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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빈민가 출신으로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은, 그가 아르바이트를 할 때, 함께 일하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하는 일이 힘들고, 임금도 적다면서 불만불평을 하는 사람과 똑같은 환경에서도 묵묵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몇 년 간 다른 일을 하다가 그 곳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까지 두 사람은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만 불평하던 사람은 변함없이 불만 불평을 하던 중, 얼마를 더 다니다가 원인모를 병으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감사하며 묵묵하게 일하던 사람은 그 회사의 회장이 되어 있었답니다. 이 일이 콜린 파월에게는 평생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불만 불평을 하며 원망을 일삼는 자는 원망의 열매를 맺고, 감사하는 자는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콜린 파월은 이 후로, 언제나 감사하며 산다고 합니다.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도록 세운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기념비를 세우겠습니까? 기념비의 비결은, 우리가 있는 곳을 하나님의 축복의 장소인 미스바로 만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것을 듣고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사무엘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내려 블레셋을 어지럽게 하여 자중지란 일으켜 승리하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 하나를 세우고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입니다. 이것이, 사무엘과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며 또,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결단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매일 나를 돌아보며 매일 돌아오는 겁니다. “루터”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 늙어 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라. 그래야 신령한 일에 냉랭해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죠지 뮬러”도 “주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찬 373장 “고요한 바다로”와 찬 494장 “만세반석 열리니”를 작사한 “어거스트 토플레디”는, “무릎을 꿇은 그리스도인은 발돋움을 한 천문학자보다 더 멀리 바라봅니다.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부모들보다 더 좋은 국민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의 저자인 “오스왈드 챔버스”는 “기도 때문에 치러야 할 불편을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을 기도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안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신앙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에벤에셀은, 안일한 언약궤 신앙으로 그저 한 해, 한 해 견뎌내는 신앙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회복과 평화가 임하는 진정한 에벤에셀의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성도를 도우십니다.
본문의 “에벤에셀”에는, “하나님,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소서”라는 간절함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을 때, 그 백성은 다른 많은 것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의 땅으로 주시면서 많은 것을 허락하셨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니 땅의 축복, 그 선물들을 하나씩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수고한 소출마저 자신들이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 “하나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소서”라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지경을 하나하나 되찾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회복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은 여기까지만 도우시고 여기서부터는 안 도우시고 멀리 가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까지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도 도우시며, 어제까지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도우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광야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도우셨습니다. 그들에게 물이 없을 때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셨습니다. 또, 광야의 40년 동안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낮의 더위를 구름 기둥으로 막아 주시고, 밤의 추위를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곁에서 이스라엘을 지키고 도우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신약에 와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마 28: 20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며,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본문에서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지키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자신들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영영히 알리고 증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무엘이 승전 후에 열 일 제쳐두고 기념비부터 세웠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을 때, 즉각 감사해야 합니다. 입으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야 합니다. 눅 17: 17 - 18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실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와서 병 낫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청함을 듣고, 치료해 주신 겁니다. 그러자, 자신의 몸이 나을 것을 확인한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며, 그 사람의 감사와 믿음을 받으시고, 칭찬하시며,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즉시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 지며,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지가 더욱 강건해 집니다. 여러분, 우리도 본문의 사무엘과 이스라엘처럼 또, 나병을 치료받은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성도를 지켜주십니다.
본문의 끝을 보시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앞에 분명 굴복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니까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평안히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가 패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진다해도,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다해도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고 승리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잠 24: 16을 보시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와 낙심과 좌절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에벤에셀은 미스바를 통과함으로 나타난 결과이듯, 우리도 승리를 위해, 미스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에벤에셀을 통해, 여기까지 도우심을 말함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대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시 23: 2을 보시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또, 바울은 롬 8: 38 - 39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것처럼, 우리를 지켜주시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 37: 24을 보시면,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이들도 뜻 모를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원망하기보다 더욱 믿음을 굳게 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자신보다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야 할 길도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잠 16: 9을 보시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을 잘 세워서 이룬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계획을 허락하고 도우시며, 계획의 진행을 지켜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다윗은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대신 그의 아들인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캔들러”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의지력이 약했습니다. 이러한 그가 하루는 귀가하는 데 마음 속에서,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라는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귀가하자마자, 아내에게 이 음성에 대해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음성을 듣는 시간에, 아내는 남편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아사 캔들러는,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알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아사 캔들러는, 수입의 10%를 철저히 헌금함으로, 자신을 인도하며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그의 회사는 장족의 발전을 함으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잠 3: 6을 보시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키심과 인도하심을 인정하심으로, 에벤에셀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회복시키고, 평화를 주십니다.
회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전형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의 은혜를 주실 때, 본문에 보면, 평화도 함께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회복되어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요 16: 33에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에벤에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보시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겼으니 평안을 누리게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에벤에셀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의 표시이며, 또,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주시는 축복의 통로로서, “회복과 평화”를 말합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회복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라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블레셋 사방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는 겁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비롯하여 아모리와도 더 이상의 전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었고,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시 23: 5을 보시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가와 세금은 오르고, 경제는 하향입니다. 모든 국민들의 입가는 행복의 미소가 아니라, 어려움의 고통을 이기려는 위로의 미소가 머금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회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미스바에 비무장으로 모인 이스라엘이 전투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블레셋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겼습니다. 그렇듯, 우리에게 처해진 상황은 우리에게 불가능을 보여주지만, 사무엘과 이스라엘을 지키고 도우심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에벤에셀의 회복과 평화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입가에 행복으로 가득하고, 만족으로 가득한 미소가 피어나는 그 날이 이를 줄 믿습니다. 그 날을 위해, 우리는 에벤에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도우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이끄시고, 능력으로 역사 하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사자성어는, “에벤에셀”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고, 이후로도 도우실 줄 믿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에벤에셀의 회복과 평화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