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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의 “침노당하는 천국”(마 11:12)에 대한 소고
1. 서론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개역개정 )는 해석하기 쉽지 않은 난제 구절들 중 의 하나로,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시도로 해석되어 왔다.1)이 구절에 대한 성서학계의 해석은 통일되지 않고 있으나, 한국교회와 신 학계에서는 주로 마태복음 11:12와 평행본문으로 좀 더 명확한 의미를 전 달하는 누가복음 16:16에2) 의존하거나 누가와 일맥상통한 메시지로 마태 본문을 해석해왔다.3) 즉 세례 요한 이후 예수의 시대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강하게 임하고 전달되어 모든 사람이 힘써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의 자료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상황과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에 따라 다르게 사용해왔다는 것을 고 려할 때, 과연 마태복음 11:12와 누가복음 16:16을 조화롭게 해석하는 것이 모호한 마태 구절을 해결하기 위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는 재고해야 한다.
본 논문은 서로 비슷해 보이는 마태복음 11:12와 누가복음 16:16이 비록 같은 자료를 사용하였다 할지라도 성서 본문의 흐름과 강조되는 신학에서 각각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마태복음 내에서 일반적으로 이 해하기 어려운 ‘침노당하는 천국’에 대한 의미를 로마제국 시대의 상황에 대응하는 마태공동체의 신학적 고찰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마태복음 11:12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살펴보고, 마태에서 전 개되고 있는 내러티브적 구조 및 주제, 그리고 마태복음 11:12가 어떠한 신 학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바탕으로 하여 누가복음과는 전혀 다를 수 있는 마태만의 적절하고 고유한 해석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마태복음에서난해함으로악명높은이구절에대하여불트만은“더이상확신있는해석패 턴의 가능성은 없다”라고 주장했고, 케제만 역시 이 구절은 “매우 초기 시대의 전승으로 복 음서 기자들조차도 확실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고 언급하였다. 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Evanston: Harper & Row, Publishers, 1963), 164; E. Käsemann,Essays on New Testament Theme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2), 42;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Jr.,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vol. 2 (London and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4), 254-256; 도널드 헤그너, 마태복음 상, 채천석 역, WBC (서 울: 솔로몬, 1999), 519-521; 이 구절에 대한 논의 역사는 P. S. Cameron의 Violence and the Kingdom: The Interpretation of Matthew 11:12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1988), 3-22에서도 다루어진다.
2)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개역개정 ). 누가복음 본문과의 비교는 본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3) 김현확, “마태복음 11장 11-14절에 나타난 큰 자와 침노 사상에 대한 연구”, 석사학위 논문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1); 장병식, “침노당하는 하나님 나라와 침노하는 자에게 주신 권위에 대한 이해: 마태복음 11:12을 중심으로”, 석사학위 논문 (협성대학교 신학대학 원, 2008). 21세기에 나온 두 신학대학원의 석사학위 논문의 내용 모두 하나님 나라가 강하 게 임하고 있고, 침노하는 자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열심 있 는 제자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눅 16:16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Q연구학자인 김형동 박사는 마태와 누가가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료를 Q16:16으로 복 원하려고 하고, 비록 마태와 누가가 다른 맥락과 상황에서 이 자료를 각기 사용했다 할지라 도 Q본문의 bia,zetai를 중간태로 해석하며, 본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 현재성의 메 시지로 사람들의 반응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김형동,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침노에 관한 두 본문(눅 16:16/ 마 11:12): Q 16:16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이해”, 「성경원문 연구」 8 (2001), 213-215; 구기정 박사의 논문에서는 마 11:12의 biaz, etai를 수동태로 사용하 여 하나님의 나라가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는 하지만 폭력을 행하는 자들은 이방인들이며, 이스라엘이 천국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이방인들이 차지하게 될 것 인데, 이스라엘의 시각에서는 그러한 이방인들의 행동이 폭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러 한 동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즉,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에게 돌아간다는 긍정적 의 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구기정, “마태복음 11:2-19 안의 지상 큰 자(μείζων)와 하 늘 작은 자(μικρότερος)”, 「신약연구」 8:1 (2009), 51-52; 구약학자 장춘식 박사만이 필자가 연구하고자 하는 해석과 같은 맥락에서 마 11:12를 연구하고 한국교회의 현실에 적용하였 다. 그러나 ‘강탈하는 자들’에 대한 연구는 로마제국과의 연관성이 아닌 유대교와 관련된 지역적 상황에서만 연구한 한계가 있다. 장춘식, “폭행당한 천국: 한국 교회의 현실과 미래 적 과제”, 「신학사상」 110 (2000), 107-115.
2. ‘침노당하는 천국’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들
마 11:12a avpo. de. tw/n h`merw/n VIwa,nnou tou/ baptistou/ e[wj a;rti h` basilei,a tw/n ouvranw/n bia,zetai
마 11:12b kai. biastai. a`rpa,zousin auvth,n)
이 본문을 해석하는 데서 관건이 되는 단어는 bia,zetai이다. bi,azomai의 중 간태와 수동태 형태인 이 동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확 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문헌에서 bia,zetai는 능동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중간태로 사용될 때는 ‘힘을 가하다’ 또 는 ‘굴복시키다’의 의미로, 수동태로 사용될 때는 ‘억압당하다’ 또는 ‘제약 을 당하다’의 의미가 있다.4) bi,azomai가 신약성서에 사용된 예는 오직 마태 복음 11:12와 누가복음 16:16 두 군데이다.
먼저 마태복음의 bia,zetai가 해석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네 가지인데,
1) 중간태의 긍정적 의미,
2) 중간태의 부 정적 의미,
3) 수동태의 긍정적 의미,
4) 수동태의 부정적 의미이다.
1)의 의 미로 사용될 때는 하늘의 통치가 힘 있게 전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의 표준 이 중간태의 긍정적 의미를 취하고 있으며, 하늘나라가 강하게 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표준 :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16:16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된다’(euvaggeli,zetai)의 의미와 일맥상통한 장점을 지닌다.
2)의 의미를 따르면, ‘하늘나라가 강하 게 다가오지만, 폭력을 행하는 자들이 그것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그러나1), 2) 해석의 문제는 bia,zetai의 의미가 마태복음 11:12b의 biastai.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biasth,j는 일반적으로 적의 있는 행동과 관련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5) 즉, 힘 있는 자가 강탈하거나 늑탈할 때 사용되는데,마태복음 11:12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부정적 의미의 biasth,j와 연결되 기 어렵다. 그러므로 bia,zetai와 biasth,j는 의미적으로 조화롭게 해석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3)의 경우도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강탈당하고 있는데, 힘쓰는 자들이 노력하여 긍정적으로 차지한다 는 것은 의미전달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4)번의 경 우에서처럼, bia,zetai를 부정적인 의미의 수동태로 biasth,j와 연결하면 해결 된다. 즉 하늘의 나라가 강탈당하고 있고, 강탈하는 사람들이(biastai.) 하늘 나라(auvth,n)를 빼앗는다는 것이다(a`rpa,zousin). a`rpa,zw 동사 역시 bia,zetai와 연결될 때 주로 폭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6) 그러므로 어문론적 입장에서 bia,zetai., biastai., a`rpa,zousin이 모두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연결하면 그 의미가 통일된다.7)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 있는 우리말 번역성서는 개역개정 , 새번역 , 공동번역 이다.
개역개정 :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새번역 :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공동번역 :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 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이렇게 문자적으로는 그리스어 본문에 충실해서 번역이 되었으나 이 의 미가 모호하게 잘 전달되지 않거나, 번역은 부정적인 것으로 하더라도 한 국교회가 신학적 의미를 긍정적인 것으로, 즉 하늘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에 열심을 내면 누구나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로 인해 하늘나라가 시작 되었다는 희망의 메시지와(마 4:17) 함께, 비슷한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16:16의 해석 때문이다.
눅 16:16상 ~O no,moj kai. oi` profh/tai me,cri VIwa,nnou\눅 16:16중 avpo. to,te h` basilei,a tou/ qeou/ euvaggeli,zetai눅 16:16하 kai. pa/j eivj auvth.n bia,zetai)
먼저 누가복음 16:16의 문맥은 마태복음과는 완전히 다르다. 누가복음16:14-18은 마태처럼 세례 요한과 관련된 맥락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의나 율법의 효용성에 관한 주제에서 사용된다. 오히려 마태복음 11:7-11은 누가 복음7:24-28과 관련된다. 사실 누가복음 16:14-18을 누가복음 16장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누가복음 16:1-13은 불의한 청지기 에 대한 비유이고 16:19-31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이기 때문에 그 가 운데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누가복음 16:14-18을 문맥에서 이해하기가 쉽 지 않기 때문이다.8)
4) G. Schrenk, “βίαζομαι, βιαστής”, TDNT, Vol. I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 609.
5) Ibid., 613-615.
6) 마 12:29에서 a`rpa,zw는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고 세간을 강탈한다는 의미에서 쓰였고(h' pw/j
du,natai, tij eisv elqein/ eivj th.n oivki,an tou/ ivscurou/ kai. ta. skeu,h auvtou/ a`rpas, ai(), 마 13:19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a`rpa,zein 동사가 사용되는데, 이 때 역시 악한 자가 그 마음에 뿌 려진 것을 빼앗는 것으로 해석된다(o` ponhroj. kai. a`rpaz, ei to. evsparme,non evn th/| kardi,a| auvtou/( ou-to,j esv tin o` para. th.n o`do.n sparei,j).
7) Ulrich Luz, Matthew 8-20, James E. Crouch, tran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1), 140-141.
8) 정창욱, “누가복음 16장의 두 비유와 16:14-18절의 관계”, 「신약연구」 4 (2005), 117-120.
일단, 누가복음 16:14-18의 맥락에서 살펴본 16:16은 율 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의 시대까지이고, 그 이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가려고 힘쓰지만, 결코 율법이 쓸데없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의 맥락이다.
마태복음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살 펴보면,
먼저 마태가 11:13에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 의 때까지라고 했던 반면 누가복음 16:16상에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순서 로 바뀌고 요한의 시대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에 속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마태에서 사용하는 조사 e[wj ar; ti와 누가가 사용하 는 me,cri의 의미 차이는 마태는 요한을 하늘나라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하 고, 누가는 요한이 율법과 예언의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마지막 사람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마태의 “하늘나라”(h` basilei,a twn/ ourv anwn/ )와 누가의 “하나님 나라”(h` basilei,a tou/ qeou/)라는 호칭이 다르며, 이것은 마태의 유대적 특징 및 마태의 고유한 신학적 담론을 ‘하늘’이라는 메타포 로 규정하는 것이며9) 누가는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세 번째로 마태와 누가의 차이는 누가가 하나님의 나 라에 대한 적용 동사를 euvaggeli,zetai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euvaggeli,zetai는 누가의 선교적 목적과 잘 부합하는 동사로, 마태의 의미를 완전히 뒤바 꿀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동사 때문에 마태복음 11:12에서도 하늘나 라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강하게 전파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euvaggeli,zetai는 누가복음 본문 안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네 번째로,bia,zetai에 대한 마태와 누가의 주어가 다르다. 마태 본문에서는 bia,zetai의주어가 하늘나라인 반면, 누가에서의 주어는 모든 사람들(pa/j)이다. 그러므 로 누가복음에서 bia,zetai는 수동태로 이해하기보다 긍정적 의미의 중간태 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려는 자마다 모 두 힘 있게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자들 중에는 누가의 bia,zetai마 저 수동태로,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10) 즉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마다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또는 수동태로 해석하더라도 주어가 ‘모든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의 신성한 주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bia,zetai의 숨겨진 진정한 주어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사람들이 노력해서 들어가 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가게끔 만든다는 것이다.11) 어떤 학자는 누가의 bia,zetai를 중간 태로 해석하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들어가 려는 자마다 폭력적으로 행동한다’로 해석하기도 한다.12) 그러나 이 해석 은 그 다음의 누가복음 16: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과의 연계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누가는 누 가의 본문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가 강하게 전파되고 그리로 들어가려는 자 들마다 노력하고 힘쓰면 어떠한 방해 없이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 미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13)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비슷한 자료를 사용하고 있기에 학자들은 이 자료의 기원과 원문이 어떠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왔다. 기원에 관하여는 마태와 누가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Q 자료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학자들은 원자료가 어떠했을지 재구성을 시도하기도 한다. 캣치폴(David R. Catchpole)은 Q의 형태가 누가복음 16:16a + 마태복음 11:12이었을 것으로 주장하며 원자료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14)
~O no,moj kai. oi` profh/tai me,cri VIwa,nnou avpo. de. tw/n h`merw/n VIwa,nnou e[wj a;rti
h` basilei,a tou/ qeou bia,zetai kai. biastai. a`rpa,zousin auvth,n)
캣치폴은 마태의 ‘선지자와 율법’ 순서보다는 누가의 ‘율법과 선지자’의 순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더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침범을 당하고 있고 폭력적으로 침략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강탈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는 또한 ‘폭력을 행하는 자들’은 당대의 예수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율법과 선지자의 이름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라고 해석한다.15) 엘르웰린(Stephen Llewelyn)은 마태 본문이 누가 본문에 비해 더 원문에 가깝다고 다음의 이유를 들어 주장한다.16)
(a) 마태의 그리스어가 아람어로 재구성된 본문과 더 잘 어울린다.
(b) 누가의 euvaggeli,zetai는 누가가 선호하는 동사로, 이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c) 누가의 ‘모든 사람들이 힘써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한다’의 해석은 마태 본문의 해석의 어려움을 누그러뜨리고자 한 흔적이다.
(d) 누가가 마태와 평행구절인 bia,zetai와 biastai.를 제거한 것도 누가 의 본문이 이차적임을 제시한다.
엘르웰린은 또한 누가복음 16:14-18의 단락이 Q에서도 연결된 같은 단락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와 누가가 16하반절을 수정한 것은 아마도 마태 본문처럼 다른 상황에서 다르게 이미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 마태가 누가복음 16:16을 수정했다고 보기보다는 누가가 마태 본문을 수정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본문비평 입장에서 더 적절하다는 이유 등으로 마태의 본문이 누가복음보다 초기의 본문임을 주장하였다.17)
김형동은 마태와 누가가 Q 자료를 자신들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bia,zetai를 중간태로 해석하여 Q 원문을 누가복음의 의 미와 가깝게 재구성한다: h` basilei,a tou/ qeou/ bia,zetai kai. pa/j eivj auvthn. bia,zetai (하나님의 나라가 강한 힘으로 다가온다. 모두는 힘써 그 나라로 들 어간다). 마태와 누가가 이 원문을 자신의 신학적 강조점과 맥락에 따라 다 르게 사용한다 할지라도 Q 원문의 재구성에서 알 수 있는 공통적인 메시지 는 세례 요한의 사역은 율법과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고,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이고 현재적으로 임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Q 연구의 중요성에 대해 시사한다.18)
필자는 이 논고에서 Q의 재구성이나 기원을 찾아가는 것을 일차적 목적 으로 삼지 않는다. 마태와 누가가 같은 자료를 사용했음에는 동의하되, 마 태가 어떠한 맥락과 신학적 주제로 마태복음 11:12를 사용하고 있는지, 누 가의 본문과 상관없이 마태복음 안에서 그 기능이 무엇인지 밝히는데 있기 때문이다. 다음 단락에서는 마태복음을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하나의 내러 티브적 문학으로 이해하고19) 본 연구의 구절이 어떠한 숲속에서의 나무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살피고자 한다.
9) 문자적으로는 ‘하늘들의 나라’로 복수 형태이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히브리어의~yIm;V'을 그대로 번역하였다는 의견과 고대인들의 하늘에 대한 이해가 복수적이고 심층적인 이해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대신 하늘나라를 마태가 사용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통 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피하기 위한 유대적 완곡어법이라는 설명과, 최근에는 사회학적,문학적, 신학적 시각에서 ‘하늘’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마태공동체의 독특한 신학을 드러낸 다는 설명이 있다. 양용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25-26; Robert Foster, “Why on Earth Use ‘Kingdom of Heaven’?: Matthew’s Terminology Revisited”, NTS 48 (2002), 487-489; 김학철,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를 다시 살 핌”, 「신약논단」 14:1 (2007),1-37; 차정식, “마태복음의 ‘하늘나라’와 신학적 상상력”, 「한국 기독교신학논총」 46 (2006), 57-88. ‘천국’이라는 한국성서해석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성종, “천국-개념정의와 번역문제”, 「신약연구」 3 (2004), 50-94를 참조하시오.
10) F. W. Danker, “Luke 16:16 – An Opposition Logion”, JBL 77 (1958), 231-243; O. Betz, “The Eschat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inai-Tradition in Qumran in the New Testament”, RQ 6 (1967), 104.
11) Ilaria L. E. Ramelli, “Luke 16:16: The Good News of God’s Kingdom Is Proclaimed and Everyone Is Forced into It”, JBL 127:4 (2008), 737-758; Juan B. Cortes, S. J. and Florence M. Gatti, “On the Meaning of Luke 16:16”, JBL 106:2 (1987), 247-259.
12) Matthew W. Bates,“Criptic Codes and a Violent King: A New Proposal for Matthew 11:12 and Luke 16:16-18”, CBQ 75 (2013),83-92
13) 누가를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눅 16:16은 마태 본문과 독립되게 따로 연구되는 것이 옳다 고 주장한다. Darrell L. Bock, Luke, 2 vols. (Grand Rapids: Baker, 1996), 2:1352; 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2 vols. (Garden City: Doubleday, 1985), 2:1117.
14) David R. Catchpole,“On Doing Violence to the Kingdom”,Journal of Theology for Southern Africa (1978), 57
15) Ibid., 61.
16) Stephen Llewelyn, “The Traditionsgeschichte of Matt. 11:12-13, Par Luke 16:16”, Novum
Testamentum 36:4 (1994), 332.
17) Ibid., 333
18) 김형동,“하나님나라의복음전파/침노에관한두본문(눅16:16/마11:12)”,214.
19) 마태복음은 단순히 성구집이나 말씀들을 뽑아 열거한 것이 아니고, 상호유기적인 관계의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기에 부분적으로 읽혀서는 안 되며, 전체적으로 여러 번 낭독되어 야 하는 책이라고 마태복음의 대표적 학자 울리히 루츠는 주장한다. Ulrich Luz, Studies in Matthew, Rosemary Selle, trans.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5), 3-17.또한 마태의 내러티브적 성격에 대해서는 Janice Capel Anderson, Matthew’s Narrative Web: Over, and Over, and Over Again (Sheffield: JSOT Press, 1994)을 참조하시오
3. 마태의 내러티브적 이해: 로마제국 VS 하늘제국20)
일반적으로 성서학계에서 진행되어온 마태복음의 주된 연구는 예루살 렘 성전 파괴 이후 새롭게 모습을 정비시켜 나가는 유대교와의 관계, 그러 한 관계에서 형성되는 마태공동체의 신학에 중점을 이루어왔다.21) 최근에 는 ‘제국’(empire)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더불어 포스트콜로니얼(post- colonial) 성서 해석 방법이 진행되면서 마태복음을 로마제국과의 관계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22) 이 분야에 앞장서고 있는 학 자는 북미에서 활동하는 워렌 카터(Warren Carter)이다. 그는 유대교와 마태 복음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방법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러한 방향성 은 오직 종교적이고 사적인 영역에만 몰두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로마제국과의 관련성 안에서 마태복음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왜 냐면 마태기독교인들에게 로마제국의 제국주의적 사상, 종교, 철학, 예식,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그들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의식적/무의식적, 긍 정적/부정적으로 밑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터는 초대 기 독교인들이 피할 수 없었던 로마제국의 영향권 아래 제국주의적 신앙과 문 화를 기독교신앙의 관점에서 경쟁하고(contesting), 모방하고(imitating), 저 항하는(resisting) 과정에서 마태복음이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23) 그러 므로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의 모든 책들과 장들은 제국과 연관된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제국과의 관계성 안에서 연구 되어야 한다고 피력한다.24) 필자는 이러한 카터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동의하며 마태의 ‘침노당하는 천국’의 의미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위해 먼저, 마태복음 전체 이야기가 어떠한 구조와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25)
첫 번째 이야기: 1:1-4:16 –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새로운 나라(basilei,a)를 시작하심
두 번째 이야기: 4:17-11:1 – 예수의 말씀과 선교활동을 통해 확장되는 하늘나라
세 번째 이야기: 11:2-16:20 – 하늘나라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
네 번째 이야기: 16:21-20:34 – 하늘나라를 이루어가는 십자가의 길
다섯 번째 이야기: 21:1-27:66 – 예루살렘에서의 하늘나라 활동
여섯 번째 이야기: 28:1-20 – 부활을 통한 하늘나라의 궁극적 승리
복음서를 기승전결이 있는 전체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는 문학 비평적 주장은 복음서의 문학적 장르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성서를 부분적이고 분석적으로 연구하다 놓치는 역사비평의 단점을 잘 보안하는 방법으로, 마 태에 흐르고 있는 전반적 주제를 파악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26) 필자가‘침노당하는 천국’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구성한 이야기 구조는 ‘하늘나 라’(h` basilei,a tw/n ourv anwn/ )를 키워드로 한 것이다. 마태의 하늘나라는 예 수선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나라’로 해석되는 basilei,a는 왕을 의미하는 basileu,j와 관련 있는 단어로, 의미상으로는 왕의 존재, 상태,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다.27) 영 어로는 황제 emperor의 존재 및 상태를 나타내는 ‘Empire’로 번역된다. 로마 제국에서 basilei,a는 로마황제 basileuj, 의 주권 및 상태를 명시할 때도 사 용되고 있었다.28) 마태도 예수님을 basileu,j로 표현한다(마 2:1-3, 9; 21:5; 27:11, 29, 37, 42). 아마도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 까이 왔다”(마 3:2; 4:17)라고 선포했을 때 마태는 ‘하늘나라’의 표현에서 로 마의 ‘제국’ 개념을 사용하지만 로마제국의 형태가 아닌 새로운 대안의 삶 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29) 로마제국의 삶의 대안 형태를 복음서 기자가‘하늘제국’이란 개념으로 사용했다면, 로마제국의 시스템이 어떠했는지 살 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카터는 존 카우츠키(John Kautsky)30)와 게르하드 렌스키(Gerhard Lenski)31)의 로마제국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정치적, 경 제적, 사회적, 군사적, 종교적 파워를 휘두르고 있었던 로마제국의 시스템 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32)
1. 로마제국의 경제적 지배는 땅, 노동력, 자원들에 대한 소유권(ownership)을 통해 이루어진다.
2. 사회계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부들, 어부들, 지역의 상인들로부 터 걷어진 세금과 공물은 지역의 땅주인들, 제국의 관리자들의 부를 축 척하는 데 사용되었다.
3. 로마의 군사적 파워는 실제적이었고 로마제국의 명예와 부를 유지 하는 데 기본적 바탕이 되었다. 세금을 거부하는 행위는 반역의 행위로 간주되었고 로마군대가 곧바로 관여하여 징계하였다.
4. 전쟁은 로마제국에 큰 폐해를 입힐 수 있으므로 로마는 웬만하면 전쟁을 피하고자 지역의 엘리트들과 공조하려 하였고, 각 지역의 지도권 을 인정하고 제국의 관료 지배 및 간섭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제사장을 비롯한 지역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관료들이 공 조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5. 황제로부터 내려오는 광대한 후원은 제국에 대한 충성과 특권, 의 존의 네트워크를 공고히 했는데, 지역의 엘리트들은 건물을 짓거나 축제 를 주관하거나 모임을 주선함으로 부와 힘을 과시했고, 그것으로 말미암 아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득 을 취하였다.
6. 로마제국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제국주의적 신학(Imperial theology)은 황제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던 동전, 동상, 건물들,축제들, 시인들, 작가들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주피터가 로마제 국과 황제들을 선택했고, 그들에 의한 제국적 통치는 신권에 의한 것이 라는 정치적 선전에 사용되었다.
7. 설득력 있는 연설을 위해 사용되었던 수사학은 사회적 질서와 지 배, 엘리트 계급의 위치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8. 소위 로마의 “정의”는 엘리트 지배계급을 보호하기 위한 체제였고,이러한 구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엄벌하였다. 그 예로 십자가 처형은 로마시민이 아니거나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시스템에 저항 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렇듯 로마제국에 의해 매일의 삶을 지배 받고 있는 초대 기독교인들에 게 마태가 전하는 ‘하늘제국’은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 는 로마제국을 심판하는 은유적 기제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대안적 실 체이다. 마태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 받은 메 시아라는 것에서 출발한다(마 1:1, 16, 17, 18을 비롯한 마태의 첫 번째 이야 기 단락의 핵심). 즉 로마제국의 황제가 주피터에 의해 치리권을 수여받은 대리자가 아니라 예수가 하늘제국의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진정한 왕이라 는 것이다. 하늘제국의 시행자(agent)로 온 예수는 하늘의 진정한 축복과 질 서(마 5-7장), 인간의 삶의 회복을 위한 치료 사건들을(마 8-9장) 통해 로마 제국의 시스템이 하나님의 뜻과 충돌되고 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하늘제 국의 질서를 은밀한 가운데 확장시켜 나간다(두 번째 단락의 핵심). 그러나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하늘제국의 질서를 구원과 감사함으로 받아들 이는 사람으로부터 강하게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세 번 째 단락의 핵심). 예수는 하늘통치의 시민은 이 땅의 시민들과는 전혀 다르 게 행동해야 함을 가르치시면서(마 20:25-26), 고난과 섬김이 바로 이 땅의 제국을 전복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친히 그 길을 가 신다(네 번째, 다섯 번째 단락의 핵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제국의 진정 한 희망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에 있으며 이 땅의 제국의 대안적 종말적 공동체로 제자들이 예수의 길을 지속하도록, 그리하여 이 세대의 제국주의 가 결과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폭정, 질병, 부정의, 가난 등에 대항하여 정의 를 세우고 치료와 회복과 생명의 사역이 지속되도록 제자들을 격려하는 것 으로 마무리된다(여섯 번째 단락의 핵심). 즉, 마태는 로마제국의 문화권에 서 사용되는 단어나 개념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전혀 다른 대안(counter- concept)을 삶과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마태의 이야기적 흐름에서 마태복음 11:12인 ‘침노당하는 천국’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 표현을 통해 마태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 일까?
20) 로마제국을 그리스어로 h` basilei,a th/j Rw/mhj라고 한다면, 그에 같은 단어이지만 대응하는 개념으로 복음서 기자가 하늘제국(h` basilei,a twn/ ouvranw/n)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 기에 필자는 ‘로마제국’에 대한 대치개념으로 ‘하늘제국’을 ‘천국’ 또는 ‘하늘나라’와 함께 번갈아가며 이 논문에서 사용하고자 한다.
21) D. C. Sim, The Gospel of Matthew and Christian Judaism: The History and Social Setting of the Matthean Community, SNTW (Edinburgh: T&T Clark, 1998); J. A. Overman, Matthew’s Gospel and Formative Judaism: The Social World of the Matthean Communi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J. Riches, Conflicting Mythologies: Identity Formation in the Gospel of Mark and Matthew, SNTW (Edinburgh: T&T Clark, 2000); Anthony J. Saldarini, Matthew’s Christian-Jewish Commun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Warren Carter,Matthew and the Margins: A Social-Political and Religious Reading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P. Foster, Community, Law, and Mission in Matthew’s Gospel, WUNT 2:177 (Tübingen: Mohr Siebeck, 2005); D. R. A. Hare, “How Jewish is the Gospel of Matthew?”, CBQ 62 (2000), 264-277.
22) Warren Carter, The Roman Empire and the New Testament: An Essential Guide (Nashville: Abingdon Press, 2006); Pontius Pilate: Portraits of a Roman Governor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03); J. Andrew Overman, Church and Community in Christ –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Valley Forge: Trinity Press, 1996); John Riches and David C. Sim, The Gospel of Matthew in its Roman Imperial Context (London;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5); 마태복음과 로마제국과의 관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마태복음의 친 로마적, 반로마적 입장, 현상적으로는 친로마적으로, 실천적으로는 반로마 입장을 보인다 는 논의는 김학철, “마태복음서와 로마의 통치- 로마제국과의 관계 설정의 문제를 중심으 로”, 「성서학학술세미나」5(2008),1-21을참조하시오.
23) Warren Carter, Matthew and Empire: Initial Exploration (Harrisburg: Trinity Press International, 2001), 1-3; “Proclaiming (in/against) Empire Then and Now”, Word & World 25:2 (2005), 151; “Resisting and Imitating the Empire”, Interpretation 56:3 (2002), 260-262; “Contested Claims: Roman Imperial Theology and Matthew’s Gospel”, Biblical Theology Bulletin 29 (1999), 56-67.
24) Warren Carter, The Roman Empire and the New Testament, 1-3.
25) Warren Carter, Matthew: Storyteller, Interpreter, Evangelist (Peabody: Hendrickson, 2004),132-153을 참조하시오.
26) 마태복음의 내러티브적 구조연구에 대하여는 F. J. Matera, “The Plot of Matthew’s Gospel”,CBQ 49 (1987), 233-253과 Warren Carter, “Kernels and Narrative Blocks: The Structure of Matthew’s Gospel”, CBQ 54 (1992), 463-481의 두 논문을 참조하시오.
27) Karl L. Schmidt, “bacileuj, , basilei,a”, TDNT, Vol. I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 576-579.
28) 요세푸스는 로마의 황제들을 basileu,j로 묘사하였다(J.W. 3. 351; 4.596; 5.58). Warren Carter, Matthew and Empire, 62에서 재인용.
29) 마 4:8-9에 나오는 예수의 시험사화에서도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pa,saj ta.j basilei,aj tou/ ko,smou)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제국이 사탄에게 속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예수는 사탄에게 속한 제국이 아닌 하늘에 속한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는 것으로, 바로 ‘하늘나라’가 새로운 대안임을 마태는 전하는 것이다. Warren Carter, Matthew and Empire, 63.
30) John Kautsky, The Politics of Aristocratic Empires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1982), 49-75, 144-150, 160-229, 235-238, 273-319.
31) Gerhard Lenski, Power and Privilege: A Theory of Social Stratification (New York: McGraw-Hill, 1966), 51, 195, 210-214, 243-256, 271-280.
32) Warren Carter, “Proclaiming (in/against) Empire”, 153-154; Matthew and Empire, chap. 1 and 2.
4. 침노당하는 천국에 대한 마태의 신학적 고찰
본 연구의 핵심 구절인 마태복음 11:12은 위에서 제시한 마태의 세 번째 이야기 단락에 속한다(11:2-16:20). 이 구절이 속해 있는 마태복음 11장을 세부적으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33)
11:2-6 -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세례 요한의 질문
11:7-15 - 세례 요한의 정체성에 대한 예수의 진술
11:16-19 - 세례 요한과 예수에 대한 거절과 부정적 반응
11:20-24 - 복음에 거절 반응을 보인 도시들에 대한 화
11:25-30 -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초청
첫 번째 이야기 단락이 하늘나라의 선포자요 시행자로 예수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면, 두 번째 단락은 말씀과 행위로 하늘나라의 삶을 실행하는 예수에 대해 전개하고 있다. 하늘나라의 특징은 소위 산상수훈으로 알려져 있는 5-7장에 잘 설명되고 있으며, 8-9장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의 영향 아래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치료와 회복에 힘쓰고 있다. 10장에서는 열 두 제자를 세우시고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똑같이 하도록 권위를 부여한 뒤,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이 선교를 하는 동한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 을 것과 박해 받을 것에 대해 미리 예고한다(10:16-23). 또한 이 땅에서의 예 수의 선교 자체가 세상의 화평이 아닌 검으로의 분열을 일으키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임을 명시한다(10:34-39). 그 다음에 등장하는 본문이 바 로 11장이다. 마태복음의 주석학자들은 대부분 11-12장의 전체 주제를 예 수의 복음에 대한 거절이나 부정적인 반응을 다루는 장으로 분석한다.34)11:1은 10장에서 열거된 예수의 가르침을 결말짓는 요약구절이고, 2절부터 는 요한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요한이 예수의 메시아성에 의심했다는 이유는 그 만큼 예수의 선교로 시작된 하늘나라이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고통이 존재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 에 대해, 예수는 이사야 말씀들을(사 25:4; 26:19; 29:18; 35:6; 61:1) 인용하며 예수의 메시아 사역은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실히 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 예수는 역으로 요한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11:7-15), 이 맥락에서 본고의 관심인 11:12이 언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이 침노를 당하고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을 때, 요한은 이미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다(4:12). 예수는 하늘나라에 대해 먼저 선포했던(3:2) 세례 요한이 옳은 일을 하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시작했을 것이다.
7절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ka,lamon up` o. avne,mou saleuo,menon)는 요단강 기슭에 자라는 무리의 풀들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은유적으로는 헤롯 안티파스에 대한 암 시가 가능하다.35) 왜냐면 헤롯 안티파스가 주조한 동전에는 갈대를 들고 있는 헤롯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공모세력인 이 세상의 권력자(헤롯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을 감옥에 넣은 것을 빗대 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이어 8절에 나오는 왕궁의 “부드러운 옷을 입 은 사람들”과도 연결되는데, “부드러운 옷”은 엘리트 계급의 부와 폭정을 상징하는 것으로36) 헤롯을 비롯한 이 땅의 제국의 통치와 공모된 권력자들 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왕궁에서 지내지만, 하늘통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3:4) 정의 를 선포하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땅의 제국은 ‘흔들리는 갈대 헤롯’, ‘부드러운 옷’, ‘왕궁’으로, 하늘의 제국 은 ‘세례 요한’, ‘털옷’, ‘광야’, ‘감옥’으로 비교되어 은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이어 9, 10절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규정한다. 말라기 3:1과 출애 굽기 23:20의 혼용으로 인용되는 마태복음 11:10은 세례 요한이 이 땅의 제 국을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길을 준비하는 선 지자임을 알린다. 이것은 말라기 4:5에서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 임을 언급하는 14절에서 확고해진다.
11절은 세례 요한이 옛 제국과 하늘나라 사이의 과도기적 인물임을 알리 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는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이다. “여자가 낳은 자 중 에” 란 표현은 히브리식 숙어 표현으로(욥 14:1; 15:14; 25:4; 1QH 13:14; 18:12-13, 16, 23), 지상 모든 인간존재를 나타내는 유대적 표현이다.37) 세례 요한은 선지자로서, 선지자보다 더 큰 자로서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주의 길을 예비했던 그 결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인 것이다. 비록 그는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고 곧 순교할 처지이지만(마 14:1-12), 예수는 그를 이 땅에서 가장 큰 자로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1하반절에는 o` mikro,teroj(가 장 작은 자)가 하늘나라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라고 설명한다. ‘작은 자’는 마 태복음에서 예수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10:42; 11:25; 18:4, 6, 10, 14; 19:30; 25:40, 45 참조).38) 이들은 이 땅의 제국에서는 실질적으로 힘 없고 약한 자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하늘나라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을 평가절하 하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 통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고, 하늘나라의 가치와 질서는 이 세상의 제국 과는 전혀 다르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39)
그 다음에 소개되는 11:12의 침노를 당하는 천국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 을까? 11절과 연결하여 이 세상의 제국(로마제국)과 전혀 다른 가치와 질서 체계인 하늘제국은 세례 요한의 길을 예비함과 예수의 선교로 이미 시작되 었으나 그 실체는 복음에 대한 거절, 세례 요한의 감옥행, 곧 이어질 그의 순 교를 포함한 많은 고통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0:3440)에 서부터 예견되었으며, 이미 임한 하늘통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를 드러내 는 이 세대의 비유(11:16-19)와 회개하지 아니하는 갈릴리의 도시들에 대한 화 선언(11:20-24)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누구에 의해 침노를 당하고 있는가?
침노하는 자들(biastai.)에 의한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베츠(O. Betz)는 쿰란문서에 나 오는 ‘거룩한 전쟁’의 개념에 입각하여 천국을 강탈하는 자를 사탄, 벨리알 로 규정한다.41) 무어(E. Moore)는 그 당시의 폭력적이고 열심 있는 바리새인들이 하늘나라를 침노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며,42) 쉬렝크(G. Schrenk)는 1세기에 폭력적으로 강탈하는 행위를 하고 있었던 열심당을 의미할 수 도 있다고 주장한다.43) 엘르웰린은 biastai.를 악한 포도원 농부비유(마21:33-46)와 연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포도원 주인을 거절하고 그 아들을 폭행한 농부들이 11:12의 천국을 강탈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한다.44) 캣치폴 은 당대에 존재했던 쿰란문서(1QH 2:10-17, 20-30; 6:22b-35)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거룩한 전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폭력을 행하는 자들”과 비교 할 수 있다고 하고, 마태복음에서 폭력을 행하는 자들은 예수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율법과 선지서의 권위에 빗대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라고 해석한다.45) 메튜 베이츠(Matthew W. Bates)는 마태복음 11:7-15이 세례 요한을 다루는 본문이고, 7절의 흔들리는 갈대, 8절의 부드러운 옷을 입 은 자는 모두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둔 헤롯 안티파스를 은밀하게 지칭하며 비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12절의 천국을 강탈하는 자 역시 헤롯 안티 파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46)
이러한 다양한 의견에 대해 필자는 먼저 천국을 강탈하는 자들을 열심당으로 보는 견해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왜냐면 열심당들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기 전부터 이미 활동하고 있 었으므로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의 범위에는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를 예수를 통한 하늘통치의 준비단계 및 시작의 시기 로 본다면, 천국을 강탈하는 자들은 예수의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 즉 하늘 통치와 다른 세상을 이끌어가는 로마제국의 권력자들, 그 세력과 공모하고 있는 헤롯 안티파스를 비롯한 유대 엘리트 지도자들, 그리고 마태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적대 세력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이 쓰였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지역은 시리아 지역 의 중심 도시인 안디옥으로,47)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48) 안디옥은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도시인 만큼 제 국관료들의 행정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 다. 실질적으로 많은 황제들이 다녀갔던 곳이고,49) 로마식의 건물들과 신 전, 극장, 목욕탕들이 건재하였으며, 로마의 통치를 상징하는 여러 동상들 이 세워져 있었던 곳이다. 로마제국의 존재 자체와 제국을 대표하는 황제들이 신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대리자들이라는 제국주의적인 사상과 신화 들은 로마의 철학자들과 작가들에 의해 지지되었고, 황제들의 생일을 비롯 한 여러 로마의 축제들이 안디옥에서 열렸으며, 신전의 제사장들은 황제들 을 위한 희생 제사 및 기도, 제국을 찬양하는 예식을 올렸다.50) 매일의 삶이 로마제국의 정치나 사회,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마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제국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기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국을 침노하는 강탈자들은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거스르는 로마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관료들, 기독교인들을 이단이 라 취급하며 박해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일차 대상이지 않았을까 생각 된다. 이들은 이 세상의 제국에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힘 있는 자들이었고, 자신의 힘으로 천국을 사유화하고자 했던 자들이었던 것 이다. 이들에 의해 ‘침노당하는 천국’은 하늘의 뜻에 따라 살고자 할 때 만 나게 되는 고통과 박해의 실재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마태는 세례 요한의 고통과 하늘통치의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탄식 표현으로‘침노당하는 천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1:15에서처럼, 귀 있 는 자들만이 제대로 깨달아 알 수 있는 하늘의 언어인 것이다. 침노당하는 천국에 대한 마태의 대안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것이며(11:28-30),51) 로마제국의 통치에 대한 대안으로 하늘통치의 공동체를 만들 어 내는 것이다.
33) 학자들은 마 11장을 일반적으로 크게 두 부분(11:2-24; 11:25-30) 또는 세 부분(11:2-19; 20-24; 25-30)으로 나눈다. 필자는 마 11:2-19의 이야기를 좀 더 세분화하여 다섯 단락으로 나누었다. Ulrich Luz, Matthew 8-20, 129;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Matthew II, 235; Margret Hannan, The Nature and Demands of the Sovereign Rule of God in the Gospel of Matthew (London; New York: T&T Clark, 2006), 84-92 참조.
34) Ulrich Luz, Studies in Matthew, 15;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Matthew 8-18, 233-234; Warren Carter, “Kernels and Narrative Blocks”, 476-477; 도널드 헤그너, 마태복음 , 507; 더 글라스 R. A. 헤어, 마태복음 , 최재덕 역, 현대성서주석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179; Craig L. Blomberg, Matthew,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 22 (Nashville: Broadman Press, 1992), 183.
35) 도널드 헤그너, 마태복음 , 517. 베이츠는 마 11:12와 눅 16:16-18이 모두 헤롯 안티파스에 대한 암시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Matthew W. Bates, “Cryptic Codes and a Violent King”, 92-93.
36) Warren Carter, Matthew and the Margins, 251.
37) Ulrich Luz, Matthew 8-20, 139; R. Gundry, Matthew: A Commentary on His Handbook for a Mixed Church under Persecu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208.
38) 구기정, “마태복음 안의 작은 자”, 「교회와 문화」 16 (2006), 117-135 참조.
39) 구기정,“마태복음11:2-19안의지상큰자(μείζων)와하늘작은자(μικρότερος)”, 51.
40)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개역개정 )
41) O. Betz, “The Eschat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inai-Tradition”, 99.
42) E. Moore, “BIAZΩ, APΠAZΩ and Cognates in Josephus”, NTS 21 (1974-1975), 541.
43) G. Schrenk, “βίαζομαι, βιαστής”, 611.
44) Stephen Llewelyn, “The Traditionsgeschichte”, 348-349.
45) David R. Catchpole, “On Doing Violence”, 58-60.
46) Matthew W. Bates, “Cryptic Codes and a Violent King”, 80-83.
47) D. C. Sim, Matthew and Christian Judaism, 40-62.
48) 요세푸스는 시리아의 안디옥을 로마제국의 3번째 도시로 묘사한다(J.W. 3. 29). Warren Carter, Matthew and Empire에서 재인용. 38.
49)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다녀갔고, 66년에는 베스파시안, 71년에는 디도가 다녀갔으며, 트라이얀 황제는 114년 파티아(Parthia)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로마군 대의 주둔기지로 삼았으며, 115년에는 지진을 피해서 안디옥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렇 게 로마황제들이 안디옥 방문이 잦았다는 것은 그만큼 도시가 로마제국의 정치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Warren Carter, Matthew and the Margins, 37.
50) Warren Carter, Matthew and Empire, 37-50.
51) 카터는 마 11:28-30도 역시 로마제국에 대응하는 예수의 메시지로 해석해 낸다. 즉, 로마가 부여하는멍에가아닌예수의멍에를지고배우는것은하늘나라통치의전혀다른질서속 에서 온전한 인간의 구원과 삶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Warren Carter, “Take my Yoke Not Rome’s: Matthew 11:28-30”, Matthew and Empire, 108-115.
5. 결론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침노당하는 천국과 그 천국의 빼앗는 자들(마 11:12)에 대한 해석은 마태복음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함을 살펴보았다.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마태복음11장은 감옥에 붙잡힌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의 메시아 됨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11:2-3), 예수의 선교활동을 통해 이미 하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예수의 확언과(11:4-6), 하늘의 통치는 시작되었으나 이 땅의 통치를 대표하는 로마제국이 하늘의 통치를 거슬러 활동하고 있다는 것(11:7-8), 이 제국의 힘 있는 관료들, 즉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은유된 헤롯 안티파스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왕궁에 사는 사람들로 표현된 제국의 공모자들은(로마제국의 제도와 영향력 하에 이득을 얻고 사 는 엘리트들과 유대 지도자들) 하늘의 통치를 준비했던 선지자 중의 선지 자인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복음을 방해하고 있음에(11:9-11), 예수께서는 안타까움으로 천국이 침노를 당하고 있다는 것과 침노하는 자들이 빼앗고 있는 현실을 탄식하는 것이다(11:12).
이러한 예수의 탄식은 다음 단락에서도 연결되는데, 말라기 4:5에서 예언된 엘리야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밝히시며(11:13-15) 하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 세대와(11:16-24) 회개하지 않는 갈릴리의 도시들에 대한 화 선언으로(11:20-24) 이어진다.
마태 역시 로마 제국의 정치, 문화 영향권이 강력한 도시,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이미 하늘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이 세상 제국의 통치 아래 계속 고통과 수치와 박해 속에 있는 자신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침노당하는 천국’의 고백을 통해 신학적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시대, 마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역시 천국은 침노당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 되심을 망각하고, 자신이 가진 권 력과 부와 명예를 누리는 데 빠져 있는 이 땅의 제국의 권력자들, 작은 자들 을 돌보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사랑과 평화는 저버리고 소수 엘리 트들의 이득만을 취하기 위해 사회, 정치, 경제, 종교 시스템을 이용하는 힘 있는 자들(biastai.), 이들이 바로 천국을 강탈하고 유린하는 자들이다.
마태를 통한 ‘침노당하는 천국’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지금까지 임재하고 있는 천국과 침노당하는 천국에 대하여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과, 말할 수 있는 입과, 행동할 수 있는 몸으로 우리를 향해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온 몸으로 반응하며 춤을 추는 것(11:17)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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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박사(안산대학교조교수)/
첫댓글 후원은 한분도 없고 카페도 그만둬야 하고
이렇게 기독교가 버림받는거 같습니다 먹어야 카페도 하는데..
통신료와 공과금으로 30만원이 필요합니다
카페운영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십시요
매일 이걸 해야하나 갈팡질팡하고 갈등합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사명인데 요즘은 너무힘드네요
카페운영을 위해 작은 성금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페에 후원을 하신분은 사랑회원(최우수)이 되십니다...
카페지기의 생활이 어렵습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도와주시면 카페 운영에 큰힘이 됩니다
후원이 없다보니 공과금과 약값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카페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않좋아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