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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3
요한복음 풀이 4 _信天함석헌
복음서의 첨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어봐도 예수님이 이 목숨 때문에 죽는 거 무서워 그런 분이 아니란 거 다 알지 않아요. 왜 그럼 거기서 굳이 갈릴리로 다시 가자 그랬나? 거 왜 그런고 하니, 그거야 꼭 여기야만 되는 것은 아니고, 다른 데 가서 전도할 데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몇 번을 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랬어도 점점 가다가 마지막엔 충돌이 돼 달라져요. 그게 중요한 데예요. 예수님의 전도하시는 코스가 달라진다 그 말이에요. 첨에는 우리 보통말로 하면 “우리가 이 마을에서만이 아니라 그저 사마리아 국경 밖에까지, 그리고 저 바닷가 지중해의 저 시온까지 우리가 다 전도하자”(「마태복음」, 9장 35절;10장 23절) 제자들을 파견할 때다 나가서 전도하자 그러지 않았어요?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라(「마태복음」, 10 장 8절)고 하면서 전도하려고 했던 건데, 문제가 이렇게 돼서, 이 사람들이 아주 죽이려고 하니까, 어떻게 되는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자기 운명이 되는 것을 아셔요.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한다면 아마 마음의 고민도 많았을 거예요. 하나님한테 기도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아마「히브리서」의 기자는 “자기를 사망에서 건져주실 수 있는 이에게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했다”(「히브리서」, 5장 7~10절) 했어요. 출처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성경에는 없고 여기만 있는 거라서 이건 중요한 거라고 합니다만, 그런 걸 보면 죽는 걸 무서워하는 분은 아니지요. 아마 “어떡하면 이걸 전도할 수 있지?” 그러고 마음이 어려워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그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죽이기로 하니까, 하나님에게 “이 잔을 될수록은 면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님 뜻대로 해주십시오”(「누가복음」, 22장 42절) 해서 이제 말씀하는데, 먼저 말씀해주실 걸, 그걸 강조하고 해서 안됐습니다만, 성경에서 아무래도 예수님의 중심 되는 것은 뭔고 하니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본래 내가 이 세상에 이렇게 온 게 아니라 “보내서 온 사람이다. 날 보내신 이가 있다” (「요한복음」, 9장 38~39절) 그건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보냈다는 건 아니오.
육신의 부모, 처녀수태라는 게 과학에 어그러지는 것 같아서 그것이 문제가 되면 그건 보류해둬도 괜찮아요. 억지로 그러지 말고, 억지로 믿는 것은 믿음 아니에요. 믿어지는 때에 믿어지는 거니까. 의심이 나면 어떡하면 내가 극복을 하지, 풀지 하는 게 좋은 일입니다. 그렇 게 하노라면, 여기「요한복음」을 보고 하면 그것이 문제가 안되게 슬쩍 돼요. 뭐 무슨 처녀수태가 과학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 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이 뭐냐? 예수님이 생각을 하다하다가 “하나님께서 날 세상에 보내신 거다” 그 확신에 들었어요. 그러니 세상의 뉘 아들이요, 뉘 딸이란 거 그것 또 문제가 아닌 건 아니지요. 뭐 예수님이 부모 공경할 줄 몰랐겠어요? 알긴 알았지만 자기가 바로 자연인으로 났던 것만 아니고, 자기 속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확신이 나는 걸 체험을 해서 아신 거 아니오? 뭐 내가 그걸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건 다 지내보시고 난 담이니까,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아 요한이 또 짐작을 하고 아니까 “아이구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나에게 나오시오?” (「마태복음」, 4 장 14절) 하니까 “그런 게 아니오. 옳은 일은 완성하는 것이 좋아”(「마태복음」, 4장 15걸) 그러고 말씀하셨다고 하는 걸 보면 자기 거기 나오시기 전에 그저 목수 노릇만 하다가, 나도 세례 한번 받아볼까 하고 나오신 분이 아닙니다. 생각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그「히브리서」의 기록에 있는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를 해서, 순종함으로 해서 아들 자리에 갔다” 하는 그 지경을 더듬어보진 않고, 그걸 더듬어봐야 연약한 우리로서도 어떻게 그 자리에 갈 수 있나 생각하는 게 믿는 자리예요. “그렇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그걸 보면 이 길이 이렇게 있다. 그런데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안되지만 우리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되는 길이 있다.” 믿게 되는 그런데서, 물론 우리가 찾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다 그러겠지만 그 점을 알지 않고는, 예수님이 앞에서 가신 그 길을 알지 않고는, 내가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나도 그 덕택에 이름 써넣고 하늘나라 타먹을 때는 나도 주시오 그런 실정으로는 갈 수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쩌면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이렇게 해왔나, 아주 싸구려 종교로 돼버렸어요.
거길 보면 비통한 것이 있어요. 괴로와서 괴로와서, 큰 이상대로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도 않고 하니까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그러잖아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시오” 그러고, 아주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결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고 하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늘나라 완전하게 펴는 것은 내겐 허락이 안되신 일이다.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지만, 그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라고 내가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내가 할 일은 뭐냐?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할 일을 내버리느냐 하면 그건 그렇지 않고, 씨를 남기려고 하는거예요.「요한복음」이 다른복음과 다른 거는, 지적해드리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그건 공관복음에도 나와 있지만, 예수님의 내적인 고민도 컸다는 게「요한복음」에서처럼 분명하게 있는 데가 없어요. 전도 방침이 달라져요. 이상대로 한다면 한꺼번에 모든 게 다 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쫙 펼치고 했으면 좋겠지만, 어쩐지 그런 건 허락이 안 돼요. “그 사람들의 하는 일로 점점 더 내가 면할 수 없게 돼. 그러나 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으니까, 그건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그런 마음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길 바라지만, 안되거든 그대로 좋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런 기도를 했을거예요. 그래서 방침이 달라진 것은, 이제는 “당장에 하늘나라를 완성하는 걸 할 수가 없고, 그걸 위해서 씨를 여기 만들어놔야지” 하는, 그렇게 하는 걸로 한번 보시오. 그래 그 점으로 하신 것이 뭔고 하니 내부 핵심단체를 훈련하고 가기로 한 겁니다. 요새 사회투쟁하는 식으로 한다면 첨에는 일반 혁명을 하려고 했던 걸 그게 안되니까 그럼 낙심을 했어? 그런 건 아니에요.
어느 때 가서도 되는 일이니까, 지금은 하나님이 무슨 까닭으로, 그걸 그렇게는 허락을 안하시니까, “요것을, 요 씨를 남기고 가야지” 해서 자기 주위의 소수 사람들을 모아놓고 내부 핵심단체를 만드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마지막 주일에 전력을 다한 거요.
그러니까「요한복음」은 재미있고, 말은 이렇게 쉬운 말이 없어요. 나도 이전에 희랍말 배웠다가 노력을 안해서 이젠 부끄럽게도 다 까먹고 그랬지만, 일 년 동안을 한 주일에 한 가지씩 해서, 물론 가르치는 선생이 잘 가르치고 해서 그랬겠지만, 아무튼 한 주일에 한 시간씩 일 년을 배우면「요한복음」은 읽습니다. 「요한복음」은 아주 쉽습니다. 말이 그렇게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구나 좋습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쉬운데, 뜻은 그 쉬운 말로 어떻게 그런 깊은 데까지 넣었나, 그건 모든 학자들이 지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시는 그게 어디 있느냐 하면, 처음에는 땅 끝까지 널리 전파하시려 하시던 것이, 그건 있다가 제자들에게 넘겨주려고 하고, 자기가 모처럼 와서 만든 내부의 핵심단체 그걸 만들려고 해요. 그게 뭔고 하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마지막까지 지켰습니다. 그러나 다만 망하기로 한 한 자식만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6~26절) 그건 가롯 유다를 두고 말하는 건데, 그러면 자기 주위에 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나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사람들로 생각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 맡긴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건지도록 하게 하기 위해 자기에게 맡긴 걸로 예 수님은 알아.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어떻게 하든지 살아 있는 동안에 염려 없는 지경까지 끌고 가야 하지, 하는 책임감을 느끼신 겁니다.
그래서 아주 몇 번 기도하시는데, “아버지께서 주신 것은 내가 땅에서 지켜서 잘못이 없습니다.” 물론 제자라는 그 사람들이 아주 형편없는 것들임도 다 알아요. 그래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나서면서 장담을 하길 “모든 사람이 다 도망을 가도 전 안 갈랍니다” 하니, “그래? 그러나 네가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거다”(「요한복 음」, 13장 37~38절) 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줄을 알긴 알지만, 베드로를 믿기는 믿어요. 그 사람 속에 씨를 넣었으니까. 그전에 자기에게 고백한 것도 있고 그러니까 씨가 들어가서 아직 발아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씨가 발아하는 때가 있을 거다, 그건 믿어요. 그래서 하시는 일, 그 마지막 한 주일 동안에 하시는 일은 13장 이하를 한번 보시오. 보면 볼수록 참 좋잖아요. 16장까지는 토론 형식으로 말씀을 다해주시고, 17장에 가면 아주 높은 빛이 올라가요, 톤이. 그건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이제 나는 갈 데로 갑니다. 아버지 부르시는 대 로 나는 가지만, 이 사람들은 두고 갑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내가 이들을 보호했지만, 이제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가니까, 이제는 아버지께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또 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는 보지도 못했지만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아버지께서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하는 게 “땅에 있을 동안에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더라” 한 게 그것입니다. 그러고 첫 출발이 제자들을 놓고 발 씻기는 것인데, 그건 전에 내가 쓴 일도 있고 그랬습니다만, 그건 내딴에는 보통 아닌 체험을 해보고 쓴 말이에요.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한 건데, 그건 어째 그런지 난 몰라요. 초겨울에 눈이 부슬부슬 오는 저녁인데, 눈을 이렇게 내다보고 있는데, 나는 환상을 봤다는 건 아닙니다. 환상은 아닌데, 저기 가롯 유다가 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가롯 유다가 문제가 돼서 생각을 하다 보니 그런 겁니다만, 그때 난 생각이지만, 그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우리가 의심이 가도록 느껴지는 말이 “내 마음이 민망해서 죽겠다”(「마태복음」, 26장 38절) 하는 부분이에요. 그런 약한 면이 어디 있어요? 다른 성인들이나, 석가모니 같은 이는 그런 비명을 올린 것 같지 않아요. 공자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럼 왜 그러셨을까? 아까 얘기한대로 죽는다거나, 매맞는게 무섭다든지 하는 그런 분은 아닌데, 아닌데 왜 그랬겠나? 나는 제일 고민거리가 그거였어요. 열둘을, 무슨 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열두 지파니까 아마 열둘로 했겠지요. 자기는 이들을 두고 먼저 떠나가지만, 그래도 안심을 하고 가려는 그것인데, 그래 공동체가 거기서 나와요.
이제 교회 시작이 그건데, 이제 거기서 하나가 불거져나갔단 말이오.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께서 밤새도록 기도를 해주고, 기도를 그날만 했겠어요, 두고두고 했겠지요. 막으로 하는 이 아니에요. 거「요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도망가시는 이예요. 도망가시면서도 자기해야 할 일은 있으니까, 열둘을 빼서, 요걸 이제 기르시려는 것인데, 그중에 하나가 배반을 해요. 그렇게 보통으로 아니고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내가 끝까지 보호했습니다”(「요한복음」. !8장 I2절) 자신있게 아주 말을 하고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빛이다. 빛있는 가운데 걸으면 거꾸러지지 않을 거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하셨어요.
그러고 이제 첨에 말했어야 하는 건데 잊었습니다. 내가 늘 말하는 게 하나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인칭을 정말 바로 쓴 사람은 예수님 한 분뿐이라고 하는데, “나다” 하는 거, ‘나’ 예수님처럼 ‘나’,‘나’,‘나’, ‘나’ 소리 한 분 어디 있어요? 그런데 보통 세상 사람들이 ‘나’ 소리 하는걸 보면 교만한 사람이거든요. 뭘 ‘내가’ ‘내가’, 내가 누구라고? 건 겸양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위선이 안 날 수가 없어요. 세상에서는 공자님 같은 이도 ‘성인’ 말 나면 “아예 말 말아라. 나는 그저 힘써 배우고, 가르쳐주려는 사람이지, 성인은 감히 못된다.” ‘님’이라 그러면 그거 내가 ‘님’이 될 자격이 있나,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공자님의 값이 올라가잖아요. 자기가 스스로 겸양할 줄 아는 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게 없잖아요? 나다, “나는 보내심을 받아서 온 사람이다”(「요한복음」, 6장 30절), 내가 날 증거해도 나는 거짓말 아니다. 왠고 하니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한다”(「요한복음」, 5장 30절) 말하자면 ‘내가’, 이 인간적인 ‘내’가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이니까, 그래도 능히, 얼핏 보면, 너무 자신 있게, 교만하다고 하리만큼, 겸양이 없지 않은가 하리만큼 일인칭을 자주 쓰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예요. 이게 정말 정신병자든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확실히 무슨 자기 양심보다도 더 큰 것을 경험했든지, 자기 양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지, 아무리 덕이 있어도 '내가’ 그러는 사람은 없어요, 예민한 양심이 있으면.
자기 양심보다 더 큰 것이 뭐가 있어요? 하나님이지. 그러니까 하나님을 직면했든지, 그게 ‘나’ ‘나’ 그러는 거예요. 그게 이제 다른 데도 그렇지만「요한복음」에는 아예 “내가 이럴 거다, 내가 저럴 거다” 하는 그 ‘내가’ 아주 유명한 말이에요. 차례 차례 쳐보세요. 얼마나 힘있게 그걸 말했는지. 그러니 우리가 깊이 “어떤 심정에서 그러나” 그걸 그려야겠는데, 그런 걸 감안하고 볼 때에 그중에 하나가 배반을 했는데, 이게 뭐냐?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끝까지 구하려고 그랬는데 어찌 네가 배반을 하느냐! 그러니 그 속이 어쨌겠나? 그래서 아마 “내가 지금 마음이 산란해, 안타까와 도무지 못 견디겠다”(「마태복음」, 26장 38절:「요한복음」, 13장 21절)고 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연약한 사람처럼 그러는데, 그러고 나서 한 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인데, 발 씻는다는 것은 뭣을 의미했을까? 날더러 해석을 하라고 한다면 열둘 중에 하나가 배반을 하면 열둘이라고 하는 완전수로 했던 이 공동체가, 깨지는 겁니다. 열둘로 해서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엮었던 이 공동체가, 하늘나라의 모델 케이스로, 표본으로 만들었던 이게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그대로 가실 수는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하든 이걸 재건해놓고 가야지. 그래 그 재건 행동이 그 발 씻는 행동이라 그 말이오. 그래서 “내가 선생이 됐으면서도 너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니까 너희도 이렇게 행하라”(「요한복음」, 13장 13~15절) 했어요. 세상에서 뭣땜에 늘 깨지느냐? 뭣 때문이냐? 내가 ‘나’라는 거 때문에 깨지지. 그러니까 너희 가운데서는 그런 것 있어서는 안된다. 내가 너 선생이라 그러고, 주라 그러면서도 친히 발을 씻어줬으니까, 너희도 피차 이렇게 해라. 그거예요.
열둘로 가는 건데 이제 가롯 유다 하나가 배반을 해서 낙심이 나, 낙심이 나게 되지 않았어요? 그거는 뭐 추측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날 더러 그러라면 그렇게 말해요. 그래 이제 다 이렇게 앉아서 저녁을, 그것도 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 아니오? 우리는 뭐 그 성찬식을 지키지 않습니다만, 개신교에서도 세례하고 성찬식하고는 다 지키고 그러는 데, “이것이 내 몸이다, 내 피다” 그랬는데, 그럴 때 그 말을 예수님의 이걸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내 몸이다” 할 때는 마땅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그걸 생각 하셔야 돼요. 또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을 거다”(「요한복음」, 3장 19절) 그럴 때에도, 제자들도 그 뜻을 몰라서, 그 봄에 훌륭하니까 “아, 이 훌륭한 성전을 보시오” 하니까, “그래? 이걸 헐어라, 내가 사흘만에 지을 거다”(「마가복음」, 13장 1~2절) 하니, 사람들이 “이걸 사십륙 년 만에 지은 것인데 당신이 무슨 재주로 사흘 만에 짓겠단 말이오?”(「요한복음」, 3장 20절)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을 했지만 제자들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까 “아, 이건 자기 몸을 가리킨 것이다. 죽은 후 사흘 만에 다시 산다”는 걸 말씀하신 것이다 하고 알게 되었는데 그 속에는 응당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교회’,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몸은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되는 새로운 공동체 그것이 몸이란 걸 알아야 합니다.
차차 자라서 인류 전체에까지 가야 할 것이지만, 우선은 열두 사람, 열두 사람 중에서 하나 빠지고 열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에다가 전 심령을 부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다를 보고 “네 할 것을 해라” (「요한복음」, 13장 27절) 해도 제자들은 뭔지 모르잖아요? “너 열둘 중에 하나는 날 저버릴 거다” 그러니까, “야,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니” 하고 놀라서 베드로가 요한에게 물으라고 했고, 그래 예수님이 “떡을 찍어주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을 하고는 “어서 너 할 것을 해라” 그랬어요. 그런데 이건 좀 생각을 해봐야지 돼요. 무슨 의미로 “어서 너 할 것을 해라” 그럴 때 한마디 한마디는 보통 말 로, 우리말 막 나가는 대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거는 이제 맛을 보도록 해요, 한 번만 아니고. 이때 이 말은 무슨 의미로 하셨나? 말 밖에 있는 그 말은 무슨 뜻일까? 맛을 봐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 유다는 나가버리지 않았어요?
유다가 쓱 나간 다음부터는 이제 말씀하시는 게 달라져요. 그때까진 고민해서 죽을 지경이라 그러셨지만, 이제는 막혔던 물이 둑이 터져서 “쏴아” 하는 그런 모양으로 “아버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오. 또 이걸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영화롭게 해달라”(「요한복음」, 17장 1절) 그거는그 "답답하다”고 하던 거기 비긴다면 참 시원해요. 그건 이 사람으로 생각 한다면 비통하기 짝이 없는 거지만, 나갈 사람은 나갈 대로 해놓고, 내부가 재단결해서, 두 번째 다시 살아난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어서 그야말로 자기를 종으로 철저히 ‘무’의 지경으로 돌아가는 태도를 가지고야만 공동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걸 보여주시고, 말로 하시는 걸 하면 “내가 너희에게 새 생명을 준다”(「요한복음」, 13장 34절) 그러지 않았어요? 새 생명이 뭐예요? 옛날부터 있던 건데 왜 새 생명이라 그래요? 사랑하라고? 그 사랑이란 거는 늘 있는 “온 세계를 사랑하라” 는 그 사랑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 핵심끼리 모인, 이걸 서로 사랑하란 말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과 차별대우 하자는 말인가? 그건 물론 아니지요. 나중에는 우주 전체에 다 적용되는 거지만, 그 원리가 살아나려면 우선 요것이 사랑으로 하나가 돼야 돼요. 사랑 안하고는 하나가 될 수 없어요. 그게 새 계명을 줬다는 거예요.
그건 거듭거듭 그 말을 하잖아요. 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줬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걸 지켜라 그러면서, 부디부디, 이담에 간 담에도, 승천할 때도 “예루살렘은 떠나지 말고”(「사도행전」, 1장 4절) 예루살렘에 있으면 죽을 위험밖엔 있는 게 없어요. 이제 예수를 죽여버린 다음에, 제자들도 없애버리려고 하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을 합해서 여기서 기도해라”(「사도행전」, 1장 4절), 그래 제자들이 그대로 복종하는 거고. 그러한 담에야 이제 그 오순절날 성령을 받아서 새 교회가 출발하는데, 그때까지 준비해요. 한주일 전에 오셔서,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서 기름 붓는 거(「요한복음」, 12장 1〜8절),그것도 다 의미가 깊은 거예요. 그리고 마음의 태도가 다결정이 돼가지고, 이제 최후로는 이 깨진 공동체에 다시 생명을 넣어서 단결을 시켜놓고는 “내가 가는 게 좋다 사실은 좋다.”(「요한복음」, 16장 7절) 왠고 하니, 생명의 원리가, 아무리 친한 선생과 제자 사이라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직접 주는 수는 없어요. 생명을 자기가 이렇게 체험하게 생겼지.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교육방법에서 알거든 마지막까지 나갈만큼 해준 담에는 제가 깨닫도록 해요. 그러니까 아주 힘든 길이에요. 또 그러니까 믿음의 길이에요. 대신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베드로를 그렇게 사랑하여도 베드로가 깨달아서 되는 자리를 가기를 기다렸지, 기다리면서 믿었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야 “네가 누구보다도 날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장 15절) 그거는 베드로가 먼젓번에 세 번씩이나 몰랐다고 했던 그 수모를 씻어주는 거예요. 그거 아니었다면 씻어질 리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세 번씩 물었을 거예요. 두 번 세 번 비난하기를 “나는 그 사람 몰라, 나는 그 사람 상관없다”(「요한복음」, 18장 17절, 25절). 이제 까지 칼을 빼들고 “나는 죽어도 배반하지 않는다”(「요한복음」, 14장 37절) 했던 입으로 모른다고 말했을 때, 그러고 나서 “밖에 나가서 통곡을 했다”(「마가복음」, 14장 72절:「마태복음」, 26장 75절;「누가복음」, 22장 62절) 그랬는데, 베드로의 마음이 어떻게 됐겠나 생각을 해보시오. 그것, 그 아픈 맘을 가지고는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거요. 아무리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고 그랬다고 하더라도....... 제 속에서 자신이 생겨야 하는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놓고, 마지막에 디베리아 호숫가에서 세 번씩이나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장 15절) 세 번씩이나 물었어요. 세 번씩 하는 거는 너무너무 미안해서 다 죽었는데, 그러셨지만 세 번씩 세 번씩 반복하는 거는 세 번씩이나 자기를 부정했던 그 상처를 씻어주시려고 그러지 않으셨나 몰라요. 뭐 꼭 그런 생각했는진 모르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보면 거기 또 재미있는 게 우리 마음에도 살아올라오는 게 있잖아요?
그러고 난 담에는 이제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6절) 부탁 하고 갔어요. 부탁을 했는데, 사실은 마지막 그 장은 이 복음서 본래 쓴 사람이 쓴 것 같지 않고, 후의 사람이 넣지 않았나 그러는 말도 있다고 그럽니다만, 하여간 우리는 작자는 누구였는지보다는, 이런 걸 맛을 보는 게 좋은데, 그담에 또 있는 것은 그 복음서 쓴 이가 자기가 그 사람인지는 모르지요. 사랑하는 제자, 그 사람이 뒤따라오는 걸 보고 “선생님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요한복음」, 21장 21절) 그렇게 물으니까 그 대답이 훌륭하고 놀라운 대답이에요. “그 사람이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둬둔다고 해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어?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21장 22절) 했어요. 이걸 보면 그렇게 했어도 아직도 베드로가 채 뭣이 못된게 있습니다. 그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거 언제 다른 사람 생각할 여지 있어요? 그리고 났으면 그저 죽음이 있을 뿐이고, 내가 있을 뿐이지, 무슨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있어요? 하지만 그래야 비로소 그게 참 공동체가 될 수가 있잖아요? 나는 이럭하지만 저 사람은 어떠한가 하는 호기심이 있으면, 네가 크냐 내가 크냐 하는 호기심이 또 살아날는지도 모르고, 합이 된다 안된다 그렇게 될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주 마지막에 그런 것까지 하시려고 이제 그러는데 베드로가 묻기를 “저 사람 어떠렵니까” 하니까 “그건 몰라. 그 사람 나 올 때까지 있도록 한다고 해서 상관이 있어? 너는 너지. 너는 나하고 직결되는 거지. 하나님하고 직결되는 거지, 남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태도를 아주 분명히 하시느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다 보통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가 믿음의 길을 따라간다고 하는데도 어느 때 그런 질문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고, 거기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는 것도 있고, 그럴 수가 있어요.
그걸 한번 생각해보시라고 지적을 합니다만, 그런데 이 제자들은 역시 모르니까 “저 사람은 죽지 않는데”(「요한복음」, 21장 23절) 그랬어요. 그런 말이 아닌데, 예수님이 그런 의미로 한 것 아닌데. “이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나. 너는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는데 따라 오려면 따라오는 거지, 내가 맡겼으면 하는 거지, 왜 이 사람에게 묻고 그러느냐” 그런 말씀 한 것은 아니지만, 그 기분을 우리가 해석해본다면 그런 게 뒤에 있지 않나, 그런 걸 생각해보시라 그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비극적으로 예수님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담에 그게 알이 들어가지고 새싹이 나는 모양으로, 그 새 공동체가 살아서 나올 수 있는 준비가 된 겁니다. 그래 주로 공관복음에서 보는 것은 알아보기 쉽게 나타나시는 걸로, 예수님의 능력이 이런 것이 있다 하는 걸로 믿음에 끌리게 하는 데, 그건 그래서 좋은 거고 이쪽에서는 내부의 생각하는 것을, 주고받고 하는 그 점을 알려주는데 그 점이 좋은 점이오.
그럭하고 보시면 이제 이 앞으로 있는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에 있어서의 우리의 할 일, 또 세계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가 할 일,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나올 수 있습니다.
1981년 8월 4일 연곡에서 퀘이커 모임 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친우회보 1982 여름호
저작집30; 21- 267
전집20; 19-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