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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한서》<무제기>를 통해 본 中삼한의 강역
《漢書》《武帝紀》삼한
《漢書》《武帝紀》雲:元封三年,朝鮮斬其王右渠降,以其地為樂浪、臨屯、玄菟、真番郡。
《地理誌》雲:玄菟、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貊、句驪蠻夷。應劭曰:玄菟,故真番國;樂浪,
故朝鮮國也。《後漢書》《東夷傳》雲: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漢元封三年,滅朝鮮,分置
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番,以並樂浪、玄菟。玄菟複徙居句驪,自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
屬樂浪。然則此二郡之地,東窮大海,皆古嵎夷也。玄菟北與夫餘、挹婁連壤,故為之封畛,使北國不得
南侵。樂浪南與三韓分海,故為之封畛,使島夷不得北侵,而中外之防峻矣。
《한서》《무제기》에 이르기를 원봉3년(기원전108)조선 우거왕을 참하고 그 땅에 낙랑.임둔.현도.진번
군을 설치하였다.《지리지》에 이르기를 현도.낙랑군은 무제시에 설치하였고,이때 예맥과 고구려도 모두
조선이었다. 응소가 말하길 현도는 옛 진번국이었고 낙랑은 옛 조선국이었다.
《후한서》<동이전》에 이르기를 예와 옥저,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한나라 원봉3년(기원전108)조선을 멸하고 4군을 분치하였다.
소제 시원5년(기원전 82)에 이르러 임둔,진번군을 파하고,낙랑,현도군에 병합하였다.
현도군은 고구려땅으로 옮겨가 살았다. 단대령(천산산맥) 동쪽에 있던 옥저,예맥등은 모두 낙랑의 속지였다.
당연히 낙랑과 현도 2군땅이다.동쪽으로 대해에 막혀있는 이곳 두군은 모두 우이의 옛 땅이다.
현도는 북쪽으로 부여와 같이 하고 읍루와도 땅을 맞대고있다.이곳에 설정된 옛 경계선들은 북국들의 남침
을 막았다. 낙랑 남쪽으로는 삼한이 바다에 산재해있어 옛 경계선으로 삼으니 이로서 바다에서 활동하는
도이(島夷)들의 북침을 막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무제시의 현도군은 요동의 북쪽에 있었고,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던 옥저와 예맥은
낙랑군의 영동7현에 속해 있었다.
영동7현은 낙랑군의 동부도위 소속임으로 낙랑군의 중심은 요동반도의 서쪽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삼한은 한반도의 남쪽에 있었던게 아니라 요동반도의 남쪽 바다에 흩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평양을 낙랑군으로 가정한다면 어떻게 삼한을 남쪽바다에 산재해 있다고 할수 있겠는가.
이뿐 아니라 왜국(倭國)도 낙랑해(樂浪海)중에 있었다는 대목은 그 위치가 서한만으로 부르는 요동반도의
남쪽바다를 낙랑해로 불렀다는 말이다.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漢書』卷28 地理志)>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日弁韓。辰韓者,
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為臣智,其次為邑借,散
在山海間,無城郭。
侯准既僭號稱王。為燕亡人衛滿所攻奪,將其左右宮人走人海。居韓地,自號韓王。其後絕滅,今韓人猶有
奉其祭祀者。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
桓、靈之末,韓(水歲)強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水歲),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於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郡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餘有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髡頭如鮮卑
《후한서》<동이열전>삼한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
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
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初,朝鮮王准為詹滿所破,乃將其餘□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為韓王。准後滅絕,馬韓人復自
立為辰王。建武二十年,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一]光武封蘇馬諟為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
四時朝謁。靈帝末,韓﹑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
고전번역총서 >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 역대전고(歷代典故) >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연간에 이르러, 진한 우거수(右渠帥) 염사착(廉斯鑡)이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고
백성이 넉넉하고 즐겁게 산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 투항하려 자기 읍락을 나오다가, 밭 가운데서 새[雀]
를 쫓는 남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말소리가 한인(韓人)이 아닌지라,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한인인데, 이름은 호래(戶來)이다. 우리들 1천 5백 명이 나무를 베러 산에 들어갔다가 한인에게 잡혀서
모두 머리를 깎이고 종이 된 지 3년이 된다.” 하였다. 염사착이 말하기를, “내가 한(漢)의 낙랑에 투항
하려고 하니, 너도 따라가겠느냐?”고 하니, 호래가 좋다고 하였다.
염사착이 이어 호래와 함께 탐자현(貪資縣)에 이르러 사유를 말하니, 현에서 군에 보고하였다. 군에서 곧
염사착을 향도(嚮導)로 삼아 잠중(岑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와 호래의 동반자들을 맞이하니,
겨우 1천 명 밖에 안 되었고, 그 5백 명은 이미 죽었다. 염사착이 진한에게 말하기를, “만약 우리 5백 명을
돌려주지 않으면 마땅히 만 명의 군사로 너를 치겠다.”고 하니, 진한이 말하기를, “5백 명은 이미 죽었
으니, 배상을 하겠다.” 하고 곧 진한 사람 1만 5천 명과 변한포(弁韓布) 1만 5천 필을 내놓았다.
염사착이 거두어 가지고 돌아오니, 군에서는 그 공을 표창하여 관책(冠幘)과 전택(田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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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一]廉斯,邑名也。諟音是。馬韓之西,海□上有州胡國。其人短小,髡頭,衣韋衣,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貨市韓中。
《통전》馬韓
馬韓,後漢時通焉。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五十有四國,其北與樂浪、南與
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
或雲百濟是其一國焉。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裏,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
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弁 辰 弁 辰 與 辰 韓 雜 居 , 亦 有 城 郭 。 衣 服 居 處 與 辰 韓 同 ,言 語 風 俗 相 似 , 祠 祭
鬼 神 有 異 。 施 灶 皆 在 戶 西 。
初 , 朝 鮮 王 準 為 衛 滿 所 破 , 乃 將 其 餘 眾 數 千 人 走入 海 , 攻 馬 韓 , 破 之 , 自 立 為
韓 王 。 準 後 滅 絕 , 馬 韓 人復 自 立 為 辰 王 。 後 漢 光 武 建 武 中 , 韓 人 廉 斯 人 蘇 馬 諟 等
詣 樂 浪 貢 獻 。 諟 音 是 。 帝 封 蘇 馬諟 為 漢 廉 斯 邑 君 , 使 屬 樂 浪 郡 , 四 時 朝 謁 。
靈 帝 末 , 韓、 濊 並 盛 , 郡 縣 不 能 制 , 百 姓 苦 亂 , 多 流 亡 入 韓 者 。 獻帝 建 安 中 , 公
孫 康 分 屯 有 、 有 鹽 縣 屯 有、 有 鹽 並 漢 遼 東 屬 縣 , 並 今 東 夷 之 地 。 以 南 荒 地 為帶 方
郡 , 遣 公 孫 模 、 張 敞 等 收 集 遺 民 , 興 兵 代 韓 、 濊 ,舊 民 稍 出 。 是 後 倭 韓 遂 屬 帶 方 。
魏 景 初 中 , 明 帝 密 遣 帶方 太 守 劉 昕 、 樂 浪 太 守 鮮 于 嗣 越 海 定 二 郡 , 諸 韓 國 臣 智加
賜 邑 君 印 綬 , 其 次 與 邑 長 。 其 俗 好 衣 幘 , 下 戶 詣 郡 朝謁 , 皆 假 衣 幘 , 自 服 印 綬 衣
幘 千 有 餘 人 。 部 從 事 吳 林 以樂 浪 本 統 韓 國 , 分 割 辰 韓 八 國 以 與 樂 浪 。 晉 武 帝 咸 寧
中, 馬 韓 王 來 朝 , 自 是 無 聞 。 三 韓 蓋 為 百 濟 、 新 羅 所 吞 并。
百 濟 , 即 後 漢 末 夫 餘 王 尉 仇 台 之 後 , 後魏 時 百 濟 王 上 表 云 : 「 臣 與 高 麗 先 出 夫 餘 。 」
初 以百 家 濟 海 , 因 號 百 濟 。 晉 時 句 麗 既 略 有 遼 東 , 百 濟 亦 據有 遼 西 、 晉 平 二 郡 。
今 柳 城 、 北 平 之 間。 自 晉 以 後 , 吞 并 諸 國 , 據 有 馬 韓 故 地 。 其 國 東 西四 百 里 , 南 北
九 百 里 , 南 接 新 羅 , 北 拒 高 麗 千 餘 里 , 西限 大 海 , 處 小 海 之 南 。 國 西 南 海 中 有 三
島 , 出 黃 漆 樹 ,似 小 榎 樹 而 大 。 六 月 取 汁 , 漆 器 物 若 黃 金 , 其 光 奪 目 。自 晉 代 受 蕃
爵 , 自 置 百 濟 郡 。 義 熙 中 , 以 百 濟 王 夫 餘 腆 佗 典 反 為 使 持 節 、 都 督 百 濟 諸 軍事 。
宋 、 齊 並 遣 使 朝 貢 , 授 官 , 封 其 人 。
土 著 地 多 下 濕 , 率 皆 山 居 。 其 都 理 建 居 拔 城 。 王號 「 於 羅 瑕 」 , 百 姓 呼 為 「 吉 支 」
, 音乾 。 夏 言 並 王 也 。 王 妻 號 「 於 陸 」 , 夏 言 妃 也 。 官有 十 六 品 :
左 平 一 品 , 達 率 二 品 , 恩 率 三 品 , 德 率 四 品, 扞 率 五 品 , 柰 率 六 品 , 以 上 冠 飾 銀
花 ; 將 德 七 品 , 紫帶 ; 施 德 八 品 , 皁 帶 ; 固 德 九 品 , 赤 帶 ; 季 德 十 品 , 青帶 ; 對
德 十 一 品 , 文 督 十 二 品 , 皆 黃 帶 ; 武 督 十 三 品 ,佐 軍 十 四 品 , 振 武 十 五 品 , 克 虞
十 六 品 , 皆 白 帶 。 統 兵以 達 率 、 德 率 、 扞 率 為 之 , 人 庶 及 餘 小 城 咸 分 隸 焉 。
其衣 服 , 男 子 略 同 於 高 麗 , 拜 謁 之 禮 以 兩 手 據 地 為 敬 。 婦人 衣 似 袍 而 袖 微 大 , 在 室
者 編 髮 盤 於 首 , 後 垂 一 道 為 飾, 出 嫁 者 乃 分 為 兩 道 焉 。 兵 有 弓 、 箭 、 刀 、 槊 。
俗 重 騎射 , 兼 愛 墳 史 。 其 秀 異 者 頗 解 屬 文 , 又 解 陰 陽 五 行 。 用宋 元 嘉 曆 , 以 建 寅 月
為 歲 首 。 亦 解 醫 藥 、 卜 筮 、 占 相 之術 。 有 投 壺 、 樗 蒲 等 雜 戲 , 然 尤 尚 弈 碁 。 僧 尼
寺 塔 甚 多, 而 無 道 士 。 賦 稅 以 布 、 絹 、 麻 、 米 等 。 婚 娶 之 禮 略 同華 俗 。 父 母 及 夫 死
者 三 年 持 服 , 餘 親 則 葬 訖 除 之 。 氣 候溫 暖 , 五 穀 、 雜 果 、 菜 蔬 及 酒 醴 、 餚 饌 、 樂 器
之 屬 多 同於 內 地 , 唯 無 駝 、 騾 、 驢 、 羊 、 鵝 、 鴨 等 云 。 其 王 以 四仲 之 月 祭 天 , 又 每
歲 四 祠 其 始 祖 仇 台 之 廟 。 大 姓 有 八 族: 沙 氏 、 燕 氏 、 劦 氏 、 劦 音 俠 。 解氏 、 真 氏 、
國 氏 、 木 氏 、 音 白 氏。 國 西 南 人 島 居 者 十 五 所 , 皆 有 城 邑 。
後 魏 孝 文 遣 眾 征 破 之 。 後 其 王 牟 大 為 高 句 麗 所 破, 衰 弱 累 年 , 遷 居 南 韓 地 。
隋 文 開 皇 初 , 其 王 夫 餘 昌 遣使 貢 方 物 , 拜 為 帶 方 郡 公 、 百 濟 王 。 大 唐 武 德 、 貞 觀
中, 頻 遣 使 朝 貢 。 顯 慶 五 年 , 遣 蘇 定 方 討 平 之 。 舊 有 五 部, 分 統 三 十 七 郡 、 二 百
城 、 七 十 六 萬 戶 , 至 是 以 其 地 分置 熊 津 、 馬 韓 、 東 明 等 五 都 督 府 , 仍 以 其 酋 渠 為
都 督 府刺 史 。 其 舊 地 沒 於 新 羅 , 城 傍 餘 眾 後 漸 寡 弱 , 散 投 突 厥及 靺 鞨 。 其 主 夫 餘
崇 竟 不 敢 還 舊 國 , 土 地 盡 沒 於 新 羅 、靺 鞨 , 夫 餘 氏 君 長 遂 絕 。
삼한(三韓) 《通志》<도읍조>송 정초(鄭樵)
三韓皆都帶方郡之東大海中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北與樂浪方可四千里有三種曰馬韓辰韓弁韓復有一種曰弁
辰其後馬韓悉王三韓之地都目支國百濟都居㧞城亦曰固麻城(晉時據遼東晉平二郡在桞城北平之間)
《漢書》《武帝紀》樂浪南與三韓分海
《한서》<무제기>낙랑 남여 삼한 분해
《한서》<천문지>에는 한무제가 공략한 조선은 육지에서 건너다 보이는 바다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서》<무제기>에서는 삼한은 낙랑 남쪽바다에 산재하여 있다고 한것이다.
또《한서》<지리지>에서는 낙랑해중(樂浪海中)에 왜인들의 100여국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삼한과 왜는 같은 낙랑해역에 있었다는 말이된다.
이는 세기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임나일본부설과 연계가 될 수 있다.
《통전》<변방전>에는 삼한땅은 해도지상에 있으며 조선의 동남에 백제와 신라가 있는데 위.진 이후
삼한으로 분활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한에서 한왕으로 등장한 준왕의 근거지는 요동반도의 남쪽바다 낙랑해가 되는것이다.
위성으로 본 장산군도 (낙랑해)
청일전쟁의 승자 일본이 조차하였던 요동반도 남부와 장산군도(관동주)
이 지도에는 요동반도 남쪽 해안지대에 서고려성과 동고려성이 있다.
그 남쪽 바다로 왕가도는 기자준왕의 망명지였고,
기타 섬에는 서쪽으로 삼한이 있었고, 동쪽으로 왜가 있었다.
《한서》《무제기》(1)에 이르기를 원봉3년(기원전108)조선 우거왕을 참하고 그 땅에 낙랑.임둔.현도.
진번군을 설치하였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현도.낙랑군은 무제시에 설치하였고,이때 예맥과 고구려도 모두 조선이었다.
응소가 말하길 현도는 옛 진번국이었고 낙랑은 옛 조선국이었다.
《후한서》<동이전》에 이르기를 예와 옥저,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한나라 원봉3년(기원전108)조선을 멸하고 4군을 분치하였다.
소제 시원5년(기원전 82)에 이르러 임둔,진번군을 파하고,낙랑,현도군에 병합하였다.
현도군은 고구려땅으로 옮겨가 살았다.단대령(천산산맥) 동쪽에 있던 옥저,예맥등은 모두 낙랑의 속지
였다.당연히 낙랑과 현도 2군땅이다.동쪽으로 대해에 막혀있는 이곳 두군은 모두 우이의 옛 땅이다.
현도는 북쪽으로 부여와 같이 하고 읍루와도 땅을 맞대고있다.
이곳에 설정된 옛 경계선들은 북국들로 하여금 남침을 막았다.낙랑 남쪽으로는 삼한이 바다에 산재해있어
옛 경계선으로 삼으니 이로서 바다에서 활동하는 도이(島夷)들로 하여금 북침을 막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무제시의 현도군은 요동의 북쪽에 있었고,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던 옥저와 예맥은
낙랑군의 영동7현에 속해 있었다.영동7현은 낙랑군의 동부도위 소속임으로 낙랑군의 중심은 요동반도의
서쪽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삼한은 한반도의 남쪽에 있었던게 아니라 요동반도의 남쪽 바다에 흩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평양을 낙랑군으로 가정한다면 어떻게 삼한을 남쪽바다에 산재해 있다고 할수 있겠는가.
이뿐 아니라 왜국(倭國)도 낙랑해(樂浪海)중에 있었다는 대목은 그 위치가 서한만으로 부르는 요동반도의
남쪽바다를 낙랑해로 불렀다는 말이다.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漢書』卷28 地理志)>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등주 북쪽 요동반도의 남쪽해중에 위치한다
사해도제47(四海圖第四十七)중 <해중삼한과 왜의 위치도>
倭人 在帶方 東南 大海之中, 依山島 爲國邑. 舊百餘國, 漢時 有朝見者, 今使譯所通 三十國.
왜인(倭人)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바다에 있는 섬을 의지하여 나라를 만들었는데
예전에 백여 나라가 있었다.
한(漢)나라 때에는 알현하는 자가 있었고 지금도 역관을 보내 소통하는 나라가 삼십나라나 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
*따라서 《한서》<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해(樂浪海)는 《삼국지》<위지> 동아전 왜인전에서 말하는
대방 동남쪽 대해와 같은 해역이라는 말이다.
만약 통설처럼 대방이 황해도라면 부산의 동남쪽에 있는 왜를 대방동남쪽 대해라고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방군의 위치는 <서진군국도>에서 요동반도의 남쪽 해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다고 하는 통설을 깨야 한국의 고대사는 산다.
통전/변방전--/동이상/서략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회이와 사이는 집과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천년의 역사를 가졌던 조선은 한 고제시 멸하였는데 무제 원수중(기원전 108) 그 땅을 열어 낙랑등
군을 설치하였다. 한말에 이르러 공손강이 소유하였고, 위,진이 다시 그 땅을 얻었다.
그 삼한의 땅은 바다의 섬위에 있다.
조선의 동남쪽으로 있던 백제와 신라는 위.진 이후 삼한으로 분활되었다.
(주)[二0]朝鮮之東南百濟新羅魏晉以後分王(三)韓地 ***王을 三으로 교정
주(1)《漢書》《武帝紀》雲:元封三年,朝鮮斬其王右渠降,以其地為樂浪、臨屯、玄菟、真番郡。
《地理誌》雲:玄菟、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貊、句驪蠻夷。應劭曰:玄菟,故真番國;樂浪,
故朝鮮國也。《後漢書》《東夷傳》雲: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漢元封三年,滅朝鮮,
分置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番,以並樂浪、玄菟。玄菟複徙居句驪,自單大領已東,沃沮、
濊貊悉屬樂浪。然則此二郡之地,東窮大海,皆古嵎夷也。玄菟北與夫餘、挹婁連壤,故為之封畛,
使北國不得南侵。樂浪南與三韓分海,故為之封畛,使島夷不得北侵,而中外之防峻矣。
[실증] 발해해역에 있던 진번조선은 지진과 해일로 윤몰되었다.
진번조선(眞番朝鮮)은 기원전 290년경 연나라의 진개장군에게 빼앗긴 3조선중의 하나다.
당시 같이 빼앗겼던 예맥조선은 난하의 서쪽으로 부터 장가구(상곡)지역까지 점유하고 있었고,
진번조선은 난하의 북동부 지역(요서.요동)에 분포되어있었다.
동부지역은 지금은 요동만으로 변한 약 500여리의 충적평야가 주강역이었다.
초기 광령(廣寧)과 양평(襄平)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의무려산을 진산으로 하는 조선의 중심지었고.
험한 물을 해자로 하는 험독현에 왕검성(王儉城)을 두었다가 마지막 남은 낙랑조선으로 치도를 옮기고
왕험성(王險城)이라 하였다.
당시 이곳에 분포되어있던 민족을 예맥.동호.산융등으로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 서북쪽 국경을 흉노와 접하고 있었다.
【正義】上谷郡,今媯州也。言匈奴東方南出,直當媯州也。以徃者,東接穢貉、朝鮮;右方王將居西方,
直上郡 《한서》<흉노열전>
광령평야는 수로가 발달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이 발달하고 뽕나무가 많아 양잠이 발달했던 곳이다.
이곳에 기원전 1122년경 기자 일행이 들어와 양잠술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하였다.
기원전 222년경 진나라가 연을 멸하고 점령하였다가 기원전 207년 한나라에게 패하여 결국 한나라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후 기원전 204년 연나라는 한의 제후국이 되었다. 그후 고구려에 의해서 수복되었다가 다시 당나라에
의해서 빼앗긴 뒤 지진등에 의해서 가라앉은 후 요동만이란 바다로 변한것이다.
이후 기원전 194년 낙랑조선의 준왕은 반란을 이르킨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로 동천하였으며
그후 86년이 흐른 뒤 한나라 무제는 기원전 108년 낙랑조선의 우거를 공격하여 약 1년반을 싸운끝에
점령하게 된다.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師古曰:
「卻,退也,音丘略反。」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師古曰:
「造陽,地名,在上谷界。襄平即遼東所治也。」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距胡。當是時,
冠帶戰國七,而三國邊於匈奴。如淳曰:「燕、趙、秦。」《한서》<흉노열전>上
지도:<고조선 위치 개관도> 송(宋) 소식(蘇軾)의 춘추열국도설 삽화도
《고조선사 연구》123쪽 문전창 저
단군조선(檀君朝鮮)과 예맥조선(濊貊朝鮮), 진번조선(眞番朝鮮)의 위치도
최근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약 40여년의 연구끝에 새로운《새한국사》
를 내놓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밝혀낸 학자로서 독자층의 신망을 어느정도
확보한 학자였기에 사실 기대하는바가 컸던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새롭게 착안한 촛점은 왕조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에 의한 자연재난이었다.
좀더 쉽게 말하면 하늘에서 벌어지는 별들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지상의 사건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한것이었다.
이 책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확인되는 통일신라기의 약 200년간에 걸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이 시기 통일신라와 대제국 당나라의 쇠락, 10-11세기의 “따뜻한 중세”의 안정을 깨트린 12-13세기
의 외계충격에 의한 유목지대의 자연재난과 몽골 부족의 이동, 여진족의 이동과 금나라의 탄생,
거란족(요)의 멸망, 그 시기 고려에서 일어난 여러 변란, 14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자연재난으로 인한
원-명 교체, 일본 남북조의 분열 속의 왜구의 출몰,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변혁 등의 동아시아의
역사 변동을 파악한다.
그리고 1490년 무렵부터 다시 찾아온 외계충격에 의한 자연재난은 이후 270년간 조선 사회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저자는 이러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변동을 배경으로 「실록」 속의 자연재난 분석을
통해서 조선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그러나 좀더 소급하여 고대사의 사료들을 추적하면
그 정점에 기자가 연계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역사의 시원을 알리는 주나라 무왕의 요청에 의하여 제시한 기자의 《홍범구주洪範九疇 》를
말하는것이다.
기자가 자신을 방문한 무왕에게 정치의 도를 전수함으로써, 주나라는 주역과 홍범구주를 통치의 수단
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주역은 음양(陰陽)학이요 홍범은 오행(五行)학이라 말한다.
음양과 오행이 둘이면서도 하나이듯이 홍범과 주역 역시 홍범 속에 주역의 원리가 있고 주역 속에
홍범의 원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홍범과 주역을 합해서 ‘이오지학(二五之學)’ 또는 ‘홍역학(洪易學)’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역은 천지자연의 이치를 음양학으로 풀이한 철학서요, 홍범은 인사의 도를 오행학적으로
풀이한 정치서인 것이다.
무왕은, 선왕이신 문왕이 전한 주역과 기자가 전한 홍범을 전수 받고 치세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주나라는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즈음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을 전수하고 조선 땅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기자동래(箕子東來)’란 말이 바로 이를 의미한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기자는 이미 망해버린 은나라 터(殷墟)를 지나다가 궁실이 헐리고 난 이후 벼와
기장만이 자라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에 마음이 상했으나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 울지도 못하고 다만 노래를 지으니, 은나라 유민들이
이 맥수가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서경 ; 주서 ; 홍범(洪範)
홍범(洪範)
『 《한지(漢志)》에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림에 하늘이 낙서(洛書)를 내려주므로 이것을
본받아 진열하니, 홍범(洪範)이 이것이다.” 하였으며, 《사기(史記)》에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에게 찾아가 천도(天道)를 묻자 기자(箕子)가 홍범(洪範)을 말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편(篇) 안에 ‘이(而)’라 말하고 ‘여(汝)’라 말한 것은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아뢴
말씀이니, 짐작컨대 〈홍범(洪範)〉은 우왕(禹王)에게서 나왔는데, 기자(箕子)가 미루어 부연(敷衍)
하고 증익(增益)하여 이 편(篇)을 이루었나보다.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이와같이 홍범의 출전은 서로가 상반된 근거를 말하고 있으니 그의 옳고 그름은 독자 스스로 판단할
일이지만 구주중 여덟번째 나오는 염용서징(念用庶徵)은 자연재난에 대하여 나라를 경영하는 임금과
권력자들의 행적과 연계한것이다.
임금이 한해동안 잘 다스리면 풍년이 들어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때에는 흉년이 들어
모든 정세가 어지러워짐을 말하는 것이 이 절의 요지이다.
예를 들면 홍수와 가믐과 태풍등의 재해는 각계각층의 책임자들의 행적과 관계가 있다는것이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가믐이 들면 임금이 책임을 통감하고 기우제를 올리는 풍습이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서 나라에서 주관하는 정기적인 제천행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기자는 은나라의 천문 전문가였고 천제를 주관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필요한 청동제기를 제작
하는 부서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제천문화는 고조선으로 부터 전래되어 은나라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를 확인시켜주는 고고유물들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원류였던 장도 북장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후한서》<지 16 오행 4>의 지진과 해일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1975,2,3 일에는 발해 의 요동만
동북쪽에 있던 해성에서 리히터 강도 9,0의지진이 있었다.
이것은 해저지진에 의한것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지진예고가 있어 인명의 큰 손실을 예방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피해현황은 밝혀지지 않았다.그 1년후 1976,7,28 일에 난하의 서남쪽에 위치한 당산
(唐山)에서 일어났던 지진(리히터강도 7,8~8,6)은 사상자 50만명에 사망자만 24만 2천명에 달하는 대
재앙이었다고 전한다. 위키백과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탕산 지진(唐山地震, Tangshan earthquake)은 1976년 7월 28일 3시 42분에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
성 탕산 시 부근을 진원으로서 발생한 진도 7.8의 직하형 지진이다.
시가지를 북북동에서 남남서로 달리는 단층을 따라서 큰 수평 오른쪽에 차이가 발생하면서, 격진에
의해서 당시 중국의 유수한 공업도시인 탕산은 괴멸 상태가 되었다.
*북북동에서 남남서로 달리는 단층을 선으로 그어보면 그 지점에 당산과 해성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그 안(요동만)에 있었던 진번조선이 중심에 놓이게 된다.(필자 주)
이 지진 정보는 즉각 공표되지 않았고, 지진 발생 21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도되었다.
그 후로도 중국 당국은 자연재해 피해상황을 국가기물로 분류하여 보도를 통제하여 왔다.
공산 치하에 있던 당시의 중공은 죽의 장막이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 두가 발해안에 있던 내륙이
침몰할 수 있었다는 직 간접적인 증거인 것이었다.
지진과 그 여파로 일어나는 해일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근간 동남아시아의 참사에서도
확인 되었다.
실재로 당산과 해성간의 대각선에 위치해 있었던 진번조선은 지진과 해일등으로 서서히 요동만으로
윤몰되었던것이다.
1.진번조선.양평 윤몰지역 2.청구.래이.제나라 북부 봉래 일부 윤몰지역.
3.모도열도.요동반도 남부 일부 윤몰지역. 4.평양성(왕험성) 낙랑조선 일부 윤몰.
6.산동반도 동남부 일부 융기지역. 7.연운항 일부 윤몰지역.
발해내역의 삼대만(三大灣)(발해만 요동만'래주만)은 지진으로 생성되어 만곡을 이루고 있다.
위의 춘추열국도에서 보듯이 어떤곳은 내려앉고 어떤곳은 융기되었다.
지진이 심하여 완전히 윤몰된곳은 섬조차 남지 않았고 일부 지진이 약했던 묘도열도는 일부 저지대만
윤몰되어 유적지가 남았고 낙랑조선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옛평양성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해도상 코리아베이라고 부르는 서한만은 삼한과 원삼국이 발생한 장산군도다.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말갈과 읍루.북옥저.동옥저.남옥저와 북부여.동부여. 남부여등은 모두가 초기
에는 원의 영역 안에 있었다.
전기 고조선은 삼조선으로 분리되어 그 영역이 달랐는데 중심조선인 진번조선은 요동만과 요서지역에
있었고, 예맥조선은 난하의 서쪽으로 장가구지역까지 진출해 있다가 연나라에 망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낙랑조선은 한나라 무제에게 멸망한 후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가 고구려에게 수복
되었다. 이후 당나라에게 망하였다가 다시 신라가 수복하는 과정을 걷게 된다.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한반도를 벗어나라
기자는 논쟁의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자 발명품이라는 ‘국사’라는 개념과 학문을 없애지(국사 해체론자들의 주장처럼)
않는 한, 우리 역사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발해연안’까지 넓혀봐야 한다는 것이다.
청동기의 기원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면’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그 옛날 이른바 동이족이 다른 족속과 어울려 발해문명을 창조해낸 발해연안을 바라
보라. 그러면 논쟁 또한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운을 떼면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기원은 발해연안이며, 그 연대는 BC 3000년(훙산문화 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 시기에는 석성을 쌓고 청동기를 만들었으며,
고대 왕국의 기틀을 쌓은(고조선) 발해연안 사람(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商·BC 1600~
BC 1046년)를 건국했다는 점까지.
청동꺾창의 비밀
1986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샤자뎬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청동꺾창의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이 청동꺾창은 중원의 허난성(河南省) 중부 옌스셴(偃師縣) 얼리터우(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꺾창(연대는 BC 1500년 추정)과 매우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둘 다 상나라 초기, 즉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꺾창이라는 뜻이며, 상나라의 전통이 발해연안에
서도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청동꺾창은 선사시대에서는 농사용, 즉 수확용 돌낫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해요.
그리고 직접적인 단서는 바로 발해연안에서 나왔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이교수가 말하는 유물은 랴오둥(요동·遼東) 반도 남단 양터우와(양두와·羊頭窪)에서 확인된 돌꺾창
(石戈)를 가리킨다.
리지(李濟)는 “양터우와 문화의 연대는 하(夏·BC 2070~BC 1600년) 연대와 비슷하다”면서 “이 돌창
이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조선 수장의 권장(權杖)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청동기 기원뿐 아니라 고대국가(고조선)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과(戈·꺾창)를 자전에서 찾으면 ‘한두 개의 가지가 있는 창’이라는 풀이와 함께,
두번째 뜻으로 ‘전쟁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과가 오늘날의 총 같은 대표적인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을 살펴보라. 비실용적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는 원래 무기다. 때문에 창날(戈) 부분은 무게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 날을 세우고, 자루부분은 가벼운
나무를 사용한다. 그래야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이서우잉쯔 청동꺾창은 창날과 자루를 모두 미끈한 청동으로 만들었다.
가벼워야 할 자루(柄)는 무겁고 두껍다. 반면 과는 얇고 가볍다. 또한 자루 양면은 정교한 문양을 주조
했고, 녹송석(綠松石)으로 요철식 상감을 해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무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살상무기가 아니라 의례(儀禮)용 병기로 볼 수밖에. 이른바 권장(權杖), 즉 권력를 상징하는
지팡이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청동꺾창이 나온 수이서우잉쯔는 랴오둥 반도와 인접한 곳에 있어요.”
(이교수)
여기서 기자는 이교수의 강조점을 듣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수이서우잉쯔.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 즉 고조선의 터전이고, 청동꺾창은 바로 고조선의
수장(왕)이 지녔던 권장이 아닌가.
기자는 “기자(箕子·상이 망한 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상나라 귀족)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
(尙書)의 기록을 떠올렸다.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 아닌가.
또 하나,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했던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석성 역시 고조선의 유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경향신문 2007년 10월13일 ‘고조선 추정 싼줘뎬·청쯔산 유적’ 참조)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BC 3000년
좐싼쯔에서 확인된 도가니편들.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기원논쟁에 핵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병기의 예제화(禮制化)를 뜻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셈이다.
벌써 BC 1500년 무렵에 이토록 예제의 완벽한 모습까지 갖춘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청동기의 기원은 언제란 말인가.
기자는 다시 뉴허량(牛河梁) 13지점에서 보았던 이른바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
金字塔·피라미드)를 주목했다.(경향신문 12월1일자 ’뉴허량의 적석총들’ 참조)
“BC 3500~BC 3000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
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거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함께….”(이교수)
이는 매우 중대한 뜻을 담고 있다. 맞다면 기존 중국 청동기 시대의 개막연대(BC 2000년)보다 1000
년을 앞당긴 중국고고학사의 쾌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韓汝) 교수는 1993년 베이징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지층이 교란되었다는 점이 제기되어 여전히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국학계는 실마리를 놓치 않았다.
“피라미드 도가니 지층에서 확인된 고풍관(鼓風管·높은 열을 내려고 바람을 불어 넣는 관)의 구멍을
보라.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 표현된 청동기 제작 과정과 완전히 똑같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이뿐이라면 또 “‘초’를 치는군”하면서 중국인 특유의 ‘허풍’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뉴허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사단이 분석해보니 홍동질(紅銅質), 즉 원시청동인 순동이었다.
증좌가 또 있다. 1987년 우한치(敖漢旗) 시타이쯔(西台子) 유적, 즉 훙산문화(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문화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이다.
도범의 속에는 낚시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 아니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훙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샤자뎬(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나라로 그대로 넘어온다.
훙산문화→고조선→상나라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BC 1500년)도 중요하지만, BC 1600년 유적으로 평가되는 다뎬쯔
(大甸子) 유적도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상나라 문화를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유적이죠.”(이교수)
1973년 다링허(大凌河) 유역 우한치 다뎬쯔에서는 모두 1683건의 도기(陶器)가 확인됐다.
도기 가운데는 400점에 달하는 완전한 채회도기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도기의 모양이라든가, 문양의 모티브가 훗날 상나라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특히 솥과 잔, 사발, 시루, 단지에 나타난 도철(괴수의 얼굴)·운뇌문(雲雷·구름과 번개)·목뇌(目雷·눈과
번개)·기룡(夔龍·추상화한 용) 문양 등은 상나라의 청동기 문양과 똑같다.
그리고 싼줘뎬·청쯔산의 거대한 석성 역시….
결국 이 모든 것을 정리해보자.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인 훙산문화 시기에 청동기 문화의 맹아가 텄다.
그리고 훙산문화부터 시작된 등급사회와 예제가 갈수록 발전했고, 청동기와 석성, 적석총의 전통이
샤자뎬 하층문화 시기에 꽃을 피웠다.
쑤빙치(蘇秉琦)의 말처럼 발해연안에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BC 1600년)와 같은 반열의 강력한
방국(方國·왕국의 의미)이 존재했다. 쑤빙치는 그 방국이 어디인지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국은 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발해문명 창조자 가운데 일부 지파가 무슨 이유
인지 몰라도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BC 1600~BC 1046년)를 건국한다.
이 모든 해석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이다. ‘고조선 부분’만 빼고….
쑤빙치를 비롯한 중국 고고학자들이 (훗날 중원을 제패한) 상나라 문화의 기원은 발해만에 있었다
(先商文化在渤海灣)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많은 사료와 답사를 통해서 확인한 사실은 발해연안에 고조선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그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발해연안 주변에 산재한 박물관에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지만 이 유물들의 정확한 출토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그 주인공인 진번조선이 윤몰되었기 때문이다.
발해연안에 있어야 한다는 고조선을 한반도에서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주체가 바뀐 후손들의
역사일 뿐이다.
'단군신화는 행성 등 외계(外界)충격의 공포가 낳은 천둥번개 신을 주제로 한 창세 신화의 하나였다.
울산 대곡리·천전리의 선사시대 암각화나 북방식 고인돌도 외계충격에서 비롯한 것.
불국사·석굴암·성덕대왕신종 같은 걸작들도 삼국통일의 영광을 기념한 것이라기보다 끊이지 않는
자연재난을 없애달라는 소망을 담은 조성물….'
이태진의 '새 한국사'(까치)는 선사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통사를 겨냥했지만 두 가지 점에서 이례적
이다.
◇역사서에 나타난 숱한 기상이변
우선 '외계충격'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을 역사 분석의 중심에 뒀다.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
지구 근접 물체들이 대기권에 끌려 들어와서 공중 폭발하거나 지구 표면에 충돌하는 현상.
소행성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다 폭발, 지상에는 기상 변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대규모 사회변동을 낳는
다는 논리다.
1970년대 이래 서구 과학계에서 발달한 이론을 이 교수는 한국사 연구에 적용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우리 역사서에 기상 현상까지 꼼꼼히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사를 일국사(一國史)가 아닌 동아시아 지각 변동이라는 큰 틀 속에서 연동해 파악했다.
말갈-여진, 거란, 몽골, 돌궐 등 북방 유목민족들이 농경지대인 중국으로 남하할 때마다 동아시아는
요동쳤고 한반도에도 여진이 닥쳤다.
저자는 "외계충격 현상과 동아시아사의 파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토대로 '동아시아 맥락 속의
한국사'의 뼈대를 세웠다"고 말한다.
발해는 본래 내륙이었다. 그 안으로 황하.구하(영정하등).난하.소능하..대능하.대요수.소요수.압록수.
등이 흘렀으나 남쪽부분부터 바다로 변하기 시작하여 점차 동북쪽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난하(당산지역) 동북지역에 있던 갈석산.양평성.진번조선.국내성등이 500여리의 같은지역에
안에 있었다가 점차로 요동만으로 변한것이다.
삼신산중 봉래산은 등주로 이동되었다.
신선이 사는 산동성 연태시의 봉래각과 장도
"제위왕(齊威王)·제선왕(齊宣王)·연소왕(燕昭王) 때부터 사람들을 시켜 바다로 가서 봉래(蓬萊) ·방장
(方丈)·영주(瀛洲)를 찾아 보도록 하였다.
이 세 개의 신산(神山)은 전설에 의하면 발해(勃海)가운데 있었고, 인간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선인(仙人: 도사)들은 머지않아 배가 도착할 것이 걱정이 되어 얼른 바람을 이용해서 배를 떠밀어 버렸다.
일찍이 그곳에 갔다 왔던 사람이 있는데 거기에는 많은 선인들 및 불사약(不死藥)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온갖 것들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기어다니는 짐승들은 색깔이 모두 흰색
이요, 궁궐은 모두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곳에 아직 도착하기 전에 멀리서 바라다 볼 때는 온통 운해(雲海)처럼 떨어져 있던 것이, 막상 그곳에
다르고 보니, 이 세 개의 신산(神山)은 오히려 물 속에 가라 앉아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배를 대어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이상스런 바람에 으해 배가 떠밀려 끝내 그곳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대의 군주(君主)들 가운데 자나깨나 그곳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후, 이 바닷가에 온다는 소식을 기다렸다가 이 같은 일에 대해 말하는
방사(方士)들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진시황은 몸소 바닷가로 가서 이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 나머지, 이윽고 사람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딸려 바다로 보내어 찾아 보도록 하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배가 바다에 이르렀으나 바람에 떠밀려 그곳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득히 먼 곳
에서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이라고 둘러부쳤다 ……
( 自威、宣、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傅在勃海中,去人不遠;患且至,
則船風引而去。蓋嘗有至者,諸仙人及不死之藥皆在焉。其物禽獸盡白,而黃金銀為宮闕。未至,望之
如雲;及到,三神山反居水下。臨之,風輒引去,終莫能至雲。世主莫不甘心焉。及至秦始皇並天下,
至海上,則方士言之不可勝數。始皇自以為至海上而恐不及矣,使人乃齎童男女入海求之。船交海中,
皆以風為解,曰未能至,望見之焉。)
《사기(史記)·무제기(武帝紀)》에 기록하기를, "건장궁(建章宮)을 수축했는데 규모가 매우 크고
문호가 극히 많았다.
그 전전(前殿)은 미앙궁(未央宮)보다 높고 컸고, 그 동쪽은 봉궐(鳳闕)로 높이가 20여 장이요, 그 서쪽
은 당중지(唐中池)로 빙둘러 수십리의 호랑이 우리(虎圈)요, 그 북쪽에 큰 못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점대(漸臺)는 높이가 20여 장으로, 이 못을 이름하여 태액지(泰液池)라고 하였으며, 못 속에는 봉래
(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호량(壺梁) 등 네 신산(神山)이 있었고, 또 해중의 신산(神山)·해귀(海龜)·
해어(海魚) 따위를 본딴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위에서 말한 삼신산(三神山)은 각이한 시기에 각이한 장소에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사기(史記)》·《한서(漢書)》에 묘사한 것을 보면, 고대 발해(渤海) 연안의 인민들이 발해 안에서
일어나는 해시신루(海市蜃樓: 신기루) 현상을 목도하였으나 그것의 과학적 생성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바다 속에서 정말로 이러한 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읕 바로 바다로 가서 찾아 나섰다가 아닌게 아니라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섬을 발견하게 되었다.
봉래(蓬萊) · 방장(方丈) · 영주(瀛洲) 이러한 이름으로 볼 때, 마땅히 고대 동래(東萊)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곳으로 생각된다.
왕헌당(王獻唐)의 유서(遺書)인 《염황씨족문화고(炎黃氏族文化考)》에서 지적하기를, "봉래(蓬萊)는
풍래(風萊)와 같은 말로, 풍이(風夷) · 내이(萊夷)가 사는 지방이라고 하였다.
방장(方丈)의 방(方)은 풍(風)의 음전이요, 장(丈)은 곧 마당 장(場)자이니, 방장(方丈)은 곧 풍족(風族),
다시 말하면 내이(萊夷)가 사는 곳임을 말한다.
영주(瀛洲)의 영(瀛)은 영족(瀛族)이 살던 해중의 육지이다. 영(瀛)도 이(夷) 가운데 하나이다.
이(夷)란 동래(東萊)에 원래부터 있었던 부족이다.
《황현지(黃縣志)》에 말하기를, "황현(黃縣)은 요임금 때 우이(嵎夷)의 땅이다"라고 하였으니,
봉래 · 방장 · 영주는 모두 해중의 내이(萊夷)가 살던 해도였다.
위 문장에서 염황씨(炎黃氏)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염제(炎帝) · 황제(黃帝)를 이르는 말이요, 일반
적으로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 함은 염제 황제의 자손, 즉 한민족(漢民族)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중국역사상 전설시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란 말을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삼황(三皇)이라 함은 상고시대 부락 추장으로 그 명칭은 종류가 많은데, 어떤 때는 복희·신농·수인이라
고 하고, 어떤 때는 복희·신농·여와라 하고 어떤 때는 천황·지황·태황이라 하고, 어떤 때는 복희·신농 ·
황제라 하고, 어떤 때는 천황·지황·인황이라고 하는 등 4개의 조합으로 나뉘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종잡을 수 없다. 일설에 의하면 염제(炎帝)는 신농씨(神農氏)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민국시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장개석 정부가 망하면서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활약했던 유명한 서량지(徐亮之)라는 학자가 쓴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황제족은 부족연명시대에 동이로 침투해 들어왔다(黃帝族在部族聯盟時代渗入東夷)」라고 정의
하고, 그 근거로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는 황제(黃帝)의
증손이다.
고신(高辛)의 부는 교극(교極)이요, 교극(교極)의 부는 현효(玄嚣)요, 현효의 부는 황제(黃帝)이다.
현효와 교극은 모두 제위에 있지 않았으나 고신씨에 이르러 제위에 올랐다.
고신은 전욱(顓頊)의 족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곡(帝嚳)은 은상의 시조라고 하였다.
(서량지,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화정서국, 256~259쪽 참조)
대명여지도(大明輿地圖)에 그려진 사문도와 등주도의 그림이다. [지도자료:향고도]
이로서 봉래도는 등주로 합쳐지고 사문도는 평원이 내려앉아 수심 4m의 바다가 되었다.
이로서 옛 평양성은 바다로 사라진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래진의 좌측에 보이는 초원(超遠)은 중국전체에서 제일가는 금광이다.
발해에서 13섬의 금을 건졌다는 《단군세기》의 기록과 삼신산의 궁궐은 모두 금으로 장시되었다는
《사기》<봉선서>의 기록들을 실증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옛날의 봉래(등주)는 단독 섬이었으나 지각의 변동으로 현재는 육지로 합해졌다.
그리고 당시 사문도는 전체가 넓은 평원이었으나 현재는 산들과 약간의 주변 땅만 남아 있을뿐 평원
지대는 윤몰되어 수심 약 4미터의 깊이를 가진 양식장이 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를 바다 목장이라고 부른다. 이곳을 필자는 선인왕검의 평양성.낙랑조선.위만조선의
왕험성. 삼신산. 고려의 서경 등으로 추정하고 근거 사료들을 수집중에 있다.
이 섬에는 장도역사박물관과 묘도 항해박물관. 장도의 조류전시관. 대흑산도의 원시유적등과 묘도에
신시시대 부터 이름만 바꿔가며 유래하는 마고를 모신 천후궁이 있다. 사문도가 샤먼에서 온 이름이
라면 이곳이 천제를 올리던 소도(蘇塗)였을것으로 강력히 추정이 되는곳이다.
서주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만들어진 바퀴살 30개짜리의 고급 수레(전차?)가 이 섬에서 발굴되어
그 축소형이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시기적으로 고조선의 작품이다.
인간의 극락으로 불리우는 산동(山東, Shandong) 연대(煙台, Yantai)의 봉래각(蓬萊閣)에는 신선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려동빈(呂洞濱)을 비롯한 8명의 신선이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바다위를
날아갔다는 이야기 "팔선과해(八仙過海)"는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아는 내용이다.
1061년에 세워진 봉래각은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중국의 4대
명루로 인정된다. 아찔한 절벽위에 세워진 봉래각은 파도를 밟고 서서 비경을 연출한다.
(사진설명: 새섬)
일명 장산(長山)제로도로 불리우는 장도는 32개의 작은 섬으로 무어졌고 항만과 암초, 산과 파도를
비롯해 많은 명소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만여마리의 새들이 하늘을 덮는다고 해서 이름하는
조류의 왕국, 만조도(萬鳥島), 대나무가 많아 수려한 강남의 경치를 보여주는 죽산도(竹山島), 만여
마리의 독사가 살아가는 뱀의 왕국 소흑산(小黑山)섬, 돌들이 다양한 벽화의 세계를 만드는 섬 등이
있다.
임해(林海)공원은 산봉과 백사장을 가지고 있는데 산에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만경창파에서는 돛배들이 아름다우며 흰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한 눈에 안겨온다.
(九山)
((
다음은 《통전》<변방전>에서 말하는 삼한의 위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