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동안 교우들에게 시편을 필사하거나 묵상하도록 요청했다.
사순절 주일 특강도 시편을 다룬다.
시편은 정직한 절망과 탄원,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희망을 가장 인간적으로 드러내는 성서이다.
한편, 악행을 일삼는 이에 대한 경고와 심판도 분명하다.
이를 귀담아 듣지 않는 이들을 신앙인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성직자는 더욱 그렇다.
교회 전통은 모든 예배 때마다 시편을 읽거나 노래하게 했다.
수도자들은 시편을 성찰과 수련의 근거로 삼았다.
많은 신앙인은 고난 속에서 시편과 함께하며, 억울함을 함께 토로했고 하느님께 울부짖었으며,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희망 안에서 위로를 받았다.
아직 절망의 고난이 다 가지 않은 처지에서도 그의 입술에는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담았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교회가 오히려 앞장서고 세상이 뒤따르며, 시편 기자의 절망과 희망을 코웃음친다.
교회든 세상이든 알량한 권력을 차지하려고, 또는 거머쥔 힘을 휘두르며, 하느님 무서운 줄 모르고 행동한다.
악행의 시대인 셈이다.
서방 교회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트의 <규칙>(RB)에는 이런 말이 있다.
“주님의 거룩한 산에 쉴 이는 누군가요?”
“잔꾀 없이 걸어가는 이,
옳은 일을 하는 이,
마음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
사기를 혀에 담지 않는 이,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는 이,
남에 대해 모함하는 악마를 믿지 않는 이”(RB).
시편 15편을 따다 쓴 스승의 대답인데,
“남에 대해서 모함하는 악마를 믿지 않는 이”(RB 서언 27)라고 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이는 의역이다. 직역하면 “제 이웃에 대한 모욕을 용납하지 말라” “이웃에 대한 중상에 귀 기울이지 마라”이다.
의역이 더 강렬하다.
악마의 본질을 못 박듯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악마를 믿지 말고, 귀 기울이지 마라.
이런 악마가 동서고금 일상 곳곳에서 활개친다.
이 때문이었을까?
베네딕트 성인과 여러 교부들은 시편 3편을 하루 기도의 준비로 삼으셨다.
“주님, 저를 괴롭히고 넘어뜨리려는 자들이 어찌 이리 많습니까?
빈정대는 자들이 또 많기도 합니다…
정녕 주님은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수시는 분.”
다시 이런 권고가 나온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에 눈을 열자꾸나.
그리고 날마다 부르시는 그 소리에 귀를 열자꾸나.” (RB)
그리고 성인은 시편 4편을 끝기도에 사용하도록 했다.
“정의의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들어주소서…
정의를 주님을 향한 제물로 바치고,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께서 큰 기쁨을 제 마음 속에 베푸셨으니…
평화로이 자리에 누워 잠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