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신앙(롬4:18-2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겨주신 이유 -
2023.3.5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오뚝이는 무게 중심이 아래쪽에 있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동일하다. 신앙의 무게 중심을 하나님께 둘수록 영적인 복원력이 강해진다. 성도란 삶의 기반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그 말씀으로 삶의 무게 중심을 잡아가는 사람이다. 이처럼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면 둘수록, 쉬지 않고 불어오는 삶의 풍파 앞에서, 잠시 흔들릴 수는 있을지언정 넘어지지는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오뚝이 신앙이다.
지난 시간에는 창세기 17장 말씀을 본문으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실수에 대해서 나누었다. 아브라함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번 실수를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용을 쓰다가 이스마엘 이라는 서자를 낳는 일생일대의 초대형 실수까지 했다. 그는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서 자식을 낳게 될 것을 말씀하실 때에도, 엎드려 웃으면서 하나님을 비웃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창17:17-19,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정말 놀랍고 충격적이 아닐수 없다.
아브라함이 이런 실수들을 범했던 이유는 그의 목적이나 마음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범했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수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나누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4장 18-22절 말씀을 보면 똑같은 100세 전후의 동일한 상황을 두고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칭찬하는 내용이다. 언뜻보면 마치 창세기의 기록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18-22)
그렇다면 왜 성경은 동일한 상황을 두고서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듯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을까? 혹시 사도 바울이 창세기의 말씀을 착각이라도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당연히 천하의 사도 바울이 그럴리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상반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을까? 바로 그 점이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나)에게 여러 가지 고난들을 허용하시고, 단련시켜 나가시는 주님의 숨어있는 계획과 마음이다.
하나님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자녀들이나 손주들 또는 어린 조카들의 아기 때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아기들이 비틀거리면서 걸음마를 시작하려고 하면,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기의 손을 살짝 붙들어 준다. 넘어지려고 하면 붙잡을 준비를 옆에서 늘 하고 있다. 그러면 아기는 수없이 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결국은 다리에 힘도 생기고, 결국은 스스로 걷는 법을 배우게 된다.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더 강해지고, 걷는 법도 배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기는 부모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아기가 조금씩 걷기 시작하면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는가? 사실은 부모가 이끌어 줬으면서도 마치 아기가 다 한 것처럼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고 칭찬해 준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벌금이라도 내고 손주 자랑을 한다. 잘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런 모습과 상황이 아브라함이나 오늘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겨자씨같은 믿음까지도 의로 여겨 주셨던 이유는, 아기처럼 비틀거리고, 의심하고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반복되는 실수 속에서도 점점 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후에는 이삭을 바칠 정도의 믿음이 되기까지 말씀이 그 내면의 무게 중심을 잡아갔다. 이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수십 년이었다(75세에 부름 받음, 100세에 이삭 출상, 모리아산의 체험까지).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김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의 믿음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갈등되는 상황 속에서도 말씀이 이끄는 대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마치 아브라함이 다 한 것처럼 칭찬해 주신 것이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은혜(恩惠)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커더라 방송”이 아니다(‘아브라함이 그랬다 카더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만들어 가셨다 카더라’). 진짜 중요한 것은 실수 많고 흠 많았던 아브라함을 이끌어 가시고, 축복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나)에게도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다 같이 로마서 4장 23-24절을 믿음으로 읽어 보자.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3-24)
이 성경구절에서 중요한 핵심 단어는 “우리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우리도”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바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 즉 우리들이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종종 “자빠져도 하나님 쪽으로 자빠지자”라고 강조하고 외친다. 아브라함은 자빠져도 하나님 쪽으로 자빠졌다.
지난 주간에 우리교회 성지순례 팀이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여러 곳들을 방문하면서 큰 은혜를 체험했다. 그 곳들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있는 주기도문기념교회이다. 이곳에 가면 140개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교회의 이곳저곳에 붙여 놓았다. 당연히 한국어로 된 주기도문도 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지하에는 예수님 당시에서부터 있었던 동굴이 있다(좌측 사진). 이 동굴은 초대교회 당시에는 무덤으로 사용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무덤은 굴을 파고, 그 속에 시신을 넣고, 큰 돌로 입구를 막아놓는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시체나 무덤이 있는 곳들은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꺼려한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에 성도들이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깜깜한 밤중에 감람산 무덤들 속에 숨어서 몰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영화 ‘쿼바디스’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그 무덤으로 쓰였던 동굴 위에 주기도문기념교회가 지어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은 비록 현실 상황은 너무 힘들고, 아직은 믿음도 연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최종 선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갔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아브라함처럼 자빠져도 결국은 하나님 쪽으로 자빠지는 오뚝이 신앙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어려움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때보다 더한 갖가지 형태의 골리앗들에게 우겨쌈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겨 주신다. 의로 여겨주실 뿐만 아니라, 칭찬해 주시고,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들을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9절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다 같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고 읽어 보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은 흠 많고 실수 많았던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셨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어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오뚝이 같은 믿음으로 지금도 내 손을 잡고 이끄는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면서, 오직 주님만 따라가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