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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확신의 찬양 너무 감사합니다. 찬양한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고 결코 떠나지 아니하실 것이라 하는 말씀을 지키실 줄 믿습니다.
오늘 설교는 남전도회 헌신 예배에 맞춰진 설교이지만 남전도 회원뿐만 아니라 우리 여전도회와 그리고 청년들 모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설교의 본문이 여호수아인데 이 여호수아 본문에 보기 전에 전체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면서 우리가 왜 강하고 담대해야 하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조금 먼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를 잘 알죠? 성경에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가면 여섯 번째 가면 만나는 책이 여호수아예요. 여호수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떠난 다음에 그의 종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열고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있는 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진멸하는 내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좀 쉽게 쉽게 오해되고 악용되고 심지어 성도들 안에서도 좀 외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삶과 무관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고,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직면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런 오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가지고 악용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는데 현대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유명한 잘 알려진 과학자 몇 번 몇 번 언급한 리차드 도킨스가 그렇게 합니다.
도킨스에 따르면 여호수아의 가난한 정복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그러한 정복은 이 야만적인 대학살입니다. 그가 보기에 도덕적으로 히틀러의 폴란드 땅 침공이나 사담 후세인의 크루드족 대학살과 다르지 않다 구별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의 요점은 그런 학살을 명령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선한 하나님이냐 하는 것이죠.
우리가 이전에 들었던 마귀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맞다면 성경에 성경은 버려야 할 것이 되고,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의 믿음도 포기해야 할 것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의 이 말은 지금 보는 주장은 우리의 믿음과 성경에 대한 도전이고 공격이에요. 다만 그의 주장에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여러 허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데 그것을 못 알아보는 많은 학생들과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따라가고, 그래서 성경을 버리고 어릴 때부터 믿었던 하나님을 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면 도움이 될 수 있는 문제들 3개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첫 번째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예요. 도킨스는 성경을 이용해서 성경을 부인하게 하는데, 그렇게 할 때에 자기 주장에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들만 딱 떼어서 자기 방식으로 이용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이 안 된 것이죠. 창세기이든 여호수아이든 성경의 일부를 사용하려면 도킨스가 하는 것처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하는 것이 기본이죠.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뉴스도 그렇고 과학도 그렇습니다. 부분적으로 딱 떼어서 보면 진실이 거짓이 될 수 있고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대학교 교수라고 하는 과학자가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도킨스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이 도덕의 문제가 있어요. 여호수아의 열이고 멸망은 앞에서 말했듯이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나 후세인의 쿠르드족 대학살과 도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가 말하는 이 도덕이 무엇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그냥 도덕적이라고 말을 하면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가질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죠.
가령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지요. 가난한 민족들에게는 이것이 도덕적인 것을 넘어서 굉장히 경건한 것이고 신성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아주 큰 악이요. 가증한 일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또 성경을 성경의 뜻에 반하게 이용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것이 도킨스나 아니면 단 브라운 단 브라운 다빈치코드라고 한때 유명했던 책이 있습니다. 단 브라운 같은 사람들에게는 도덕적일지 모르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도덕과 아주 먼 얘기죠. 그러니까 도킨슨은 도덕적으로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셋째로 도킨스가 성경을 가지고 하는 일은 그가 성경에 대해서 지적한 문제들을 그대로 보여줘요.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수아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안에 기록된 것이 야만적인 대학살이라고 했는데 그가 성경에 대해서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더 이기적이고 더 잔인하고 더 야만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에요.
구약 성경이 무엇입니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경이요. 심지어 이슬람에게도 일부가 포함돼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냥 책이나 글이 아니라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이기도 해요. 그러한 성경을 자신이 세운 기준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찌르고 그들의 공동체를 공격하는 잔인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성경의 정체가 그로 인해서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주장이 진리에서 참으로 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호수아를 위해서 도킨스의 주장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그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살펴보는 데 있어서 얻는 유익함도 있어요.
그중에 하나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격을 부분적으로 파편적으로 보지 않고 어느 부부든지는 전체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야만적인 대학살이 아니라 세상을 어둡게 하는 죄를 면하시고 만물을 창조의 뜻대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일부가 되는 것이에요.
성경 전체에서 보면 이 가나안 정복에서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민족들을 심판하는 데 사용된 기준은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적용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이제 본문을 보면 다시 여호수아는 따로 분리해서 읽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다큐멘터리에 많이 봤죠. 사자가 무리, 동물의 무리를 쫓아가는 거, 특히 자기보다 큰 들소 같은 것을 쫓아갈 때 제일 약한 부분을 공격을 하죠. 제일 떨어져 있는 떨어뜨려서 공격을 하죠.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그럴 수가 있습니다. 제일 약한 부분일 수도 있어요. 성경을 반박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 중에 하나가 여호수아요.
근데 우리는 여호수아를 따로 보지 않고 앞과 뒤이 같이 하나로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는 것이 중요한데 특별히 그 앞에 있는 모세, 그리고 그 뒤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읽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 뜻에서 여호수와 모세를 비교해서 그들의 공통점, 차이점, 연결점 이걸 살펴보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세상에서 사는 이 시대에 우리의 위치에 대해서 우리가 잘 배우고 알아야 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수아와 모세의 공통점은 1절과 5절에서 볼 수 있어요.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지도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와 함께하실 것이고,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오 그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찬양했던 가사의 찬양의 내용이죠. 믿음 안에서 역시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차이점인데 2절, 6절, 8절에서 볼 수 있어요. 여호수아는 시대 함께하는 사람 하는 일,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세와 다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광야에 이르는 시대에 속하고, 여호수아는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시대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사람들과 함께했어요. 모세는 율법 없는 백성에게 율법을 전달했고,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그 율법의 말씀을 따라서 준행한 사람입니다.
끝으로 3 4절에서 볼 수 있는 연결점이 있어요. 곧 모세에게서 시작하였고 여호수아에게로 이어지는 한 가지 일,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 구원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알려주신 축복의 계획이고, 세상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알려주신 창조의 뜻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하실 의 비전, 천국의 길입니다.
우리 복음의 은혜 아래 살고 있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 만나는 사람, 우리가 속한 언약 따르는 말씀 이런 부분에 있어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것과 다르죠.
그러나 세 번째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시작하시고 그리스도에게서 완성하신 그 구원의 역사 안에서 살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특별히 주시는 말씀이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 라는 명령의 말씀이에요. 6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시죠. 또 7절에서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라고 강조를 하시고 다시 한 번 구절에서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죠. 여호수아의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 하는 것이고, 그가 지킬 일이 있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도전들이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명령이 있는데 7절과 8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그 율법을 지키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도 정말로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한 자로서 할 일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 강하고 담대해야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렇게 담대하라. 주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은 더불어서 복의 약속도 함께 주셨어요.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라 그리하면 약속하신 땅을 백성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너는 여호수와 너는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말씀을 하셨고요. 율법을 지켜 행하라.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떻게 해요?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내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다. 내가 형통하리라고 말씀을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정말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말씀들이에요.
하나님은 특별히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명령의 뜻이 이렇게 이 말씀에서 보여지는 것이죠.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그렇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이고, 부르신 사명이 있기 때문이고, 그 사명의 일이 쉽지 않고 정말로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각 사람에게도 이 가난한 땅을 향해 가는 나아가는 측면이 있어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의를 행하는 어둠이 지배하는 땅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영국에 살고 있지요.
영국은 여러 면에서 살기가 좋지 않습니까?
공기가 좋아요. 치안이 있어도요. 정치 경제, 의료, 교육, 복지 등에서 아주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 오려고 하는 많은 난민들도 영국에 오려고 그렇게 자기의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 땅에도 악하고 더럽고 어두운 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어요.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들, 가정들, 이 마음들 속에 우리를 붙잡고 누르고 정제하며 죄의 길로 가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마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무엇을 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죄의 길로 행하고 어두운 곳에 머물면서 비참하게 슬프게 이를 갈며 살게 사는 것을 원하지요 그의 공격이 어떻습니까?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금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합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자들이 다 경험해서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에요.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이 말씀대로 준행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는 말씀에 따라서 강하고 담대했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모세에게 받은 그 율법의 말씀을 다 준행을 했어요. 그래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고 약속하신 그 복들을 다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물 중에 하나이죠.
그런 뜻에서 우리는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거슬러서 지금 성경에서 만나는 이 여호수아, 그리고 그가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목하고 그의 길을 배워서 그 길로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남전도 회원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래요. 세상에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약하게 무력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이 있고 또 믿음에 따른 환란도 있어요. 일터에서 믿음의 자녀로 백성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고 거기에 따른 환란이 있을 수 있어요. 낙망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포기하게 하고 힘 빠지게 무력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많이 있어요. 그렇다면 먼저 여호수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감당할 수 없이 큰 일이 앞에 있지만 강하고 담대하라 하는 그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간 여호수아를 본받아서 여러분도 다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주이시고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가신 그 십자가의 길도 가난 정복처럼 죄의 세력과의 싸움이죠. 죄의 권세를 죄를 가지고 사망을 가지고 세력을 부리는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그 난이도에 있어서는 가나안 땅 정복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전하는 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 여호수아에서 만나는 가난한 땅 정복에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죠.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뭐라고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겨놓느냐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낙담해야 하고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역시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 가는 길이 좀 힘들고 어려워도 주를 향하여서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교회, 남전도회 또한 여전도회, 그리고 청년회, 모든 성도 다 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