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霜 이후 최고의 천재 시인 출현 !!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출간
하록 시인은 대전에서 출생했고,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2024년 {애지}로 등단했으며, 우리 젊은 시인들의 존재론적 위기와 그 절망을 티없이 맑고 깨끗한 ‘신세대의 감각’으로 노래함으로써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하록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는 김보나 시인의 표현대로, ‘물뭍동물의 캔버스’에 그린 시집이자 “이 시대의 청춘에게 시인이 전하고 싶은 마법의 물약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하록 시인의 첫시집인『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는 언어의 혁명이자 감각의 혁명이며, 우리 한국 현대시의 경사라고 할 수가 있다.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 --[초대] 부분
난 결국 무엇도 되지 못하겠지
곁의 먼 곳을 부러워만 하다 끝나겠지
뭘 잘못했을까 ---[극야] 부분
「초대」에서 ‘나’는 쓸쓸한 나머지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까지 놀러오라고 합니다. 급기야 영혼을 거래해 소원을 성취하도록 돕는다는 ‘악마’를 호명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상냥하게도” 이러한 역전은 어떻게 발생할까요? 쓸쓸하다는 인식은 더는 오갈 곳이 없고 막다른 곳을 마주하고 있다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악마와의 거래도 여기에선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화자에게 ‘변화’를 가져다 줄 유일한 존재이자 행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록 시의 화자는 대개 멈추어 있고, 이러한 자가당착 상태에서 화자는 변화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 「극야」를 보겠습니다.
---김보나 시인
나는 말소되고 싶어// 번쩍/ 하고
----[주행부적합개체군] 부분
소망하세요/ 절망하세요/ 소망하세요/ 책임질 수 없어도/ 그저 달콤한 말이라도
---[그리기] 부분
죽는 것이 두려우니 더는 죽지 않겠어요
사는 것이 막막하니 이젠 살지 않겠어요
먹을 것이 절망뿐이라 그만 먹어치웠어요
입을 것이 경멸뿐이라 그만 차려입었어요---[빵과 장미] 부분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 밖에 나선 뒤에야 맨발임을 알았고/ 덜컥 맞은 뒤에야 맨손임을 알았지/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부분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은 나에게는 다정한 이름이 없다는 것이 되고, “나를 찾는 없는 소리”는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된다. 요컨대 이 시구들은 ‘나는 냉정한, 또는 싸늘한 사람이다’라거나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은폐하기 위한 말장난이며 반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추운 설원 속의 맨발과 맨손이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부름을 따라 갈 곳이 없어”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늘 혼자이고, 나를 찾는 다정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 하록 시인의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쩌렁쩌렁 삭아가는/ 태연한 피로”는 그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겨울 산장’([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의 독백과 절규의 풍경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원은 동토이고, 마른 나무는 죽은 나무이고,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는 채 꽃이 피기도 전에 이미 다 “쩌렁쩌렁 삭아가는” 이 21세기의 우리 젊은이들의 운명을 뜻한다.
하록 시인은 2024년에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으로 등단한 신진 시인이지만, 그러나 이상李霜 시인 이후 대한민국의 최고의 천재 시인임을 너무나도 신선하고 압도적인 충격으로 인식시켜 준다.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한 만큼 시의 언어와 미술의 언어(색채)를 상호 중첩시키는 언어 사용능력과 함께, 그의 언어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사용하면서도 해학과 풍자, 또는 반어와 말놀이를 병치시키는 기법은 신기에 가깝고, 그리고 설원의 아름다움과 설원의 차가움(비정함)을 통해 존재론적 성찰을 해나가는 앎의 깊이는 하록 시인이 이상 시인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 시인임을 증명해준다.
하록 시인의 등단작,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 이외에는 그 어느 지면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전작 시집({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이며, 그 신선한 충격과 감동은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반경환, 애지 주간)
인적이 드문 풀밭에 앉아/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을 보며/ 총총 수놓듯 네가 절망을 말했을 때/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하고/ 움켜쥐었던 것은 숨/ 한줌 숨
침묵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포옹도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아/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우리는/ 막다른 곳을 뚫고 넘어왔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일 때/ 나 벼랑의 바닥이 궁금해/ 우리 떨어지면 어딘가 닿기나 할지/ 나 절벽의 속살이 궁금해/ 우리 부딪히면 어딘가 금이나 갈지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 삼고/ 우리를 지키는 신이한 존재라도 빌어/ 그래도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전문
등단작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를 펼칩니다. ‘맑은 밤’이라니,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조어가 눈길을 끕니다.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이란 문장은 은하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하게 하지요. 혹은 강물에 비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것이 도시라면, 서울의 강물이라면 흐린 하늘 탓에 별빛이 비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강에 비치고 있는 건 인간의 불빛인 셈입니다. 네온사인이나 아파트의 불빛을 총망라한 인간의 불빛은 물에 비치는 순간에야 별처럼 보이지 않은가요. 이러한 아름다운 역전은 하록의 시집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한 줌 숨(한숨을 고유한 시선으로 표현한 말로 읽힙니다)’을 내쉬며 느닷없이 찾아든 어둠을 고백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침묵’을 택하는 건 무책임하고 ‘포옹’이 가져다줄 평화도 잠시뿐이기만 할 때, 시인은 한 사람의 곁에 그저 머물기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두 사람을 한데 묶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우리’라고 말입니다.
‘너’라는 한 글자에 손을 내밀어 ‘우리’라는 두 글자로 만들기. 저는 여기서 말문이 막히는 막막함 앞에 선 한 사람을 껴안아 ‘우리’로 만드는 젊은 시인의 씩씩함을 봅니다. ‘우리는 막다른 곳을 뚫고 넘어 왔다’라니, 이어지는 말은 더 용감하지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는 현실을 인식하기-이를 뚫고 넘어 왔다고 말하기. 어쩌면 막막한 현실에 언어로서 길을 내는 것이 하록 고유의 어법 아닐까요. 동시에 이는 하록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와도 닮아 있을 거라 확장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 같은 청춘에게 시인은 “나 벼랑의 바닥이 궁금해”라고 말합니다. 우리 좀 더 알아보자는 것, 떨어지고 부딪히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궁금해’ 하자는 것이 신예 시인 하록의 태도입니다.
다른 시에서 더 알아보겠지만,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일종의 ‘굴 파기’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끊임없이 막다른 곳을 마주하고, 이를 뚫으며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러한 나아감에 힘입어, 시의 말미에서는 ‘수호성’의 가호라도 받은 듯 마법이 펼쳐집니다.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 너에서 우리가 되는 것, 한 사람이 두 명 모여 우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너절한 운명을 피할 수 없어서 혹은 오히려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발현 가능한 신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떠나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라
떠나간 모든 것들을 감사하라
상실을 쌓을 수 있다는 건
한때는 기쁨을 모았다는 것
소망하세요
절망하세요
소망하세요
책임질 수 없어도
그저 달콤한 말이라도
「그리기」의 화자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고 좌절 속에 중얼거립니다. ‘떠나간 것에 감사하라’라는 말이 주문처럼 반복되는 가운데, 저는 시의 4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소망하세요/ 절망하세요/ 소망하세요’. 하록은 이러한 반복을 통해 절망의 다른 뜻이 ‘소망’인 것처럼 의미를 펼쳐나갑니다.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것을 갖게 되면 그것을 소망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소망은 절망의 다른 말이라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주행부적합개체군」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말소되고 싶어” 그러나 이는 생이 지속되는 한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며, 그런 점에서 절망의 다른 말처럼 작동합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만 ~ 했어요’ 형태의 어구가 반복되며 독특한 리듬을 형성하는 시 「빵과 장미」에서도 두드러집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니 더는 죽지 않겠어요
사는 것이 막막하니 이젠 살지 않겠어요
먹을 것이 절망뿐이라 그만 먹어치웠어요
입을 것이 경멸뿐이라 그만 차려입었어요
‘그만 차려입었다’라는 말은 차려입기를 멈추었다는 걸까요, 그만 차려입고 말았다는 것일까요? 이러한 중의적 문장은 화자가 택할 수 있었을 두 가지 선택지 모두를 보여주면서도, 화자가 어느 쪽을 골라도 차이가 거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김보나 시인)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