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기간 중 사패산과 북한산을 연이어 탔더니 어깨와 엉덩이 근육이 뻐근하다.
웬만해선 산에 다녀왔다고 근육통이 생기지는 않는다. 매일 빠지지 않고 몇km씩 달리기도 하고 근육운동도 핼스장에서 한 두 시간씩은 하니까 근력도 어지간 할텐데, 근육통에는 이유가 있다.
3월 2일이다.
아점(아침 겸 점심)을 먹고 북한산행을 12시부터 개시. 어제의 사패산에 이은 산행이다.
코스는 삼천사에서 시작해 청수동암문 쪽 계곡으로 올라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거쳐 기자촌과 진관사 갈림길에서 진관사로 내려오려는 3시간 정도(점심 먹고 쉬엄 쉬엄 4시간) 계획을 잡았다.
사실은 설악산 속에서 일박이일을 하려고 장비를 갖춰 금요일에 출발했는데, 이날 교통 상황을 들어서 아는 분은 알겠지만, 국도 몇 곳과 영동고속도로며 춘천고속도로까지 그야말로 대형 주차장이 되어 있었기에, 그만 청평의 설악면에서 보리밥 잘하는 집에서 점심만 먹고 돌아온 것이었다. 웃기는 것은 그 구석진 시골에서 보리밥을 주문했는데, 이 흔한 보리밥마저도 운전에 지친 과객들이 밀려들다보니 다 떨어져서 새로 짓는 밥이 뜸을 들이려면 이십분이나 기다려야 된다기에 청국장으로 바꿔 먹은 것이 어제다. 그래서 설악산 대신 사패산과 북한산을 이어 달리기식 오르는 셈.
삼천사를 지나면 아직도 음식점 몇 곳은 좋은 경치를 훼손하고 있는데, 정비가 힘든 모양이다.
여기 저기 놓아 먹이는 토종닭들이 햇살 받으며 흙이며 풀을 쪼는 모양이 정겹다. 산기슭에 방목사육해서인지 암탉도 살이 포동 포동하고 털이 윤기가 있는데, 역시 장닭 자태는 위엄이 있다. 붉은 벼슬과 긴 꼬리와 목에 두른 갈색과 황금색과 검정색의 조화는 귀족적이기도 하다. 문득 박용래 시인의 ‘고향’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짧은 행에 엄청난 서정을 담아낸 시인이다. 눈물의 시인이기도 하고.
대학생 시절. 대전 시민회관에 세들었던 대전 문화원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옆 골목 누추한 주점에 새파란 어린 문학동인들(나하고 아마도 소설 쓰던 한운산, 김기흥, 그리고 시 쓰는 송인창 아니었나싶다)과 어울려 들어서서는, 술 한잔 드시면서 누군가가 어느 불우한 환경에 맞닥드린 문인 얘기를 들려주니, 아이고 어쩌나 아이고 어쩌나 연신 탄식하며 눈물짓던 대선배 시인. 그 반백의 긴 머리결과 덥수룩한 수염이 지금도 그리운 아저씨 시인.
외워본다.
눌더러 물어 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 길
여기사 扶餘 故鄕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조금 올라서면 무대바위(공연장 닮아서, 이곳서 노래를 불러보면 뒤편 병풍 같은 바위가 막아주는 효과가 있어 제법 공명이 앞으로 나간다)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비봉이 나온다. 계속 왼쪽으로 오르면 문수봉과 승가봉 사이의 계곡으로 완만하게 정상으로 오르는 긴 코스다. 여기부터 아이젠을 차고 걸었다. 곳곳이 아직 잔설이 얼어있고, 흙으로 살짝 덮힌 길도 얼음이 위장한 채 밑에 숨어있는 길.
한참을 올라가니, 바위와 계곡 사이로 길이 이어져야 되는데 눈으로 덮여 있고 발자국도 드물어서, 그냥 발자국이 좀 더 드러난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금 오르니 이상하다.
이렇게 급경사가 나올 리가 없는데? 하면서 밑을 내려 멀리 보니 역시 길이 안보이기에 좀 더 올라갔다. 그런데 한 스무 명 정도 되는 산악회원들이 무리를 지어 아래에서 멈칫 멈칫 하더니 내가 오르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나를 따르기 시작하는 거였다.
아이고. 그들 때문에라도 나는 이젠 할 수 없이 갑자기 만난 급경사를 그냥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든 거니 내려가시오 라고 말하기도 그랬다. 차라리 길이 없어지면 좋을텐데 희미하게 사람 발길 흔적이 보이니까 좌우간 뭔가 나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보였다 말았다 하는 발자욱 흔적을 찾아 올랐다. 어쩌면 떠밀려 오른 셈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길이 거의 빙폭이나 마찬가지인 험한 코스였고, 뒤 따라온 무리는 아이젠 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 일행 중에서 몇은 미끌어져 구르고 몇은 엉덩방아 찧고 하는데, 괜히나를 따르다가 낙상 사고라도 나는 거 아닌가 불안하고 무안해지는 마음이었다. 그저 어서 평탄하고 안전한 길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불편한 선두, 마음 졸이는 리더가 될 수밖에.
이젠 맘먹고 길을 뚫어야 한다는 비장함 마저 생겼다.
문득 힘들어진 선두가 되다보니 백범 김구 선생의 애송시가 떠올랐다.
나 원참. 황당한 선두가 되어 힘들다보니 별 시가 다 떠오르는군. ㅎㅎㅎ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김구 선생은 서산대사가 지은 이 시를 즐겨 읊으며
“내가 38선을 넘는 것은 어리석고 무분별하며 쓸데없는 짓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난 나의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질 줄 안다. 그리고 훗날, 나의 행적을 제대로 평가할 날이 올 것”
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듯 옳은 일에 목숨을 걸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백범의 삶에 시공을 초월해 영향을 끼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또 누군가. 조선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승병장이었던 그는 속성은 최(崔), 호가 청허(淸虛) 또는 서산(西山), 속명이 여신(汝信), 법명이 휴정(休靜)이다.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로 선조의 명을 받고 1500명의 승병을 이끌며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유(儒)·불(佛)·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해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기도 했다.
아! 이래서 선두가 힘들구나라는, 그 것도 얼결에 꼬리를 단 생각을 하며 빙폭같은 급경사를 오르니, 드디어 넓게 사계가 개활된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온 길도 보이고 갈 길도 보였다. 휴우~. 이제 좀 웃음의 여유도 생기고 주의를 넓게 둘러보는 안정이 생겼다.
알고 보니 이 곳은 왼쪽으로는 저 아래 계곡 길과 오른쪽으로는 응봉능선 사이의, 승가봉으로 직접 급히 치고 올라와 정상과 연결되는 능선이었다. 앞에도 조금 험난한 바위덩이 길들이 보였지만 일단 연결은 되니 안심이다.
뒤따르던 산악회원들 나누는 대화가 내게는 인상적으로 들렸다.
“아이고. 무슨 코스가 이렇게 빡 세냐?”
“글쎄 말여. 뭐 계곡 길로 완만하다더니 뻥 쳤고만이라 잉 ㅎㅎ.”
“미끌어지는데 죽는 줄 알았다카이 야”
“야아 경치 직이삔다.”
“저기가 백운대, 그리고 주욱 오른 쪽으로 오면 분수봉이고, 저게 승가봉이지. 그리고 또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사모바위고, 멀리 보이는 곳이 비봉이야.”
“와아, 역시 북한산이 역시 명산여.”
나야 말로 북한산 곳곳에 빡센 길이 있다는 걸 오늘 또 알았다.
섣불리 선두 선다는 건 수 많은 사람의 생사도 때로는 우연치 않게 끌고 간다는 것도 느꼈고, 어떤 산악회들은 겨울산은 안전장비 갖추라는 것과, 새로운 코스를 올랐다는 것과, 북한산이 과연 명산이구나 느낄 수 있는 절경 포인트를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좌우간 황당한 선두가 성공적이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래서 지금 엉덩이가 뻐근하다. 진관사 쪽 내리막 길, 위에서 보면 수직으로 까지 착시 되는 얼음 하산코스 때문에 다리에 엄청 힘이 들어간 탓도 있겠다.
나를 열심히 따라 다닌 아내 역시 종아리가 아프다고 해 주물러주니까 낑낑 신음소리 내는걸 보면서, 잘 시청하지 않는 티브이 뉴스 채널을 켜보니, 역시 아무나 선두라고 나대는 여러 못난이들 처신만이 비쳐질 뿐이다.
촌스럽다.
떠밀려 선두로 나서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정말 선두인 것처럼 착각하다가 결국은 무꼬랑지 신세가 되어서야 물러나는 이ㄷㅎ 김ㅇㅈ, 또 미국인 김ㅈㅎ, 그리고 또 낙마가 뻔한 자질들이지만 결국 통치권자 고집대로 통과될 황ㄱㅇ 김ㅂㄱ 아무개 등의 끈질긴 버티기가 불쌍해진 뉴스들이다.
사퇴의 변이라고,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나라를 생각한다 국민에게 고한다 충정의 결단이다 등 등, 중세시대의 영주들 흉내내는 황당하고 염치없는 매국적 애국자들이 주위에 엄청 많다.
결단을 내려 백기 들고 물러나야할.
(2013.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