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사영의 서글픈 가족 순난사
-제 1 편-
얼마 전에 ‘야월 한라산’이라는 글을 포스팅했더니 고맙게도 많은 독자 분들이 찾아 주셨다.
1904년 행패를 부리는 천주교도들을 응징하는 민란을 일으킨 이 재수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답글도 주셨다.
미국 교포가 영어로 써준 이 재수의 여동생 오돌또기 이 재옥씨가 서귀포 장로교회 집사였었고 매우 약했으며 작은 과자 집을 운영했었다는 사연은 매우 중요한 추가 정보였었다.
그러나 답글을 통해서 대화 하는 중에 나는 유명한 황 사영의 부인이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를 본 어느 제주도 천주교인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자기는 성당에 다니는데 이 재수 의 교란 이야기가 나오니 자신이 죄를 지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황 사영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황 사영의 부인 정 난주 마리아가 남편이 처형되고 제주도에 와서 관노로 30년 넘게 살다가 죽고 나서 제주도에 묻힌 이야기를 자신도 들은바있으니 꼭 이런 천주교도의 서글픈 테마도 한번 다루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초기 천주교의 조선 핵심 인물중의 하나였던 황 사영 가족의 비극적인 삶을 소개한다.
잠깐 이 글을 탈고할 때까지 천주교 제주교구 이 창준님, 추자도 성당 선교사 이 아네스님, 제주 소방서 허 은석씨의 귀중한 협조가 있었음을 밝혀두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먼저 황 사영과 유명했던 황 사영 백서 사건을 먼저 소개한다. [백서(帛書)란 명주천에 쓴 글을 말한다.]
황 사영은 경기도 장흥 출신- 강화도 출신이라는 설은 틀린 것이다- 으로서 아버지없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알아주는 남인의 명문 집안이었다.
1790년 약관 16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너무 어린 소년이 과거에 급제하자 정조가 그를 불러 손을 잡아주고 격려했다. 그는 감격하여 그 팔에 명주수건을 두르고 지냈다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큰 전환이 왔다.
그가 정약용 형제중 세째이며 천주교의 열렬한 신자인 정 약종에게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이다.
이 인연으로 정 약용 [네째]형제의 제일 맞이인 정 약현의 딸 정 명련[난주로 개명]과 맺어져 정씨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천주학에 심취했던 황 사영은 학문을 통하여 관리로 입신양명하는 길을 가지 않고 천주교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조선에 밀입국하여 포교하던 청국인 신부 주문모에게서 세례를 받고 열렬한 활동을 했다.
그는 주 문모를 보좌하던 초기의 간부들의 모임인 명도회 회장 정 약종의 최측근으로서 천주교를 이끌던 핵심 간부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경기도 고양 군의 집에서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하여 훈장과 성경의 필사로 생활을 하며 선교에 열심일 때 정조가 죽고 불과 11살의 순조가 즉위하였다.
즉위한 해인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 부르는 천주교도 학살의 참변이 일어났다.
정조 때 밀리던 노론이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섭정하던 정순 왕후를 꼬드겨 발생시킨 사건이었다.
[이때 노론의 대표 인사로 심 환지가 있었고 남인의 대표 인사로 채 제공이 있었다. 채 제공의 사후 강한 리더십을 상실한 남인이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주문모 신부이하 100여명의 신도가 죽임을 당했다.
이 신유사옥 때 황 사영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집요한 지명수배를 받는다.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순조 신해 사옥이래 황 사영에 관한 기사가 26번이나 나온다.
그의 체포를 포함하여 초기에 수배 기록은 네 번이다. 첫 기록부터 극악무도한 요괴 같은 흉악범으로 나온다.
조정에서 그를 중요한 존재로서혈안을 뜨고 찾는 것을 알게 된 장진부사 이 여절은 황 기운이라는 천주교도를 잡아 40여차례나 주리를 틀어 드디어 황 사영이라는 강제 자백을 받아내서 상부에 보고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황 사영의 천주교 내에서 위치가 중요하다고 해야겠다.
황 사영은 수염까지 깎고 상주로 변장하여 한양도성 여기저기를 피해 다니다가 충북 제천군의 배론이라는 곳으로 피신해서 한 토굴에 은신하였다.
그는 이 토굴에서 동료교인 황 심과 상의하여 북경 주재 A.구베아 주교에게 명주에 가는 붓으로 신유사옥의 참상과 정부의 탄압실태, 그리고 조선 교회의 참상을 쓰고 군대를 보내어 조선을 징벌해주도록 탄원하는 탄원서를 썼다.
황 심은 다시 황 사영의 백서를 북경을 다녀온 바있던 옥 천희를 시켜서 북경으로 전달하게 하였으나 국경의 책문에서 불심검문에 이 백서가 발각되었다
황 사영 백서 -------------
황 사영, 황 심,옥 천희등은 모두 체포되어 그 해 11월 모두 참수되었다. 황 사영을 숨겨주었던 옹기쟁이 김 귀동을 포함해서 총 열여섯 명이 이 사건으로 처형되었다.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은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를 저지른 중죄인으로서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 사람들이 오가는 저자거리에서 신체가 여섯 토막으로 찢어지는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이 악명 높은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당한 교인들로 앞에서 소개한 김 효임, 김 효주 자매[CLICK!]가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백성들에 대한 일벌 백계로서 번잡한 시장거리를 형장으로 사용했다는데 이 형장이 있던 시장은 1960년대 까지도 지속되어 오다가 노량진 수산 시장으로 이전하고 이 시장터는 현재 서소문 공원이 되었다.
서소문 순교 성지- 바로 옆으로 경의선 열차와 전철이 다닌다. ----------------------------
황 사영의 모든 재산은 물론 몰수되었고 노비 다섯 명은 모두 관노(官奴)로 몰수 편입되었다.
황 사영 가족이 살아 있었다해도 살 수없는 집 한 칸 없는 거지 신세를 만들어 버렸다고 해야겠다.
황 사영의 처가관계에 있었던 정 약종도 물론 처형당했고 천주학에 관심을 두다가 멀어졌던 정 약용과 그의 형 정 약전 [둘째]까지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를 보낸 것도 바로 이 사건이었다.
정 약용은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고 형 정 약전은 끝내 유배가 해제되지 않아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유복자로 태어났던 황 사영에게는 편모 이 윤혜, 처 정 난주[마리아]와 아들 황 경한이 있었다.
황 사영이 능지처참을 당했을 때 아들 황 경한은 단 두 살이었다. 어리지만 청국인 신부 주 문모가 유아 세례를 준 천주교도였다.
포악한 조정의 마수는 두 모자는 물론 황 사영의 편모까지도 그만 두지않았다.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는 관노 계급으로 전락당해 거제도로 쫓겨났다.
심지어 천주교와 아무 관계도 없던 그의 숙부 황 석필은 먼 북방 함경북도 경흥 땅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아직 20대였던 황 사영의 부인 정 금주도 역시 관노(官奴)로 신분강등 되어서 제주도 대정현으로 추방당했다.
관노란 관의 소유인 노비로서 개인 소유인 사노(私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가축과 같은 존재로서 일체의 개인 생활이 허락되지 않고 그 자손은 대대로 관노로서 관의 소유가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 재수가 관노였다. 일단 관노가 되면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여기서 기기묘묘한 것은 황 사영의 아들 황 경한이 아직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추자도로 유배당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이 처사는 분명히 황사영을 사건을 처분하는 기록에 남아 있다 한다. 두 살짜리를 어미에서 떼어 내 아무도 돌봐 줄 수없는 낙도에 내동댕이 치라는 것은 죽게 버리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나의 추리로는 그때 황 사영 아들의 나이를 모르던 정순황후나 실무를 맡은 형조에서 대역죄를 지은 황사영, 황 심, 옥 천희등은 능지처참하고 가족들은 각기 분리하여 관노로 만들어 유배하라는 큰 지침을 내렸고 이 잘못된 지침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중간 관리들은 이 문제를 아래로 떠밀어 버리고 “네가 알아서 기어라.“라는 책임 전가하는 전형적인 관료들의 무사안일 한 태도로 이런 이상하고 몰인정한 지시가 나온 것이 아닌가한다.
황 사영이 능지처참 형에 처해지고 난 뒤 2주도 안 된 1801년 11월 21일, 정 난주는 두 살짜리 경한을 등에 업고 두 포졸에 압송되어 피눈물을 뿌리며 추운 겨울 속 서리서린 천리 길을 걸어 머나먼 제주도 하고도 외진 대정현으로 떠났다.
황 사영 처형 후 재빨리 두 모자를 유배형을 보낼수 있었던 것은 황 사영이 지명 수배가 된 2월 11일 두 모자는 황 사영의 모친 이윤혜와 함께 일찌감치 체포되어 의금부에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배를 떠날 때 두살짜리 황 경환은 이미 힘든 옥살이를 9개월이나 하고 있었다.
역사는 여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기록으로만 보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황씨 일문의 가족사는 흔적을 찾기 힘든 신유박해 100여명의 순교자들의 그것과 같이 역사의 어두운 망각지대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황 사영의 자취들은 일정한 시공을 두고 다시 세인들의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 사영 사후 제일 먼저 세상에 그 얼굴은 내민 것은 멸문(滅門)의 단서가 되었던 백서였다.
가로 62센티 센티 세로 38 센티에 명주천에 가는 모필로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빽빽이 1만 3311자를 121줄로 써내려갔다.
이 백서는 1894년 갑오경장과 함께 의금부의 오래된 서류를 파기할 때 이 백서의 가치를 알아본 관리에게 발견되었고 그는 다시 친지인 천주교도에게 연락되어 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해졌다
뮈텔 주교는 대단히 완고한 사람으로 안 중근 의사와 민립대학 설립을 싸고 대립을 보였었고 [- 조선 사람들은 교육을 안 받는 것이 포교에 유리하다는, 우리 민족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로서 대학 설립 추진을 요청하는 안 의사의 청을 거절했다.-]
안 의사의 이도 히로부미 저격을 살인행위로 규정했는가 하면 자신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여순에 가서 안 의사에게 최후의 미사를 보아준 빌렐 신부를 중징계하는 둥 한국인에게 인기가 별로 안 좋게 기억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천주교 전파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 주교였다,
지금도 발간되는 경향 신문은 그가 창간 한 것이다.
얼마 전 이글을 쓰기 위해서 취재를 나섰다가 용산성당에서 그의 묘소를 발견했기에 여기 그 사진을 올린다.
용산 성당의 뮈텔 주교 묘소 ----------------------------------
그는 1880년에 조선에 와서 50년을 살고 1933년 사망했다. 그는 1925년 황사영을 복자로 시성할 때 그 증거로서 로마 교황 비오 11세에게 보내져서 현재 이 백서는 로마 교황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황 사영의 사후 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그의 백서가 세상으로 나온 것도 기이한 일이지만 저 남쪽 추자도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1801년. 어머니 정 난주의 등에 업혀 서울을 떠나고 역사에서 사라진 황 사영의 아들 황 경한의 자취가 100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뒤 홀연 다시 역사의 앞면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유배형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긴 추자도에서 였다.
1908년경, 제주본당 2대 주임 라크루(M. Lacrouts, 具 瑪瑟 -이 분의 전임자 때 이 재수의 난이 터졌었다. ) 신부가 추자도 선교를 나선 길에 뜻밖에도 황 경한의 손자를 자처하는 섬 사람을 만났다.
그의 묘소는 그가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오씨 부부에게 구출되어서 성장했던 하추자도에 있었다.
황 경한이 발견되고 성장하고 사망했던 추자도 예초리 ----------------------------------------------------- 경한의 손자를 만난 라크루 신부는 지금 남아있는 프랑스 파리로 보낸 편지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있다.
황 사영의 자손이 멸족당하지 않고 저 남쪽 추자도에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조선 천주교구계의 알 만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나 교통도 무척 불편했었고 지금처럼 메스미디어나 출판문화가 발달하지 않던 시절인터라 황 사영의 자취를 관심을 가지고 깊숙이 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역사가 눈을 껌뻑거리고 있는 사이, 1920년대 황 사영의 또 다른 유적이 충북 제천의 배론까지 찾아갔던 한 일본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배론 옹기촌의 토굴 황사영이 숨어있었던 곳 -------------------------------------------- 그는 황 사영을 숨겨준 죄목으로 처형당한 김 귀동의 옛 집터를 찾아내고 근처에서 황 사영이 숨어 지내던 토굴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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