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더하기
허 열 웅
추억이란 흘러간 세월 저 편에서 정지된 시간 속의 그리움이다. 세월이 젊음을 질투하고, 연륜은 장년을 시샘해서인지 노년이 퀵 서비스처럼 빨리 왔다. 요즘 거울 앞에 서면 늙어가는 모습이 씁쓸히 웃고 있지만 마음속 거울은 가슴 두근거리는 설례임이 아직도 남아있다. 살다보니 꿈은 점점 줄어들고 가슴엔 책 몇 권 분량의 뼈 삭은 옛이야기만 쌓였다. 아름다운 추억을 지녔다는 것은 삶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았다는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아름다운 흔적을 더듬다보면 소중했던 이름이 떠오르고 함께 했던 추억의 온도가 높아져 얼어있던 마음도 녹여준다.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행복하고 젊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한 동안 묻어두었던 추억은 잘 익은 김장김치의 새로운 맛처럼 상큼하여 오늘의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추억을 소재로 소설이나, 영화, 뮤지컬 등을 만들면 흥행에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다. 나는 종로3가에 있는 실버극장과 낭만극장에 일주일에 한 번 쯤은 간다. 먼 옛날에 보아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한 닥터지바고, 안나 카레니나, 벤-허, 등 명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영화가 끝나면 가까운 곳에 있는<추억 더하기>란 휴게실에 들린다. 그곳에선 차와 간단한 음식과 술도 팔지만 음악을 감상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LP 판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고 은발머리결의 지긋한 디스크자키가 음악을 들려주는 곳이다. 홀엔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옛날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서빙을 한다. 흘러간 노래를 감상하다가 가끔 내가 좋아했던 곡명을 신청하면 잠시 후 들려준다. 그곳에서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가 초, 중, 고 시절에 갖고 다니던 알미늄 도시락 속에다 계란 부침을 올려놓은 밥을 팔고 있었으나 지금은 잔치국수가 유일한 식사 메뉴다.
네 벽면엔 한 때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이미 고인이 된 스타들의 사진이 차지하고 있다. 멋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록 허드슨, 크라크 케이블, 율 브린너 등 남자배우와 미녀 배우 오드리 헵번, 소피아 로엔, 그레이스 케리 등이다. 한국 배우들은 한 명도 없어 아쉽다. 한 쪽 넓은 벽엔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그림을 배경으로 걸려있다.
간단한 안주로 술잔을 기우리다보면 첫 잔은 현재의 남루한 모습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쓰디쓰지만, 한잔 두잔 들어가면 술은 어느 사이엔가 우리에게 위대했던 과거 그 시절의 희열과 행복을 선사한다. 극작가 유진 오닐은 ‘술은 우리를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웠던 과거로 데리고 가는 최고의 묘약이라고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가물거리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다보면 이루지 못한 첫 사랑과
영롱했던 꿈이 아쉽게 떠오른다. 때로는 철없었던 행동의 속죄가 후회로 모래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젠 거의 모두가 떠나가 버린 부모 형제들, 친구들과 이웃들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앞으로는 만들 추억의 일들이 사라져간 지금은 그 동안 쌓아놓았던 추억의 탑을 허물다보면 다시 또 한 번의 삶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며칠 전 요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이 악화되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친구를 문병했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시작되어 치매까지 발전되어 있었다. 기억도 희미하고 언어도 서툴러진 환자와 어렵게 조금씩 소통하다보니 최근 있었던 일보다는 먼 옛날을 조금 기억하고 있었다. 중, 고 시절에 그와 함께 보낸 아름다웠던 추억이 될 만한 기억들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띠기도 했다.
푸른 바람이 젊음을 밀어냈고, 세월이 중년을 빼앗아가면서 마음보다 몸에 먼저 찾아온 황혼이다. 이제는 연분홍이나, 초록으로 못 돌아가는 길임을 알아 추억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지금의 계절을 바라보며 나에게로 돌아와 은빛 머리 결을 사랑하고 싶다. 하나님은 한 겨울에도 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반세기가 흘러도 첫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기억을 주셨다.
그 동안 오직 살려고만 발버둥 치며 가지려는 생각만 쌓아왔으나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분수에 맞게 남은 세월을 보내리라. 해돋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과 장려함을 선사하는 저녁노을처럼 여운과 여광(餘光)을 남기고 싶다.
아름다운 추억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지난날들을 회상해보면 꿈 많고 순수했던 추억들이 앞으로 살아갈 나의 알 수 없는 미래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주기도 할 것이다. 추억을 소중히 여기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간다면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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