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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 7-14절. 가이사랴에서 아가보가 바울에게 예언함
7절.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we had finished the voyage from Tyre, we arrived at Ptolemais, and after greeting the brethren, we stayed with them for a day.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Ἡμεῖς δὲ τὸν πλοῦν διανύσαντες ἀπὸ Τύρου
we then the voyage having completed from Tyre
직역하면 ‘우리가 두로로부터 항해를 다 마치고’란 뜻입니다.
‘우리’(Ἡμεῖς, we)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 마치고’(διανύ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completed),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완전히 항해를 마친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carrying an voyage through a definite result).
돌레마이에 이르러
κατηντήσαμεν εἰς Πτολεμαΐδα,
came down to Ptolemais
‘이르러’(κατηντήσ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came down) 돌레마이로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καὶ ἀσπασάμενοι τοὺς ἀδελφοὺς
and having greeted the brothers
‘안부를 묻고’(ἀσπασάμενοι)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greeted) 안부를 물은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ἐμείναμεν ἡμέραν μίαν παρ’ αὐτοῖς.
we stayed day one with them
‘있다가’(ἐμείν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stayed) ‘우리가 그들과 같이 하루를 있었다’는 뜻입니다.
1. 두로 항에서 남쪽으로 35킬로 항해해가면 돌레마이 항구가 나옵니다.
이 돌레마이란 알렉산더 왕의 후계 왕조로서 톨레미(Ptolemy) 왕조와 셀루키드(Seleukid) 왕조 중 애굽과 수리아를 통치한 톨레미 왕조를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즉 이 돌레마이 항구는 애굽의 프톨레마이우스 왕조를 따서 부른 항구로서,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서 서쪽 편 바다 끝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돌레마이에서 다시 남쪽으로 갈멜산 옆을 지나서 60킬로를 항해하면, 바로 가이사랴 항구가 나옵니다.
즉 갈릴리 호수 서쪽은 비옥한 아셀 평야가 있는데, 이 아셀 평야 서쪽 바닷가에 바로 돌레마이 항구가 있습니다.
이 돌레마이 항구는 유명한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하기 전까지 팔레스틴에서 가장 큰 항구였습니다.
두로에서 돌레마이까지는 35킬로 밖에 되지 않고,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도 60킬로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두로에서 곧바로 가이사랴까지 하루가 못 되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일부러 돌레마이에 들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돌레마이 교회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무섭게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일 때 피난 간 성도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레마이 교인들 중에는 바울의 핍박 때문에 불구자가 되었든지, 재산을 잃었든지, 심지어 가족을 잃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돌레마이 교회 성도들을 찾아가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돌레마이에 들러서 그곳 성도들에게 용서를 빌고, 또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이방인 교회들을 많이 설립한 간증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돌레마이에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이 있고,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돌레마이 교회도 두로 교회처럼 바울의 핍박을 피해서 피난 간 성도들이 전도하여 설립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돌레마이 성도들에게 과거에 자신이 핍박했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하여, 이방인 교회들을 설립한 전도자가 된 것을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 바쁘더라도, 하루 동안 돌레마이 성도들과 교제하고 간증하다가 헤어졌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입니까?
돌레마이 교인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놀랐을 것이고, 바울도 놀라운 간증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간증들은 후에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의 재판정에서 반복되어집니다.
즉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고소한 유대인들과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이 교회를 핍박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
이러한 재판정에서의 증언은 바로 두로와 돌레마이와 가이사랴에서 미리 했던 간증의 연장이었습니다.
8절.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On the next day we left and came to Caesarea, and entering the house of Philip the evangelist, who was one of the seven, we stayed with him.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τῇ δὲ ἐπαύριον ἐξελθόντες, ἤλθομεν εἰς Καισαρίαν,
on the now next day having gone forth, we came to Caesarea
‘떠나’(ἐξε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gone forth), 떠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키고, ‘이르러’(ἤλθο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came) 가이사랴에 도착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καὶ εἰσελθόντες εἰς τὸν οἶκον Φιλίππου τοῦ εὐαγγελιστοῦ, ὄντος ἐκ τῶν ἑπτὰ
and having entered to the house of Philip the evangelist, being of the seven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에서 동사(ὄντος)는 현재분사로서(being) 정확히 번역하자면, ‘일곱 가운데 속한’(being of the seven)이란 뜻입니다.
‘들어가서’(εἰσε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entered) 들어간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머무르니라
ἐμείναμεν παρ’ αὐτῷ.
we stayed with him
직역하면 ‘우리가 그와 함께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머무니라’(ἐμείν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stayed) 머물렀던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말합니다.
1. 바울은 돌레마이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에 이튿날 남쪽으로 60km를 배를 타고,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이 가이사랴에는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빌립의 집이 있었습니다.
이 빌립 집사는 사도행전 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과부 구제 문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방인 과부들을 구제하도록 뽑은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일곱 집사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빌립을 전도자 빌립이라고 부른 것은 열 두 사도 중 하나인 빌립(요6:7)과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즉 유대교의 지도자 청년 사울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스데반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빌립 집사도 사마리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서 능력 있게 전도를 잘했습니다.
즉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표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행 8: 4-7).
그리고 빌립 집사는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장관도 전도했습니다( 행 8:26-38).
그 후로 빌립 집사는 가이사랴에 가서 살았습니다.
이 가이사랴는 원래 사도행전 10장에 말씀한 대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사는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전도했던 곳입니다.
이 가이사랴는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총독이 6천 명의 로마 군인들을 거느리고 주둔하던 곳입니다.
이처럼 가이사랴는 큰 도시이기 때문에 빌립은 가이사랴에서 많은 사람을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에는 상당히 큰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 교인들과 빌립을 핍박할 때는 AD 34년경이고, 가이사랴에서 빌립을 만난 때는 AD 57년이기 때문에, 23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립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때 빌립 집사의 집에 들어가서 23년 전에 자신이 무섭게 핍박했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무지막지한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한 일을 간증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회개와 간증은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이었습니다.
빌립도 과거에 성령님께 쓰임 받은 위대한 전도자였지만, 핍박자 바울이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 놀랍게 전도하고 많은 교회들을 세운 것에 대한 간증을 들을 때, 빌립은 대단히 놀라고 은혜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회개와 간증은 두로와 돌레마이와 가이사랴에서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재판받을 때 똑같은 간증 전도를 하는데, 이미 앞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간증해보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더욱 세련되게 높은 사람들 앞에서도 간증식 변론을 잘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훌륭한 부흥사는 여러 번 훈련을 통해서 준비되어집니다.
그러므로 봉사를 자꾸 해보아야 훌륭한 사역자로 가꾸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생이 졸업하고 단번에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부장 집사도 해보고, 교육전도사도 해보고, 부교역자도 해보면서 훈련을 통해서 가꾸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9절.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this man had four virgin daughters who were prophetesses.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τούτῳ δὲ ἦσαν θυγατέρες τέσσαρες, παρθένοι προφητεύουσαι.
with this (man) there were daughter four, virgins, prophesying
‘있으니’(ἦσαν)는 미완료과거로서(there were) 계속 있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언하는’(προφητεύουσαι)은 현재분사로서(prophesying) 계속 예언하는 것을 가리키고, 직역하면 ‘그에게 예언하는 처녀들 네 딸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1. 빌립 집사가 성령 충만하니까 딸들도 성령 충만한 자녀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결혼을 안 한 것이 아니고, 결혼 생활을 해도 성령 충만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성령 충만한 신앙을 자녀들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자녀들의 신앙은 별수 없이 부모의 신앙을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쑈(show)가 아니기 때문에 진실한 모습 그대로 자녀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전도자 빌립 집사의 성령 충만한 생활을 네 딸들이 그대로 전수 받아서 예언을 했습니다.
이처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그 자녀를 보면 알 수 있고, 그 친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가족이 예수 안 믿어도 모두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면, 그 진실 된 모습에 가족이 감동 감화를 받아서 모두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집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한집에서 사는 가족만큼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집에서 사는 가족은 진실한 신앙의 모습을 보고 자연히 감동 감화를 받습니다.
그래서 빌립 집사의 진실한 신앙을 보고, 네 딸들이 역시 성령 충만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2. 성령의 은사 중에 예언의 은사는 가장 중요한 은사였습니다. (고전 14:1-4)
그리고 빌립 집사는 이 후에 히에라볼리 교회에서 사역했습니다.
10절.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s we were staying there for some days, a prophet named Agabus came down from Judea.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Ἐπιμενόντων δὲ ἡμέρας πλείους,
remaining now days many
‘머물더니’(Ἐπιμενόντων)는 현재분사로서(remaining) 계속 머물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κατῆλθέν τις ἀπὸ τῆς Ἰουδαίας, προφήτης ὀνόματι Ἄγαβος,
came down certain (man) from the Judea, prophet named Agabus
‘내려와’(κατῆλθέν)는 부정과거로서(came down) 내려왔다는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이 빌립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고 있는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의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에 대해 예언을 했습니다.
이 아가보 선지자는 사도행전 11장 28절에서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해서 그대로 이루어진 선지자였습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도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물론 구약 시대는 선지자들이 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있어서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어서 교사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행 13: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는데, 구약 시대는 선지자들이 주로 활동했고, 신약 시대에는 사도들이 주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는 교회에 세우신 직분 중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능력 행하는 자를 열거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열거했습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도 선지자가 있어서 예언 활동을 했으나, 성경이 완성된 후로는 선지자의 예언 활동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빌립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물론 아가보 선지자는 빌립 집사가 성령 충만하고 그 딸들이 예언을 하기 때문에 빌립의 집을 종종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빌립의 집에 찾아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풀어 바울의 수족을 잡아매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유대인들이 이렇게 결박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 것은 이러한 선지자의 신비스러운 예언보다도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더 신앙의 지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보다도 더 예언의 말씀을 확실한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베드로후서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신비주의자들의 이상한 예언은 참고로 할 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한 표준으로 삼고 신앙생활 해 나가야 합니다.
11절.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coming to us, he took Paul's belt and bound his own feet and hands, and said, "This is what the Holy Spirit says: 'In this way the Jews at Jerusalem will bind the man who owns this belt and deliver him into the hands of the Gentiles.'“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καὶ ἐλθὼν πρὸς ἡμᾶς καὶ ἄρας τὴν ζώνην τοῦ Παύλου,
and having come to us and having taken the belt of the Paul
‘와서’(ἐλθὼν)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come), ‘가져다가’(ἄρας)도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둘 다 과거에 행동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δήσας ἑαυτοῦ τοὺς πόδας καὶ τὰς χεῖρας,
having bound of himself the feet and hands,
‘잡아매고’(δήσ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ound) 잡아맨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말하기를
εἶπεν
he said
‘말하기를’(εἶπεν)은 부정과거로서(he said) ‘그가 말했다’는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Τάδε λέγει 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
thus says the Spirit the Holy,
직역하면 ‘성령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이란 뜻입니다.
‘말씀하시되’(λέγει)는 현재형입니다(says).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Τὸν ἄνδρα οὗ ἐστιν ἡ ζώνη αὕτη, οὕτως δήσουσιν ἐν Ἱερουσαλὴμ οἱ Ἰουδαῖοι
the man of whom is the belt this, in this way will bound in Jerusalem the Jews
‘이 띠 임자를’에서 동사(ἐστιν)는 현재형이고(is), ‘결박하여’(δήσουσιν)는 미래형으로서(will bound) ‘결박할 것이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καὶ παραδώσουσιν εἰς χεῖρας ἐθνῶν.
and will deliver (him) into hands of gentiles
‘넘겨주리라’(παραδώσουσιν)는 미래형입니다(will deliver).
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선지자들은 예언 활동을 하면서, 자기가 한 말을 더욱 확실하게 증언하기 위해서, 종종 행동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즉 열왕기상 11장에서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에게 예언하면서, 새 옷을 열두 조각을 낸 후에 10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서 열 지파를 여로보암이 다스리도록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20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벗은 몸으로 3년간 다님으로써 유대 백성들이 자기처럼 벗은 몸으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을 가시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행동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아가보 선지자도 바울의 허리띠를 풀어서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이 띠 임자가 예루살렘에 가면 이처럼 결박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육도 말로써 하는 교육보다 시청각 교육을 해야 더 잘 전달되는 것입니다.
2.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교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리라고 했습니다.
이 아가보의 예언대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교인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인 로마의 총독들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분명히 아가보는 성령의 감동으로 정확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가이사랴 교회 성도들은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바울은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될지라도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말일지라도, 그에 대한 반응과 태도는 달랐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다면,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은 틀림없이 결박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바울이 각오를 하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때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은 대단히 신빙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도행전 11장 28절에서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용 있는 예언은 큰 신빙성을 안겨 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가보 선지자가 사도행전 11장에서 흉년에 대해 예언했을 때, 바울과 바나바는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갔습니다(행11:28-30).
그래서 바울은 이미 아가보 선지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즉 사도행전 11장 28-30절에서 아가보 선지자가 흉년을 예언함으로써, 그대로 흉년이 이루어져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갔다 왔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하고 있을 때이므로 AD 47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AD 57년 즉 10년이 지난 후에 바울은 유명한 사도로서 아가보 선지자를 빌립의 집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과거에는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부교역자로서 아가보를 알았지만, 이제는 바울이 유명한 이방인의 사도로서 아가보를 직접 빌립 집사의 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과거의 부교역자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 전도를 소아시아 지역과 헬라 반도(그리스)까지 다 완성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아가보 선지자가 결박에 대한 예언을 했지만, 이미 바울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20장 23절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께서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시기를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신다고 하지만, 나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즉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결심을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미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과 같은 예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사도행전 21장 4절에서 두로 교회 성도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가이사랴 교회에서 아가보 선지자가 하는 예언이 새롭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2절.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we had heard this, we as well as the local residents began begging him not to go up to Jerusalem.
우리가 그 말을 듣고
ὡς δὲ ἠκούσαμεν ταῦτα,
when then we heard these,
‘듣고’(ἠκούσ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heard) 과거에 들은 분명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παρεκαλοῦμεν ἡμεῖς τε καὶ οἱ ἐντόπιοι, τοῦ μὴ ἀναβαίνειν αὐτὸν εἰς Ἱερουσαλήμ.
began begging we both and those of that place, of the not to go up him to Jerusalem
직역하면 ‘우리와 그곳 사람들이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계속 권했다’는 뜻입니다.
‘올라가지 말라고’에서 동사(ἀναβαίν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go up), ‘권하니’(παρεκαλοῦμεν)는 미완료과거로서(began begging) 계속 권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아가보는 과거에도 흉년 예언을 맞힌 유명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가보의 권위에 눌려서 바울에게 아가보의 말을 듣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또한 가이사랴 성도들은 예루살렘과 거리가 가까워서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살인적인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장 23절 말씀대로 각 성에서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셨고, 21장 4절에서 두로 교회 성도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였으며, 세 번째로 아가보 선지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니, 바울을 따라왔던 일행들도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이러한 권면은 바울을 아끼고 염려하고 사랑해서 하는 권면이었습니다.
이처럼 일행들과 가이사랴 성도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바울은 이미 결박과 환난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자기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 전할 각오를 했기 때문에, 이 사명의 길을 방해하지 말라고 책망했습니다.
13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n Paul answered, "What are you doing, weeping and breaking my heart? For I am ready not only to be bound, but even to die at Jerusalem for the name of the Lord Jesus.“
바울이 대답하되
τότε ἀπεκρίθη ὁ Παῦλος
then answered the Paul
직역하면 ‘그러자 바울이 대답했다’는 뜻입니다.
‘대답하되’(ἀπεκρίθη)는 부정과거로서(answered) 확실하게 대답한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Τί ποιεῖτε, κλαίοντες καὶ συνθρύπτοντές μου τὴν καρδίαν;
what are you doing, weeping and breaking my the heart?
‘하느냐’(ποιεῖτε)는 현재형이고(are you doing), ‘울어’(κλαίοντες)는 현재분사이고(weeping), ‘상하게 하느냐’(συνθρύπτοντές)도 현재분사로서(breaking) 현재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ἐγὼ γὰρ οὐ μόνον δεθῆναι, ἀλλὰ καὶ ἀποθανεῖν εἰς Ἱερουσαλὴμ, ἑτοίμως ἔχω
I for not only to be bound, but also to die at Jerusalem, readiness I have
직역하면 ‘왜냐하면 나는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나는’(ἐγὼ, I)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결박당하는 것’(δεθῆν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수동태로서(to be bound) 단호하게 결박당하는 것을 가리키고, ‘죽는 것’(ἀποθανεῖν)도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die) 용감하게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각오하였노라’에서 동사(ἔχω)는 현재형으로서(I have), 지금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ὑπὲρ τοῦ ὀνόματο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for the name of the Lord Jesus
1.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바울의 일행들과 가이사랴 성도들이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하니까, 바울이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여,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동정과 사랑이 참 좋은 것이지만,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는 방해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려고 했을 때, 베드로가 만류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즉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고 갈려고 하시는데, 베드로가 인간적인 정으로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2.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 사도는 주 예수님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미 말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바울은 주님과 복음 전도를 위해서 한번 죽을 것을 각오했습니다.
바로 이 <일사각오>의 신앙이 한국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이었습니다.
일제 강점 시대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 신사에 우상 숭배를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마지막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같이 시들어 떨어질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나의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생각에 주기철 목사님이 일 년만 더 살아서 해방을 보았더라면 참 좋았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 전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늘날은 모든 교인들이 주기철 목사님을 순교자로 존경하지만,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주기철 목사를 파면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즉 주기철 목사가 1940년 8월부터 44년 6월 21일 순교 시까지 평안노회가 주기철 목사님의 목사직을 파면하고 산정현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즉 장로교단은 1938년 2월 평북노회와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이에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1939년 12월 파면했습니다.
그 후 노회는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저지하기 위해 산정현 교회를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주 목사에게 회유와 고문을 반복했지만 주 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저항하다 결국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노회는 주기철 목사의 노모를 포함한 가족을 사택에서 추방하는 일까지 감행했는데, 이후 주기철 목사 가족은 해방될 때까지 5년 동안 열세 번이나 이사하며 유랑했습니다.
그래서 평양노회는 평양 대 부흥 1백 주년이 되는 2007년을 앞두고 일제 강점 시대에 노회가 행한 중대한 잘못들을 고백하기로 결의하고, 주기철 목사를 복권하고, 유족들에게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즉 바울이 자유의 몸으로 전도하면 우리 생각에 참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뜻은 죄수로 전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재판을 받으면서 유대교의 높은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전도했고,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도 전도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죄수의 몸이 아니었다면, 이런 높은 관리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죄수로 재판을 받기 때문에, 유대교의 고관들이나 총독들이나 왕에게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감옥에서도 황실 자제들에게 전도해서 복음 전도의 진보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황제 앞에서도 재판 시에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억울하게 죄수가 되는 것을 참고 복음 전도한 것처럼, 우리들도 억울하게 죄인 취급을 받아도 참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장차 천국에서 큰 복 받으시고, 자손들이 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