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927-2번지에 위치.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본사 해인사의 말사로서 깨끗할 淨, 재미 趣의 정취암(淨趣庵)은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대성산(大聖山)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하여 정결함이 물씬 풍기는 절이다.
전통사찰 제83호로 지정, 삼국통일한 직후인 686년(신라 신문왕 6)에 창건된 고찰로, 동해에서 장륙금신(丈六金身) 아미타불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발하니 한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 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조사(義相祖師)가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세우고 대성산에 정취암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인지 상서로운 기운이 금강(金剛)에 버금한다해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하였다. 정취암은 창건 이래 수많은 고승납자(高僧衲子)들의 수행처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고암(古巖) 스님도 주석하여 정진한 바 있다. 문화재로는 경남 지방문화재 자료 제243호 산신탱화와 제314호 관음보살좌상이 있다.
858년(헌안왕 2) 범일(梵日) 조사가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에 봉안했던 정취(正趣) 보살상을, 고려시대인 1254년(고종 41)에 명주성(溟州城)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夜別抄) 열 명과 사노(寺奴)인 걸승이 정취보살상을 땅 속에 묻어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 후 경상북도 경주 기림사(祇林寺) 주지 각유(覺猷) 선사가 정취보살상을 어부(御府, 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어부에 모시게 되었다. 1354년(공민왕 3)에 화경(華敬), 경신(景信) 두 거사가 정취암을 중건 한 후 어부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암으로 옮겨 모셨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1652년(효종 3)에 불이 나 모든 전각이 불타고 정취보살상도 소실되어 창건 이래 최대의 비운을 맞았다. 이듬해 봉성 치헌(鳳城致憲) 스님이 중건에 착수하여 1658년(효종 9년)에 복원 하였으며, 정취보살상도 재현하였다. 치헌 스님은 이후 평생을 정취암에 주석하다가 생몰연대는 전해지지는 않으나 입적하신 기일은 11월 20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 1833년(순조 33)에 계곡 이관(溪谷以官) 스님이 당우를 중수하였으며, 근대에 와서는 1923년 설하(雪荷) 조장원(曺章源) 스님이 중수하였다. 최근에는 1956년에 법당과 요사를 개축하였고, 1968년에 당우 일부를 보수하였으며 1987년 현재의 금당을 신축하였다. 도영당(道永) 스님은 이 법당을 완공한 뒤 대웅전으로 개칭하면서 석가여래상을 본존불로 하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봉안 하였다. 1989년 수일(秀一) 스님이 대웅전 단청을 하고 봉안된 대세지보살을 내리고 지장보살을 봉안하였으며, 1994년 순민(純敏) 스님은 대웅전 뒤쪽 암벽 위에 응진전을 짓고 동쪽에 요사 건물을 지었다.
1996년 주지인 수완(修完) 스님이 대웅전을 원통보전(圓通寶殿)으로 바꾸고 석가여래좌상은 응진전으로 옮겨 봉안 하고 정취관음보살상을 개금 후 본래대로 원통보전의 본존불로 봉안하고 후불탱화를 관음탱화로 조성 봉안하였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정취암은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다. 제천 고산사도 응진전 관음보살상이 주불이다.
정취암이란 이름은 정취보살을 모심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정취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 정취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는 뜻인데, 한 번 세운 원을 향해오로지 외길 수행으로 일관한다는 뜻으로 무이행보살(無異行菩薩)이라고도 한다. 정취보살은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날 때, 관자재보살을 스물여덟 번째로 만나고, 스물아홉 번째로 정취보살이 등장한다. 선재동자가 보살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묻자, 정취보살이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하여 '보문속질행해탈(普門速疾行解脫)'이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보문(普門)'이라는 말과 오로지 중생 구제를 제일의 원으로 삼는다는 것이 관세음보살과 같기에 동일한 보살로도 표현
기암 절벽사이에 위치한 정취암은 경내가 비교적 좁은 편이다. 금당인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원통보전 뒤는 곧바로 바위와 절벽인데, 좁게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응진전, 오른쪽에 산신각이 절묘하게 위치해 있다.
정취암의 본전에 해당하는 원통보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987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처음에는 대웅전이라 하고 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을 협시불로 봉안 하였다가, 1996년에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좌상은 응진전으로 옮겨 봉안 하고, 지금과 같이 원통보전(圓通寶殿)으로 바꾸어 관음보살상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후불탱도 관음탱으로 봉안하였다.
불신과 연꽃무늬가 새겨진 낮은 대좌가 하나의 목재로 조성되었다. 자세는 등을 세우고 머리부분을 약간 앞으로 내민 모습의 가부좌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은 중앙에 큰 화불(化佛)과 앞뒤로 불꽃무늬 장식이 달려 있으나, 후대에 따로 만들어 부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네모반듯하며 턱이 둥근 형태이고 가늘고 긴 눈 완만한 콧등, 입술 양끝에 양감을 주어 미소를 머금은 모습 등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를 얕게 표현하였다.
옷주름 선은 대체적으로 간략한데 반가부좌하여 드러난 오른발 밑으로 보이는 군의 자락을 종아리와 평행하게 드리운 것이 특징적이다. 규모는 50cm 정도의 크기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요사채는 1994년에 지은 건물로 맞배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원통보전 뒤의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응진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상, 그리고 나한탱을 봉안하고 있다.1996년에 대웅전을 원통보전(圓通寶殿)으로 바꾸고 그 때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좌상은 응진전으로 옮겨와 봉안하였다.
율곡사에 거쳐하던 원효대사가 보리죽을 먹고 있는데, 정취암에 있는 의상조사는 하늘(도리천)의 길상천녀(吉祥天女)가 올리는 공양을 드셨다. 어느 날 정취암으로 의상을 찾아온 원효대사가 점심 공양시간이 되었는지라 “자네는 천공(天供)을 받아 먹고 있으니 어디 나도 함께 드세”라고 하면서 기다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천녀가 내려오지 않으므로 원효대사는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제야 천녀가 공양을 받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왜 이제야 오느냐” 라고 물으니 천녀가 말하기를 “원효대사가 옹위하는 팔부신장이 길을 가로 막아서 정취암으로 올 수가 없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깨달은 의상조사는 자신이 원효대사에게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그 뒤로는 천공을 사양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