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 훈 "원고지 10장 쓰려면 50장 버려야"
소설 ‘칼의 노래’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작가 김훈 씨가 최근 세 번째 역사소설 ‘남한산성’을 냈습니다.
소설 ‘칼의 노래’가 충성심으로 가득 찬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를 허망함과 싸우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냈다면 소설 ‘남한산성’은 청나라의 진격을 피해서 남한산성에 들어가 47일 동안 비참하게 견뎌 내다가 결국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한 사건, 병자호란을 다룬 소설입니다.
소설가 김훈 씨는 언론인으로 27년 동안 기자생활을 했습니다. 한국일보, 시사저널, 국민일보, 한겨레신문 등 여러 곳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50대에 소설가로 늦깎이 데뷔를 했습니다.
소설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단편소설 ‘화장’으로 이상 문학상을, 그리고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주 절제되고 간략한 문장으로 새로운 문체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한 소설가 김 훈 씨를 6월 21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손끝에서 맴도는 연필의 감촉을 사랑하는 영원한 기계치
▶ 댁이 일산이신데 혹시 오늘 자전거를 타고 오시지는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봤어요. (웃음)
아마 자전거로 오면 한 시간 반이면 올 거예요. 그러나 너무 덥고 교통량도 많아서 그냥 택시 타고 왔습니다.
▶ 운전을 못 하시나요?
운전을 전혀 못 합니다. 저는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계를 못 만져요. 기계를 만지면 기계가 망가져요. 그래서 집사람이 아예 못 만지게 해요. (웃음)
▶ 저하고 비슷하시네요. (웃음)
비디오를 볼 때도 켜고 끄는 것은 우리 애를 시킵니다. 완전히 낙후된 인간이죠. (웃음)
▶ 컴퓨터도 안 하세요?
컴퓨터는 옆에도 가기 싫어해요.
▶ 원고도 연필로 쓰시겠네요?
연필이 워낙 사양 산업이다 보니 요즘은 좋은 연필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심이 물러서 잘 부러지고, 지우개는 하도 지워 대니까 원고 다 쓸 때쯤이면 하얗게 눈이 내려있어요. 단단한 연필과 가루 안 나오는 지우개를 누가 좀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웃음)
▶ 우리 옛날에는 연필 한 다스 선물 받는 게 굉장히 큰 기쁨이었는데....
맞아요. 크리스마스 때면 늘 기다렸죠. 지우개도 옛날에는 딱딱해서 공책도 찢어지고 그나마 없는 아이들은 침으로 지우곤 했어요. 그러면 공책도 찢어지고 손가락도 까매지고 그랬죠.
▶ 잠자리 그림 있는 연필이 참 좋아서 필통에 넣어두면 기분이 좋고 그랬는데 혹시나 생기면 좀 드릴게요.
많이 사다 놔서 오히려 필요하시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웃음)
◇ 나는 뒤로 빠지고 모든 등장인물에게는 정당성을
▶ 요즘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에요. 저도 김훈 씨 팬이라 김훈 씨 작품은 빠트리지 않고 다 읽었어요. 며칠 전에 ‘남한산성’도 읽었는데 읽으면서 굉장히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저도 쓰면서 정말 속상했어요.
▶ 어떻게 이런 나라가 다 있나 싶은 게 너무 속상해서 잠을 다 못 잤는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제 소설은 매우 고통스러운 주제를 다루고 있고, 아무런 희망이나, 꿈이나, 사랑이나, 낭만이나... 많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가치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의 문장은 좀 삼엄하고, 재미없고, 딱딱하고, 거칠죠. 그런 책을 따라와 주는 독자들을 보니까 눈물겹도록 행복한 느낌이 들어요.
▶ 특히 남성독자들이 많이 본다고 하는데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죠? 솔직히 남자들은 책을 잘 사서 보지 않잖아요. 요즘은 여류작가의 책이나 번역 책이 많이 팔리는데 그런 와중에 쉽지 않은 김훈 씨의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남성들이 책을 많이 안 읽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구태여 중년 남성들에게 책 사서 읽으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매일매일 밥벌이에 허덕지덕하고 직장생활 열심히 해서 월급 고스란히 집에 가져다주는 것이 건강한 사회인의 모습일 것이고, 그렇다고 책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닌데 그들이 책을 읽지 못하는 사정을 나무랄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아마도 남자 분들이 세상의 고통이나, 더러움이나, 억울함, 비리, 모순, 치욕...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여성 독자들보다 훨씬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왜 이 시대에 김훈 씨가 그런 소설을 썼을까... 이 시대와 소설의 연관성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
시대와는 상관이 없고 제 마음속에 오래 있었던 소재이고 주제였는데 제 소설을 이 시대와 관련지어서 읽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가령 그것을 FTA와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자주와 독립의 문제, 외세의 문제, 열강의 문제, 그런 것들과 결부시켜서 읽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저의 소설에서 정치적인 외연을 설치하고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작가로서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독자가 자기 식대로 읽는 것에 대해서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죠.
▶ 저는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작가는 글을 쓰다 보면 어느 한 편에 서기가 쉽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쓰게 되고.... 그런데 김훈 씨는 굉장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쓰신 것 같아요.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의 입장도 아니고,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도 아니고...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서로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적대적이고, 반대되고,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애를 썼어요.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고,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은 정당할 수가 있는 것이라는 쪽에 주안점을 뒀고, 그렇게 되니까 저 자신은 뒤로 빠져나가 있었던 것이죠.
▶ 인조임금이 제가 보기에는 무능한 것 같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무능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저는 인조가 결국 거대한 치욕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그 시대를 살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참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인조임금이 선택한 길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죠.
◇ 모순과 대립 속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우리네 삶
▶ 오히려 김상헌의 주장은 쉬울 수가 있는 것 같은데요.
김상헌 대감은 참 고귀하고, 아주 높은 도덕적 덕성을 가진 분이고, 인간 삶의 아름다움, 정통성, 삶의 경건함, 그런 것들의 화신인 것이죠. 그러나 그분은 그 시대가 처한 군사현실, 그 당면현실에 전혀 무지했고, 일부러 그걸 안 보려고 했던 거죠.
▶ 근데 그런 분들도 나라에 필요하잖아요.
그런 분들도 필요하지요. 필요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분들도 역시 필요한 것이죠. 그런 모순과 대립 속에서 사람은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 저는 거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있었는데 왜 청나라가 추운 겨울에 쳐들어왔을까...
그것은 거대한 병력을 이동시켜야 하는데 화포, 대포, 군량, 말, 이런 것들을 다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강이 얼기를 기다렸던 것이죠. 언 강으로 그냥 끌고 오니까요. 압록강을 건너고, 청천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너고, 임진강을 건너고, 예성강을 건너고, 한강을 건너서 들어오는 군대기 때문에 그 강이 얼지 않으면 다 배로 넘어야 하니까 너무 힘들지요. 그리고 군대들은 배로 강을 건널 때 가장 허약해요.
물 위에 떠있을 때 양쪽 육지에서 공격을 하면 도망갈 길이 없으니까 중국군대는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쳐들어온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워낙 추운 데서 살았기 때문에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우리 한국 군인들은 추우면 꼼짝도 못할 테지만 그들은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내려오면 따뜻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 ‘남한산성’을 못 읽으신 분들은 잘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김상헌이 강을 건너면서 사공을 죽였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죽였어야 할까....
사실 그 사공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김상헌은 그를 살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죠. 살려주면 그 다음날 청나라 군대가 와서 강을 건너는데 이 사공이라는 자는 조선 임금도 건네주지만 청나라 군대도 건네주고 대가를 받으려는 사람이니까 김상헌은 살려둘 수가 없는 입장이죠. 그렇지만 사공으로써는 그 사람 칼에 맞아 죽을 이유가 전혀 없는 거죠. ‘나는 내가 살던 자리에서, 내 직업이 사공이니까, 건너가겠다는 사람 건네주고, 그 삯을 받아서 살겠다.’ 하는데 죽을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 백성이라는 것은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네요?
백성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죠.
▶ 그 사람이 어차피 강을 안 건네줘도 어차피 청나라는 건너오게 마련인데 한 사람을 왜 죽였을까요?
그 사공이 강을 인도하지 않으면 청나라군대는 들어 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얼음이 깨지니까요. 단단하게 언 얼음 쪽으로 군대를 인도해 주는 것은 전문가인 사공만이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 ‘칼의 노래’는 칼 같은 문장으로, ‘남한산성’은 한발 물러선 채로
▶ ‘칼의 노래’를 한 달 반 동안 쓰셨다고 들었어요. ‘남한산성’은 얼마 만에 집필하셨나요?
7개월 걸렸어요. 너무나 힘들고, 피곤하고, 매일매일 허덕지덕했죠. 내용이 절망적이라 너무나 힘들었어요.
▶ 작가도 매일 그렇게 쓰자면 힘이 드는군요.
아! 그럼요. (웃음)
▶ 보통 하루에 원고를 몇 장이나 쓰시나요?
저는 일을 많이는 못 해요. 일을 오래해도 하루에 10장 이상은 못쓰고 200자 원고지 한 5장, 어떤 때는 3장, 어떤 때는 전혀 아무것도 안 되는 날이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9시쯤에 책상 앞에 앉아 연필을 들고 시작하려고 하면 오늘 일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내가 알아요. 오늘은 일이 안 되는 날이다 싶으면 결국은 안 되죠.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안 돼요. 그런 날은 그냥 나가서 놉니다. (웃음) 자전거 끌고나가서 강가에 가서 막 놀아야 해요. 오늘은 되는 날이다 싶으면 밤늦게까지 앉아서 10장 정도를 쓰지요.
▶ 되는 날 10장 정도를 쓰시는 거예요?
10장을 쓰고 나면 지우개 가루가 눈처럼 책상에 가득 쌓여있어요.
▶ 10장을 쓸려면 몇 장을 버리셔야 하나요?
10장을 쓰려면 수도 없이 버려야죠. (웃음) 한 50장 이상은 버려야죠.
▶ 제가 굉장히 부끄러워지네요. 저도 가끔 잡문을 쓰는데 저는 앉아서 한두 시간 만에 20장 정도를 쓰거든요. (웃음)그렇게 하시니까 그런 문장이 나오는 것이군요. 문장 하나하나를 보면서 저는 어떻게 이 작가는 문장을 이런 식으로 쓸까... ‘남한산성’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날씨를 비롯해서 청나라군대의 조여 오는 모습... 너무 생생한 표현과 긴장에 깜짝깜짝 놀랠 정도였거든요. 이번에는 문체는 ‘칼의 노래’ 하고는 좀 달랐던 것 같아요.
‘칼의 노래’보다는 문체가 조금 완만하고 여유가 있다고 느꼈어요. ‘칼의 노래’는 그야말로 칼 같은 문장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이번 ‘남한산성’의 문장은 조금 미완된 것이지요. 한 발짝 물러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작가의 전략이지요. 언어에 대한 작전인 것이죠.
이번 소설은 어떤 문체로, 어떤 리듬으로, 어떤 호흡과 어떤 박자로 써나가겠다는 사전 전략이 있어야만 쓸 수가 있는 것이에요. 저는 전략이 없이는 쓸 수가 없어요.그리고 거기에 그림, 영상이 있어야죠. 논리가 있어야 하고, 메시지가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요소를 짜 맞춰서 비로소 한 줄 한 줄 쓰는 것이죠.
그런데 문장에 리듬이 잡혔구나, 할 때도 그림이 있어야 하잖아요. 독자가 읽어보고 떠오르는 그림, 영상, 상상 속에서요. 그것이 확보가 안 되면 또 나가서 놀아야죠. (웃음)
▶ 그러니 그게 얼마나 힘든 작업이겠어요...
힘든 작업이지만 산다는 것이, 누구의 삶이든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 하면서 참고 살아요.
◇ 작가에겐 괴로운 모호한 비논리와 애증의 우리말
▶ 저희도 연극을 할 때 분석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러면서 가끔 우리말이 답답할 때가 있어요. 표현이나 그런 것들이요.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연극의 말로는 소련어가 좋다는 얘기가 있어요.
들어보니 그럴 것도 같네요. (웃음)
▶ 글을 쓰시다가 우리나라 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가령 잘못됐다거나 표현하기 어렵다거나 하는...
한국어는 사랑과 미움이 겹쳐있어요. (웃음) 왜 이게 이렇게밖에 안 되나 싶기도 하고요.
▶ 영문학을 하셨는데 영문학과 비교하면 어떠세요?
한글 문장의 문제는 조사에 있어요. 가령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에 -는, -를을 넣어야 하죠. 우리는 모든 사유와 언어의 논리작용이 조사가 빠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한국말을 읽는다는 것은 조사를 읽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은 조사를 운용하는 것이지요.영어로 ‘I love you!’ 하면 조사가 없잖아요. 동사가 목적어를 바로 지배해 버리니까 선명한 논리구조가 떠오르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에서 -는과 -를을 안 읽으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거죠.
그것이 자꾸 조사에 걸리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우리 모국어의 힘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 모호함이라든지, 약간 비논리적인 부분이 우리 모국어의 폭과 넓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것은 매우 성가시고 괴로운 일이에요.
▶ 리듬 면에서는 어떤 것 같으세요?
리듬은 우리말 자체로 리듬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가령 옛날의 4.4조처럼요. 말 자체로 리듬을 만들어 낼 수가 있지만 그러한 리듬은 이미 우리 시대에서 약간 뒤떨어져 있는 리듬이지요. 옛날 고문서에 나오는 리듬을 가지고 우리는 현대의 사회를 말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죠. 우리의 리듬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현대 문장에 맞게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죠. 긴 문장, 짧은 문장과 단어 자체가 갖는 고유한 리듬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 어휘들을 잘 골라서 배열할 수밖에 없지요.
◇ 한문과 영어를 잘해야 한글도 잘한다
▶ ‘한문이 없이는 우리말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어요.
저는 한문을 아주 좋아해요. 한글을 잘 쓰려면 한문을 잘해야 하고,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를 하지요. 어떤 나라 말이건 언어가 지향해야 할 명석성과 그 논리성을 알 수 있게 되니까 한문을 잘 공부하고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젊은이들에게 늘 말했어요. 그런데 별 반응이 없더군요.
▶ 애들이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영어를 그렇게 열심히 몇 십 년씩 가르치는 나라인데 그렇게 영어를 못해요. 그게 참 이상해요. 어렸을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죽어라고 영어를 가르치잖아요. 그런데 끝까지 영어가 문제가 되잖아요. 일본에 갔더니 그들도 열심히 영어를 하는데 그다지 영어를 잘하는 삶들도 아니고 발음이 안 되고 그러더군요. 우리도 영어를 매우 못하는 민족에 속하는 것이지요. 어렸을 때부터 20년 가까이 가르치는데 그걸 그렇게 못 할리가 없을 텐데... 그것은 아마도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더라고요.
◇ 삶이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다!
▶ 저는 김훈 씨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우리말들과 잘 쓰지 않았던 말들을 어떻게 그렇게 찾아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고 하셨는데 좀 풀어서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인간의 삶이나, 인간의 역사나, 인간 공동체 현실, 그것이 영광과 자존만으로는 성립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에는 치욕과 굴종과 비열함, 더러움, 억압, 그런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것이지요. 저는 영광과 자존으로만 성립된 역사라는 것은 거짓의 역사라고 생각을 했어요.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인간은 그 틈바구니에서 결국 지지고, 볶고, 고통 받고, 또 사랑하고, 절망하고, 또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그러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치욕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 영광과 자존으로만 성립된 역사는 거짓의 역사
▶ 사실 저는 주화파인 최명길의 편에서 ‘남한산성’을 읽었어요. 젊었을 때는 척화파인 김상헌 쪽이었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래도 살아야지요. 그리고 치욕이라는 것을 우리가 그때 처음 당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명에 사대한 것도 치욕 아닙니까? 꼭 명이 아닌 청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만이 치욕인가요?
명은 그전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크게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명에 대한 우리의 사대주의는 사대라기보다는 그것이 정통성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정통, 오소독스(正統, Orthodox)한 것은 바로 거기에 있었고 청이라는 것은 명을 뒤집어엎고 나타난 신흥세력이고, 야만인이고, 오랑캐고, 도시 부랑 무식하고, 상대 못 할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청에게는 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 그전에 고려 때 몽골에 종속됐던 것은...
그것은 몽골의 군사적 힘에 철저히 짓밟혀 버렸던 것이죠.
▶ 인조가 결국 삼전도에서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지요?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에다 세 번 댔어요. 아홉 번을 이마를 땅에다 비빈 것이죠. 그런 예법을 청이 강요를 했다는 거예요.
▶ 그리고는 그 이후로 청의 지배를 받았던 거죠?
청에 말하자면 주권을, 주권의 상당부분을,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청에 갖다 바치고 사실상 청의 속국이 되었다고 해도 별 하자가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청 이외의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기로 했으니까 외교적 주권, 군사적 주권, 정치적 주권을 포기한 것이죠. 그 이외에 곡물이나 여자를 바치고 그런 것은 열거하지 않다 하더라도 정치, 외교, 군사적인 주권을 포기한 것이죠.
▶ 그 작품을 쓰시면서 남한산성을 얼마나 많이 가보셨어요?
남한산성을 여러 번 갔어요. 혼자 어슬렁거리고 비 오고, 눈 오는 날 혼자 비통한 슬픔을 안고 성벽을 헤매고 그랬죠. 눈 맞으면서요... 그때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겨울에 가봐야 해요. 눈 많이 올 때 가면 참 그때 이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때 어떠한 애국심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인지... 그들은 무슨 희망을 가졌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 참 갑갑하죠.
◇ 언어와 무기 사이에서 삶의 일상성을 상징하는 대장장이 서날쇠
▶ 조정이 떠나간 빈 남한산성 안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일상을 새롭게 시작하는 대장장이 서날쇠를 보면서 김훈 작가가 아마 그 사람 편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아! 그건 작가 비밀인데.... (웃음)아마 제가 서날쇠의 편이 아니라고는 말하기가 참 어려울 것 같아요.
▶ 대장장이 서날쇠는 어떤 상징인가요?
성 안에서는 우리는 갇혔잖아요. 성안에서 우리는 주로 말을 많이 했어요. 말싸움을 한 거죠. 오직 말, 말로 서로 치고받고, 지지고 볶고, 별말을 다 하잖아요. 어떤 자는 싸우자, 어떤 자는 싸우지 말고 항복하자, 어떤 자는 오늘은 싸우자고 했다가 내일은 항복하자고 하고 또 어떤 자는 어떤 말도 안하고.... 성안은 별의별 말들이 난무하는 말의 세계인 것이죠.
그리고 성 밖은 청나라군대가 포위한 무기의 세계인 것이죠. 말의 세계와 무기의 세계 사이에서 날쇠는 연장을 가진 사람이에요. 연장의 세계인 것이죠. 연장이라는 것은 생활의 도구에요. 평화의 도구고, 논밭을 갈고, 집을 짓고, 그런 거잖아요.저는 연장을 지금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날쇠는 연장으로써 그 무너진 세계를 다시 일구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생활인이죠.
▶ 속국이 되더라도 생활을 이어가는....
어쨌든 살아가고 농사를 다시 짓지요. 그 폐허에다가 다시 봄 농사를 시작하고, 거름을 날라다 뿌리고, 항상 연장을 잘 만들고... 연장을 닦고, 조이고, 잘 기름 치는 그런 인간으로 그려냈던 것이죠. 저는 서날쇠의 편인지 어느 편인지 말하기가 참 어려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는 서날쇠처럼 연장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웃음)
▶ 연장으로 뭘 하세요? 기계도 못 다루시면서...
보는 것이죠. (웃음) 연장 중에 제일 아름다운 연장은 치과에 있습니다. 치과에 가보면 여러 가지 섬세한 펜치, 드라이버 같은 게 있잖아요. 금속 공예품으로써 말에요.
▶ 그 연장은 무섭잖아요. (웃음)
작고 예쁜 것이 많아요. 그래서 집에 갖다놓고 보려고 하나 달라고 했더니 비싸다고 하더군요.
▶ 직접 땅을 갈고 그런 일은 안하세요?
젊었을 때는 좀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연장을 걸어놓고 보기만 해요. 연장을 보면 삶에 대한 희망과 평화에 대한 꿈이 거기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연장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이죠.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땅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더 좋은 세계로 바꿔나가는... ◇ 언어의 세계, 무기의 세계, 연장의 세계
▶ 무기는 포함 안 되는 거죠?
무기는 세계를 부수는 거죠. (웃음)연장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녹슨 호미라 할지라도 인간의 꿈이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구석기 시대부터 그와 비슷한 연장을 우리가 쓰면서 살아왔잖아요. 비록 돌로 만든 것이지만요. 그래서 날쇠라는 인물에 저의 그런 꿈을 투영했던 것이죠.
▶ 거기다가 부모 잃은 아이까지 데려다 키운다고 하는 것은...
남한산성에서는 오직 날쇠만이 어떤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데는 희망이 없어요.
▶ 임금이 나가서 그렇게 청에 머리를 조아리는 와중에 아무도 자기 목숨을 끊는 대신들은 없더라고요. 일본은 할복도 하고 그러는데 문화적인 차이일까요?
김상헌이 죽으려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실패했지요. 그분은 정말 자결을 하려고 그랬을 것 같아요. 워낙 뜻이 지엄한 분이기 때문에 그 치욕을 볼 수가 없었겠죠. 그래서 죽음으로써 항거할 생각이 있었는데 결국 미수에 그쳤죠.
그리고 두 젊은 신하가 인질로 가기를 자원하잖아요. 그 이외에는 현장에서 자결하거나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이죠. 일본 사무라이 같으면 다 자결을 했겠지만 제 생각은 문화의 차이도 차이지만 자결하는 쪽을 편 들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람은 또 살고 봐야 하니까요.
▶ ‘칼의 노래’도 역사소설이고 ‘남한산성’도 역사소설인데 앞으로 또 다른 역사소설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두 소설 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인데 많은 분들이 현대, 당대의 의미를 부여해서 읽고 계시더군요. 저는 앞으로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그만 쓰려고 합니다. 내 당대의 삶의 모습들, 나의 시대, 우리가 살아온 시대에는 성취와 많은 좌절, 그리고 시련이 있었잖아요. 그 속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살았는데 그런 얘기들을 써볼 생각이에요. 그런데 제가 잘 쓸 수 있을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 자전거는 나의 취미이자 밥벌이 수단!
▶ 얘기를 조금 바꿔볼까요? 자전거는 언제부터 타시기 시작하셨어요?
저는 어렸을 때 자전거를 못 탔어요. 자전거가 없었죠. 제가 초등학교 때는 자전거가 매우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때 가정환경조사서를 쓰는데 자기네 집 재산을 다 써야 되요. 그러면 피아노, 전화, 냉장고, 자전거... 있는 것에는 동그라미를 그렸어요. 저는 자전거에 동그라미를 그릴 수가 없었고 집에 없으니까 자전거를 잘 몰랐어요.
10년 전인 제 나이 50에 일산에 이사를 와서 자전거를 처음 탔는데 거긴 도로가 좋잖아요. 자전거를 처음 탄 날 깜짝 놀랐어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이렇게 좋은 것을 모르고... 나는 여태껏 헛 산거다 싶었죠. (웃음)그래서 앞으로는 자전거만 타면서 살아야지 하고 결심을 했어요. 집사람에게 이제부터 나는 자전거만 타면서 살겠다고 했더니 저더러 배달업을 할 거냐고 하더군요. (웃음)자전거를 타고 글 쓰고 다니면서 살면 되니 걱정 말라고, 밥벌이는 하겠다고 그랬고 진짜 그걸로 밥벌이를 했어요. ‘자전거 여행’을 써가지고 집사람과의 약속을 지켰죠. 그리고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을 다 뽑았어요. (웃음) 그리고 돈이 남아서 새 자전거 한 대를 더 샀죠.
▶ 비싼 자전거를 가지고 계시다면서요?
자전거가 좀 비싸요. 처음에는 쌌는데 그게 비싸다고 저를 욕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60살인데 평생 자동차 한번 사지 않고 밤새고, 야근하고, 노동해서 산 건데 그 정도를 왜 눈감아주지 못하는지... 그리고 생업의 수단이고, 밥벌이의 도구인데 좋은 거 타야 하잖아요.제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안다면 그렇게는 얘기 못 할 거예요. 앞으로 좀 더 책이 잘 팔리면 좀 더 좋은 자전거를 사려고 해요.
▶ 자전거가 비싼 것도 있군요.
자전거가 점점 좋은 게 나와요. 점점 좋은 것을 만드니까 나 같은 사람이 힘들어져요. 한번은 최고로 좋은 자전거를 동네 사람이 가지고 나왔기에 5분만 타보자고 했는데 멀리까지 가서 30분 만에 왔더니 자전거를 가지고 간 줄 알고 화가 났더라고요.
▶ 아는 분이었어요?
모르는 사람이었죠. (웃음)그런데 몸에 짝 붙고 진짜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점점 좋은 것을 사게 되지요.
▶ 얼마나 비싼가요? 자동차 값 되는 것도 있나요?
자동차 중간치 값 정도는 되지요. 자전거라는 것은 부속이 다 귀금속 같아요.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몸에 직접 닿는 기계들이기 때문에 훨씬 더 정교하게 만들어야 하지요. 몸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 많이 타실 때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타셨어요?
많이 탈 때는 하루에 220㎞씩 타고 다닌 적도 있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까지 타는데 그렇게 무리한 거리는 아니에요. 전에는 아주 먼 장거리도 다니고 그랬죠. 소백산 노령산맥을 넘어 다니고 그랬어요.
▶ 혼자 다니세요?
저 혼자 다닐 때도 잦았는데 제가 같이 일하는 카메라맨이 있어요. 그 사진기자 후배와 겨울에 같이 다니고 그랬죠.
▶ 겨울에 위험하지는 않아요?
위험하지는 않아요. 겨울에 노령산맥 갈 때는 그 산 밑에서 보면 알아요. 겨울 산이 구름이 끼고, 어두침침하고, 눈이 부슬부슬 오는데 날이 저물잖아요. 그럴 때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안 가야 되요. 마음에 무섭다는 느낌이 있으면 그날은 여관에 가서 그냥 자야 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무섭다는 건가요?
저 산을 넘어서 저편 마을에까지 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 같은 게 있어요. 갑자기 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안 가죠. 그리고 겨울에 산에 들어가려면 많은 장비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 장비 하나하나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아무리 작은 장비라 하더라도 그게 없으면 산 속에서 자전거가 망가져도 고칠 수가 없어요. 장비를 배낭에 매고 가는데 산으로 올라갈 때 장비가 무거우면 정말 더 힘들어요. 정말 버리고 싶고 버려야 갈 수가 있는데 이걸 버리면 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가지고 가야 하죠.
▶ 해외에 가서 타고 싶은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해외는 비행기를 싫어해서... 비행기를 타면 묶어놓고 짐승들 밥 주듯이 갖다 주는데 그게 너무 싫어서 비행기를 안타요. 동경도 가기 싫거든요.
▶ 가족들이 다 미국에 계시잖아요?
그분들은 다 젊었을 때 갔고, 그때는 비행기 타는 게 소원이었잖아요. 그때는 대한항공이 없어서 노스웨스트라고 꼬리에 빨간 칠한 것 타고 미국 가는 것이 다 꿈이었지요. 우리 형제들은 그런 시대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으로 갔죠.
▶ 고백할게 있는데 사실은 김훈 씨 손위 누나인 김연 씨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김훈 씨 어린 시절을 잘 압니다. (웃음)
제가 사석에서는 누님이라고 하지요. (웃음)
▶ 같은 돈암동에 살면서 하루는 그 집에 갔다가 하루는 우리 집에 갔다가 그랬기 때문에 어릴 때 김훈 씨가 늘 책상 앞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나요. 얼굴은 하얗고 운동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굉장히 공부만 열심히 하는 소년으로 제가 기억을 하거든요. 공부는 잘하셨나요?
잘은 못했는데요. (웃음)
◇ ‘허클베리 훈’의 거침없는 유년기
▶ 책상에서 매일 뭐하셨어요? (웃음)
잡서를 읽었어요. (웃음) 그때 읽었던 것 중에 제일 신나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5)’이었어요.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 1876)’ 보다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더 재밌었죠.허클베리가 진짜 반항아이고, 자유인이고, 자유에 꿈을 가진 문제아였죠. 톰은 허크의 하수인 정도였어요. 허크가 시키는 대로 하는 놈이죠. (웃음) 미시시피강에서의 생활(Life on the Mississippi, 1883)이라는 것도 있었고, ‘15소년 표류기’, ‘암굴왕’, ‘괴도 루팡’, 애꾸눈 제크가 나오는 ‘보물섬’...그런 소년 소설들을 읽었지요.
그때 우리가 가난하고, 억눌리며 살았는데 그래도 읽을거리는 지금보다 많았던 것 같아요. 소년소녀문고도 많았고, 대본서도 있고, 학원사에서 나오는 노란 책도 있었고...그때 독서환경은 지금보다 좋았어요.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공부를 하라고 그렇게 몰아대지를 않았어요. 놀거나, 공을 차거나, 산에 가거나, 책을 읽거나, 그냥 내버려 뒀다고요.
◇ 시대 유감! 그 수많은 젊은 좌절의 표상, 아버지
▶ 그리고 저는 기억에 나는 것이 놀러 가면 어머님이 늘 큰 머그잔에 분유를 한잔 씩 타주셨어요.
성당에서 배급받은 분유에요. 성당의 신부님이 미군들에게 분유를 얻어다가 신도들에게 나눠줬죠.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죠?
저희 어머님은 대한민국에서 고생의 고생을 거듭한 수많은 어머니 중에 한 분이시죠. 지금 연세가 90세가 좀 넘으셨는데 미국에서 형님이 모시고 계세요. 다음 달쯤에 한 번가서 뵈려고요. 어머님이 오라고 하시면 그때는 비행기를 탑니다. (웃음)
▶ 아버님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저희 아버님은 제가 육군 병장 무렵에 돌아가셨어요. 가난한 시절인데 날이 굉장히 추웠죠. 장사를 치르는데 땅을 파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땅이 얼어서 곡괭이가 안 들어가 모닥불을 지르고 땅을 팠는데 그때 제 여동생들은 매우 어렸습니다.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추운 무덤 앞에서 막 울고불고... 제가 못 울게 막 윽박지르고, 울더라도 오늘 말고 나중에 울라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 아버님이 그 당시에 유명한 소설가 김광주 선생님이시잖아요.
소설가셨는데 밥을 먹을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죠. 중국에서 김구 선생님을 보좌하다가 해방이 되니까 김구 선생님과 함께 귀국을 했는데 아마 저희 아버님은 김구 선생님 밑에서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대 수많은 젊은이가 그랬죠. 김구 선생님을 앞세우고 김구 선생님과 더불어 나라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기 위한 야심이 있었죠.
저는 그것을 청년으로서 정당한 야심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김구 선생님이 총 한방에 쓰러져서 돌아가시니까 수많은 청년들의 생애와 꿈이 그날로 좌절되어 버린 것이에요. 저희 아버지는 그때 좌절된 수많은 청년 중에 한 사람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생애는 매우 불안정했고, 술을 많이 마셨고,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었고... 소설이라는 것은 생업의 수단이 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좌충우돌, 허랑방탕, 동가숙 서가식(東家宿西家食)... 그러면서 생애를 마치셨죠.
▶ 어렸을 때는 아버님에 대한 원망이 있으셨어요?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님 편이었어요. 저는 지금도 항상 아버님 편이에요. 우리 어머님은 나 때문에 무지 속상해했어요. ‘저 놈은 항상 자기 아버지 편만 든다, 사내놈이라는 것은 다 한통속이다.’.... (웃음)아버지가 저러고 다니는데 아들이 돼서 뭐라고 말은 안 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말다툼하면 꼭 아버지 편만 들고,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서 험담을 하면 나무라고, 저희 어머님은 지금도 그게 맺혀있어요.
▶ 아버님 기억이 나는데 까만 양복에 나비 넥타이 매시고 우리 졸업식 날 오셨댔어요. 중절모 쓰시고 되게 멋쟁이셨어요.
아버지가 좀 댄디(Dandy)했죠.
▶ 이름이 다들 참 독특해요. 다 외자죠?
저희 누나는 제비 연(燕), 형은 부평초 평(萍), 저는 향기 훈(薰), 제 동생은 부용 용(蓉), 그 밑에 여동생은 고향 향(鄕), 이죠. 전체를 모아보면 동양화, 그림이 돼요.우리 형은 부평초 평(萍)인데 부평초라는 것은 덧없이 떠돌아다니는 풀이잖아요. 저희 아버지가 형이 큰아들인데 해방된 조국에 와서 큰아들을 낳고 그 인생의 허무감을 이기지 못해서 이름을 부평초 평(萍)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사실 그렇게 잘하신 일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웃음) 지금도 어쨌든 형은 미국에 가서 떠돌고 있고, 저는 향기 훈(薰)이니까 형보다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이름이잖아요.
◇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 신문사에 오래 계시다가 왜 늦게서야 작가가 되셨어요?
저는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어요. 꿈에도 없었죠. 젊어서도 특별한 꿈은 없었고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어요. 밥을 걱정하지 않고 사는 그런 세상이 좀 왔으면 좋겠다 싶었죠. 저뿐만이 아니라 제 주변의 많은 또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어요. 솔직히 말해 뭐 위대한 청춘의 꿈이 있었던 게 아니죠. 물론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위대한 청춘의 꿈이라는 것이 표면에 드러날 수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현실이 너무나 각박했기 때문에.... 그러다가 신문사에 들어가서 언론인으로 오래도록 살았는데 저는 그때도 제가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뭔가를 막연히 쓰고 싶다는 매우 비논리적인 충동 같은 것은 내부에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작가가 될지, 시인이 될지, 에세이스트가 될지, 평론가가 될지, 그것은 알 수가 없는 거였죠. 그러다가 언론사를 그만두고, 그렇다면 내 내부에 있던 모호하고 정체 모를 충동을 지금 실현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 비로소 한 줄, 두 줄 쓰기 시작했죠. 내 청춘의 소망은 작가가 아니었어요. 밥이었어요.
그렇게 우리 세대는 결국 밥을 먹는 시대를 만들어 냈잖아요. 저는 우리 서울 같은 대도시에 이런 세상이 올 줄 꿈에도 몰랐어요. 우리 어렸을 때는 이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수많은 자동차와 고층빌딩이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옷을 잘 입고, 이렇게 거리에 예쁜 여자가 많고, 이렇게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거리에 많은 세상이 올 줄 꿈에도 몰랐던 거예요.
◇ 내 청춘의 소망은 작가가 아니라 밥이었다!
▶ 밥이 명제였는데 소설을 쓴다면 사실 그것도 밥이 좀 걱정 아닌가요. (웃음)
근데 저는 책을 한 권 쓰면 약간의 수입이 있잖아요. 그것을 가지고 그다음 책을 쓸 때까지만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걸로 또 하나 써서, 또 그다음 책을 쓸 때까지만 살고, 그것이 연결되고 있어요. (웃음) 그것은 매우 복 받은 겁니다.
▶ 떨어질 때쯤 되면 책을 써야 되요?
그렇죠. (웃음)
◇ 내 복의 원천은 수많은 독자의 애정
▶ 그 돈은 부인에게 주십니까?
그 돈은 나를 유지하고 가정을 유지하는 돈이고 근데 이만큼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많은 작가는 이것이 안 되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업을 가져야 하겠죠. 부업을 가지려면 글 쓰는 시간과 에너지는 다 낭비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의 복은 어디서 오냐면 제 책을 사는 독자 여러분들로부터 들어오는 것이죠. (웃음)
▶ 자녀는 어떻게 되시나요?
다 커서 큰딸은 33살이고, 작은 애는 서른이에요.
▶ 어디서 보니까 딸이 용돈을 준다고 하던데요?
제가 전에 벌이가 없이 쉬고 있을 때 딸이 십만 원, 십오만 원씩 줬어요.요즘은 제 책이 팔리니까 안줍니다. (웃음)
▶ 오히려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웃음)
큰놈은 가끔 달라고 하는데 어디 갈 때 나는 운전을 못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 애들이 가끔 자기 차를 태워주는 적이 있어요. 각자 두 놈이 작은 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는 방향과 길이 맞으면 태워주는데 가다가 반드시 주유소에 들어가더라고요. (웃음)기름을 꼭 가득 넣어요. 사실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더 싸게 들지만 지는 척하고 내야지 딸하고 주유소에 차를 대놓고 싸울 수도 없잖아요. (웃음)
▶ 어떤 사윗감을 원하세요?
그것도 남의 사생활 아닙니까? 그걸 개입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지는 않아요.
▶ 딸은 남이 아니죠. (웃음)
그래도 남이죠. (웃음) 이래라 저래라 할 생각은 없는데 저는 우선 이런 사람이 좋아요.남자가 우선 밥을 먹을 때 씩씩하게 잘 먹고, 직장에 가면 상사에게 예쁨을 받고, 일도 열심히 하고, 상사의 어려운 일을 스스로 해결도 하고, 또 처가에 잘하고 (웃음) 그리고 가정에서 약간의 가부장적 책임을 감수하고 항상 자기 가족들에 대해서 도덕적인 우월성을 확보해야죠. 이건 아주 중요한 거에요. 그래야 야단을 칠 수가 있잖아요. 존경도 받고요. 집안에 모든 어려운 일과 험한 일은 절대 여자에게 안 시키고, 자기가 다 하고, 이게 훌륭한 가부장이잖아요. 그런 좋은 남자한테 시집을 갔으면 좋겠는데 내가 뭐 할 수 있나요. 자기가 알아서 가겠죠. (웃음)
▶ 김훈 씨는 처가에 잘하십니까?
저는 잘 못했어요. (웃음)
▶ 본인은 못하는 일을 그렇게 원하면 어떻게 해요? (웃음)혹시 소설 쓰는 남자를 데려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런 일이 절대 없기를 바랍니다. (웃음)그래도 데려오면 어쩔 수가 없겠지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죠.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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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 훈 "원고지 10장 쓰려면 50장 버려야"
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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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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