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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별하심 / 열왕기상 15:1-15
시편 25:8절에 보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직한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하고 정직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고 정직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 큰 축복을 하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 사람들이 점점 타락하여 점점 악해지고, 정직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점점 더 악해지고, 점점 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7:29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는데, 타락하여 자꾸 잔꾀를 부려서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을 보면, 마귀의 본성을 알 수가 있는데, 마귀는 살인자이고 악한 영이라고 했습니다. 거짓의 아비요, 거짓말쟁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속성은 악하고 거짓된 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꾸 타락을 하니, 마귀를 닮아갑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을 보십시오. 얼마나 타락했는지, 아주 악하고 거짓된 인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아우를 때려 죽였는데, 그 이유가 자기 아우는 의롭고, 자기의 행위는 악하기 때문에 죽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못된 짓을 하면 아우가 동조를 해주지 않고, 자기는 못된 짓을 하여 밤낮 욕이나 먹지만, 아우는 칭찬 듣고 축복을 받으니,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아우를 시기질투하여 죽인 것입니다. 얼마나 악독한 인간입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3:12절을 보면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뻔뻔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속일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서 그의 악한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 왕도 타락하니까 얼마나 악한지, 군대를 몰고 다니며, 그렇게 충성스러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완전히 멸하라고 하셨는데, 사울 왕은 살진 소와 양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시니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멸망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주 악하고, 거짓말을 뻔뻔하게 하고,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기뻐하시고, 위선자들을 미워하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멸시, 천대를 받은 큰 죄인은 세리들과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나 창녀들을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는 누가 더 잘못했나 저울질을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도 하지 않은 것처럼 위선하는 것은, 두 배의 죄를 범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세리와 창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다 같은 죄인인데, 이들은 위선자이고 거짓말하는 자이기 때문에 더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죄가 큰 이유는 첫째,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죄가 없는 척을 하다보니 회개를 절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1: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고, 큰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면,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깨끗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끊어지지 않았던 죄는,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으로 인해, 결국 멸망까지 가야 했던 것을 보면, 우상은 이스라엘에게 최대의 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도대체 우상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붙들고 놓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중, 가장 쉬운 것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갓바위에 가서 7일 불공을 드리면, 뭐든 원하는 대로 성취된다면, 그리고 실제 모든 사람이 갓바위에서 불공을 드려 소원성취를 이루고 있다면, 갓바위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내가 갓바위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도 아니고, 이번 문제만 해결하고, 다시는 안가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갓바위에서 소원성취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예전처럼 갓바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기 문제를 초월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상,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는, 자기 문제를 초월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곧 누구도 우상숭배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갓바위에 가지 않고, 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제사 지내지 않는 것으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의 문제는 그토록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들의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았던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역시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해한 적은 없습니까?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한 적은 없습니까? 이 행동은 종교적 행동을 초월하여,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곧 기독교적 행동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가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우상이고 교회가 우상이며, 하나님이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문제를 위해, 취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종인 목사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목사의 말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을 것이 염려되어, 목사의 말에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목사가 우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행위의 중심에, 자기가 들어있는 이것이 우상임을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대로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에 대해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대하면, 성도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왕 르호보암을 이어서 그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됩니다. 3절을 보면 아비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아비얌이 행한 그의 아버지의 모든 죄는 14:23-24절에서 말한 대로,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민족의 가증한 일을, 이스라엘이 본받아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악이 되었고, 아비얌이 부친의 악함을 그대로 본받아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얌 후에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됩니다. 11절을 보면, 아사는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습니다. 아사의 정직한 행함은 12-1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12-15절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그가 그의 아버지가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것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이더라.”
이 말처럼,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고, 모든 우상을 없앴으며, 심지어 우상을 만든 태후의 위를 폐할 정도로, 철저히 우상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사의 정직한 행함이었으며, 이런 아사의 마음을 두고,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내용을 대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똑같이 우상을 섬기는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다르게 대하신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뭔가 일관성이 없고,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14:8-9절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내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따르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여로보암의 악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10절부터 보면,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리시고, 아예 이스라엘을 버리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악을 행한 유다의 아비얌에 대해서는,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똑같은 악을 행했음에도 한쪽은 버리시고, 한쪽은 더욱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절을 보면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한, 르호보암이나 아비얌도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악을 행한 자에 대해, 전혀 다른 조치를 취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여, 각각 다르게 대하시는 것이고, 이것을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다윗 언약을 중심으로, 사랑할 자와 버릴 자로 구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르호보암이나 아비얌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들만이 아니라, 유다의 여러 악한 왕들이 예수님의 족보, 곧 생명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여로보암의 집과 동일하게 버림을 받아야 할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아비얌의 아들 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왕으로 등장을 하는 것은, 4절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아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가 행한 일은 우상을 쫓아낸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견고함은 국가의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집이 아무리 발전하고 부강하게 된다고 해도, 그들은 이미 버림 받은 집입니다. 그렇다면 부강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비록 악을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 견고하게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들을 견고하게 함을 기억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자신들을 돌아보며,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고, 우상을 쫓아내는 것이 됩니다. 곧 자기 문제를 초월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문제에 집착을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힘에 둘려 싸여 있는가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존재라는 것이, 어떤 은혜이며 사랑인가를 미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별이나 은혜를, 타인보다 더 높아지고 잘되는 것에서 확인하려고 하지만, 그 모두는 여전히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자는, 자신의 높음과 잘됨에서 구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될 수 없는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에서 구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구별이 큰 감사로 남는다면, 어떤 일이 주어진다고 해도, 나를 구별하신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초월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모든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지극히 신앙적인 행동으로 보인다고 해도,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우상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12절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이상한 것은 우상과 함께, 남색하는 것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악을 말할 때도, 우상과 함께 남색을 언급합니다.
남색은 남자끼리 동침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처럼 보이는데, 왜 우상과 함께 언급하면서, 악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남색을 이방인의 풍습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 쫓아내신, 이방인의 풍습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에, 우상과 함께 악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라는 것을 압니까? 구별되었기에 다르게 대접받고 있음을 압니까? 구별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악을 짊어지고, 영원히 버림받은 자리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곧 구별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모든 악을 예수님의 의로 덮으시고, 생명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구별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구별된 성도로서, 이방인처럼 자신을 위해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 말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며, 여호와께 정직하지 못한 것이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왜 자기 문제에 매여서는 안되는 존재인가를,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별하여 대하시는 것에서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구별하셨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잘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버리시기로 작정한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살아가는 것이 부러운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거룩한 자입니다. 모든 악함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생명의 길로 인도 받으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기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기쁘다는 고백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별하심에서 크신 은혜를 발견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설사 내가 망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할 수 있기를 소원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정직히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직하게 사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지혜로운 길이고, 가장 성공하는 길이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축복의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영국 격언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만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라. 일주일만 행복하려면 결혼을 해라. 한 달만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 일 년이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그러나 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한 인간이 돼라.’
여러분, 정직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축복의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아사왕은 평생에 정직한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을 본받아 정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항상 정리하며 살았습니다.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별의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들도 아사왕처럼, 믿음이 하나님의 것은 항상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바칠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성별의 생활이 있게 하옵소서.
이제 바라기는 우리 주님을 나의 잣대, 곧 모본으로 삼고, 그 주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방패가 되어주시는 그 주님의 은총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도, 그 주님의 뒤를 따라 다윗처럼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모세처럼 신앙의 작은 잣대들, 곧 가정과 교회에 신앙의 모본이 되고, 더 나아가 그 주님이 뒤를 따라 다윗처럼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모세처럼 가정과 교회와 조국의 방패가 되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다윗에게 허락하셨던 영원한 등불의 언약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평안할 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이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한번의 실수나 잘못을 극복한 평생의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영원히 하나님께 기억될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우리들의 가정과 삶에 하나님의 영원히 비치는 등불이 항상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