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락방을 정리하다 신문지에 돌돌 싼 작은 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제법 묵직한 것을 조심스레 펼쳐 보니 망치머리 두 개가 앙증맞게 싸여 있었다. 양쪽 끝이 뾰족하게 생긴 이 망치는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가시고기처럼 사셨던 진부한 삶의 흔적이다.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연일 정씨 가문의 종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계셨다. 오랫동안 맡아 오던 협촌의 이장 직함에 대한 책임감도 대단하셨다. 하루 건너 한 번씩 창말재를 넘어 읍내로 나가셨고 면서기가 마을에 출장을 나와도 더운밥을 해 대고 사거리 김순경이 와도 닭을 잡아 대접했다. 그것이 관(官)에 대한 아버지의 예의였다. 소출이 적은 농지와 거의 무보수직인 이장일은 아버지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농토를 거의 없애버린 가난한 아버지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 열이 넘는 식솔을 거느리고 유행처럼 번지던 이농현상에 편승해야 했다. 격변의 도시로 나온 아버지는 선로를 보수하는 철도노동자가 되셨다.
동해 남부선의 마지막 종착역인 포항역에서 형산강 강변을 따라 나 있는 공업용 철로가 아버지의 일터였으며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간간이 둘둘 말린 철판이나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가 쇳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아이들은 대못을 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납작해진 못을 숫돌에 갈아서 작은 칼을 만들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열차가 어디쯤 오는지 철로에 귀를 대고 진동 소리를 들으며 놀기도 했다. 따가운 햇볕에 달구어진 선로가 땅거미에 식기 시작할 때 아득하게 구령 소리가 들려왔다.
“노가, 노가, 노오가, 노오가 사요.”
단조롭고 주기적으로 끝이 올라가는 이 소리는 철도 노동자들이 노을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핸드카를 젓는 구령 소리다. 흑인 영가처럼 애련하게 들려오는 소리 속에는 힘든 노동과 암울한 현실이 묻어 있었다. 누런 때가 찌든 축 늘어진 어깨걸이 러닝셔츠를 입은 아버지의 일상이 삽과 괭이와 빈 도시락과 함께 핸드카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몇 해 정도 선로 보수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침목을 박는 헤머질을 무리하게 하셔서 양손의 엄지손가락 신경이 마비되었다. 보상은 없었다. 다만 포항역에서 제철소에서 나오는 화물열차와 동해남부선을 따라 들어오는 열차의 바퀴를 검사하는 객화차검수원으로 업무가 바뀌었을 뿐이다. 손가락을 다친 이후로 아버지의 상에는 젓가락이 놓이지 않았다.
열차가 플랫홈으로 들어오면 망치를 들고 허리를 숙여 열차의 바퀴를 탕탕 두드려서 고장을 검사하는 일이었다. 열차가 움직이면서 내는 쇳가루 분진과 풍압에 의한 자갈의 기름 먼지가 뿌옇게 뿌려지는 공기를 마시는 악조건에 24시간 고된 철야 교대근무를 하셔야 했다.
유일한 연장은 긴 나무 자루의 망치였다. 쇠를 두드려 미세한 소리나 감각으로 고장을 찾아내는 일은 연장이 중요했다. 아버지는 뾰쪽해야 할 망치의 끝이 조금이라도 뭉그러지면 대장간을 찾아갔다.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 대장간을 간 적이 있었다. 대장장이가 화덕에서 달군 시뻘건 망치를 꺼내 두드리고 물에 담그자 치지직 쉬익 소리를 내며 자지러졌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숯불이 단단한 쇳덩이를 녹여내는 것을 보면서 가당찮게도 불 위에서 달구어지는 망치가 아버지의 엄지손가락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셔서 낫을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나무자루를 다듬었다.
네 개의 손가락으로 잡기에 적합하게 맞춤옷을 만들 듯 정성스레 만들었다. 쇠와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미묘한 감각으로 강철 스프링이나 브레이크 페드의 실금을 찾아내기 위해서 손가락의 단점을 보완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든 망치를 콩기름을 칠하여 신문지로 돌돌 감아서 소중이 다루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다. 기름때가 묻은 시커먼 작업복을 입고 열차 바퀴를 두드리고 다니는 것이 보기 싫었다.
금태 모자에 황금색 단추가 달린 양복을 입은 역무원과는 대조되었다. 열차 통학을 하였는데 친구들과 플랫폼에서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 마다 기둥 뒤로 숨어 버리곤 했다. 학교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오래전에 그만 둔 이장이라고 써낸 적도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직업이 천하다고 내 스스로 인정해버리니까 종손으로써의 체통이 무너진 것에 대해 당신이 부끄러워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내가 당돌하게도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효도는 부모가 돌아가셔야 깨닫는다고 한다. 서른 후반부터 정년퇴직을 하실 때까지 사용하던 이 망치는 아버지의 분신이기도 하지만 우리 오남매의 밥과 학비를 만들어낸 젖줄 같은 것이다. 단조롭고 힘든 작업의 연속인 열차검수원의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이 망치만 두드리며 열심히 사셨다. 열차의 분진을 오랫동안 마신 탓으로 말년에는 폐가 안 좋아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 이 작은 망치를 들고 부자유스럽던 손으로 쇳가루 분진 속에서 고군분투 하셨을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저민다.
아버지는 멍에 같았을 이 망치를 왜 간직하려 하셨을까? 추수가 끝난 들판의 노을 아래에 선 노농(老農)의 마음처럼 평생 함께한 미련으로 이 연장을 쉽게 놓지 못하셨을까?
그 시절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우리들에게‘사랑한다’는 다정한 말을 하거나‘너희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라’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었다.
네 개의 손가락으로 어설피 잡은 망치의 끝이 수없이 뭉그러지도록 열차의 바퀴를 두드리며 묵묵하게만 사셨다. 돌이켜 보니 그 묵묵함이‘너희들이 어떻게 살아라’하는 직접적인 어느 교육보다도 더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참 가르침이었음을 오늘 이 신문지에 싸인 망치를 보면서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