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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남색 보자기
함영연 yrose0202@hanmail.net
남색 보자기는 생선가게 간이의자 귀퉁이에 며칠째 놓여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도시락을 싸 와서는 던져 놓은 것입니다. 남색 보자기는 할 일 없이 지내는 게 무료해 의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지내서 속상해. 난 귀하게 쓰이고 싶었거든.”
남색 보자기는 세상에 나오던 날, 공장 벽에 걸려 있는 ‘귀하게 쓰이게 하소서!’란 글귀를 보았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 꼭꼭 새겨 두었습니다.
“귀하게 쓰이는 게 뭔데?”
세월이 흐른 태가 보이는 낡은 의자가 말했습니다.
“흔한 일 말고 소중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 특별하게 쓰이는 것 말야.”
“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성껏 하는 게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해. 넌 물건을 싸고, 난 사람들이 편히 앉게 하고, 지나보니 그래.”
의자가 추억에 잠기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휴, 그건 소중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지.”
남색 보자기는 의자에게 퉁바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귀하게 쓰이겠다는 소망을 키웠습니다.
생선가게 맞은편은 건강식품 가게였습니다. 좁은 길이 사이에 있지만 가게 종업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 가게 손님들은 보자기로 곱게 싼 물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난 저런 모습이 아름답더라.”
의자의 말에 보자기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저건 보자기면 누구나 할 수 있잖아? 난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 아주 귀하게 쓰이는 일.”
남색 보자기는 꿈을 더욱 다졌습니다. 그때 가게 앞으로 화사한 스카프를 목에 두른 아가씨가 지나갔습니다. 스카프는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바람을 탔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건강식품 가게 종업원이 할머니 손님을 반겼습니다.
“몸이 허한 사람한테 좋은 게 뭐 있누? 쓴 맛이 덜한 거면 좋겠수.”
“이건 몸에 좋은 식물 뿌리인데, 먹기 좋게 젤리처럼 만든 거예요. 과자처럼 주머니에 몇 개 가지고 다니며 씹어 먹으면 좋아요.”
“그럼 그걸로 주시우.”
할머니가 건강식품 상자를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종업원은 계산대 밑으로 손을 넣더니 허리를 굽혀 두리번거렸습니다.
“할머니, 이걸 어쩌죠? 보자기가 다 떨어졌어요.”
“그럼 비닐봉지에다 넣어줘.”
가게 종업원과 할머니의 대화를 들은 주인아주머니가 남색 보자기를 기억해냈는지 눈길을 돌렸습니다.
“할머니, 죄송해요. 다음에 오시면 예쁜 보자기로 싸드릴게요.”
“괜찮대도 그러네.”
할머니는 종업원이 비닐봉지에 넣어주는 물건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할머니 나오셨어요? 좋은 거 사셨나 봐요.”
주인아주머니는 아는 사이인지 가게 앞을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몸이 부실한 우리 딸 먹이려고 건강식품 샀수.”
할머니가 비닐봉지를 들어보였습니다.
“네, 그러셨어요? 할머니, 여기 보자기 하나 있는데 이걸로 싸실래요? 도시락 싸온 건데 깨끗해요.”
주인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남색 보자기를 들어보였습니다.
“그럴까? 늙은이라 손마디가 안 좋아.”
할머니 말에 주인아주머니는 얼른 물건을 받아 남색 보자기에 쌌습니다.
‘이건 아닌데, 특별하게 쓰이고 싶었는데…….’
남색 보자기는 당황스러웠습니다.
“보기도 좋구랴. 시장 올 때 돌려줘야겠구먼.”
할머니는 물건을 싼 남색 보자기를 쓰다듬었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의 투박한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할머니, 돌려줄 생각 안 해도 돼요.”
“그래도 내 것이 아닌디, 고마우이.”
할머니는 물건을 소중히 안고 한참을 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건물로 가더니 7층까지 올라갔습니다. 철문이 열리고 면회실이 나왔습니다. 철창으로 되어 있는 안쪽은 무척 소란스러웠습니다.
“히이, 엄마 왔어? 먹을 거 갖고 왔어?”
할머니 딸은 몸집은 어른인데 행동은 다섯 살 정도 아이 같았습니다.
“인숙아, 몸은 어떠냐?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응, 없어. 좋아, 아주 좋아.”
할머니가 남색 보자기를 풀고 상자에서 건강 젤리를 몇 개 꺼냈습니다.
“이게 몸에 좋다더라. 간호실에 맡겨놓을 테니 날마다 조금씩 나눠 먹도록 해.”
“에게, 이게 뭐야?”
그러면서 할머니 딸은 싱글벙글하였습니다.
“이것아, 얼른 정신 차려라. 어서 나아서 집에 가야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여.”
할머니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할머니 딸이 입은 환자복에는 푸른병원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푸른병원 정신병동이었습니다.
‘아휴, 정신없어! 이런 분위기, 별로야.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남색 보자기는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간호사 양반, 이거 여기다 맡길 테니 날마다 좀 챙겨 주시우.”
할머니는 건강식품 상자를 간호사에게 내밀었습니다.
“할머니, 저번에도 말했는데 자꾸 가져오면 어떡해요?”
간호사는 할머니 행동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정신병동에는 음식물을 가져오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어, 알고말고. 그렇지만 에미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잖여?”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펼쳐진 남색 보자기를 돌돌 말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굽은 허리로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는 병원을 나왔습니다.
“에고, 내 팔자야. 저거 제 정신 돌아올 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겄어.”
할머니는 힘에 부치는지 걷다가 쉬고를 반복했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 말이 무슨 뜻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할머니의 울적한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한여름에도 겨울코트에 머리는 물귀신이여. 휴우, 그런 모양새로 대문 앞에 서 있으니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어. 에구, 무슨 죄로 험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몰러.”
할머니는 마치 옆 사람에게 말하듯이 했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외로워서인지 습관처럼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우울한 분위기 정말 싫어요. 저는 귀하게, 그러니까 특별하게 쓰이고 싶었거든요.”
남색 보자기는 은근히 짜증이 났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 손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시집 간 딸이 그러고 나타났으니 가슴이 아파 죽을 것만 같어.”
할머니는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때 할머니 손힘이 스르르 빠지면서 남색보자기가 바닥에 툭 떨어졌습니다. 바람에 남색 보자기가 몇 걸음 날렸습니다. 할머니는 급하게 남색보자기를 주워들었습니다.
“저런 극성맞은 바람 같으니라구.”
할머니는 보자기를 다시 돌돌 말아 쥐고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서랍장 위에 놓여졌습니다.
할머니는 며칠 뒤에 남색 보자기를 바닥에 펴더니 속옷 몇 가지를 쌌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소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꿈과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엄마, 뭐 가져왔어?”
“이것아, 정신 좀 차려라. 그렇게 정신 놓지 말고.”
할머니는 딸의 손을 부여잡았습니다.
“엄마, 나 차 안 탈거야. 절대로 안 탈거야.”
딸이 손을 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 그래. 어서 나아서 집으로 가자.”
할머니는 속옷을 사물함에 정리해 주고는 남색 보자기를 들고 서둘러 나왔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정신병동에 남아 있는 것도 싫지만, 할머니가 꼭 자신을 챙겨서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한테 묻어나는 슬픔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든 할머니 손에서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때 무언가 툭 떨어졌습니다. 그건 바로 할머니의 눈물이었습니다.
‘내 팔자도 참…….’
남색 보자기는 저도 모르게 할머니 말을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쯧쯧, 차 사고만 안 당했더라도 저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불쌍해서 어쩌누.”
할머니는 딸이 빨리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우리 딸이 좋아하는 건데 입맛이 안 변했을라나?”
이번에는 따끈한 호박죽을 담아서 남색 보자기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병원에서도 할머니 정성에 이제 더 뭐라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와, 맛있겠다.”
“성질 급하기도 해라. 달작하게 했는데 어여 먹어봐.”
할머니가 호박죽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남색 보자기는 또 할머니 신세타령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습니다.
“며칠 야근한 사람을 보채서 휴가를 떠날게 뭐람? 다음날 여유 있게 떠나면 좀 좋아?”
할머니의 몸이 휘청거렸습니다. 걷는 게 힘이 부치는지 겨우 걸음을 옮겼습니다. 집에 도착한 할머니는 남색 보자기를 머리맡에 놓고는 자리에 누웠습니다. 혈압이 높은 게 문제가 된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몇날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몹시 힘든지 끙끙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불쌍한 것……. 유치원 딸애와 남편을 잃고 어디 제 정신이겠어?”
할머니는 누워서도 딸 걱정에 잠겼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의 슬픔이 스며들어 덩달아 울적해졌습니다.
할머니는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남색 보자기는 외출은커녕 할머니의 푸념도 듣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가 그토록 건강해지기를 고대하던 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으로 왔습니다.
“엄마, 일어나. 빨리 일어나! 엄마랑 살려고 약도 잘 먹었는데……. 엄마도 차에 부딪친 거야? 나도 엄마한테 갈래.”
할머니 딸이 몸부림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며칠 동안 먹지도 않고 울었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 딸이 너무나 애처로웠습니다. 할머니 딸의 사연을 알고 있는 터라 병이 더 악화될까 봐 걱정되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를 만나 푸념을 들으며 지내는 거 별로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리 싫지만은 않았어요.’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 딸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생각만 꼬물거릴 뿐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어.’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새로운 소망이 자리 잡았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 딸이 정신을 놓지 않기를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소망을 키울 여유도 없이 남색 보자기는 할머니 옷가지들과 함께 태워질 처지가 되었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마당 한 모퉁이에 놓여졌습니다.
“제발 정신 놓지 마세요. 할머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남색 보자기는 마지막 심정으로 할머니 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할머니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할머니 딸이 남색 보자기를 보는가 싶더니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습니다.
“엄마, 엄마 보자기다! 맛있는 거 싸다 주던 엄마 보자기!”
할머니 딸이 남색 보자기를 들더니 가슴에 꼬옥 품었습니다.
“엄마, 엄마아!”
마치 하늘나라로 간 할머니라도 되는 듯 남색 보자기를 안고는 애절하게 불렀습니다. 남색 보자기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맸습니다. 다만 자신이 할머니 딸에게 의미가 담긴 소중한 보자기라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순간 맡겨진 일을 정성껏 하는 게 귀하게 쓰이는 거라던 생선가게 의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맞아요, 제가 그 보자기예요. 그러니 얼른 정신 차리세요. 그래서 할머니 산소 갈 때 맛있는 거 싸서 같이 가요. 네?’
남색 보자기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
첫댓글 남색 보자기가 새로운 꿈을 다시 꾸기 시각했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