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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차고 넘치게
시편 19편 1-10절, 요한1서 1장 1-5절
한 문 덕 목사
[창조절을 시작하며]
1년 24절기 중에 지금은 열네번째 절기인 처서를 지나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로 한참 가고 있는 중입니다. 처서(處暑)는 ‘더위가 그친다.’라는 뜻인데, 처서를 지나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정말 시원합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처럼 모기나 파리도 점점 사라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가을로 접어드는 느낌입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언제 이 무더위가 지나가나’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는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전통적인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이어집니다. 12월 첫 주부터 시작되는 대림절은 교회력의 시작이고, 이때부터 부활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됩니다. 부활절기가 끝나고, 6월 초부터 11월 말까지는 원래 성령강림절 절기가 6개월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성령강림절 절기가 너무 길고, 하나님과 관련된 절기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9월 첫 주부터 창조절 절기를 만들었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모두 기리는 균형 잡힌 교회력을 만들었습니다.
창조절기를 새롭게 만듦으로써 우리 신앙고백의 근원이 되는 창조신앙을 되돌아보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담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후 변화와 그에 따른 전 지구적 생태 위기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더욱 더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입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창조로 시작해서 창조로 끝난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에서 새로운 질서와 빛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창조와 구원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모든 구원의 메시지는 창조와 창조 사이에서 흐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바라보고, 계속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때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탄성(歎聲)]
오늘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이 자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그 영광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창조자의 숨결과 말씀이 온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시인처럼 느끼고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꼈나요? 사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데가 없고, 모든 존재와 사건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존재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관심과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잠깐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몰아닥치는 일과 바쁜 일상에서도 우리는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멈추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 제가 파주에 살 때 일입니다. 그 때 둘째 동규가 태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선규는 4살이었습니다. 교회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는데, 그래도 쉬는 날이면 선규를 데리고 제가 졸업한 교하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함께 놀곤 했습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여름이 지나고 한창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2-3분도 걸리지 않는데, 호기심이 많았던 선규가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툭툭 건드리며 가다가 갑자기 ‘우와’ 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코스모스에 꿀벌이 날라 다니기도 하기에 저는 벌에 쏘였나 하고 깜짝 놀라서 선규를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선규는 코스모스 꽃을 따다가 얼떨결에 하늘을 쳐다보았고, 너무나 큰 그 하늘 때문에 소리를 지른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크고 넓고 맑은 하늘은 처음 보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그날은 매우 화창한 가을이었고, 하늘은 참으로 높고 맑았습니다. 그 하늘을 처음 올려다 본 선규는 놀라서 감탄의 소리를 질렀던 것이지요. 4살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하늘은 아마도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저도 그와 비슷한 탄성을 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같은 교회 다니는 제 친구와 고등학교 2학년 형과 함께 철원에 있는 상노제일교회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 그 교회에는 제가 무척 좋아하던 전도사님이 전임목회를 하셨고,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해서 찾아 갔던 것입니다. 중고등학생이 무슨 성경학교 교사를 하는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때 당시 우리는 중고등학생 4명이 초등학교 어린이들 80명을 5일 동안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성경학교를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찾아간 시골에서 하루 종일 성경학교와 다른 프로그램을 하고 저녁이 되면 평상에 누워서 새까만 하늘에 수없이 떠 있던 별들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완전 시골이라 버스도 잘 다니지 않아서 철원 동송읍에서 교회까지 1시간도 넘게 걸어갔던 기억이 있고, 군부대 시설이 가득한 동네 개울가에서 돌 메기 낚시도 했습니다. 정말 완전 깡촌이었습니다. 그 날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또 평상(平床)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데 별똥별이 계속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골이었던 우리 집 밤하늘도 아름다웠지만, 그날 밤 하늘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하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논어에 보면 하루는 공자가 시냇가에 산책을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끄러미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다가 공자는 갑자기 이렇게 말을 합니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그치질 않는구나!”(子在川上曰: “逝者, 如斯夫! 不舍晝夜.” <論語> 子罕 16.)
이 짧은 탄성에는 세월의 경험과 깨달음이 녹아 있습니다. 세상은 늘 변한다는 것, 변화 속에서 흘러가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 따라서 배움이란 변화에 따라 잘 적응하는 것이고, 배움을 통해서 인류는 또 문명을 만들어 왔다는 것, 또한 자연은 언제든 그렇게 꾸준히 흘러가며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인간은 자연에서 이런 것들을 또 배워야 한다는 것,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란 그렇게 흘러가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 그럴 때에 새로운 후세대들이 이어 갈 수 있다는 것! 한 마디 말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깨달음들을 읽어내야 합니다.
예수님 또한 자연을 지그시 바라보시며 하늘의 뜻을 읽어 내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중략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마태 6:26-29)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서 예수님의 삶과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근심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통해 무조건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걱정 근심에서 해방되고 참 자유와 진정한 삶의 의미인 영생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시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철학자 김영민은 <봄날은 간다>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익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그러나 익어도 죽는다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의 짧은 봄날의 이치이다.”
여러분! 봄이란 계절은 온듯하면 어느 새 여름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늘 아쉬움을 남깁니다. 봄은 그렇게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쉬이 지나가 버립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한평생을 사는 것이고, 그 인생은 봄날처럼 훅 지나갑니다. 그 인생은 그렇게 가고야 마는 것이지만 성숙한 삶을 살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참살이 삶을 살아야 참 사람이지만, 참살이 삶을 살아도,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도 죽음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 또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참으로 깊고도 아련한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길에서 저와 여러분은 자주 탄성을 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을 알아채고,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말 없는 자연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이제 주님의 율법과 계명과 교훈에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더 탐스럽고 더 달콤하다]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주님의 말씀은 티 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견고히 서 있으며, 주님의 법규는 참되어서 한결 같이 바르다. 주님의 교훈은 금보다, 순금보다 더 탐스럽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
읽고 또 읽어도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서 또 누구의 입에서, 어떤 언론에서 이런 언어들을 들을 수 있을까요? 생기를 북돋우고, 깨우쳐 주고, 기쁨을 안겨 주고, 사람의 눈을 밝혀 주는 참되고 완전하고 정직하고 순수한 언어, 티 없이 맑은 언어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요? 요즘 언론은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자를 놓고 온갖 의혹을 제기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2013년 2월 13일부터 3월 11일까지 30일간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임명될 시기의 언론보도는 2,918건이었는데, 지난 8월 9일부터 29일까지 20일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놓고 언론이 보도한 것은 모두 619,806건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사 중에 참되고 정직하고 순수하고 티 없는 기사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거짓말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올바른 말을 구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을 어둠 속을 헤매다가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은 자연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계명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병렬시키면서 자연법과 도덕법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거듭되면 될수록, 또한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새로운, 나아가 더욱 커다란 감탄과 경이로움, 존경심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별이 총총 빛나는 저 하늘과 내 마음의 도덕법칙이다.”(실천이성비판) 철학자 칸트는 저 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 있는 것처럼 내 마음에는 자신만의 원칙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세계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듯,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 안에 이미 있는 도덕법칙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말씀을 주체적 인간의 도덕성을 확보하려는 자신의 철학에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대로 운행하는 자연을 보며 배우고, 또 명시적인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참된 기쁨이 나오고, 참된 평화에 이르며, 올바른 깨우침으로 견고히 서 있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에서 주님의 교훈을 금과 꿀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꿀은 매우 귀한 것, 제일 좋은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영양학적으로도 꿀은 참 신비합니다. 꿀은 소화력이 아무리 약한 사람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으며, 모든 음식물 중 가장 많은 비타민 C를 비롯해 다양한 영양소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위급한 사람을 살리는 약으로도 꿀을 사용했고,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발굴된 꿀은 3,000년의 세월에도 전혀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친구 요나단은 며칠 굶고 힘이 들어 지쳐 쓰러졌을 때, 지팡이로 꿀을 두 번 찍어먹고 눈이 번쩍 뜨이고, 기력을 회복하였습니다(삼상 14:27).
그런데 오늘 시인은 주님의 교훈이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16장 24절에도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고, 쑤시는 뼈를 낫게 하여 준다.”고 되어 있는데 바로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송이꿀’은 꿀통, 벌통에 있는 아직 따지 않은 꿀로, 최상급의 꿀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훈이 순금보다 더 탐스럽고,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깨닫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 또한 시편 시인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가진 사람이 쓴 고백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기쁨이 차고 넘칠 것이라고 요한1서의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온 교우가 진정으로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지만,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어둠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참된 변화의 기운이 일어나도록]
오늘 목회마당에도 썼지만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우리 교단의 목사 수련생들이 집중적으로 받아야 하는 목사후보생 교육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맡은 주제는 생명과 평화, 정의, 창조질서의 보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목회와 선교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돈만 아는 자본주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는 실증적 유물론, 개인적이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4차 산업혁명의 바람이 몰고 올 변화 속에서 한국교회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사회적 신뢰도가 추락하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매년 일만사천명이라는 숫자가 줄고 있는 우리 교단의 현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직하게 예수의 목회와 첫 교회의 능력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무엇보다 목회자의 철저한 변화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외면적으로 그럴 듯한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매우 구체적인 전문성과 영성, 균형 감각이 있는 목회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 실력이 있어야만 한국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질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개신교의 대다수 교인들이 걸려 있는 병은 성경을 문자-사실적으로만 읽는 습관, 구원을 천국과 지옥틀의 내세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 무교와 유교의 습성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신앙 행태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신앙을 가지고 그것으로 승부해야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올바른 교회의 활동과 목회 사례를 우리교회가 하고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조별로 토론하는 시간이 돌아 왔고, 제가 5개의 공동 연구 중에 마지막 순서였기에 토론도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토론 시간에 저는 이전과는 다른 색다른 체험을 했습니다. 우리 조에 속한 14명의 목사수련생들이 강의의 소감과 목회 준비에 대해 말하는데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선택, 말하는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들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후배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 사도가 설교를 하고 나서 3천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1907년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난 회개와 부흥운동의 모습이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강의를 들었던 한 강사 목사님은 “저야말로 이번에 공부 많이 했어요. 마지막에 한 목사님을 배치한 것 잘한 것 같아요. 기장 신학이 뭔지 되돌아보게 했어요.”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는 진짜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 발은 세상에 다른 한 발은 하나님께 걸쳐 놓으면 안 됩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배운 것을, 주님의 교훈과 가르침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에 우리의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만 기쁨이 차고 넘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가을에 주님의 교훈이 금보다 더 탐스럽고,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늘을 보고, 온 누리에 퍼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보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귀를 열어 주소서. 완전하고 참된 주님의 교훈과 계명을 듣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손발을 붙들어 주셔서 서로 기쁨이 차고 넘치는 일들에 힘쓰게 하여 주소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만 붙들고 전진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의 전에 불러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때로 배고픔을 느껴 겸손할 수 있는 마음 또한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주시고, 우리 맘에 진리를 향한 갈망을 주셔서 또한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듣고, 접촉하는 모든 것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가 때때로 참 견디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넘어져도 일어날 힘을 주소서.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고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의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오니, 이 예물을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몸과 여러분의 감각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 축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주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