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빈자리 / 이팝나무
‘파이팅’하라는 문자를 보낼까 말까. 시험이 시작 되었겠다. 예상한 문제가 나왔을까? 일어나면서부터 마음이 쓰인다. 자꾸만 시계에 눈이 간다. 어제는 전문직 시험이 있는 날이다. 한 번도 관심 가지고 이 날을 기다려 본 적도 없었는데 올해는 다르다. 우리 학교 선생님 한 분이 그 시험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 왼팔 역할을 하는 연구부장이.
늦은 아점을 먹고 티브이를 보다 보니 오후 한 시가 넘었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시험을 끝내고 남편과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란다. 그녀 특유의 조용한 목소리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다. 잘 봤느냐고 물으니 세 문제 중에서 예상한 것은 한 문제뿐이라서 나머지는 그냥 썼단다. 자신 없는 목소리다. 첫 술에 배부르겠냐며 2학기에 또 보면 되지 않느냐는 말로 위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해에 이 학교에 왔으니 올해로 삼 년째다. 나와는 띠 동갑 가까이 나이차가 난다. 매사 조용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녀와 시끄럽고 덜렁대는 나는 여러모로 다르다. 발자국도, 노크 소리도 워낙 조용해서 나는 안 보고도 그녀가 왔음을 짐작한다. 일의 스타일이나 행동은 다르지만 생각은 비슷해서 지난 3년간 많은 일을 함께했다. 전남교육연수원에서 공모하여 추진하는 현장 맞춤형 연수도 3년째 했다. 사전과 사후 협의회, 수업 공개 방식도 새롭게 정해 자리 잡았다. 매주 화요일 전문적 학습 공동체를 두 팀으로 나눠 효율적으로 이끄는 일도 그녀가 있어서 가능했다. 그뿐인가. 기초학력 관련 방과 후 부서가 무려 여섯 개나 운영되고 있다. 계획 세우고 기안과 품의를 올리고, 다른 교사와 공유하는 등 절차가 복잡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일은 자신이 먼저 하면서 후배 교사들을 배려한다. 작은 일도 소통하고 일의 순서를 정리하여 알려주니 동료 교사의 신뢰가 두텁다. 젊은 선생님들보다 연장자라 하여 학년 배정이나 업무에서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기 밥그릇을 못 챙기는 편이다. 나는 그게 보기 안쓰러워서 그래도 된다고,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다독인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한다. 들어 보면 더 좋은 안일 때가 많다.
그녀를 인정한 것은 공개 수업을 보고 나서였다. 수업을 참 잘했다. 평소에 어땠는지 짐작이 갈 정도로 아이들과 호흡이 잘 맞았다. 아이들이 길을 놓치면 짧게 한 마디 던지는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절묘했다. 아이들은 금방 알아듣고 원래의 길로 돌아왔다. 떨어지고 산만한 아이도 마음 상하지 않게 챙겼다. 학급 운영 잘하고, 업무에서도 능숙하니 신뢰가 절로 갔다. 그녀는 그런 내 칭찬에 감개무량해 했다. 알고 보니 그녀도 상처가 있었다. 삼사 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학교는 시스템이 바뀌어 낯설고, 용기 내어 한 수업은 관리자의 질책으로 끝났다. 능력 있는 후배도 많아 자신이 설 자리가 없었다. 이래저래 자존감이 바닥인 채 전입한 상태였다.
우리 학교는 12월 말에 교사들끼리 모여서 1차로 담임과 업무를 정한다. 업무는 일부 조정되기도 하지만 담임은 웬만하면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 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그녀의 업무가 과중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작년까지 맡아 오던 연구, 기초학력, 평가 외에 다른 분이 맡고 있던 혁신 학교 운영까지 배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담임도 교직 생활 19년 동안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1학년이다. 나와 근무하는 동안 느린 학습자 지도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란다. 일을 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눠 할 역량이 충분한데, 그러다가 병난다며 말렸다. 그런데 혁신 학교 근무는 처음이라서 꼭 배우고 싶어서 자원했단다. 작년까지 내리 6년을 맡던 주무자가 올 3월에야 타 학교로 가서 자리가 빈 거였다.
각종 계획 세우느라고 3월 한 달이 얼마나 바빴을까. 어떨 때는 기안이 새벽 네다섯 시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느냐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안 그래도 핏기없는 얼굴이 더 파리하게 보여 짠했다. 집에까지 일 보따리를 싸 가는 날이 허다한 모양이었다. 초등학생, 중학생 두 딸을 키우는 엄마라서 집에 가면 할 일도 많을 텐데, 볼 때마다 미안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 전문직 시험에 응시한 것이다.
처음에는 수석교사를 권했다. 내 주변에 그 일을 하는 지인이 많을뿐더러 올해에도 한 명이 시험에 합격한 걸 보아서다. 가까이서 지켜 본 수석교사의 삶이 일반 교사보다 훨씬 나아 보이고, 당사자들의 만족도도 높아서 도전해 보라고 했다. 그때서야 그녀는 본심을 털어 놓았다. 사실은 장학사가 되고 싶다고. 업무나 인성 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으나 수줍음 많고 남 앞에 서는 일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녀이기에 생각지도 않았던 답이었다. 수업 잘하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선생님은-그녀는 1급 정교사 시험에서 백 점을 맞았다.- 오히려 수석교사가 제격인데, 내 생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그때부터 전문직 시험 공고가 나기를 기다렸다. 최근에 그 시험을 치른 청의 장학사와도 연결해 주었다. 시험의 경향을 알아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들어보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학교 업무를 줄이고, 시험에 정진할 수 있도록 수업만 마치면 조퇴하도록 조치했다. 잘할 거라며 간간이 용기를 불어넣는 일도 잊지 않았다.
오래 전에 나도 전문직 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장학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당시 청의 학무과장(지금의 교육과장)을 하다가 우리 학교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이 자꾸 시험 보기를 강요했다. 나뿐 아니라 선배들 여럿에게도 그랬는데 이제 막 교직 15년이 된 가장 나이 어린 나만 어른 말 대접하는 차원에서 시험을 준비한거였다. 마음이 없으니 준비는 대강했고, 당연하게 미끄러졌다. 떨어졌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장학사는 평일에는 밤 열 시 넘어서까지 초과근무가 일상이고, 휴일에도 일을 해야 업무가 돌아가는 자리였다. 아이 셋을 독박 육아로 키우는 내게는 꿈조차 못 꿀 자리였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다. 일반 학교보다야 근무 시간이 길지만 특별히 인사철이 아니고서는 정시에 퇴근하는 일이 많다. 일과 삶의 조화로운 균형을 권장하는 내용이 공문으로 내려오는 세상이 되었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사는 교사보다 시야를 넓힐 기회도 잦다. 무엇보다 벽지 점수가 없는 교사가 승진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전문직이다.
아마도 그녀는 합격할 것이다. 철저하게 파고드는 평소 성격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시험 이력이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믿음을 준다. 그녀의 인사 기록 카드에 90점 이하의 연수 성적표는 없었다. 마음의 결이 고운 사람을 곁에 두는 건 관리자의 큰 복이다. 능력에 맞게 사람을 쓰고 그 사람이 날개를 달고 날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리더의 역할이다. 아마 그녀가 우리 학교를 떠나면 한동안 허전할 것이다. 업무야 다른 사람이 맡아서 한다지만 하는 일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 주던 강력한 우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벌써부터 그녀의 빈자리가 느껴진다.
첫댓글 글쓰기에서 첫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설렘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선생님 글은 늘 흥미롭습니다. "능력에 맞게 사람을 쓰고 그 사람이 날개를 달고 날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이 말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항상 칭찬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 역시 늘 첫 줄을 고민합니다.
매번 글감 찾기 힘이 들지만 또 이렇게 써 놓고 나면 보람입니다.
그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리더를 만나셨네요. 교장선생님을 만난 것도 그 선생님의 복이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하. 그 선생님을 칭찬한 건데 제 칭찬이 되었군요.
에고 부끄러워라!
'시끄럽고 덜렁대는' 선생님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하하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따듯해서 덩달아 제 맘이 흐뭇해집니다.
무튼, 양선례선생님을 만나는 선생님들은 다 복있는 사람들이에요.
시끄럽고 덜렁대고 꼼꼼하지 못하고.
저 맞습니다. 헤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서 한 번 써 봤습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제가 복이 많은 거지요.
저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랍니다.
그녀의 빈자리가 다른 이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네. 좋은 인연으로 만나 3년을 잘 살았는데 이제 서서히 떠나 보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겠지만 좋은 사람과의 헤어짐을 늘 아쉽습니다.
보통은 인력을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재능이 있는지, 어떻게 연결해 줄 것인지 궁리하는 리더는 드물거든요. 훌륭합니다.
교장 선생님께도 많이 배운 걸요. 칭찬 고맙습니다. 다른 이를 칭찬하고자 쓴 건데 다들 저를 칭찬해서 어리둥절합니다. 하하.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게요. 아이들을 사랑해야 본인도 편하고, 직장 생활도 여유로워지지요. 교단에 계셨으니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짐작됩니다.
인정하고 격려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고 정말 따뜻하고 좋은 교장 선생님이시네요.
선생님이 교회 다니셨으면 전도도 참 잘하실 텐데 아쉽네요.
하하하.
교회 전도요?
교회 다니는 걸 못 보는 남자랑 사는 걸요.
웃음이 절로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