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의 「철길의 유령」 평설 / 조대한
철길의 유령
강인한
이리(裡里)에서 오산(五山)까지 3.4 킬로미터
나도 걸을 만한 거리였다.
자갈 많은 신작로엔 미루나무들이 그림붓처럼 서있었다.
밤에도 걸을 수 있는
이리에서 오산까지 철길이 좋았다.
콜타르 칠한 침목은 또박또박 내 걸음에 응답해 주고
6학년의 밤길에 레일은 내 동무였다.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고 때리며
조개탄 같은 자갈들이 침목과 침목 사이에서 비죽거릴 때
문득 뒤돌아본 내 눈앞에
시커먼 미카!
눈보라 속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그때 나는 열두 살,
지금의 나는
예순 해도 전 그 겨울밤 철길을 걷는 유령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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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라워리 감독의 「고스트 스토리」라는 작품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령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주름진 흰색 천, 눈에 뚫린 검은 구멍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대사는 거의 없으며 주인공이 연기력을 뽐낼 수 있는 길은 천의 실루엣을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이 독특한 유령은 자신이 기억하는 어떤 과거와 공간에 매여 있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들어서고, 심지어 집이 허물어진 후에도 유령은 시간을 초월해 그곳에 남는다. 그는 관계에 묶여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발을 디뎠던 대지에 붙잡혀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위 시편 속의 ‘나’ 역시 열두 살의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유령’이다. 그 과거의 장면은 “이리에서 오산까지” 이어진 철길을 따라 걸었던 “6학년의 밤길”로 그려진다. 그것이 무작정 좋았던 까닭은 그림붓처럼 서 있던 미루나무, 큼지막한 자갈들, 가지런히 뻗은 레일의 풍경이 선사하는 생경한 감정 때문이었겠지만, “또박또박 내 걸음에 응답해 주”는 침목의 울림과 질리지 않고 반복되는 발의 감촉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 겨울밤 철길”의 걸음에 묶여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시인은 자조적으로 고백한다. 아마도 소년이라는 정체성에 부여되었던 문학적 축복은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예찬과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문득 뒤돌아본 내 눈앞에” 쏜살같이 다가온 “시커먼 미카” 기차처럼 내게 허락된 시간은 끝나버렸다. 이 유령의 삶을 추동하는 것은 이미 도래한 과거의 기억들이다. 그렇다면 실체 없는 허깨비처럼 늙어버린 나의 삶에 남아 있는 가능성이란, 그저 이전의 선명했던 기억을 반추하며 자위하는 것일 뿐일까.
‘유령론Hantologie’을 주장했던 데리다는 과거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종의 임무를 위해 맡겨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 있다. 햄릿에게 맡겨졌던 선왕-유령의 당부와 복수의 임무를 떠올려보자. 햄릿이 강박적인 과거의 목소리에 얽매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유령의 기억을 스스로 실현하느냐 또는 실현하지 않느냐의 선택에 따라 그는 전혀 다른 앞날을 맞이해야 했다. 이미 일어난 과거이지만 미래는 물론이고 과거의 인식이나 평가(선왕⸳백부⸳왕비 등에 대한)까지 뒤바꾼다는 점에서, 그것은 적극적인 잠재태에 가깝다. 이 철길의 유령들은 단순히 뒤를 돌아보고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것이 아니라, 종착역이 결정되어버린 현실에 불현듯 출현하여 선조적인 시간의 철길을 뒤집는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지금은 이름이 사라진 이리역과 흔적도 남지 않은 오산역 사이의 밤길을 증명하는 것은 그곳을 디뎠던 내 발의 감촉과 유령처럼 사라지지 않는 나의 기억뿐이다.
조대한(문학평론가), 《현대문학》 2019년 3월호, 시 격월평 「황혼에서 소년에게」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