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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2편 2절-3절: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2절: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삭도’란 날카로운 면도칼을 말한다. ‘간사’란 거짓말을 말한다. 사람들이 혀를 좋은 뜻으로 쓰면 분별력 구별력 판단력이 예민하고 정확할 것이다. 이건 참 좋은 혀다. 그런데 본 절은 도엑을 두고 하는 말로서, 악한 도엑의 혀가 악을 꾀하니 날카로운 삭고 같다고 한다. 그러니 이 도엑이 사울 왕에게 가서 의인 다윗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헐뜯고 거짓말을 했겠느냐?
도엑의 말인즉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가서 떡도 얻어먹고 골리앗장군을 죽인 칼을 얻어가더라.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과 짜고 사울 왕 당신의 목을 칠 거라고 하더라’ 라고 말을 했을 거다. 사실 다윗은 그런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 그러나 도엑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악한 혀를 가진 도엑으로서는 다윗이 나쁘게 보이기 마련이고, 따라서 다윗에 대해 악하게 말하기 쉬운 거다.
사람들도 보면 자기와 원수 된 자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들이 모여서 자기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했을 거라고 넘겨 집어 생각을 하게 된다. 넘겨 집어 생각하는 것은 악한 거다. 가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 중에 의부증이나 의처증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넘겨 집는 병이다. 넘겨 집는 것은 사단 마귀의 짓이다.
믿는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런 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보여질 수 있는 꺼리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다 보면 나는 나쁜 짓을 안 했는데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악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 허다하다. 세상은 선악과 따먹은 세상이기 때문에 사단 마귀가 거짓된 사람들을 붙잡고 얼마든지 시험을 친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오해를 사지 않게 미연에 방지하는 선한 꾀를 가지는 게 좋다.
악한 도엑이 ‘다윗이 아히멜렉과 합세하여 사울 왕 당신의 목을 칠 거라고 했다. 내가 그 소리를 직접 들었다’ 라고 말을 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다윗이 미워서 죽이고 싶은데 이 간사한 말을 들은 사울 왕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겠느냐?
이걸 보면서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한다. 내 주위의 진리성도가 괜히 미워지고 남이 잘 되는 게 괜히 미워진다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않고 있으면 반드시 도엑이 찾아와서 그 마음을 선동해서 더 악한 짓을 하게 한다. 도엑의 성질이 자기를 찾아와서 그런 선동이 안 되도록, 선동을 하지 못하도록 평소에 자기의 성격과 성질을 늘 하나님 앞에 고치는 게 좋다. 안 고치고 있다가는 선동을 받게 된다. 선동을 받으면 나중에 가서 자기 얼굴이 어떻게 될까? 결국은 자기에게 다 돌아온다.
진리의 사람들은 항상 말씀을 좇아가면서 자기를 만들어 나가고 자기를 단속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자기를 만들어 가려고는 하지 않고 사고하는 것이 늘 다른 사람 쪽을 생각을 한다. 그래서 상대는 나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내 편에서 자꾸 상대를 넘겨 집어서 그 상대를 좋지 않게 생각을 한다. 이거는 도엑이, 즉 사단 마귀가 찾아오기 쉬운 상태다.
우리는 절대로 도엑의 짓을 해서도 안 될 것이고 도엑이 찾아오도록 해서도 안 된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마음, 말씀을 새김질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게 선한 마음이다. 우리가 사람인지라 혹 다른 사람의 좋지 않은 면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럴 때는 그 생각을 계속 품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라. 이게 제일 좋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다. 안 좋은 것을 자꾸 생각하면 시험에 든다.
3절: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일반적으로라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활동을 하는 대신 사람을 두들겨 패고 죽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한 일반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면서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며 좇아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일부러 그러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몰라서 그러는 사람이 있을 거고, 알면서도 강압과 억압에 못 이겨서, 죽지 못해서 그러는 사람도 있기는 할 거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누구보고 이 말을 하는 거냐? 도엑보고 하는 말이다. 도엑보고 하는 말이지만 계시적으로 보면 이 말씀은 도엑과 같은 나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일반세상에서 선과 악을 말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선악과 따먹은 타락된 지식으로 말을 한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의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서 선과 악을 따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 아담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모든 사람 속에는 그 지식이 들어갔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 영향이 들어갔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 독소가 들어갔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 맛이 들어갔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 사상이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기준해서 따진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기준이 아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 자기 기준으로, 사람의 기준으로 따진다.
세상에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 독이 올라서 나온 지식의 기준으로. 사람을 기준으로 따지는 선과 악이 있고, 진리의 말씀을, 생명과를 따먹고 그 기운에서, 그 지식에서, 그 영향에서 나온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따지는 선과 악이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던 말을 딱 들어볼 때 인간의 눈에 나타나 보이는 모습이나 활동 등을 기준으로 하는 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의 기준에서 하는 말이고, 사람의 중심 사상에 놓고 정신과 사상을 신령한 것에 놓고 말을 하는 것은 생명과 따먹은 지식의 기준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믿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좋지 않게 보여지는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런 말과 행동을 삼가라고 권고를 할 수 있다. 이건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하는 거다.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행동적으로 누는 안 끼치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이 보기 싫은 게 있다. 이건 악한 생각이다.
믿는 우리가 조심할 게 참 많다. 자기의 분수에 넘는 말이나 자기 분수에 넘는 행동 등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닌데 성도에게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거다. 인간의 세계에는 이런 게 있다. 그러니까 늘 자기를 살펴서 해야 될 일인지 안 해야 될 일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남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내가 보기에 안 좋게 보이는 게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나도 저 사람처럼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할까?’ 하면서 자기를 바로 세워나가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볼 때 안 좋게 보일 때는 그 사람에게 결과가 나쁘게 나타날 때까지는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진리의 교훈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양하고 다각적으로 생각을 하며 자기를 다듬어야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선을 행하다 보면 남 보기에 악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항상 바로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하고 안 좋게 볼지라도 ‘그러냐?’ 라고 하면서 혹 자기에게 잘못된 것이 없는지를 살펴서 바로 하면 된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선적인 행동을 오해하고 안 좋게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자기 뇌에 병이 든다. 이런 것은 사망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기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과를 먹은 지식에서 선과 악을 따져야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으로 판단을 하는 것은 세상 땅의 차원이고, 생명과를 따먹은 지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신령천국의 차원이다. 우리는 임시성과 영원성을 따지는 근원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체적으로 선한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활동과 역사는 모두가 선하다. 왜냐? 선한 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이 선은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드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믿는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온전의 속성과 성품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또한 이 일에 순종하고 수종을 드는 자들이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악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방해하는 것.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신경 쓰게 하는 것. 이렇게 해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끊게 하는 것이 악이다. 악을 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불타질 임시 것에 목적적으로 몰두하게 해서 스스로 시험에 들어서 악에 빠지게 하는 게 있고, 또 보면 다른 사람의 설득에 의해서 악에 빠지는 것도 있다.
일반 세상사람들은 다 스스로 악에 빠져 있다. 그러면서도 이 사실을 모른 채 세상에 더 많이 빠질수록 행복하다고 한다. 돈에 많이 빠질수록 더 행복하다고 하고, 불타질 것을 많이 안을수록 더 행복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지식과는 완전히 거꾸로 된 지식이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일반적 표면적 액면적으로는 폭도들이나 이런 짓을 하지 보통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본문은 일반적인 사람을 두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신앙 사상적으로 성도들 속에 이런 정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모든 활동은 믿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하나님의 의를 입히시는 의로운 말씀이고 의로운 역사다. 따라서 믿는 우리의 언행심사도 사람을 영원히 의롭게 만드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수종을 드는 거다. 그런데 도엑은 이 일을 미워하고 방해하고 사람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땅에 더 정을 붙게 하는 일을 했듯이 믿는 우리 속에도 도엑과 같은 마음이 들어있다면 이런 게 다 거짓말이요 거짓적인 행동이다.
어떤 것이 거짓말이냐? 영원 궁극적인 그 세계에서 되어질 일을 현재로 미리 당겨놓고 볼 때 성경을 들고 하는 말의 성격과 성질이 하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어떤 말을 해도 다 거짓말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면 신앙의 세계에서 말하는 참과 거짓을 전혀 분별을 못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과 거짓은 지금 당장을 놓고 말하는 게 아니라 ‘죽음 저 너머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서까지 효력을 볼 수 있는 거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판단을 하는 거다. 세상 임시적인 것에 속하는 말은 다 땅에서 난 것이니 땅에서 난 지식의 활동, 말, 소원 목적으로 가르친다면 영원한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므로 전부가 거짓말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설령 그것이 이루어졌더라도 그 행복은 천국에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서 거짓말이다. 그러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네 말대로라면 일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러면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느냐?’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 말은 일을 하거나 돈을 버는 것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세상 임시성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살지 말라는 거다. 믿는 사람도 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어디에 목적을 두고 공부를 하느냐? 어디에 강조를 두느냐? 우리는 직장에 다니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뭘 하든지 그걸 매개물로 해서 관계되는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거다. 일이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니까 일터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을 전하는 거다.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다 보면 물질을 쓸 수도 있는 건데, 이 때 지혜롭게 하라. 자칫 잘못하면 내 쪽에서는 상대에게 좋게 해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건데 상대는 이것을 역이용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전했다면 나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지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볼 때 이용을 당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죽음의 세계를 알게 하고, 영원한 참 행복과 기쁨과 쾌락을 알게 하는 게 참말이다. 이게 아닌 영원히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영원으로 들어가 있는 말은 참말이고, 임시성으로 들어가 있는 말은 거짓말이요 도엑의 말이다. 본인은 정직하게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임시성에 목적을 두고 말을 하면 세상은 움직이는 곳이라서 자기의 그 말이 거짓말로 되어지는 상황이 돼버린다. 그래서 거짓말이다.
그러니 우리 기독자들은 함부로 약속을 하지 말아라. 그 때 그때마다 ‘예스다. 노다’로 나가야 한다. 자기가 아무리 앞날을 철저히 계획을 하고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할지라도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자기가 약속한 것이 어쩌다 맞게 되면 상대방에게 ‘그것 봐라. 내가 틀림없다고 말했지 않느냐?’ 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권 섭리적으로 돌리시는 것에 어쩌다 자기의 계획이 맞은 것뿐이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돌려버리면 인간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세상과 세상 것을 자랑하고 돋보게 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헛 살게 하거나, 불 탈 세상에 대한 욕심을 품게 하거나, 사람을 미워하게 하는 자는 도엑을 사랑하는 자이고, 도엑이라는 새끼를 품은 거다. 고슴도치가 자기 새끼를 바라보며 ‘세상에 이렇게 부드러운 털을 가진 짐승은 없을 거다’ 라고 하면서 자기 새끼를 사랑하듯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도엑을 사랑하는 거다. 또한 도엑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한다.
목회자가 교회에 어떤 교훈을 하느냐? 목사가 교인들에게 세상을 준다면 이 목사는 세상을 사랑하는 거고, 자기가 세상을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이것을 교인들에게 주는 거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 역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세상을 가지려고 힘을 쓰게 된다.
교회 안의 도엑은 진리와 하나님을 미워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가진 성도를 미워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세상을 사랑하도록 하여 하나님 앞에 망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에게는 이런 도엑의 요소가 없느냐? 자기 속에 새끼 도엑은 없느냐? 자기가 알게 모르게 도엑의 짓을 했거나 알게 모르게 도엑의 성질에 끌려간 일이 없느냐?
이제 도엑이 누군지 잘 알겠느냐? 도엑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도엑이 어떤 성격 성질을 가졌는지 알겠느냐?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도엑을 모르면 도엑의 짓을 하게 된다. 성도의 움직임을 항상 그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