스틴의 회고록은 이 소문에 대해서 상당한 부분을 할애 하고 있다. 글라이스틴 씨는 “많은 한국사람과 몇몇 미국인들이 박 대통령 암살에 미국이 공모 했다고 의심 했다.”고 지적 했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의견은 11월 초에 미국의 비판이 그의 종말을 초래 했다는 것인데….,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의장 클레멘트 자블로키가 이 문제에 집착 하고 있었다.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우리의 고위 정보 대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지에도 불구 하고 자즐로스키는 “나는 믿지 않는 다”고 말 했다.
45. 2011, 피터 헤이에스와 문정인은 한국 일간 한게레에, “박이 핵무장을 시도 했기 때문에 미중앙정보부가 199년 10월26일 박정희 암살을 조직했다는 소문이 넓게 퍼졌다는 사실은 중요하다”고 보도 했다.
46. 미국에서 넓게 퍼진 미중앙정보부의 관련설에 대한 결과물로, 미국의 암살 부추김과 조직을 묘사한 여러 편의 한국 소설이 있고, 단 한권의 영어로 된 소설이 있는 데, 그것은 1982년 베스트 셀러 였던 스티브 쌰건의 “The Circle(Bantam Books, 1982)”이다.
소송의 귀추가 주목 된다. 1945년 이후 한국정부는 미국에 비밀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한국 정부와 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https://namu.wiki/w/제임스%20하우스만
다음 글에는 박정희 암살 이후의 한국정부와 미 대사관, 주한미군, 미국 정부의 움직임이 담긴 체로키 파일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