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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쓴 글 대부분이 암에 걸려 바깥출입을 못 하고 집에 있을 때였다. 항암치료 받으며 후유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거의 석 달 가까이 참 드물게도 시집만 읽었다. 만사가 힘들었어도 우선 책이 얇고 가벼워 한 손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몸으로 책을 읽는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그 시간 아프지도 않았다. 내친김에 그동안 책장 한 쪽에 쌓아 둔 것을 빠짐없이 읽어 이번 기회에 마음 빚을 갚고 싶었다. 동료 문인에게 우편으로 받은 시집과 수필집이었다. 병원에 오가느라 읽지 못했다. 볼 때마다 제때 읽지 못한 게 미안했다. 오늘 같은 다짐은 심신이 안정되고 나면 한 권이라도 허투루 읽지 않고 꼼꼼히 읽겠다는 나와의 약속이었다. 다 읽고는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癌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요즘은 수필을 짧게 쓴다기에 유행하는 5매 수필 쓰듯 짧게 썼다. 짧게 쓴다는 게 정말 어려웠다. 기왕 쓰는 것, 시집처럼 5매 수필집을 쓰고 싶었다. 한두 편이 아니라 책 한권 분량을 맞추기 위해 쓰면 쓸수록 어려움이 더해갔다. 그러나 어떤 형식의 수필이든 그것이 독자 마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내 마음에 들 때 까지 한편 한편을 산문시를 쓰듯 써야 할 것이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글을 동료 문인에게 내 보이는 것은 설익은 밥을 손님상에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때 떠오른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는 창원 문인협회 카페에 글을 올려놓고 독자의 눈으로 읽다 보면 언젠가는 밥에 뜸이 돌아 독자와 내 밥맛이 같아질 거라는 생각이었다.
여기에 쓴 글 대부분이 한두 편 빼고는 원고지 6매를 넘기지 않았다. 5매에 맞출 수는 있었으나 신문이나 한정된 지면이 아니어서 그냥 마음 편하게 썼다. 원고지 5매라는 생각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글쓰기는 힘들어도 내 삶에 가장 큰 부분이다. 지금은 전부라고 해도 좋다. 어느 하나에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최선을 다한 삶, 정직하고 성실하게 실하게 산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그 사람 역사가 된다. 나는 지금 내 역사를 기록하는 중이다.
행간 行間 김시철
요만큼이라도
좀 쉬었다 갔으면 해서
행간을 두어 놓았습니다.
쉬엄쉬엄 가야만 후회하는 일도 덜 생길 거고
생각도 더
영글게 아니겠습니까.
노상 빨리빨리 서둘러 살아온 삶이라서
많이도 후회되고
낭패도 많았답니다.
좀 늦기는 해도 앞으로는
숨 고르는 일만 남았답니다.
1부
가슴 졸이던 날들
며칠 있으면 창원 삼성병원 혈액종양내과에 가는 날이다. 며칠 전 혈액검사와 CT를 찍었다. 꼭 1년 만이다. 수능시험 앞둔 학생보다 마음 떨린다. 온갖 생각이 다 든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 되지는 않았는지, 몸 상태가 전보다 나빠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에 걱정이 앞선다. 1년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담당 교수는 진료 마지막 날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몸 관리 잘하다가 보기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했다. 병원에서는 지금은 CT 판독할 교수가 없으니 그동안 다른 병원에 가라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미국 간 교수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며 가지 않았다. 이제 만나러 가는 날이 다가온다. 가기 전 먼저 가야 할 곳은 손녀 돌잔치 하는 아들집이다. 기쁜 마음으로 손녀를 보고 싶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교수 만날 생각만 하다 보니 마음이 흐트러져 그리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할아비로서 미안하고 부끄럽지만 나도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 나의 간절한 바람은 더 나아지지는 않았어도 지금 이대로만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겐 흐르는 물처럼 평범한 일상이 나에겐 천하장사와 씨름하는 것만큼이나 힘이 든다.
한 가지 좋은 점도 있다. 항상 내 마음이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는 사람처럼 너무 간절하다 보니 요즘은 온갖 것이 글이 된다. 회장실에서 손을 씻거나 양치질할 때와 변기에 앉아 똥 눌 때 번갯불처럼 스치는 것들이다. 아픔의 고통을 똥 누듯 쏟아 내지를 못하니 그것이 내 안에서 돌고 돌다가 막걸리처럼 발효되어 글이 되어 나오는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몸은 고통스러워도 수필가로서 진실하게 쓸 수 있어 이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 같다. 내가 만약 아프지 않았으면 오늘 같은 내가 있었을까. 나는 요즘 들어 그게 참 궁금하다. 잠 안 오는 날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생각하다 보면 어떨 때는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못 된 것 같기도 해서 나로선 도저히 답을 못 찾겠다. 아무래도 이것만큼은 세상에 이름 있는 사람이 자신을 후세 사람에게 맡기듯 나는 세월에 맡겨야 할 것 같다.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고
오늘 아침 미국에 공부하러갔던 혈액 종양내과 교수를 만났다. 근 일 년을 눈 빠지게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진료실에 들어가 인사 나눈 뒤 의자에 앉은 나에게 교수는 혈액 검사 결과도 너무 좋고 CT 상태도 너무 좋다고 했다. 얼굴도 건강해 보인다며 좋은 말만 쏟아놓았다. 다음 진료도 6개월 뒤로 잡았다. 나는 진료실에서 나와 병원 안을 오가는 동안 병원 특유의 냄새도 나질 않았고 오히려 향기롭기까지 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누구 말대로 상갓집 개처럼 보인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원했던 것은 마음 안정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다. 이런 몸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 들죽 날 죽이었다. 이제 더는 아프지 않고 지금 이대로만 살수 있다면 상갓집 개라도 좋고 그보다 더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솔직히 말해 목숨 앞에서는 소중한 게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뒤 여기저기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나에게 교수는 항암치료와 투병으로 신체기능이 약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는 비틀어지거나 제 기능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가능하면 약을 먹지 말라는 당부도 곁들였다. 내 생각과 똑 같았다. 교수 말대로 요즘 내 몸이 그렇다. 전에 없던 일이 생기곤 한다. 교수를 만나기 전에는 왜 그런지를 몰라 두렵기도 했다. 오늘 의문이 풀려버렸다. 아픈 사람은 의사 말 한마디에 기쁨이 슬픔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기쁨이 되기도 한다. 병원 환자에게는 의사 말 한마디가 천금보다 무겁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병원에서 암 환자에 해줄 수 있는 일이 다양하질 않고 제한적이다. 나머지는 환자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오늘 나는 병원 문을 나서며 지금 이대로만 산다면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날아갈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현관문 앞에 서서 병원 가는 나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내 얼굴이었다.
다시 모를 심으며
오늘부터는 나 자신 암 환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계속 거기에 얽매여 있다가는 나 스스로 힘이 빠져 아무것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라도 빨리 새 삶을 찾아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전력 질주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오늘 나는 경남 문인협회 임원이었던 선생에게 전화로 내가 쓴 모든 글을 내려달라고 했다. 컴퓨터에 내 정보가 엉클어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인해 보니 최근작 -산문 자리가 텅텅 비었다. 막 추수 끝난 들판 같다. 조금 허전했다. 방문객 숫자가 세 자리인 글도 있었다. 이제 나는 여기에다 모내기 철 농부가 모를 심듯 그 마음으로 모를 심을 것이다. 모 심는 곳은 경남 문인협회 카페다. 이번에 심을 모는 지난날 심은 모와는 형태가 조금 다르다. 논에 물이 들어와 심을 때가 되면 농부가 씨앗을 보고 어떤 종자인지 알듯이 내가 말 안 해도 문인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 다시 모를 심으며 간절했던 것은 모심는 걸 보러 많은 독자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심어 놓고는 가을을 생각할 것이다. 어떤 풍경을 떠올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틀림없이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나락 알갱이를 손에 쥐고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곳간에 들어갈 가마니를 생각하며 미소 지을 것이고 온갖 생각에 젖어 말 없는 말을 할 것이고 들리는 것 없이 들을 것이다.
요즘 농부들이 정제된 쌀을 종이 포대에 담아 소비자에게 내놓듯 나는 5매 수필 세 편을 한데 묶어 경남 문인협회 독자에게 내놓을 것이다. 수필을 산문시처럼 무게감 있게 써서 그것으로 5매 수필집을 선보이고 싶다. 요즘은 수필을 하도 짧게 쓴다기에 5매 수필 쓰듯 짧게 썼다. 어떤 형식의 수필이든 그것이 독자 마음이라면 받아들이고 싶다. 여기에 쓴 글 대부분이 한두 편 빼고는 원고지 6매를 넘기지 않았다. 5매에 맞출 수는 있었으나 신문이나 한정된 지면이 아니어서 그냥 마음 편하게 썼다. 원고지 5매라는 생각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바람 부는 방향 따라 항로가 달라지는 돛배처럼 그렇게.
책 향기 1
나는 요즘 책 향기에 취해 산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중국 진나라 때 여불위가 쓴 여씨춘추’이다. 책에 “남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이겨야 하고 남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논해야 하며, 남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라는 글이 있다. 조금이라도 학문을 한 사람이라면 이런 명언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백번 읽어도 좋은 글 그게 바로 책 향기다. 우리가 고전을 읽다 보면 무수히 많은 명언이 있지만, 나는 유독 중국의 고전을 읽으며 밑줄 친 곳이 많다. 그런 이유가 한국이 중국 문화를 고스란히 내려 받았다는 굳어진 생각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여씨춘추를 읽기 전 남회근 선생의 책을 읽고 있었다. 방금 옮긴 여씨춘추의 글은 잠시 옆길로 새었을 뿐이지 맛보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쓰는 책 향기에 대해 남회근 선생과 나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게 먼저일 것 같다. 여씨춘추도 한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선생의 책을 읽다 보니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서 또 다른 향기가 난다. 읽으며 나 스스로 놀라는 일이 한두 번 아니었다. 처음 구입하고서 내 딴에는 읽는다고 읽었어도 전혀 읽은 게 아니었다. 낯선 곳이 백팔 염주 알보다 많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와 남회근 선생의 인연은 서점에서 맺어졌다. 언젠가 서점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가 책장 한 칸에 선생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뭔가 느낌이 와 그중 한권을 책 읽는 자리로 가져가 대충 훑어 본 것이 선생과 나의 인연 줄이었다. 그 줄이 끊어지지 않고 더욱 질긴 끈으로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은 요즘 들어서다. 그것도 서재 정리를 하며 책이 줄어드는 바람에 읽을 책 마땅찮아 찾다보니 여전히 책장 한 칸을 꽉 채운 선생의 책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렇게 두 번째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나의 영원한 스승으로 내 안에 좌정하고 있다. 살다 보면 자기와 인연이 되는 사람이 있듯이 책도 읽다보면 자기와 인연이 되는 책이 있다. 세상 만물이 그렇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사람 말고는 책이다. 나에겐 선생의 책이었다. 왜 그런가를 묻는다면 대답하는 내가 바보다. 왜냐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산회상에서 석가가 꽃을 들어 보였을 때 미소 지으며 꽃을 받은 가섭의 염화미소(拈花微笑)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책 향기 2
나는 여불위의 여씨춘추를 읽는다고 했다. 읽자마자 맨 먼저 와닿은 것은 물이 풍부하면 “물고기와 자라가 그리로 돌아오고 나무가 우거지면 뭇 짐승이 그리로 돌아오고, 임금이 현명하면 제주 있는 영웅호걸들이 그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성왕 (聖王)은 돌아오게 할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는 일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라는 글이었다. 마지막 부분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나는 여불위가 2200년 전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어젯밤 스승의 훈계(訓戒)처럼 너무도 생생했다. 여씨춘추를 저잣거리 문에 펼쳐놓고 그 위에 또 천금을 걸어놓고는 여기에서 한 자라도 더하거나 뺄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한 여불위의 자신감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도 고전 속 명언들을 접하며 이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다. 아니,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해서다. 글을 쓰며 낭송하듯 수십 번 되읽다 보면 가야할 길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 여씨춘추를 읽으며 책장 한 칸에 빼곡한 남회근 선생의 책도 한권씩 뽑아 읽고 있다. 모두 한번 읽은 책이다. 다시 읽는다. 먹는 음식에 비유하자면 책은 다시 읽을 때가 제 맛이다. 한마디로 맛있어도 너무 맛있다. 곶감 빼먹듯 오늘도 먹으러 간다, 먹기도 전에 입에 단물이 고인다. 사탕처럼 와싹 깨어먹지 않고 입안에 굴려가며 살살 녹여 먹는다. 그렇다고 먹을 만큼 먹지 욕심내지 않는다. 늘 그렇게 먹고 싶다. 선생의 책은 꺼져가려는 불씨를 되살려 주었다. 지금은 장작불이다. 나의 애창곡 내 마음의 보석 상자였다.
나는 남보다 뭔가를 조금 더 안다고 우월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나 도통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하기가 어렵다. 솔직히 말해 가까이 하기 싫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하겠지만 상대와 몇 마디만 해보면 감이 잡힌다. 그런 사람에게는 잠시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
읽으며 또 한 번 안경을 고쳐 쓰게 한 글이다. “자신에게 더러운 점이 있으므로 남의 더러움을 비방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삐딱한 점이 있으므로 남의 삐딱함을 비방하는 것이니 비방하는 자와 비방 받는 자가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훌륭하다 하겠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병폐는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다른 사물에게는 인(仁)하게 대하고서 사람에게 인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사물에게는 인하지 않지만, 사람에게만은 인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인이 된다. 똑 같은 사람에게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옮겨 쓰며 생각하니 여기에 한자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지금 우리 문인들 세계였다.
책 향기 3
이번에는 내 마음의 스승 남회근 선생의 강의 내용 중 일부분을 옮긴다. “여러분이 국학을 배우고 학위를 따고 학문을 하려면 스스로 기본적인 수양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평생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다할 뿐이지요. 沒身而 한평생을 묵묵히 또 적막하게 스스로 즐길 뿐입니다. 학문이 있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아주 적막하게 마치 출가한 사람처럼 그대로 다할 뿐입니다. 적막함을 즐거움으로 삼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적막을 즐기는 학문적 수양이 없이는 진정한 학문은 불가능 합니다.” 마치 아픈 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수필가인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요즘 내 삶이 적막하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어떨 때는 무척이나 외롭다. 그래도 그런 적막감과 외로움은 글 쓰고 책 읽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글을 쓰게 된 동기도 무력감과 외로움이었다. 지금은 즐길 줄도 알고 누릴 줄도 안다. 공자 말처럼 선생의 책을 읽으며 그 향기에 취하다 보니 이젠 즐길 줄도 알게 되는 모양이다.
동서양의 고전이 많고 많지만 나에게는 남회근 선생의 책이 그 무게를 감당하고도 남는다. 만권의 책을 읽고도 고뇌하던 파우스트가 영원한 여성을 통해 구원받듯이 나는 선생의 책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그런 매개(媒介)를 만나게 되는 것이 사람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성서 한 권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불교 경전 되듯이 책도 일념으로 읽다 보면 저마다의 인연이 따른다. 나는 선생의 책에 그만큼 감동하고 빠져들었다는 말이다. 선생의 책은 문학적으로도 문장이 수려하고 어느 한 곳 부족한 데가 없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고전의 백과사전이기도 했다. 오래전 버스로 백두산에 올라가며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경치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감탄사를 연발했던 갈수록 깊어지고 아름다워지는 백두산자작나무 숲길이었다.
길가에 부처님
성주사 들어가는 입구에 다리는 없고 상반신과 두 팔만 남은 절반의 몸뚱어리를 작은 바퀴 달린 판자에 엎드린 채 몸을 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맡에 시주함이라고 쓴 통을 매달고 독경 카세트를 틀어놓고는 절을 오가는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전 마산 어시장 부근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며 얼핏 본 일은 있지만, 오늘은 그 사람을 직접 보게 되었다. 막상 그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니 멀리서 볼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런 몸을 하고서 저토록 열심히 사는데 싶어 몸 어딘가가 조금만 불편해도 잠시를 못 참고 짜증 부리던 내 모습이 정말 부끄러웠다. 백석의 시에는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라는 시 구절이 있다. 나는 백석이 저토록 불쌍한 사람을 생각하며 썼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싶었다.
한동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오가며 시주함이라 쓴 통에 더러는 돈을 놓고 간다. 그날은 부처님 계신 법당 불전 함에 시줏돈을 넣는 것보다 그 통에다 넣는 모습이 더 좋아 보였다. 어찌 보면 카세트를 통해 흘러나오는 독경 소리와 시주함을 보고 있으니 큰 부처님 계시고 향 촛불이 있는 곳만 법당이 아니라, 이곳도 작은 법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절을 오가는 사람 중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고개 돌리며 외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사랑의 반대가 질투나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절을 오가는 사람 중에 그 옆을 지나는 누군가가 작은 사랑일지라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내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위해 축원할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사지 멀쩡하고 좋은 환경에서 많이 배웠다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하기 싫었다. 요즘 TV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못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만 화가 치민다. 그들이 남의 돈을 가지고 제 것인 양 흥청망청 써 재낀 것을 보면 그 돈으로 이들을 수천 명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것이다 “부처가 있는 곳에는 한자 밖에 악마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거꾸로 악마가 있는 곳에는 한자 밖에 부처가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배고픈 아이들
언젠가 밤늦은 시간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다 EBS에서 다큐멘터리 프로를 방영하는 것을 보고 채널을 고정했다. 화면에는 필리핀의 어느 지역에선가 기아에 시달리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방영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나라 기독교 자선단체에서는 아이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무료 급식소를 열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가장 배고파하고 무엇이든 먹고 싶을 때인 오후 세 시에 문을 열었는데, 그 시간만 되면 어린아이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서 한 끼라도 밥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갈수록 하도 많은 아이가 몰려와 자선단체에서는 오는 순서대로 표를 주기로 했는데, 재정문제로 하루 250명밖에 표를 주지 못했다고 한다.
길게 늘어선 아이들이 순서대로 표를 받고 들어가다가 표가 떨어지면 그다음 아이는 들어갈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머지는 돌려보내야 하는데 발길을 돌리며 뒤돌아보는 아이들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급식소 안으로 아이들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바로 앞에선 아이까지는 표를 받아 들고 환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아이를 끝으로 문이 닫혀버린다. 그러자 못 받은 어린아이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그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 아이 심정을 알 것 같아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마나 먹고 싶고 배가 고팠으면 저리도 섧게 울까 싶었다.
세상 어디에나 배고픈 아이가 너무 많다. 자선단체의 선교사는 미국의 애완동물에 먹일 사룟값만으로도 지구상에 있는 아이들을 배고픔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어느 한 곳이 부족하면 다른 것으로 채워지는 게 자연의 균형인 줄 아는데 사람의 일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먹어야 하고 애완동물도 먹어야 한다.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순서는 사람이 먼저다. 누구에게 물어도 말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몸이 따르지 않고 말로만 하는 사랑이 얼마나 공허한 줄 알기나 할까. 요즘은 어딜 가나 애완동물 세상이다.
불쌍한 아이들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림칙하고 그런 일을 보고 듣는 것도 몸서리치게 하는 일이 요즘 부모 된 사람들의 어린 자식에 대한 학대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가 죽이는 세상이다. 짐승도 죽은 새끼를 끌어 앉고 젖을 물리며 차마 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식에게 부모가 저지른 행동을 보면 이게 사람인가 싶어 소름 돋는다. 짐승에게 부끄럽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을 심판하는 우리나라 사법기관의 처벌이다. 가벼운 도둑질 하나에도 처벌이 가혹한데 이런 일에는 너무도 관대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내게 아무 일 없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사회에 그늘지고 소외된 외로운 아이나 이웃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나 한 사람 나선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외면해선 안 된다. 그에 대한 방관과 무관심은 죄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촛불 한 자루가 밀어내는 어둠의 양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불 밝히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 불이 다른 사람에게도 이어져 언젠가는 지금보다 밝은 세상이 올 것이다.
명말 청초 유학자 장대(張岱)는 “형의 아들이 아플 때는 밤새도록 왔다 갔다 살펴보지만, 돌아와서는 잠깐이나마 편히 잠드는데, 자기 아들이 아플 때는 단 한 번만 가서 들여다보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라는 글이 있다. 인간의 사심을 돌아본 엄정한 자기 성찰에 저절로 고개 숙어진다. 그것은 더욱 근원적인 인간의 본질을 생각게 하고 보통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을 이야기한다. 글 속에 든 가르침이 무얼 뜻하는지 알지만,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악랄해졌다. 지금 우리 몸은 세상 편하도록 진화되었는데 정신은 거꾸로 퇴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 주변에는 버려진 짐승이나 의지할 곳 없는 병든 사람을 돌보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의 수고가 많은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는 따스한 밥이 되려면 노력의 가치를 값없이 만드는 사회가 사라져야 한다. 한 줌의 선한 삶은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다. 이 같은 진실을 알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조용필 그 겨울에 찻집
새벽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즐겨 찾는 음악 사이트에 들어가니 내가 좋아하는 방장이 올린 노래가 있었다. 가수 조용필이 부른 그 겨울의 찻집이다. 의외였다. 늘 올리는 음악이 세미클래식에 가까웠는데 오늘은 영 다른 모습이었다. 나이 든 남자 마음 다 그런가 싶어 내심 반갑기도 했다. 노랫말에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라는 말은 참 쉽고도 어려운 시인의 언어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날까지 이 노래를 셀 수도 없이 들었다. 처음 나올 때부터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빼놓지 않고 즐겨 부른다. 한국의 나무로 치자면 등산길에서 만나는 고목으로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다. 이 노래가 오늘따라 내 가슴을 후비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노래를 들으며 옛 생각이 나설까. 아니면 웃으며 눈물을 흘려보지 못해서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혼자 노래 가사에 빠져들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걸까. 한국인 정서에 어울리는 국민가수가 부르는 국민노래다. 맞다! 나도 노랫말처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그게 언젠가 하면 백일을 갓 넘은 손녀가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옹알이하는 것을 볼 때다. 몸이 불편한 지금의 나로선 겨울날 찻집에 갈 수도 없고 의자에 앉아 차 마시며 창밖을 바라볼 수도 없다. 비록 며느리가 만든 가족밴드에 올라온 사진으로 보는 거지만 나는 그 시간 노랫말처럼 바람 속으로 걸어가 손녀를 만나고 품에 꼭 껴안는다. 그만 웃으면서도 눈물이 난다. 이제 그 손녀가 돌이 지나고 한참을 기어 다니다가 어느 순간 일어서더니 걸음을 때기 시작한다. 나는 한 걸음씩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걷는 그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웃으면서도 눈물이 난다. 그러나 처음 웃으며 흘리던 눈물과 지금 흘리는 눈물은 다르다. 손녀는 할아비 눈물 속에 피는 꽃이다. 손녀야~~~ 할아비는 이곳을 떠난 다음에도 네가 보고 싶으면 노래 첫 소절 바람 속으로 걸어가 너를 만날 것이다.
연극배우 윤석화
오늘이 입동이다. 공원에 마주보고선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잎을 떨구고 있다. 천주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은 가을하늘처럼 넓고 높고 깊다. 이제 하나씩 우리 곁을 떠나려 한다. 우리 인생도 해돋이처럼 왔다가 해넘이처럼 가는 것, 저무는 것들은 외롭고 슬프지만 내가 살아온 만큼 사라지는 것이다. 가을 색으로 짙어갈 지리산 길은 올해도 매정하게 손 한번 잡아주질 않는다. 아픈 뒤로는 늘 그렇듯 임을 향한 마음도 안 하는 것 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마음 여행을 한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이 단풍으로 붉게 물든 지리산 피아골이다.
어느 날 TV에서 뇌종양 수술로 너무도 변해버린 연극배우 윤석화의 모습을 보며 무척 마음 아팠다. 윤석화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한말 중에 이날 것 기억에 남는 것은“나는 관객이 없을 때 연기가 잘된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연기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었다. 나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글이 잘 써졌다. 어떨 때는 봇물 쏟아지듯 했다. 어떤 날은 눈이 내렸다. 모습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윤석화가 지금에 와서는 “암과 싸우고 싶지 않고 이왕에 만났으니 잘 지내다가 떠날 때는 말없이 가자”라고 한다. 항암을 거부하고 자연치유에 들어간 윤석화의 이런 마음가짐이 그대(癌)와 함께 살자고 했던 내 마음과 어쩌면 이리도 같은지 모르겠다. 그녀가 내 마음인지 내가 그 마음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혼자 자기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지는 깨달음일 것이다. 투병생활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도 윤석화는 윤석화의 모습으로 나는 내 모습으로 나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고 싶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는 없으나 나는 그녀 모습을 보면 표적을 향해 정확히 날아가는 화살이 그려진다.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나는 오래전부터 수필을 독자가 알기 쉽게 간단명료하게 쓰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평론가 김현의 ‘말들의 풍경’이 아니라 글들의 풍경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수필을 그렇게 쓴다는 게 정말 너무 어려웠다. 시인의 영감이 아니고서는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답은 하나였다. 어떤 방면의 시든 시를 읽어야한다. 작가 고종석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중에서 단어를 고르는데 가장 예민한 사람이 시인일 겁니다. 시인들은 이를테면 어떤 조사가 들어가는 게 좋을지, 어미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게 좋을지도 깊이 고민합니다. 가장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했다. 예로부터 중국이든 한국이든 선비가 시를 짓지 못하면 선비 취급을 하지 않았다.
시를 짓기 위해선 시를 읽어야한다. 남의 시를 읽지 않고서는 자기 시를 쓸 수 없다. 마치 시를 짓는 일은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한 두 마디에 그치다가 말이 터지기 시작하면 온갖 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처럼 시도 이와 똑 같다. 남의 시를 읽으며 문리가 트이고 감성이 무르익기 시작하면 속에서 시가 나온다.
나는 글 쓰다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문장에 들어갈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글이 막히면 밖으로 나와 산책하거나 아니면 시집을 읽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전에 없던 생각이 떠오르고 쓰다만 글에 들어갈 단어가 생각나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묘한 힘이 있다. 수필가도 시를 읽어야 수필을 섬세하게 리듬감 있게 쓸 수 있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지 작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생각은 하나일 것이다. 나는 아픔으로 견디기 힘들 때 잠시나마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글을 썼다. 생각보다 많은 글이 써졌다. 어떤 날은 하루에 서너 편을 쓰기도 했다. 시인의 시가 그렇듯 수필도 당사자가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발아(發芽) 되는 모양이다. 중국의 두보와 굴원 한국의 옛 시인들을 보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읽히는 좋은 시는 가난과 슬픔에서 나왔다. 신기한 것은 나 역시 그럴 때 쓴 글을 지금 와서 읽어보면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을 만큼 낮 설기도 하고 마음에 쏙 드는 글도 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려 기분 좋거나 마음 편할 때는 한 줄도 써 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