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배역의 선들이 처처에 포복해 있다. 갈라놓고 배제하고 금지하고 견제한다. 선은 일정한 기준이나 어떤 범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론 무어보다 폭력적이다. 은밀하고 거세게 밀어붙이며 가슴속까지 서슴없이 그어 댄다.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공간과 공간 사이 수만은 선들이 우리를 갈등하게 만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홀연히 또 하나의 선이 사무쳐 왔다. 냉정하게 생과 사를 가르는 선, 허망하고 쓸쓸하며 소리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기막힌 선이 있음을 진즉 알긴 했어도, 비로소 뼛속 온도로 닿았다면 내 몽매함 탓이리라.
오십 초반이던 그녀가 돌아올 수 없는 선을 감히 스스로 넘어가 버린 것도 그랬다 막 외출하려는 등 뒤에서 집 전화가 울렸었다. 옛 직장 선배였다. C가 죽은 거 모르제? 내 그런 줄 알았다. 그녀가 당최 짐작할 수 없는 의문을 남기고 떠났단다. 그것도 지난주에.
“하, 하, 하,” 뜬금없이 왜 헛웃음이 터졌는지 모른다. 나의 이상한 반응에 움칠한 선배는, 많이 슬퍼하더라고 전해 주겠다며 황망히 전화를 끊었다. 내 안부가 궁금할 본인이 없는데 누구한테 전한다는 걸까. 나와 그녀를 아는 사람들? 넋 나가 있더라는 그녀의 남편? 그저 아득하고 멍했다.
C와 나는 정확히 보름 전에 포항 호미곶을 둘러 하루 여행길을 다녀온 터다. 몸에 좋다는 칡차까지 한 병 사 들고 돌아왔던 그녀가 어처구니없게도 딴 세상으로 가 버렸단다. 수십 년 집과 직장을 오가던 길을 명퇴로 갈무리하고 다그치던 시간의 끈에서 풀려난 지 몇 년이나 됐다고, 정말 하고픈 일 하면서 재미있게 살자고 마음 맞추었건만, 활달하고 소탈한 성격이었건만, 대체 무슨 일이 심경에 일어났더란 말인가.
전화를 끊고서도 울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뻣뻣이 서 있었다. 합창 수업에 가려고 차려입었던 외출옷을 도로 벗는데 그제야 갇혀있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삶과 죽음이 결국엔 한통속이었다. 절대로 오갈 수 없는 극명한 선이 다시금 내 곁에 그어진 것이다. “안돼….
그녀만큼 나를 생각해 준 친구가 있었을까. 매일이 판박이인 생활에 지친 내가 어디든 가자고 하면 열 일 제치고 나섰던 그녀, 여름휴가 때에도 ‘여행은 친구와 함께’가 제격이라는 내 주장을 토 달지 않고 받아 주었다. 외국어 울렁증으로 이국인 앞에서는 입술이 붙어 버리면서도 선뜻 유럽 여행길에 동행할 만큼 내겐 이해를 넘어 이타적이던 친구다. 그녀를 잘 살피지 못했다는 자책이 뒤늦게 몰아친다. 후회는 늘 이런 식이었지.
선은 넘을 수 있는 것과 넘을 수 없는 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선, 보이진 않아도 강력한 힘으로 앞을 턱턱 막는 선들이 있다. 부드러우면서 정겹게 양쪽을 이어 주는 선이 있는가 하면, 벼린 칼끝처럼 시퍼런 냉기를 품고 매섭게 갈라놓는 선도 있다. 사는 동안, 여려 선들에 묶이고 매달리고 등을 지며 고뇌한다. 선을 잇기 위해서, 혹은 선을 뛰어넘기 위해서.
아버지는 선 하나로 인해 평생을 이산의 아픔과 그리움으로 살다 끝네 생을 놓으셨다. ‘죽지 말고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가 실향민들의 염원이었지만 이제 생존자도 많지 않다. 남은 이들도 고령으로 귀향은커녕 생명줄마저 희미한 처지다. 자고 나면 바뀌는 세상이고 지구촌 곳곳을 넘나드는 시대라는 말이 맞기나 한지. 내가 사는 좁은 땅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혈육 지친의 정도 막아 놓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재다.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도 뻗대고 있는 휴전선 이야말로 전쟁과 평화가 위태롭게 공존하는 역설의 현장이겠다..
휴전선 이남에서 태어나고 자란 딸은 아버지의 고향이 있는 북녘땅을 이야기로만 안다. 남북을 갈라놓은 그 통한의 실선보다 당장 주위에서 진로를 방해하는 무형의 선들이 더 암담했다. 불리한 환경요인들 틈에서 선택의 길은 여럿 있을 수 없었다. 실현하고 싶은 이상 보다는 삶을 영위할 방편으로 지킨 직장에서 기대와 좌절, 환희와 고통을 맛보는 동안 많은 세월이 출렁거리며 흘렀다.
생이란 호시탐탐 발을 걸어, 채려는 선들을 뛰어넘고 또 다른 선에 닿는 길일까. 가령 대나무도 몸 중간중간 매듭진 선들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가늘기만 한 나무가 그렇게 높이 올라갈 수 없었을 테니까. 만약 유형무형의 태클을 거는 선들이 곳곳에 없었더라면 세상의 목표들은 달성되지 못했을 테니까. 하여, 유사 이래 세상사 구비마다 앞앞마다. 숱한 사연을 꿰고 존재했을 선들에게 묻고 싶다. 적인지 동반자인지 아리송한 그대 의문의 선들이여! 오늘도 여전하신가.
선을 넘는다. 유연하고 포용적인 선, 우리 동네 구서동을 지나 금정구를 벗어나고 동래구 수영구 남구를 거치고 그다음 구의 딴 동네로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하루에도 몇 개의 선을 넘나든다. 어떤 날은 인문학 강좌를 수강하고, 어느 날은 합창 수업을 하고, 한국무용을 하고, 다시 역순으로 넘어온다. 그게 언제까지일지 자신도 알 순 없지만, 기껍고 유유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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