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의 모형은 ‘살림살이’의 길-지구 살림살이 (철학 이기상교수 p210-218)
21세기의 가장 큰 국제문제는 Economy와 Ecology, 즉 경제와 생태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 Economy 와 Ecology의 어원을 살펴보면, 둘 다 oikos라는 그리스말로 이 말은 ‘집, 주거, 거주’를 뜻한다. Economy를 순수한 우리말로 풀어본다면 ‘살림살이’가 된다. Ecology는 ‘살림살이학’에 해당된다. 즉 ‘살림’을 생활화하는 ‘살림살이’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서 ‘살림’의 원칙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 우주적 살림살이의 대 원칙은 ‘나눔’과 ‘비움’이다. 한국인의 생활세계에 각인되어 있는 삶의 문법을 고찰해 볼때, 우리는 거기서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이라는 살림살이의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예전에 서양은 자기들의 세계만이 유일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변방이라고 보았으며, 하나의 진리, 하나의 문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이성만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다원화되어가고, 문화와 가치가 서로 다름을 보고 알게 되었다. 서양의 이성은 기계론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 기술적이고 계산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서양인의 생활세계적 이성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이성’이라고 이름한다. 서양인들은 그것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세계에 따라서 이성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 세계적 이성’이라는 개념 속에 담긴 본래의 뜻이다. 철학은 삶의 세계에서 어떤 생활 방식을 표본으로 삼아 그것을 이론화하고 합리화한다. 그것이 그들 세계의 독특한 이성이며 세계를 보는 눈을 이룬다. 하이데거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이 ‘존재의 이해’이고,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다. 존재이해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서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를 기치로 내건 유럽적 세계관이 승리하였고, 그로써 기계론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 기술적이고 계산 가능한 이성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원화된 현대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이성만을 고집하여서는 화해와 평화를 기대할 수 없고, 오직 갈등과 투쟁만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문화권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간직되어온 다른 이성의 형태를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는 가로지르기 이성이다. 다른 세계관과의 대화, 다른 문화간의 대화,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는 가로지르기 이성이 필요하다. 내 것만을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대화를 나누며 더 보편적인 것을 찾아나서는 열린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로지르기 이성을 전제로 하면서 우리의 생활세계를 되돌아볼 때, 우리 나름의 독특한 이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활세계를 각인한 우리 나름의 생활세계적 이성을 ‘살림살이의 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천(天)·지(地)·인(人) 합일의 삶을 살았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존재’이다. 예전에는 천재지변이 하늘과 땅 사이에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이 잘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물이 넘쳐 홍수가 났을 때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고을의 책임자가 천주라고 하는 동헌의 기둥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어 인간의 잘못을 대신 사죄하였다.
우리는 서양인처럼 자연을 에너지 창고로 본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도리를 보았고, 따라야 할 덕목을 읽어내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품(人品)이 있듯이 꽃에게도 화품(花品)이 있다고 보았다. 대나무는 절개, 모란과 작약은 부귀, 개나리와 진달래는 그 분명한 거취가 그 꽃들의 화품이다. 또한 도덕의 범위를 짐승에까지 확대하여 벌과 개미에게는 군신의 의(義)가 있고, 원앙에게는 부부의 정(情)이 있고, 기러기에게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예(禮)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생명체가 아닌 무생물도 마구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을 특별하게 생각하여 다루었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기 어려웠던 한 며느리는 팔(八)자를 적은 바가지를 갖고 냇가에 가서 실컷 운 다음 그 바가지를 쪼개 냇물에 떠내려 보냄으로써 자신의 한을 풀었다 한다. 물은 우리에게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비가 온 뒤에 산에 갈 때에는 코가 얼기설기한 짚신을 신었다. 비가 온 뒤에는 벌레가 많이 나오는데, 그 벌레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그러한 신발을 신은 것이다. 우리는 “산에 간다”는 말 대신에 “산에 든다”는 말을 썼다. 산에 허락 맡고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상들의 살림살이에서 지구 살림살이를 위해 배울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삶의 지침과 새로운 가치관으로 체계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살림’이라는 말은 살리다에서 나왔다. '살리다’는 ‘살다' 와는 다르다. 모든 삶은 살다'지만 ‘살리다’는 아니다. 사는 것을 살게 하는 것이 살리는 것이다. '살리다'를 하기 위해서 ‘살림’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삶을 알아야 한다. 삶을 알아야 그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를 살릴 수가 있다. 삶을 아는 것이 ‘삶’이다. 이것이 곧 '사람'이다.
사람은 삶을 아는 존재이고, 사람만이 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만이 생명의 세계에서 삶을 알고 삶을 살릴 수 있다. 이 자연에서 살림을 책임지는 것은 사람이다.
자연의 우주적 생명의 원칙은 나눔과 비움이다. 우리의 생명체는 나뉘는 것이다. '나누다’는 ‘낳다’와 ‘놓다’가 합쳐진 말이다. 이것은 자기를 갈라서 낳은 자기의 분신을 독립적으로 따로 세워 놓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원칙은 낳아서 놓는 것이고, 그렇게 끊임없이 나뉘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은 ’나눔과 성장’이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뉘어야 자라는 새싹들/ 그렇습니다. 나누어야 성장합니다./ 커지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나뉘어야 자라납니다./사람 몸도 세포가 나뉘어야 성장합니다./커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입니다./ 커나가는 조직은 정보와 지식,/ 비전과 자유와 책임을 잘 나누어/ 함께 공유하는 만큼 멈춤 없는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지금 그대로의 자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자기자신이 성장하고 상대를 성장시키고/ 모두가 진보해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누어 자신과 상대를 함께 키워내지 못하는 것은/ 사랑도 정의도 진보도 아닙니다./ 함께 하나되어서도 성장하지 못하고,/ 나누어도 성장하지 못하는 건/ 진보가 아닙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나눔,/ 성장하지 못하는 성숙은 진보가 아닙니다./ 창조적 맴돌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눔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긴장된 떨림/ 그 살아 움직이며 이동하는 균형점이/ 참된 사람의 자리이고 진정한 진보의 자리입니다./ 잘 나누어 보살펴야 성장함으로 성숙할 수 있고,/ 성숙함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눔의 손은 보살핌의 손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다 나누고 마침내/ 고목처럼 부드럽게 쓰러지는 생이 있습니다./ 쓰러져 돌아감으로 다시 새싹처럼 부활하는 생,/ 그래서 죽음마저 최후의 나눔이고 사랑이고 희망인 생,/ 그런 일생이기를 기도하는 신생(新生)의 시간입니다./ 언 흙을 뚫고 치열한 숨결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바라보며,/ 나눔으로 빛나는 작고 여린 얼굴들을 묵묵히 들여다보며,/ 내 안에서, 세상에서, 나눔으로 자라나는/ 푸른 희망 하나 하나를 뜨겁게 지켜봅니다./ 고개 들어 해동청(海東靑) 하늘 / 바라보는 눈빛 시려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에서)
(12/16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