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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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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침탈의 실상 스크랩 12.12 군사반란, 26년만의 증언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494 14.08.22 09:2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2005년 6월 21일 (화) / 제 639 회
    ▣ 12.12 군사반란, 26년만의 증언


    지난 1일 전두환 前 대통령이 대전 현충원을 방문했다. 12.12 쿠데 타 주역의 한사람인 유학성씨 묘소를 다녀간 것이다. 현충원은 전 前대통령 참배급수를 A급으로 정하고 의장대와 헌화병, 나팔병까 지 동원 현충원장이 직접 집례관으로 나섰다. 한편 서울 현충원에 는 12.12쿠데타로 인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세 사람이 잠들어 있 다. 김오랑 중령, 박윤관 상병, 정선엽 병장. 지금도 이들의 가족들 은 여전히 통곡하고 있다. 특전사령관 실에 난입하여 동료를 죽이 고 상관을 체포했던 불운의 대대장, 그리고 아군의 총격에 부상까 지 당한 장교들, 쿠데타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원과 이들에 맞섰던 헌병들은 26년 전의 쿠데타를 각각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의 증언을 통해 12.12쿠데타를 파헤친다. 그리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서 어쩔 수 없 이 쿠데타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가 아직도 유효한지 살 펴본다. PD수첩은 호국 보훈의 달 6월에, 12.12 쿠데타를 경험하였 던 군인들의 증언을 들어보고 26년 동안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통 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겨진 과제를 찾아본다.

    * 26년만의 증언 - 특전 사령부의 총격전!

    “총격이 끝난 후, 김오랑 소령은 살아 있었다.” 13일 새벽 0시 15 분.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연행하던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이 총격 을 받아 사망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체포조도 사령관실에 서 날아온 총탄에 4명이나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반신불 수가 되었다. 당시 체포팀을 지휘하여 하극상을 벌이며 같은 아파 트에 사는 친한 후배 김오랑소령을 죽게 한 대대장의 회한에 찬 증 언과, 총격전 후 현장으로 달려간 주임상사의 목격담을 통해 군사 반란의 비극을 되새긴다. 더구나 총격전이 끝난 후에도 김오랑 소 령은 숨이 붙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낸다. 더구나 후송조 치가 빨랐다면 생명을 건졌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진술도 듣 는다.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씨는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 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하던 중 실족사로 사망하였다. 하지 만 인척들은 백씨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당시 고소 사 건으로 백씨에 대한 감시와 외압이 있었다는 것이다. 충성스런 부 하, 김오랑 소령를 잃은 정병주 사령관은 그 후 괴로운 나날을 보 내다 89년 3월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행방불명 된지 130여일 만이었다. 가족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나서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자살로 처리됐다. 12.12 쿠데타가 이들 가족들에 게 가져다 준 고통은 무엇인가?

    * 공수부대원들의 최초 증언

    “우리는 간첩을 잡으러 가는 줄 알았다”, “영웅이 졸지에 반란군 이 되었다”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점령에 큰 역할을 했던 공수부대 원들은 대간첩작전에 출동하는 줄 알고 무장한 채 서울로 들어왔 다. 그러나 총격을 받으며 육본과 국방부로 돌입할 때 일부 병사 는 사태를 파악했다. “매우 혼란스러웠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 령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그러나 이래도 저래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료들과 같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반란군이었 다.” 12.12 다음 날 모 중령은 공수부대원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혁명군이다.”라고 이야기 하며 분위기를 고무시켰다고 한다. 정승 화 체포과정에 동원 돼 크게 부상을 입은 헌병, 국방부에서 13명 의 장군들을 직접 무장해제 시켰다는 공수부대원은 자신들의 임무 완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2.12가 반 란으로 규정된 후 목숨까지 걸고 충성한 군생활이 허무하다며 하 소연을 하는데...

    * 12. 12에 희생된 젊은 영혼들

    반란군과 진압군의 이름으로 나란히 묻혀있는 박윤관과 정선엽. 정승화 총장 연행에 참가했던 헌병 박윤관 일병. 당시 박일병은 외 각 초소에 대기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경비병이 쏜 총알이 머리를 관통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결혼한지 20일 밖에 안됐던 박일병 은 어려운 형편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다니던 귀한 아들이었다. 기 대가 컸던 아들을 앞세운 아버지는 얼마 후에 화병으로 돌아가시 고,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계시는데... 국방부 헌병 정선엽 병장.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 벙커에서 근무를 섰던 정병장은 국방부에 진입하던 1공수여단에 저항하다 총을 맞고 사 망했다.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대에 왔다가 12. 12 군사 쿠데타에 동원 돼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운명을 달리한 두 청년. 현재 두 사 람은 나란히 현충원에 묻혀있다. 12.12 군사 쿠데타에 희생된 젊 은 영혼의 안타까운 사연을 취재했다.

    * 진압군 하소곤 소장과 반란군 허화평 비서실장

    12. 12 쿠데타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던 하소곤 소장과 쿠데타의 주모자였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 당시 총 상으로 폐의 절반을 상실한 하소곤 소장. 서빙고분실에 보름동안 정승화 총장과의 공모사실에 대해 모진 취조를 받았다. 26년이 지 났지만 아직도 반란군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있는데... 고 통속에 지내온 하소장이 방송 최초로 pd수첩 인터뷰에 응했다. 반 면 허화평 대령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국회의원까지 탄탄대로 를 달려왔다. 12.12는 군사쿠데다가 아니라 정당한 임무 수행이었 다고 주장하는 허화평 의원. 그는 정총장의 강제연행에 대해 “대통 령의 재가가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관례적으로 보고를 하는 사항 이었다. 박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는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국가로 부터 받은 임무이기 때문에 어는 누구라도 재가 없이 연행할 수 있 었다”며 12.12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정치 재판에 승복할 수 없으며 역사가 올바로 판결해 줄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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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8.22 14:41

    첫댓글 무뢰배들.지엄한역사의심판을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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