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눈이 달라지면 사는 것도 달라진다
(약1:9~11)
미모의 아가씨가 할머니와 함께 옷감을 사러 시장에 갔습니다.
아가씨는 주인에게 “이 옷감 한 마(碼)에 얼마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키스 한번 해주시면 한 마 정도는 공짜로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럼요.”
“그럼 다섯 마를 주세요.”
주인은 즐거운 표정으로 다섯 마를 잘라 준 후 “이제 키스 다섯 번을 해주셔야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가씨는... “계산은 우리 할머니가 하실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서로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미국의 최대 통신회사인 AT&T가 1980년에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를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AT&T 중역들은 “설마... 길을 걸어가면서 전화할 사람이 있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싼 값에 기술특허를 모토로라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모토로라는 실제로 휴대전화를 만들어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당시 휴대전화 한 대 값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도 역시 서로 보는 눈이 달라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은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돼지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돼지의 보는 눈을 바꾸어주면 됩니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의 고민은 돼지의 보는 눈을 바꾸어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5,000년 전 돼지나 오늘날 돼지나 보는 눈은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눈으로 살아야 하느냐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까요? 당연히 믿음의 눈, 성경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요셉은 주인마님으로부터 누명을 쓰고 왕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왕의 감옥은 정치범 수용소로서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감옥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었던 덕분에 왕 앞에 불려 나가 왕의 꿈도 해몽해주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해몽을 들은 바로왕이 신하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우리가 이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어디 가서 얻겠냐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요셉이 보는 눈은 너무나 탁월하다는 거예요.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거예요. 그래서 즉석에서 약관 30세의 요셉을 총리로 발탁했습니다.
사울 왕과 소년 다윗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적장 골리앗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그 다른 눈이 두 사람의 운명까지 결정지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이유도, 성경을 읽는 이유도 그 목적은 우리의 ‘보는 눈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시각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히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허상’을 보는 게 아니라 ‘실상’을 보게 만든다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왜 고생합니까? 왜 방황합니까? 왜 실패를 합니까? 허상을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실상을 보려면, 보는 눈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의 인사는 샬롬(평안)입니다. 평안이 깨지면 불안해집니다. 불안해지면 분별력이 떨어지면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지혜’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평안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평안이 깨지면 불안이 찾아오고, 불안해지면 지혜는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福 중의 최고의 福을 ‘평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福 중의 福인 ‘평안’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그걸 말해주고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을 말해줍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높음을 자랑하고’ 즉 자랑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만은 안 되지만 자랑거리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자랑거리가 없으면 정신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평안’도 사라지고 덩달아 지혜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나라 목사님들이 독일교회의 초청을 받아 갔는데 일정 중에 독일의 공장을 견학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공장은 정신박약자도 고용하는 공장이었는데 생산라인에 들어가니까 한 정신박약자가 콘베어벨트에서 나오는 물건을 10개까지 세어서 박스에 담는 일을 하고 있더랍니다. 한국 목사님들이 다가가니까 그 사람이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셀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랑을 하더라는 거예요. 오늘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셀 줄 아는 분들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전통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 높아야, 가진 재산이 많아야, 배운 지식이 많아야 큰소리를 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기가 팍 죽어 삽니다. 유교가 이 나라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열등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모 대학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까지 출판했겠습니까?
서양인들은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직업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테일러’라는 이름은 자신들의 조상이 양복쟁이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스미스’란 우리 조상이 대장장이였다는 것이고, ‘피셔’란 우리 조상이 어부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는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 세상 신분이 낮을지라도 ‘정직’만큼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다 그렇지요? 성품도 대한항공 조현아 씨보다 더 따뜻하지요? 그래서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부자는 무엇으로 자랑하라고 했습니까? ‘낮아짐’ 즉 겸손으로 존경을 받으라는 거예요. 재벌이 겸손하면 진짜 존경을 받습니다. 사실 돈이 없으면 사는 데 좀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나 불편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번은 제 동기 목사님 아파트를 찾아갔는데 문이 열려 있는 거예요. “어딜 가셨나?” 그리고는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30분 후에 오셨습니다. 제가 “아니 문을 열어 놓고 다니면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뭐 가져갈 게 있어야지” 그러는 거예요. 제가 집안을 살펴보니까 정말 모두 고물들이어서 가져갈 게 없는 거예요. 제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우리 집에는 가져갈 게 좀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 저는 3년마다 책이나 짐을 정리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높은 것도 지나가고, 부한 것도 지나가고, 아름다운 것도 지나가고, 건강했던 몸도 다 지나간다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할아버지는 저하고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벌써 70살이 되었습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현실인데 어쩌겠습니까. 이건희 회장은 식물인간이 된 지 벌써 몇 년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재벌도 다 쇠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쇠잔하는 것에 인생의 최종목표를 두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런 것들이 쇠잔해질 때 초라해진다는 거예요. 후회하게 된다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거예요.
과거 제가 부목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심방을 해달라는 구역장의 부탁을 받고 모 여집사님 댁을 방문했는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악~ 악~ 악~”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집사님의 남편 되시는 분이 얼굴이 까맣게 된 채 뼈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숨을 몰아쉬며 “악~ 악~” 소리만 질렀습니다. 집사님은 이젠 진통제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심방을 두 번 한 후에 그분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식 치르는 날 그분의 관은 병원 특별 별관에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양편에는 화환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는데 그렇게 긴 화환 길은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거기에는 대통령과 국회의장과 국무총리와 대법원장의 화환이 있었습니다. “아니 고인이 이렇게 높은 사람이었나?” 놀랐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분의 죽어가는 모습을 저는 보았잖아요.
제가 몇 년 전 문경에서 요양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문경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한 분을 제가 전도했습니다. 이분은 췌장염이 너무나 심해 거의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임종이 가까운 것을 알고는 지인들에게 전화하면서 “問病을 오시겠소? 아니면 問喪을 오시겠소?” 그랬다는 거예요. 얼마나 지혜로운 말입니까? 그랬더니 당장 다음 날 面長, 파출소장, 보건소장, 심지어는 스님까지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와야지 죽은 다음에 화환들이 찾아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한때 영광은 꽃처럼 다 시드는 겁니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좋은 점에 대해 긍지를 갖고 살고, 부한 자는 겸손으로 존경을 받으며 살라고 했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셀 줄 알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교통사고 나서 의식불명 상태가 되거나, 치매에 걸리게 되면 열까지도 세지 못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범사’란 무엇입니까? 좋은 일만 아니라 나쁜 일, 실패한 일, 손해 본 일, 병든 일...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나쁜 일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쁜 일, 손해 본 일, 실패한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국물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거예요. 저는 이런 사실을 깨우친 이후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은 福 중의 福인 ‘평안’을 누리게 하는 최고의 길입니다.
첫댓글 “問病을 오시겠소? 아니면 問喪을 오시겠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ㅎ
정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