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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주일, 이 절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기며, 오늘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현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지금부터 505년전,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의 출입문에 95개 조항의 논제를 써붙였습니다. 면벌부의 능력과 효력에 관한 토론 주제입니다. 당시 비텐베르크에서 신학 명제를 정하고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루터가 95개조의 토론 제목을 써 붙인 이유도, 면벌부에 대하여 신학적인 토론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아무 날, 어느 장소에서 이 논제에 관한 토론회가 열리니, 모두 다 이 논제들에 대해서 숙고하고 토론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서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가톨릭 교회가 발행한 면벌부였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지만,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바치면, 사제는 죄를 범했다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참회하는 신자에게, 그 죄에 상응하는 보상 행위를 일러주고, 죄가 용서받았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 줍니다. 죄에 대한 보상행위가 보속입니다. 대개 기도나 금식을 하라든지, 혹은 이웃에 대한 자선을 실천하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하여 막대한 건축기금이 필요했는데, 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면벌부를 발행하였습니다. 대성당 건축에 재정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영광스런 일인데, 면벌부를 구매함으로써 죄에 대한 형벌도 면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연옥에 가서 생전에 미처 다 치르지 못한 죗값을 치러야 하는데, 그 영혼을 대신하여 살아있는 사람이 면벌부를 사면, 그 영혼을 연옥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면벌부를 사면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혹은 사랑하는 가족을 연옥에서 빨리 건져맬 수 있다니, 사람들은 누구라도 당연히 서둘러 면벌부를 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면벌부가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헛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면벌부를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죄를 고백하거나 뉘우치거나 회개할 필요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로 된 증서 한 장을 사는 것으로 벌을 면제받는다는 것은 루터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무슨 선행을 하거나 헌금을 하거나 면벌부를 사거나, 어떤 공로를 세우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루터의 확신이었습니다. 오직 인간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루터는 믿은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의 근거는 성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을 하는 분이었는데, 세속적인 성공을 위하여 루터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루터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법학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루터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함께 가던 친구가 낙뢰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루터는 두려운 마음에 땅에 엎드려서 ‘제발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노라’고 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시대에는 흑사병이 창궐하기도 하였고, 대중적으로 악령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루터는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 속에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회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스물둘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부질없는 생각이 떠오르거나 부지불식간에 잘못을 행했음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기도 하고, 성실하게 고해성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의로움을 얻기 위하여 애를 쓰면 쓸수록 구원의 확신보다는 도저히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될 뿐, 그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29세가 되던 해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신학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513년부터 1515년 까지는 시편을 가르쳤고, 1515년부터 1516년까지는 로마서를 강의했습니다. 당시 루터의 연구실은 수도원의 탑 속에 있었는데, 그 연구실에서 루터는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로마서 강해는 루터의 생애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로마서를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개념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불의를 미워하시며, 인간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처벌하시는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것이 이전에 루터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존재라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충분히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의로움을 얻기 위하여 아무리 애를 써도 스스로 의로운 존재라고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확신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는 이 로마서 1:17의 말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이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심판과 형벌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죄인들은 반드시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그 죄를 감당시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죄를 대신 감당하게 하시고 희생의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우리 인간이 선행을 하고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해져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즉, 의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창세기15장 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핵심이고 뿌리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죄가 없고 무슨 공로를 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기준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 온전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은 무엇을, 어떻게 믿었습니까?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본토와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명령을 따라 아브라함은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가야 할 그 땅이 어디인지도 모랐습니다.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가나안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네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지만, 지금 그에게는 단 한 명의 후사도 없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지고 노인이 되어서, 생리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후손을 가질만한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청년 하나를 양자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네 상속자가 아니다. 반드시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다는 것은 곧 그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당신을 믿고 신뢰하는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그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시험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것은 곧 너의 생명을 내 놓으라는 말씀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막으셨지만 그는 아들을 칼로 찌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이고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인하여 산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말할 때, 그 뜻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입니까?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성경 지식도 있으니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전도도 하고, 사회봉사와 기부를 많이 하면 그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물론 그런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일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나 선행과 같은 공로 자체가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믿는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에무나’란 말은 ‘믿는다’는 뜻 외에 ‘성실하다, 신실하다, 순종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은, 너는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그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은혜,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믿는데, 지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하는데,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실천적인 행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 믿음’과 함께, ‘오직 성경’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정신 하나는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혜가 공짜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받았다는 것은 공짜로 선물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아무런 조건없이 받기만 하면 되는 그런 공짜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요구하여 자신의 상속분을 미리 받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갔습니다. 먼 나라로 간 이 아들은 허랑방탕하다가 모든 재물을 허비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스스로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바란 것은, 그저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 중 하나로 받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기에,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아들은 말하지만, 아버지는 종들에게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주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말합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사실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아무 자격이 없습니다. 내 집의 종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호적에서 파버려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받아주시고 자격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돌아온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하고, 그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은혜를 베푸신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들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베푸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아들로서의 책임을 힘써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혁(改革)이라고 하는 말은 ‘고칠 개’ 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가죽 혁’ 자를 썼습니다. 개혁이란 가죽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개혁에는 피부를 벗겨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의 신앙과 인격과 삶에서, 혹은 오늘 우리 교회에서, 우리가 벗겨내야 할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더욱 신실한 교회로 거듭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하고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