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29일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수도회] 별 감흥없는 부활 앞에서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복음 : 루카 24, 1 - 12
◈ [청주] 여기에서 부활을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30일 부활 성야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 루카 24,1-12
여기에서 부활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세상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승리요,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우리의 가르침도 헛되고 믿음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조건 없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드러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스승을 잃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슬픔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없이 침묵하셨던 주님의 모습이 의로운 행위였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또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고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로 동안에 보여주었던 여러 표징들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신을 몸소 생명의 빵으로 소개하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고 영적인
양식으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23,34). 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신 간절함이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의탁한 기도가 열매
맺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파멸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새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에게 ‘부활이 왜 기쁘냐?’ 고 물었더니 ‘사순절이 끝나서
기쁘다’고 합니다. 동안에 여러 가지 결심을 하고 실천하기가
벅찼나 봅니다. 물론 부활이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고와 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준비는
일회적이고 한시적으로 하고 말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주하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이
끝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매 순간 ‘고통 없이 영광 없고,
죽음 없이 부활 없다.’는 진리를 생각하면서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처럼 날마다 순간마다 희생을 바쳐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여자들이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의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부시게
차려입은 두 남자로부터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 나셨다.”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과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천상행복의 미래를 보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 (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오늘 여기서부터
살 수 있는 은총을 받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청주] 보고 믿었다 / 장봉훈 주교님
2013년 부활 담화문
“보고 믿었다”(요한 20,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6.8).
2.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무엇을 보고 믿었습니까?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빈 무덤과 주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가 잘 개켜져
있는 사실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놀라서 무덤으로 달려갔고, 무덤에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잘 개켜진
수의는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법칙으로 잘 설명하거나 파악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고,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지거나 다른 데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표지로 믿었습니다
(요한 20,1-8참조).
3.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빈 무덤과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의 빈 무덤이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고린 1,23-25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코린 1,21).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1요한 3,16)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과 이웃을 철저히 사랑한 ‘비움과 내어줌’의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빈 무덤과 잘 개켜진 아마포는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자신을 비우고 내어주는 십자가 신비인 동시에 ‘그분이 들어
높여지심’(구원에 이르는 고통, 22항)을 예표하는 부활의
상징입니다.
4.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 신앙선조들은 예수님 부활의 표지인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아마포를 보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고
모진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특히
금년 탄생 200주년을 맞는 황석두 루카 성인은 1813년 충청도
연풍 병방골에서 태어나 천주교 도리를 접해 입교한 후 모진
고문 중에도 “비록 만 번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굳건한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 선조들에게 뿐만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근원이요 희망의 원천입니다. 그러하기에 교회 공동체는
소리를 높여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부활삼종기도)
하며 경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
백성의 영적보화인 ‘말씀’과 ‘성체’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또한 구원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더욱 탁월한 방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합니다.
5. 우리는 어떻게 부활 신앙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와 구원에 대한
무관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는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영상미디어의 눈부신 발달과
보급,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학적 사고를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부활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무관심해 가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가정에서부터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의 부재 현상을 통해서 드러나고, 교회의 미래인
젊은이들이 교회를 속속 빠져나가는 현상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한 부활 신앙은 우리 신앙의 기초요
핵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둔 부활 신앙은
우리 삶의 참 기쁨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의 빛을 되찾은 우리는, ‘비움과 내어줌’의 사랑을
가정에서부터 실천하고 증거하여 신앙의 해에 더욱 담대하고
용기 있게 ‘믿음의 문’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부활
영성은 이웃의 호의에 감사하고 자신의 탓을 인정하는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체성사의 ‘내어줌의’ 삶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의 삶’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말씀 중심의 삶입니다.
또한 성체성사의 삶은 구체적인 말씀 실천의 삶을 통해 ‘임마누엘
하느님’의 현존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는’ 체험 중심의
삶입니다. 신앙의 해에 말씀과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여 신앙의 활력을 찾고, 우리 모두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이웃과 우리 사회에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6.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장차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오늘의 시련을 이겨내고 ‘비움과
내어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13년 3월 31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
◈ [기타] 부활은 체험이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3월30일 부활성야 복음묵상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루카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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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헛소리처럼 여겼다 한다.
직접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나서야 믿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요한20,8) 하지만 그렇게 믿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 믿음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믿었다면 두려움에 문을 잠그고 떨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한20,19)
부활은 체험이다. 귀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론이나 상상으로도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부활은 가슴 뜨거운 체험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주시는 그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가슴 뜨거운 체험이다. (루카24,35)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아 헤매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실 때 비로소 깨달았던 눈물 나는 체험이다. (요한20,16)
예수님의 상처 난 곳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던 토마가 “평화를 빈다”는 그분의 말씀에 “나의 하느님”을
고백했던 가슴 벅찬 체험이다. (요한20,26)
우리는 해마다 부활절 미사에 참여하며 기쁨을 나눈다. 그리고
쉽게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교리를 통해서,
혹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막연하게 믿으려는 그런 것은
부활이 아니다.
부활 체험은 구체적이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 노력이 그분의
내미신 손을 보게 될 때 허락되는 체험이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몸을 내던질 수 있을 때,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때, 옳은 것 때문에 받는
고통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때, 남의 아픔이 철저하게
나의 아픔이 될 수 있을 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체험이다.
부활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 성령의 손길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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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아름다운 부활절 맞이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인천] 미사가 봉헌되지 않는 오늘
교회는 성토요일에는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다.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무르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한다. 이날은
노자 성체만 허락되며, 제대포는 벗겨 둔다. 부활 성야
예식을 거행한 뒤에야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이
기쁨은 50일 동안 넘쳐흐른다.(매일미사)
미사가 봉헌되지 않는 오늘. 그래서 오늘은 매년 그러했듯이
‘새벽을 열며’ 묵상 글도 유일하게 없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시면서 더욱더 그 사랑에 깊이 빠져
드는 은총의 시간이 되십시오. 그래야 오늘 저녁 예수님
부활의 큰 기쁨에 함께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음 하나 잘못 쓰면 사람이 사랑이 되고, 모음 하나 빠뜨리면
사람이 삶이 되죠. 사람은 늘 뭔가를 실수하고 삽니다. 그런데
그게 살아가는 혹은 사랑하는 방법입니다(권혁웅).
예수님의 무덤 성당에서 미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잊지말자.
한 역사학자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기억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날짜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갑오경장은 1894년, 프랑스 혁명일은 1789년 7월 14일,
잔 다르크는 1412년 1월 6일 출생, 미국 독립 기념일은
1776년 7월 4일. 또 물어보라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지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모든 날짜를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휴대 전화가
울립니다. 그리고 전화를 받아 이야기를 하다가 깜짝 놀라며
이런 말을 하네요.
“뭐라고? 오늘이 당신 생일이라고? 아이고 깜빡했네. 정말로
미안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짜를 모두 기억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중요한 날짜는 기억하고 있지 못했네요. 어쩌면 우리들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나눠주신 그
사랑만으로도 충분한데도 너무나도 많은 것에 욕심을
부리고 있어서, 정작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오늘 밤이면 주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기쁜
잘 준비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별 감흥없는 부활 앞에서
2013년 다해 3월30일 부활 성야
<루카 24,1-12>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별 감흥 없는 부활 앞에서>
교회 전례력이 돌고 돌아 또 다시 부활입니다. 가톨릭교회
수많은 축일 가운데 가장 등급이 높은 부활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부활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습니다.
부활 없이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부활 없이 구원도 하느님
나라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예수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중에 핵심이자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핵심 교리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인 부활 사건 앞에 별 감흥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너무나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부활사건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큰 사건이라서 그런가요?
물론 열심히 부활 계란을 삶습니다. 예쁘게 그림을 그리고
이웃들에게 돌립니다. 길고 긴 부활 미사에 참석해서 큰 목소리로
알렐루야를 외칩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옆 사람들에게 부활
축하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앞에 기뻐 용약해야
합니다. 나 역시 새 삶을 찾은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알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마음을 주체 못해 펄쩍
펄쩍 뛰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쉴 틈 없는 총공세에도 골을 성공하지 못하고 지루한 공방전만
계속되다가 이대로 시합이 끝나나 하고 허탈해 있는 순간,
‘버저비터골’(경기가 끝남을 알리는 타임아웃 휘슬과 동시에
골인)이 터졌을 때 환호하던 그 환호성이 터져야 하는 예수님
부활입니다.
그런데 부활? 어쩌라구?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가장
축제 중의 축제, 잔치 중의 잔치인 예수님 부활 사건 앞에
밋밋한 사람들, 심드렁한 사람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이 타성에 젖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에도 뼈를 깎는
쇄신 작업이 필요한데, 그러한 고통스런 과정을 외면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답은 당연히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이란 당신 인생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란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셔야 했습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십자가 길을 끝까지 인내하며 순명하며 걸어간
그 결과가 영광스런 부활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 부활의
참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극복 없이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님 부활을 온몸으로 느끼고,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깊이 참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매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기쁘게 참아내는 사람들,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시련이 다가올 때 마다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매사에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에게서 예수님 부활은
정말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매일 죽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죄에서 죽고, 이기심에서 죽고, 교만한 마음에서 죽고, 용서
못하는 마음에서 죽는 사람들에게 부활 예수님께서 주실
은총은 정말 클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진리이자
교리인 부활 신앙,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에 대한 이해가 아주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매일 제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담긴 의미를 깊이 헤아리는 사람들,
그 십자가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그 십자가를
통해 부활과 영생, 구원으로 넘어감을 굳게 믿는 사람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는 사람들,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신앙은 절대로 어려운
교리가 아닐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활이 신앙의 키포인트
죽었다가 살아나고 영영 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믿겠습니까? 이 사건을 믿으면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안 믿으면 비신자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키포인트로
부활을 정점으로 구약과 신약이 나뉩니다.
불변하는 자연법을 있게 하신 그 힘님을 믿게 되는 절정의
사건입니다.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며 굿 뉴스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영양가 없는 사건들을 매일
중대뉴스라고 들먹이는 건 지루한 시간들이지요.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부산] 기억하였다
부활 성야 복음에 기억이란 단어가 두 번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억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복음의 저자들은 기억이란 단어로
예수와 구약의 예언자들을 연결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와 제자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 기억을 매개로 한
제자들과의 연결은 부활 사건에 대한 체험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 체험이 제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들을 되돌아
보게 했으며, 그 되돌아봄 속에서 이전의 사건들은 완전히
다른 사건으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새로운 빛이
비춰짐으로 새로운 이해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부활은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초대하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기억은 단순한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사건이며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기억의 의미다.
오늘 또다시 부활 사건을 기념한다. 그러나 이 기념은 그저
이천 년 전 어느 봄 날 한밤중에 조용히 일어나, 새벽녘에야
여인들에 의해 알려진 빈 무덤 사건에 대한 회상이나 되새김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다시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이 오늘을 기념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소리치며 노래 불러도 좋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 홍경완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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