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로 헌신하게 하신 하나님
- 이계준 원로목사 (신반포교회, 전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나와 우리 가족은 1950년 12월 3일 소위 1.4후퇴에 의해 폭정으로 얼룩진 고향을 떠나 오래 동안 꿈에 그리던 자유의 남한으로 피난의 순례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 친척, 친지 등 약 20명은 선친이 잘 아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권세열 목사의 픽업으로 대동강 군사용 가교를 쉽게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평남 역포역에서 화차로 서울로, 교역자 피난대책에 따라 화차로 다시 부산으로 그리고 미군 수송선으로 제주도로 이송되었다. 제주도에서 피난민의 환경은 마치 포로수용소 수준에 머물렀고 구호품에 의존한 생활은 극빈상태였다. 야밤에 기습하는 소위 공비들의 총소리는 전선을 방불케 하는 공포와 전율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나는 일할 곳이 없어 친지가 경영하는 베이커리에서 빵 굽는 일을 돕기도 하고 피난민으로 구성된 ‘산지’라는 축구팀에 가담하여 잠정적으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마침 하사관 모집이 있어서 입영하려던 때 제주읍에서 감리교신학교 보결생 모집이 있었다. 나는 고향에서부터 염원하던 공부의 길이 열렸으므로 선친의 허락을 받고 예과 1년에 입학하였다.
나는 성화신학교에 입학할 때와 마찬가지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면서도 목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데 내 인생의 길을 가로막는 일대 비극이 발생하였다. 1952년 봄 부친께서 급성 폐렴으로 57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한 것이다. 부친의 서거는 나에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하나는 내가 대학에 진학하면 누가 그 엄청난 등록금을 마련해 줄 것인가? 또 다른 하나는 인생이란 그토록 짧은 것인데 내게 삶의 궁극적 의미와 보람을 가져다 줄 직업이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밤낮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목사란 직업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일까? 최선을 다 한다면 거기에도 무한한 의미와 보람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학공부를 계속하여 바람직한 목사가 되기로 결단한 다음 어떤 처지에서도 후회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최선을 경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 생활이 그리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다행히 부산에서는 영수학원을 경영하는 동급생과 함께 지내면서 일을 돕고 가르치기도 하며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3년 학교가 서울로 복귀한 다음에는 영어 가정교사와 기독교방송국 국장 비서 일을 보며 학창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으니 실로 은총의 힘은 놀랍기만 하다.
나는 부산에서 공부할 때부터 시온감리교회에 출석하였다. 그 교회는 평양성화신학교 교수였던 한승호 목사와 안상현 전도사가 주축이 되어 피난민 학생들과 함께 설립한 곳이었다. 시온교회는 환도 후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종로 3가에 있던 중앙신학교 건물(구 일본불교사원)을 빌려 예배드렸고 몇 년 후에는 옛 서울운동장 뒤편에 있는 마사회 건물을 구입한 다음 리모델링하여 사용하였다.
1957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종장교로 입대할 때까지 시온교회에서 계속 봉사하였다.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일과 수요일을 포함해서 교회학교 교사, 예배 반주, 청년회 회장 등의 활동에 전적으로 투신하였다. 그 당시 교회 재정은 극히 열악하여 교회 유지만도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10여명의 피난민 신학생들 누구에도 장학금이나 거마비를 보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적 신앙으로 교회 봉사에 최선을 다 하였다. 그 결과 나는 교역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교우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게 되었고 소속 목사인 감신대 교수 김용옥 박사와 박대선 박사의 각별한 사랑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헌신은 하나님 신앙의 확고한 근거가 되었다.
- 출처 : 기독교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