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여행 인터넷 언론 ・ 1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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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이 문화국장(연극배우)
기자가 물었다.
“89세에 첫 작품이 세간에 알려지며 판매가 됐습니다. 소감은?”
카르멘 에레라가 답한다.
“버스를 기다리면 언젠간 버스가 온다!”
107세를 일기로 영원(永遠)을 향해, 恨(한)많은 세상을 떠난 쿠바 태생의 여류화가이며 조각가!
‘카르멘 에레라’를 보고 느끼고 명상해본다.
단명(短命)의 천재가 있으면, 장수(長壽)의 천재가 있다.
카르멘 에레라는 1915년 5월31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2022년 2월12일 타계했으니, 100살 하고도, 7세를 더 장수한 셈. 그러나 그녀는 아마 107세가 장수(長壽)가 아닌 단수(短壽)라고 할 것이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젊었을때 사진
사진: 카르멘 에레라
세계 화단에선 그녀를 가리켜 ‘추상화가, 미니멀리즘 화가, 시각예술가, 조각가’로 통칭한다. 그 외에 덫 붙이고 싶다면, 필자는 ‘視覺 詩人’이라 칭하고 싶다. 글 쓰는 사람만이 작가이며 시인인가! 그녀의 작품 앞에선 오랜 동안 침잠에 빠지는 詩的 아트 홀릭을 경험한다.
물론 필자가 처음 그녀 작품을 만난 건, 뉴욕 현대박물관 ‘MOMA’.
복잡다단한, 이 토할 것 같은 세상에 그녀의 그림은 내게 그냥 힐링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절로 <순수~단순~기억~회상~명상~힐링>의 세계로 서서히 이첩(移牒)된다. ‘역시 최고는 최상이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1)
카르멘 에레라(Carmen Herrera)는 쿠바 아바나에서 7남매 중 한 명으로 삶의 여정을 시작했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지역 신문 '엘문도(El Mundo)'의 편집장이었고, 어머니 ‘카르멜라’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그리고 페미니스트였다. 이러한 가정 배경으로부터 ‘카르멘 에레라’는 차츰 험난한 삶의 투쟁을 유영하며, 강렬한 표현매체 아트에 빠져, 이미 8살의 나이에 입문(入門), 아니 접하게 된다.
14세에 파리 메리마운트 학교에 진학해 미술 교육을 받고, 1938년엔 불연 듯, 건축에 흥미를 느껴 쿠바 아바나에 있는 Universidad del la Hebana에서 수학한다. 짧지만 건축에 대한 입체적 학문 체험은 그녀에게 “결코 닫히지 않은 비범한 세계가 내게 열렸다. 바로 선과 직선의 움직이는 세계였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3)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4)
1939년 뉴욕 출신의 영어교사 ‘제시 로웬탈(Jesse Loewenthal)'과 결혼, 뉴욕으로 이주하며, 가난한 아티스트들의 둥지(?)격인 맨하탄 East 19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계 최대 현대 예술의 도시, 뉴욕에서 그녀는 계속 ‘아트 스튜던트 리그’와 ‘브루클린 미술관’ 등지에서 미술 수업을 듣고, 1948년 파리로 이주해 5년간 또 다른 유럽 화단의 흐름을 호흡한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지성, 실존주의 작가이자 철학가 ‘싸르트르’와 ‘시몬 보봐르’와 교유하며 많은 생동감과 생명력에 반응, 영(靈)적인 작품의 세계에 든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5)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6)
1950년 쿠바로 돌아간 그녀는 그해 12월 아바나의 'Lyceum'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반응은 참담..... 1953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 온 카르멘 에레라는 여자 신분이라는 성적(性的) 차별로 몇 차례 전시를 거부당하는 있을 수 없는 부당한 수모를 겪어야 했다.(뉴욕 로즈 프리드 갤러리 등의 예)
사진: 카르멘 에레라 뉴욕 Lisson갤러리 전시회
당시 이러한 차별은 단순히 여류 화가이기 때문만은 아닌, 쿠바 태생이라는 이유도 한 몫을 차지했다. 동시에 아트의 무한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무지의 평론들에겐 생경한 그녀의 작품에 대한 의구심과 반감과 괴리감.....? 이런 일련의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 불행하게도 인정받지 못한 그녀는 가난 속에 고독한 창작을 이어가야 했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업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2)
이 숙고(熟考)와 고난(苦難)의 시기에 그녀는 ‘적을수록 좋다!’란 오래 된 쿠바의 격언을 되 뇌이며, ‘가슴이 아닌 머리로 그린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세상에 질서 정연한 예술 창조가 우선이다!’를 작업에 반영하고 투영하며, 소위 <시그니쳐 기하학적 추상화>를 완성해 간다. 이 작업을 구체화하기 위해 에레라는 캔버스 형태까지 변형을 꾸준히 추구하며, 동시에 단순한 색상으로 축소된 아트, 미니멀 기하학의 작품을 이어간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7)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8)
‘카르멘 에레라’의 본격적인 첫 개인전은 1954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50년이 넘은 후에 열렸다. 2004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버스(?)가 그녀 앞에 와서 선 것이다. 그녀의 절친 화가 ‘토니 베차라(Tony Bechara)’가 맨하탄 ‘라틴 콜렉터 갤러리’의 소유자 ‘페데리코 세베’에게 에레라를 추천하면서,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타게 되고, 인생 여정 가운데 마침내 가고 싶은 절정의 언덕에 도착한 것이다!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여자이면서 쿠바태생이라는 출신이 그녀를 주류에 서지 못하게 했으나,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갈파한다. “나는 분명 쿠바 태생이고 쿠바의 전통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단지 나의 작품을 특정 국가나 특정 민족의 미학과 연관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쿠바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공산주의 피가 흐르진 않는다. 내겐 아티스트의 피가 흐르고 있을 뿐이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10)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9)
지금도 곳곳에 편견과 오만과 자만에 빠져있는 세상을 질타하는 에레라의 담론(談論) 한 토막이다!
89세까지 단 한 점의 작품도 알려지지 않아 외면당한 채, 팔리지 않던 그녀의 작품들이 드디어 기다리던 인정과 영광의 버스에 가득 실려, 세계 굴지의 박물관, 갤러리에 비로소 판매를 기록한다. 인생 긴 여정의 마라톤을 완주한 삶의 보상(?)을 받게 된 것이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11)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12)
2019년 ‘카르멘 에레라’는 런던의 ‘Royal Academy of Arts’ 명예왕립 회원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를 비롯해 뉴욕의 ‘MOMA’, ‘휘트니 뮤지엄’, 런던의 ‘TATE 모던 뮤지엄’, 마이애미의 ‘페레즈 미술관’ 등 세계적인 뮤지엄에 영구 소장되어 있어 후학들에게 아트를 넘어 굴곡진 삶의 기하학적 직선을 새삼 음미(吟味)케 한다.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13)
사진: 카르멘 에레라 작품(14)
필자는 ‘카르멘 에레라’의 생애와 작품을 일별(一瞥)하며, 문득 일필휘지(一筆揮之) 우리의 한국화와 3줄짜리 기막힌 시조(時調) 한 수를 떠올려본다.
“春山에 눈 녹이는 바람, 건 듯 불고 간데없다.
저근 듯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붙이고저
귀 밑에 해 묵은 서리 녹여볼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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