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작가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거의 다 읽었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출간되었다. 6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로 화제가 된 이번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하루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이 여전함을 과시했다.
열일곱 살 남고생인 ‘나’, 열여섯 살 여고생인 ‘너’. 두 사람은 고교생 에세이 대회에서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나’는 어리둥절하지만 이내 소녀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 이야기를 따라 도시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해가던 나날, 돌연 소녀가 사라진다. 우연한 사고인지, 무언가의 암시일지 종잡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결국 소녀가 말했던 미지의 도시로 향한다.
소녀가 말한 도시는 견고하고 높은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곳 시계에는 바늘이 없지만 사람들은 자연히 시간을 감각할 수 있다. 도시에는 도서관이 하나 있는데, 그곳 서가에는 책이 아닌 사람들의 꿈이 달걀 모양으로 줄지어 놓여 있다. 그 꿈들을 관리하고 꿈의 내용을 해독하는 것이 도시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도시의 출입구는 단 하나, 그마저 우람한 문지기가 지키고 있어 아무나 드나들지 못한다. 도시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조건이 있다.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는 것. ‘나’는 그림자를 버리고 그 도시에 들어간 후, 도서관에 출근하며 ‘꿈 읽는 이’가 되어 생활한다. 애타게 그리던 소녀와도 재회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소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느덧 중년이 된다. 오래 몸담았던 출판 유통업계 일을 그만두고, 산간 지방의 작은 도서관에서 신임 관장으로 일한다. 그곳에서 전임 관장 ‘고야스’, 사서 ‘소에다’, 노란 잠수함이 그려진 옷을 입고 매일 도서관을 찾아와 엄청난 속도로 책을 읽어나가는 ‘M소년’과 교류하며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고야스’의 미스터리한 비밀이 밝혀지고 ‘M소년’이 행방불명되면서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산간 지방의 한적한 도서관’과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경계에서 부유하듯 살아가던 ‘나’는 이제 이러한 생활에도 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한다. 단 하나의 분명한 진실과 현상을 갈구하는 일이 무의미한 경계, 인간의 믿음이 끊임없이 시험당하는 그 경계에서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2023년 4월 27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 칼리지에서 "역병과 전쟁의 시대에 소설을 쓰는 것"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한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 사이에 경계심이라는 벽이 생기고, 그 벽을 허물어 정의롭고 자유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는 일이 개인의 선택으로 떠맡겨지는 오늘날의 현상에 대해 언급하면서"『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이러한 시대에 합치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는 하루키의 작품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 즉 사랑, 그림자, 도서관, 비틀스, 클래식과 재즈 등이 더욱 긴밀히 어우러진다. 하루키가 40년 넘게 구축해온 세계가 꽃을 피운 것이다.
하루키는 주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리고 소설에 대해 ‘마음으로 쓰는 것’ ‘마음과 논리적인 의식의 간격을 메워나가는 것’ ‘논리만으로 구제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밝혀왔다. 이번 작품에서 하루키는 그간 구축해온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계승’ ‘이후 세대’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확고한 작품세계를 이룬 거장 하루키가 향후 작가로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해본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자신의 작가 인생과 작품세계를 수확하는 뜻깊은 완성이자 하나의 매듭이며, 이후의 하루키를 기대하게 하는 또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다채롭게 넘나드는 하루키적 상상력을 더욱 원숙한 세계로 만나볼 수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