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
3-1 연암 박지원은..
괴짜 작가로 이름을 날리다
베스트셀러 작가 박지원, 노론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음에도 어딘가 좀 괴짜 같은 면이 있는 양반.
문과 1차 시험인 초시에서 장원을 하며 영조에게 주목을 받았지만, 정말 중요했던 2차 시험에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함.
왜??실력도 없으면서 관료가 되겠다며 대놓고 컨닝을 하고, 시험관 매수가 판을 치던 조선 후기의 과거 시험장의 모습을 보고, 이런 흐릿하고 더러운 세상에 몸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함.
어쩌면 박지원의 그런 모습은 시대를 비판하는 그의 소설과도 닮아있을지도 .....
혹시 2,000년도 한국의 인기 탑 작가 김홍신(인간시장)의 전신???
매력1 :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통쾌하게 풍자하는 소설
어떤 시대나 사회의 모습, 사건이나 인물을 직접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하거나 과장된 다른 모습을 빌려 비판하는 것을 ‘풍자’라고 하며,
박지원은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며 사회는 급속도로 변해 가는데 양반이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체면을 내세울 줄만 알았지 현실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는 것을 풍자하고 싶었던 모양임...-.-:::.
박지원의 소설에서는 이런 조선 후기 사회 양반들의 무능하고 부패한 모습이 통쾌하고 속 시원한 풍자와 함께 표현되고 있음.....Very 통쾌 상쾌 유쾌!!!!.
매력2 : 재미있는 표현과 유머가 담긴 문장 =김삿갓과 쌍벽을 이룬 인물??
박지원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날카로운 비판이 살아있으면서도 유머와 재치가 담긴 문장으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는 점.
겉보기엔 가볍고 장난스러운 문장 같은데 알고 보면 깊은 뜻이 담겨 있음.
“시장에서 개를 살 때 개 값이 두 냥인데, 양반은 냥 + 반이라 한냥 반밖에 안한다.
양반은 개 값보다 저렴하다!”라는 식임..
원래 누군가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일은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법인데, 박지원의 소설에서는 적절하고도 기막힌 표현을 쓰다 보니 ‘맞아, 맞아’라며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을것이다.
매력3 : 당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다
후에 나라 말아먹은 노론 집안에서 태어난 양반임에도, 하층민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점이 인상적.
저잣거리와 산천을 떠돌아다니며 거리낌 없이 백성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삶을 애정을 가지고 관찰했던 박지원의 진실된 태도.
김삿갓과도 통하는데가 있을것 같음.....
매력4 : 작가 박지원의 실학 사상이 마음껏 표현된 작품
박지원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실학 사상을 드러내고 있음.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사회에 등장한 상인 계층의 인물들을 보여 주기도 하고, 소설 속의 인물을 통해 박지원이 꿈꾸었던 개혁을 실행하기도 함.
선비들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상공업의 중요성을 깨달아 나라의 발전을 돕는 모습에서 그만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데...왜 정조는 그런것을 추진 못했을까......노론 땜시일까????
3-2 열하일기란
《열하일기》(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이44세 때인1780년(정조5년)에 삼종형(8촌 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사절로 북경(당시의 연경)에 갈 때 따라가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 .
(현재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이 소장되어 있음)
구성
《열하일기》는26권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본이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서 발견되었다.
내용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수단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비판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는 청의 털모자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평가
현재 남아있는 《열하일기》의 필사본은 아홉 종. 당시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지를 보여준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거나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다.
당대에'점잖은 글'이랍시고 일상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판에 박힌 것 같은 글과는 전혀 다른 문체,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쓰기도 하고 거기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켰다는 분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열하일기》에는 절실히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어필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열하일기의 구성
《도강록(渡江錄)》: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15일간의 기록.
《성경잡지(盛京雜識)》: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5일간에 겪은일에대한 필담 중심의 기록.
《일신수필(馹迅隨筆》: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9일간의 일을 쓴 기록.
《관내정사(關內程史)》: 산해관(山海關)에서 북경에 이르는11일간의 기록. 여기서 호질(虎叱)이 나온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북경에서 열하(熱河)에 이르는5일간의 기록.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열하에 도착해서 그곳 태학관에 머무는15일간의 기록.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를 출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6일간의 기록.
《경개록(傾蓋錄)》: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이력과 면면을 묘사한 일종의 스케치.
《황교문답(黃敎問答)》: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더불어 나눈 라마교에 대한 대화를 쓴 기록.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과 청나라에 전파된 라마교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
《찰십륜포(札什倫布)》: 라마승과 반선의 모습, 조선사신들이 판첸라마를 만난 일 등을 적은 기록.
《행재잡록(行在雜錄)》: 조선과청나라 황실 사이에주고 받던 외교문서와 외교문서를 쓴 내력를 옮겨적은 기록.
《망양록(亡羊錄)》: 중국 지식인들과 필담형식으로 주고 받은 음악이야기.
《심세편(審勢編)》: 박지원 스스로가 본 당시 중국의 형세와 이를 면밀히 보는 법을 적은 기록.
《곡정필담(鵠汀筆談)》: 중국 지식인들 중 하나인 곡정과 장장16시간 동안 벌인 과학, 역사, 철학, 시문 등의 필담을 정리한 기록.
《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熱河)의 피서산장에서 쓴 아홉 편의 기행록을 엮은 기록.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 이야기(상기:象記)가 여기서 나온다.
《환희기(幻戱記)》: 중국에서 본 마술에 대해 묘사한 기록.
《피서록(避暑錄)》: 중국에서 본 시들에 대해 기록하고 평한 시화(詩話)의 기록.
《구외이문(口外異聞)》: 열하에서 들은 이야기나, 박지원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짧은 잡기 형식으로 모아놓은 기록.
《옥갑야화(玉匣夜話)》: 사신들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8]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은 기록. 여기에서 그 유명한 허생전이 나온다.
《황도기략(黃圖紀略)》: 북경의 명승지와 건물들에 대한 내력과 묘사를 엮은 기록. 성당과 서양화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알성퇴술(謁聖退述)》: 북경의 유교명승지를 둘러보고 쓴 기록.
《앙엽기(央葉記)》: 북경 안의 기타 종교 유적들을 둘러 보고 쓴 기록.
《동란섭필(銅蘭涉筆)》: 주로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암의 의견이나, 중국의 견해를 짧은 글 형식으로 쓴 기록.
《금료소초(金蓼小抄)》: 중국 의서에서 본 치료요법이나, 자신이 가장 효험을 본 민간요법을 적은 기록
<내용 참고 :네이버...Zum....Daum 등에 서 내용 발췌함>
3-3 연암에게 고함
1,700년도 후반부면 18세기 후반이다.
유럽에서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날 즈음이고,동양의 일본에서는 에도시대 막부의 마지막을 향한 기울임이
한장일 때인데, 왜 그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연암은 청국에만 매달려야 했을까....
한자로는 일본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을 터인데...그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구구식 소총과 박격포 정도로 나라를 호령했다면,저들은 벌써 이지즈함과 뱅기를 띄우는 최신형 근대국가 직전이었을텐데,
왜 그대는 일본이나 서양을 안보고 오로지 북쪽만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까...
당시 최고의 해학과 재치를 한몸에 지녀 많은 선비들로부터 응원과 부러움을 샀었겠지만.
5,000년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에겐 손에 쥐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도...하지도 못한다는걸 알면서도...
그래서인가??
조선의 국력과 정체성의 한계.그것을 지금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참으로 답답하기는 하다...
그래서 말인데....
그때 큰맘먹고 일본도 가봐고 더큰 세상 돌아다녀보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러면 우리도 더 일찍이 세상을 바꾸었을터인데....
연암같은 선각자가 안나오는것이 참으로 애닮는 심정이네요.
혜초 선배는 불경을 가지러 실크로드도 건넜었는데....
우리는 오로지 한곳만 바라보고 목메달고 있는것은 그제나 어제나 오늘이나 다 똑 같으니..
이번 생도 역전 드라마를 보는것은 힘들겠슴다.....-..-;;;
연암이여!
그래도 메마른 옹달샘에 물길 터 귀한 물맛을 알게해준 그대 공은 잊지 못하리요.
마음으로 Really 감사드림다!! Thank you 쪼금 Much!!!
And We 늘 Love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