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용 장군의 일세기
나대용장군은 1556년(명종 11년) 7월25일 전남 나주 태생으로 28세(1583년·선조 1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奉事)로 재직하다 32세(1587년·선조 20년)에 훈련원 봉사를 사직하고 낙향하여 거북선 연구에 몰두, 1590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당시 오륜동)의 방죽골에서 거북선 실험 제작에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선조 24년) 당시 전라좌수영수사로 있던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막하에 전선(戰船) 감조(監造) 군관으로 들어가 거북선 및 각종 무기 제작 책임자로 종사하였고, 임진왜란 발발 해인 1592년(선조 25년) 4월12일 거북선을 진수하여 발포실험을 성공함으로써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전투함을 건조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시 나대용장군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도와 손수 만든 거북선을 이용하여 옥포해전(1592년 5월7일), 한산대첩(1592년 7월8일)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사천해전과 한산대첩에서는 적탄에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 나대용장군은 강진현감, 금구현감, 능주현감, 고성현감 등을 역임하면서 목민관으로서 민생문제와 치안유지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정묘왜란시에는 명량해전(1597년 9월16일)과 노량해전(1598년 11월18일)에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는 등 총 15여회의 해전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림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왜란 이후 남해현령으로 제직시에는 '창선'이라는 철감선과 '해추선이라는 쾌속선을 고안하는 등 우리 역사상 가장 탁월한 조선기술자이자 구국분전한 용장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611년(광해군 3년) 당시 경기도의 수군을 관장하는 경기수사(종2품)를 제수받았으나 임란시 입은 탄환 상처로 인해 1612년 1월29일 향년 57세로 별세하였다.
이러한 역사에 빛날 업적에도 불구하고 충무공의 업적에 가려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1974년도에 노산 이은상선생을 중심으로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서부터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나대용장군의 고향인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는 나대용장군의 생가, 묘소, 방죽골, 장군바위 등이 전라남도 문화재 기념물 제 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나대용장군 기적비, 나대용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소충사(昭忠祠)'가 있다. 매년 4월21일 소충사에서는 나대용장군 추모식이 열리는데 일반적으로 추모제는 고인의 탄신일이나 서거일에 행하여지는데 비하여 나대용장군 추모식은 '과학의 날'인 4월21일에 거행되고 있다. 그 이유는 평생을 군함건조에 몰두하여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우수한 군함을 고안·건조한 발명가이자 조선기술자인 나대용장군의 뛰어난 창의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 소령 박영식(해군9전단) 글 욺김) 사진 참찬공파 (장승안)현지 찰영
나대용 징군의 생가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생가의 분체 (보존되여 있슴)
안방
생가의 경관
나대웅 장군위 위페가 봉안된 소충사
소충사는 오르기가 힘들군요
장군의 묘소르 찿아가는길이 너무나 힘들군요
( 문평면 공무원의 협조로 이곳까지 동행해주신 공무원님 너무 고마워요)
장군님의 묘소는 아직 벌초는 안되여 있고 같이 동햏한
공무원도 마음이 언짠은 기분이였습니다 ..벌초가 안되였기때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