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01월 25일(목).
황산 : 전북 남원시.
▣산행코스 : 동편제마을주차장-황산대첩비-송흥록생가-국악성지-황산-피바위-부층탑-동편제마을주차장.
▣산행시작 : 동편제마을주차장 10시 43분.
▣산행종료 : 동편제마을주차장 13시 43분.
▣전체거리 : 약 7.21km.
▣전체시간 : 03시간 00분.
▣운동시간 : 02시간 30분.
▣휴식시간 : 00시간 30분.
10 : 43 동편제마을주차장 출발.
10 : 50 황산대첩비.
10 : 54 송흥록생가.
11 : 07 국악성지.
11 : 54 황산.
12 : 45 서무마을이정표.
13 : 07 피바위.
13 : 17 부층탑.
13 : 43 동편제마을주차장.
▲ 10시 43분 :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동편제마을주차장.
▲ 북모양의 동편제마을 표시.
▲ 초기에는 동편제마을 방문자센터였었는데.. 지금은 베이커리 카페 개업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 국창 박초월선생.
▲ 람천을 건너는 대첩교.
▲ 람천의 대첩교위에서 바라본 황산..
람천은 운봉읍 세걸산 아래 금샘에서 발원하여.. 황산의 피바위를 지나 경남 산청에서 남강이라는 이름으로 흘러가다가
진주 진양호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 대첩교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황산대첩비 전경.
황산대첩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있던 고려군이 현 전라북도 남원인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에서 기세가 절정에 오른 왜구 무리와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황산전투는 같은 해 8월 진포대첩, 1376년 홍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를 격퇴시킨 3대 대첩으로 불린다..
황산대첩비로 가기전에 먼저 황산대첩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1380년 경신년(庚申年). 고려 신우(우왕) 6년 음력 9월. 호남평야에 추수가 막 끝났을 무렵. 일본열도와 대마도, 고려 남해
바다에 산재해 있던 왜구는 500여 척의 대규모 전선(戰船)을 이끌고 군산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강 하구 진포(鎭浦)
에 배를 대고 참혹한 약탈에 들어갔다. 왜구들이 배로 실어 나르다가 흘린 알곡들이 길바닥에 한자나 쌓여 길이 푹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곡창이 유린당하자 고려 황실에서는 급히 최무선을 파견하였다. 최무선은 세계 최초로 기록된 함포사격
을 통해 왜군의 대장선을 비롯하여 수백여 척을 침몰시켰다. 이른바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진포대첩에서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격퇴당한 수만의 왜구의 잔당들이 훔친 말을 타고 재빨리 금강을 거슬러 부여와 공주
를 거쳐 지금의 옥천을 유린(蹂躪)하고, 화령(化寧)을 넘어 경상도 상주까지 진출했다. 상주를 점령한 왜군은 승리에 도취
하여 6일 동안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들은 상주를 떠나 낙동강을 따라 남하했다. 그리고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를
지나 사근내역(沙斤乃驛)과 함양(咸陽)에서 고려 정규군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이 치열한 전투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9원수
중 2명의 원수와 수백여 명의 군사들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고려의 남부지역이 초토화 되었다.
그리고 그 왜구를 이끌던 15세의 장군 아지발도(阿只拔都, 아기바트루, 몽골어로 ‘아기 영웅’ 혹은 ‘어린 영웅’이란 뜻)는
백마를 타고 다니며 긴 창을 휘둘러 고려군을 죽음과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피해 소식을 접한 고려조정은 북방에 있던 이성계의 기마부대를 남원으로 급파한다. 왜구들이 함양에서 인월을 지나 운봉
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운봉에서 남원으로 내려오면 섬진강이고, 다시 함양으로 가면 낙동강을 거쳐 김해까지 당할 형편이
었다. 북방에서 태어나 30여 년간 만주 벌판에서 거란과 여진 그리고 몽골을 상대하느라 잔뼈가 굵은 이성계의 당시 나이
마흔다섯... 이성계의 수천 기마부대는 여원치를 단숨에 넘어 왜구들을 맞아 운봉과 인월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고려군은 기마부대의 특성인 기동력과 활을 이용해 먼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황산 아래 벌판에서 적을 상대했다.
그러던 중 왜장 아지발도가 백마를 타고 내려와 전장을 휘젓고 고려군을 급습하기를 수차례. 전세가 왜구 쪽으로 기울고
아군의 피해가 점점 커졌다.
이성계와 의형제인 이지란은 지금 전적비가 있는 작은 숲을 방패 삼아 황산 중턱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를 유인했다.
그리고, 이성계가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화살로 맞춰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재빨리 활로 아지발도의 머리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아지발도의 낙마와 전사로 인해 일본군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후퇴하다가 고려의 추격군에 의해
지금의 피바위 인근에서 궤멸당하면서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소리와 같았다" 라고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황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역성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 황산대첩비로 가기전에 조금 떨어진 "어휘각"을 먼저 찾는다.
▲ 어휘각.
어휘각의 바위에는 황산대첩때 왜구를 격멸한 것을 기리고자 태조대왕 이성계를 비롯해 함께 싸운 8원수(元帥)들의 이름
이 새겨졌다고 한다.
▲ 어휘각에 새겨진 내용은...
조선 태조 이성계장군이 황산대첩이 본인 혼자만의 공이라기 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알리
기 위하여 성지를 내렸고 그 내용을 자연석벽에 새긴 유적인데.. 1945년 1월 17일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서
황산대첩비를 폭파하고 파괴 하였을때.. 이곳의 석벽도 함께 폭파하고 남은 글씨를 정으로 쪼아버려 현재는 잔영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73년에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 하고 있다.
▲ 어휘각내역이 적힌 액자를 당겨 보았다.
춘풍추우가 565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했던 글씨가 1945년 1월 17일 새벽에 왜정의 독수로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서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얼마나 악랄한 놈들인가...
▲ 어휘각에서 황산대첩비쪽으로..
▲ 10시 50분 : 황산대첩비로 들어가는 삼문..
황산대첩비는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그 자리에 세우고 비바람에 보호하기 위하여 1973년에 보호각을 세웠고 1963년
1월21일 유적건조물.. 인물사건.. 역사사건으로 분류되어 28,593㎡ 면적이 국가사적 제104호 남원 황산대첩비지라는 명칭
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는 곳이다.
▲ 황산대첩기념비.
황산대첩비가 일제에 의해서 부셔져서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한국전쟁이 끝난후 황산대첩비 탁본을 그대로 복원
하여 1957년에 비문은 김귀영이 짓고 송인이 글을 쓰고 남응운이 전액을 만들고, 박광옥이 세우면서 황산대첩에 관한
사실과 비문을 세우게 된 목적을 새겼다.
▲ 파비각.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부서진 황산대첩비 원본은 19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파비각 이라는 현판을 써서 보호하고 있어서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탈하고 일제강점기에 또한번 조선을 침탈하면서 자신들의 치욕과 관련된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정기에 우리나라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다양한 조선의 유적들을 파괴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황산대첩비도 파괴하도록 명령이 하달되었고 황산대첩비는 글씨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정으로 쪼아지고 대형망치로
파괴하여 황산 람천변에 버려지게 되었다.
▲ 황산대첩비각.
지금의 대첩비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1973년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 홍살문.. 삼문.. 담장.. 그리고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 복원된 황산대첩비.
다행히 원본을 세웠을 당시 탁본을 하여 보관을 잘해 놓았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1957년 다시 복원할 수 있었다.
복원한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좌대는 원본 그대로인데 그 늠름한 모습만 보아도 이 비석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옆에 가만히 서 있어도 그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고.. 위엄이 있는 좌대다.
▲ 황산대첩사적비각.
고종19년 1882년에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가 황산대첩비와 함께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황산대첩비
를 복원하고 그다음해인 1958년에 황산대첩비사적비 라는 명칭으로 복원되어 있다.
▲ 황산대첩비와 가까운 동편제 마을의 가왕 송흥록의 생가를 찾는다..
▲ 10시 53분 : 가왕 송흥록의 생가 입구.
▲ 동편제의 가락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 가왕 송흥록..
그는 200년 판소리 역사 속의 허리 역할을 단단하게 해낸 인물로 꼽힌다.
남원 운봉 비전마을이 배출한 가왕 송흥록(宋興祿.1801~1863)선생이 어떤 분이고, 어떤 위상을 가지는가 말하면..
그는 조선 8대 명창 중 한분으로 꼽히는데.. 소리로는 그중에서도 최고라고들 한다.
판소리의 주요 유파 중 하나인 동편제를 창시하였고, 판소리계의 중시조(中始祖)라고 불린다.
▲ 가왕 송흥록의 생가.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비전마을에는 동편제의 태자리가 있다.
서편제와 더불어 판소리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편제가 이곳에서 첫 소리를 냈다. 동편제 창시자로서 판소리계에서 최고의
칭호인 가왕으로 불리는 송흥록 명창이 이곳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 국창 박초월(朴初月,1917~1983)의 생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남원에서 성장하며 판소리를 익힌곳이기에.. 아마도 순천의 생가를 재현해 놓은듯...
국창 박초월 여사는 17세의 나이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우승하며 판소리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그분의 스승이
명창 송만갑(宋萬甲,1866~1939)선생이었다. 송만갑 명창의 경우.. 그는 동편제를 이끄는 판소리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가왕 송흥록 선생의 아우되시는 명창 송광록 선생이시고, 아버지되시는 분이 또 명창 송우룡
선생이었다.
▲ 판소리에 대해 잘은 몰라도.. 판소리의 유파는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로 나뉜다.
중고제의 경우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했고..
동편제와 서편제는 전라도 지역..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으로 경계짓는다.
동편제가 남성적이고 호방하다면.. 서편제는 여성적이고, 애절하고 한(恨)서린 목소리라고 하고..
중고제는 동편제와 서편제 사이 중간이라고들 한다.
▲ 가왕 송흥록선생과 국창 박초월선생을 배출한 비전마을을 나와서...
▲ 마을길을 따라 황산을 찾아 간다.
▲ 비전마을 동구밖의 마을수호목과 정자 뒤쪽으로 보이는 황산과 마주하며 간다..
▲ 며칠사이에 영하로 뚝 떨어지더니 오늘 낮부터 조금씩 풀린다고 한다..
영하 6도~2도/c.. 날씨는 맑고.. 바람은 3~4m/s 다.
▲ 황산의 등산로는.. 국악의 성지를 경유하게 된다..
▲ 11시 03분 : 국악의 성지 입구에서 안내도를 살펴보고..
▲ 가야금 형상의 가로등이 이쁘다.
▲ 국악한마당 광장.
▲ 운상문(외삼문).. 운상원은.. 운봉의 옛 이름이다.
▲ 낙성사.
국악은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며,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동편제 소리의 발상지이며 춘향가 흥부가의 배경지로서 국악의 역사가 보존 전승되어 온 국악 본고장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판소리의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록에 따른 국악의 보존.. 전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전통문화의
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해 바로 이곳 남원 운봉에 "국악의 성지"가 설립된 것이다... -- 국악의 성지 홈피에서 발췌...--
▲ 납골묘..
▲ 가왕 송흥록선생의 묘..
▲ 악성 옥보고선생의 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운상원)은 신라 말 악성 옥보고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익히고 스스로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으며 신라 땅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도록 큰 공헌을 하였다.
▲ 내려다 본 운봉읍 전경..
멀리 백두대간상의 고리봉 수정봉이 이어진다.
▲ 참으로 아름다운곳에 자리 잡았다..
▲ 국악한마당 광장..
▲ 국악 공연을 할때... 한번쯤은 와볼만한 곳이다..
▲ 소리길 표시판을 따라서..
▲ 국악의 성지 전시관..국악성지는 판소리와 농악 등 국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곳으로 판소리, 농악, 기악, 전통
무용 등 4개 전시관에 400여점의 유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며.. 국악 체험장, 수련장을 비롯, 소리꾼들의 득음을 돕기
위해 동굴 모양으로 지어진 독공장(3개)도 마련되어 있다.
▲ 11시 15분 : 국악의 성지를 지나.. 본격적인 황산 산행 들머리..
▲ 미산정...
▲ 국창 박초월 선생의 묘..
그녀의 아드님 되시는 분이 명창 조통달 선생이시고..
손자는 팔세토 창법의 대가, 가성의 명인.. 가수 조관우씨로 문화예술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 고남산..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고남산은 태조봉(太祖峯). 고조봉(高祖峯). 제왕봉(帝王峯). 적산(赤山). 일광산(日光山) 등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태조봉..고조봉..제왕봉 등으로 불리는 것은 모두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성계는 이번 싸움이 고려의 국운을 좌우하는 만큼, 고남산 정상에 올라 석축으로 제단을 쌓고 팔도 산신을 불러 경건하게
필승의 산신제를 올렸다. 지금도 그 때 쌓았던 석축 제단의 흔적이 지금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고남산 아래 마을을 권포리 라고 부른다. 이 역시 황산대첩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당시 전승 기도를 올릴 때 이곳에 주둔
하던 병마의 식수로 쓰기 위해 큰 샘을 조성하였는데, 대첩이 끝나자 샘 주변에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루었다.
태조가 조선의 왕업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고남산을 일명 제왕봉이라 하고, 마을 이름은 권력을 편다는 의미로 권포리
(權佈里)라 지었다고 한다.
▲ 가왕 송흥록 생가의 비전마을이 보이고 황산대첩비가 화수산 숲에 가려져 있다.
▲ 서릿발이 얼마나 깊은지 잘못 밟으면 10cm정도는 푹푹 빠진다.
▲ 등산로 정비를 최근에 한것 같이 쌩쌩한 통나무계단이다..
▲ 솔숲사이로 덕두산 바래봉이 그림이다.
▲ 이정표도 새것이다..
▲ 등산로 정비를 잘해 놓았다 했더니..겨우 20m지나온 지점에 이정표가 또 나타난다..
▲ 황산 정상쪽 진행방향으로 서북간 쪽으로 조망이 시원하다.
▲ 남서쪽의 운봉읍 방향..
▲ 바위 협곡같은 안부를 넘어서고..
▲ 11시 46분 : 군화동 갈림길..
군화동은 1961년 대홍수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라는 뜻으로 "군화동" 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덕두산과 바래봉..
▲ 11시 54분 : 황산 정상..
▲ 바래봉 아래의 옥계저수지에 윤슬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 운봉읍 방향의 백두대간 수정봉..
▲ 당겨 본 지리산 천왕봉.. 황산에서의 조망이 너무 좋다.
▲ 서룡산 아래 인월면...
남원시 인월면은 고려 우왕6년(1380년) 삼도 도원수 이성계 장군이 그믐날 기도를 통해 보름달을 끌어올려(引月) 훤한
달빛아래서 왜장 아지발도를 격퇴한 황산대첩 전승지로서의 자긍심을 가진 곳이다.
▲ 조망이 너무 좋은 황산에서..
▲ 등산로 정비는 잘 되어 있는데.. 찾는이가 없는지 발자욱이 없다..
▲ 무슨동물인지 모르지만.. 발자국만 남겨놓고... 좌측 계곡으로 사라진다.
▲ 흔적 없는 능선길을 따라 가는데..
▲ 조금전 같은 과의 동물인지..
▲ 한참을 앞서가던 발자욱은 어디선가 다시 사라지고..
▲ 12시 27분 : 바람끼 없고 햇살만 가득한 작은 봉우리에서.. 민생고의 점찍기를 하고..
▲ 대봉산 천왕봉과 백운산이 구비구비 골짜기마다 민초들의 삶을 보듬고 있다..
▲ 12시 45분 : 서무마을 갈림길..
▲ 직진하면 정봉이 나오는데.. 일행중에 발이 불편한 사람이 있어..여기서 하산이다.
"정봉"은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의 왜구와 접전을 벌일 때, 이셩계가 이끄는
고려 토벌군이 먼저 이곳 봉우리에 올라 적정을 살피며 군사들에게 솥[정(鼎)]을 걸어 밥을 짓도록 했다는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땅을 파면 검정 숯이 나온다고 한다.
▲ 동물생태 감지카메라..
지리산권역이라 반달곰의 활동범위를 관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 왼쪽으로 가면 서무마을로 가는 길인데.. 우리는 차량 회수를 위해 오른쪽으로 간다..
▲ 24번 국도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 13시 07분 : 람천의 피바위..
이곳은 이성계가 활을 쏘아 "달을 끌어당겨 놓고 싸웠다"고 해서 인월면(引月面)이다.
달을 끌어다 환하게 밝혀놓고 이성계는 화살로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맞히고 이지란은 아지발도의 머리를 쏘았다..
아지발도는 개울가에서 피를 흘리다 죽었다. 그 핏자국이 아직도 개울가 바위에 남아 있어서 그 바위 이름이 "피바위" 다.
당시 전사한 왜구의 피로 냇물이 붉게 물들어 6~7일 동안이나 핏빛이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릇에 물을 담아 맑아지길 기다렸다가 한참만에야 물을 마실 정도였다.
당초 왜구의 숫자가 고려군보다 열 배나 많았으나, 살아서 지리산으로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에 불과했다.
고려군은 왜구의 말 1,600여 필과 엄청난 수의 병기를 포획했다.
▲ 가까이 당겨 본 람천의 피바위.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이쪽지역의 바위들이 철분 성질이 있어서 바위가 붉게 물들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건 저렇건.. 이성계가 적의 장수 아지발도를 죽임으로써 승리를 한 곳임에 초점을두고 보아야 할것 같다.
▲ 동경대(同庚坮)..
생뚱맞게 길가의 바위에 각자되어 있는 글이 보여서 읽어 본다..
동경(同庚)은 같은 해에 태어난 같은 나이라는 뜻으로 흔히 동갑(同甲)을 말한다. 보통 인연이 아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단기4224년(서기1891년) 신묘년 3월 26일 오시 생(午時 生)인 <고영환>과 <정래순>이
단기 4294년(서기1961년) 신축년 3월 26일에 글을 새겼다.. 다시 말하면... 같은 해의 한날 한시에 태어난 두사람이
나이 70살이 되던 해에 바위에 글을 새겼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돈대 대(坮)는 성벽위의 망루같은 곳을 말하는데...
두사람이 같이 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피바위를 보았던 것을 기념하여 바위에 새긴 모양이다..
▲ 황산대첩 피바위가.. 도로 건너에 있다고 가리키고 있다.
▲ 피바위를 보려면 길을 무단횡단해야 되는데.. 이곳을 지나는 차들이 완전 아우토반 무제한 질주다..
노견으로 걷는 내가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속도를 낸다... 위험하다..
▲ 그래서 조심조심 잘보고 잽싸게 건너 갔다가 건너 온다..안전제일...ㅎㅎ~~
▲ 무얼하는 건물인고?..
남원뜰 노인복지센터라고 하는데.. 휴업중인것 같다..
▲ 24번 국도에서 황산정(국궁장)이 있는 군화동 마을로 간다..
▲ 여기서부터 지리산 둘레길 2구간과 접속된다.. 버스대기장이 마치 케이블카를 닮았다.
▲ 13시 17분 : 부층탑(원명대선사 부도탑).
원명(圓明, 1911-1992)스님의 속명은 종범(終範)으로 1911년 경북 청도에서 김해 김씨 재순거사와 방봉선 보살의 슬하
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에 1925년 청도보통학교 졸업 후 출가하고 지리산 실상사에서 당대의 대선사였던
수월(水月)스님의 상좌인 지담(智潭)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29년 춘담(春潭)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이어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이후 원명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 등에서 수행정진하다 비로봉에 올라 10년 동안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10년정진을 거듭한 끝에 대오를 이루었다.
6.25동란으로 금강산을 하산해 제주도 한라산과 거제도 실상사에서 안거하다가.. 1954년 전북 남원 청룡사에서 포교에
힘썼고.. 1960년 현 원명사의 전신인 금불암(金佛庵)을 인수해 개명하고 수행에 힘썼다.
1965년 상좌인 영봉스님에게 원명사를 맡기고 다시 남원에서 정진하다가 봉림선원을 세워 안거했다.
평생 쌀가루에 솔잎을 섞어 생식으로 일관하였으며 바랑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바람처럼 주유하며 오로지 참선과 중생
교화에 진력했다. 1992년 11월 11일, “고요한 즉 죽은 시체요, 움직인 즉 망상이라. 고요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이 물건이
무엇인고?”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좌탈입망했다. 세수 82세, 법납 68세. 법구는 황산벌에서 숨을 거둔 넋을 위로하고자
오랫동안 수행처로 삼아온 남원 인월땅에 안치되었다.
▲ 부층탑(원명대선사 = 부처님 부도탑).
부층탑안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등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세계 불교계에서 72번째로
부처님으로 공인받으신 분이다. 좌탈입망하셨고남겨진 육신에 금박을 입혀 탑안에 안치했다. 그분을 존경하는 수행자들과
신도들이 지나 가다가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고 간다.기감이 예민하신 분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해보면 맑고 강한
기운이 몸에 들어오는 걸 느낄수 있다고 한다..
▲ 앞면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 뒷면에는 어렵고도 난해한 망상게다. 이 뭣고???~..
▲ 지리산 둘레길2구간 쉼터.
▲ 오덕준 장군 공적기념비.
오덕준(吳德俊)은 1921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소덕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간사이대학(關西大學)에서 주경야독하여 1944년에 수료하였다.
학도병으로 일본 본토 주둔 부대인 제48 부대에 배치되어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해방을 맞이 하였다.
해방 후 초창기 국군에 입대하였다. 1948년 10월에 광주 주둔 제5 여단 참모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순 사건 가담자들을 색출
하는 데 힘을 쏟았다.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오덕준은 전주.. 임실.. 남원 지구 전투, 거창 지구 전투, 양양-서림 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제9 사단장, 제11 사단장으로 복무하였다.
▲ 군화동 마을.
군인들이 만든 마을이라 하여 군화(軍花)마을이다.
▲ 람천을 따라가는 지리산둘레길 2구간...
▲ 이 구간은 여름에는 피해야 할듯.. 그늘이 적어서 힘들것 같다.
▲ 람천 벚꽃길은..
이곳 남원읍 북천마을이 고향인 육군 간호장교 출신의 박말순여사님이 지리산둘레길2구간이 지나가는 람천 뚝방길에
기증했다는 125그루의 왕벗꽃 나무다... 벚꽃이 피는 봄날이면 좋을것 같다.
▲ 다시 비전마을을 지나고..
▲ 황산대첩비 가는길..
아침에 그냥 건너뛴 동료에게 소개하고자.. 다시 간다.
▲ 황산대첩비를 나서며..
역사의 현장에 와서 <한국사에서의 왜구> 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고 가자.
왜구(倭寇)는 전근대에 활동했던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바다를 따라 가까운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왜구가 주변국에 약탈을 하는 해적국에 된데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대 일본은 농사지을 땅이 적은데 도래인으로
인한 인구증가는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약탈 경제가 발달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지진해일로 인해 경제기반이
무너지자 해안가에 거주하던 이들이 약탈에 뛰어들면서 왜구가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왜구(倭寇)라는 한자어 표현은 414년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
라는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사에서는 고종 10년(1223년) '왜가 김해(금주)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라
는 표현이 나온다. 한반도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땅이기에 왜구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신라 박혁거세 즉위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유구하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0년이다
서기 11년 남해 차차웅 때에도 왜구의 침입 기록이 있는 등 고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음을 알수 있다.
신라 역대 왕들의 삼국사기 기록을 뒤져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없는 왕보다 있는 왕이 더 많을 정도다. 게다가
신라의 수도 경주시가 동해 바다와 그 건너 일본 열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지리적 조건상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소지가 컸고, 실제로 왜군에게 수도가 포위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구의 침입 기록에 의하면… 신라 초대 혁거세 거서간 8년(기원전 50년) -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21대 소지 마립간 22년(500년)까지 -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라는 기록까지 29년동안 한해도
침략을 당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다. 이후 통일신라가 되면서 정세가 안정된 뒤에는 왜구의 침략이 줄었다.
▲ 고려 말부터는 왜구들이 특히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였는데 한반도 해안 지역은 동서남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약탈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해안가 근처가 아닌 충주, 청주, 단양같은 완전히 내륙에 있는 곳도 왜구에게 털린 기록이 있었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약탈이 극에 달했을 때는 관료들의 녹봉도 못줬을 정도. 그래서 이러한 왜구들을 토벌
하기 위해 고려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사실상 무장 해제 상태에 놓였던 고려군으로서
는 대응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는 이미 해적을 넘어서 갑주를 갖추고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군대 수준이었다. 공민왕 20년동안에만 100여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14년동안에는 378회나 쳐들어 왔다.
▲ 1350년 이후 왜구의 고려 침입 상황도.
1350년~1392년까지 40여년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을 일삼았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수도를 강원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1392년 조선건국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노략질)은 계속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후에도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은 끊이지 않았다.
1396년 문하우정승 김사형의 지휘 아래 대마도 정벌이 진행되었고, 1419년 세종 초에 상왕 태종과 이종무의 지휘 하에
다시 대마도 정벌이 이뤄져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왜구들의 반격이 거세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공격은 제법 효과를 봐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요청하자 조선 조정은 왜구를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간 왜구들도 몰살당한데다 일본 내부에서도
무로마치 막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해적인 왜구들을 토벌하며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약 50여년 간에 걸친 왜구의
활동은 잠잠해진다. 1589년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태합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에 대한 전격적인 금지령
을 내렸다. 물론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일본 수군에 편입되어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사령관이었던 구키 요시타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에도 막부 수립 이후 다시 금했다. 또한 천주교 박해의 일환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왜구도 혹독한 탄압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왜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 13시 43분 : 동편제마을 주차장...
▲ 역사탐방.. 황산대첩비.. 피바위 길..
길따라 소리따라 걸었던 동편제 길.. 우리나라 공인 부처님의 길...
짧았지만 황산 정상에서의 일망무제한 지리산 조망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좋은곳 다녀오셨네요
사진 과 설명
우리 태조 전적을 細細히 설명해 주셨어 감사드립니다
와우~~
이성계꽈구만,,대단한선조를 두어 자긍심도 많겠구먼..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