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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유종호, 김종길 - 트리비얼리즘의 지양
요즘 우리 시에는 주제의식의 결여로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에 집착하는 경향이 흔하게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과거의 시가 소재나 표현에서 범한 과장이나 수사적 사치를 반성하는 뜻에서 말의 외연을 좁히고 내포를 확대하려는 긍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이러한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에 빠져서 오히려 긴장을 잃고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상실한 채 품위없는 언어유희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시인을 지상과 천상의 중간에서 신의 말을 번역하여 민중에게 전달하고 민중의 희원을 신에게 전하는 메신저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따위의 고답적인 얘기를 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이런 정신이 필요)
그렇다고 해서 보편성 없는 개인적 일상의 자질구레한 신변잡기를 시의 이름으로 양산하는 일부의 시작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달의 화제작으로는 소품이지만, 내용이 넓고 울림이 깊은, 그리고 표현형식도 매우 정제되어 교과서적인(?) 다음 두 편의 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오랫동안 비평가로 우리 현대문학에 큰 영향을 끼쳐오다가 근래에 와서 대단히 활발하게 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유종호의 소품 「그제 회오리(세계의 문학, 봄호)」가 주목된다.
이대로 훨훨 국경을 넘어
내 자유의 두루미 되리라
몽고르 草原의 승냥이 되리라
시베리아 막수풀의 호랑이가 되리라
半島의 달을 향해
두 눈 부릅뜨고 포효하리라
유종호의 「그제 회오리」 전문
시의 제목 「그제 회오리」는 얼핏 보기에 낯설고 어렵다. <그제>의 사전적인 뜻은 그저께 혹은 그 때를 의미하는 옛말 그 적에 라는 말의 준말로 보이고, <회오리>는 나선상으로 일어나는 돌개바람이므로 제목의 문자적 의미는 그저께 혹은 <그 때의 돌개바람>이 되고 그것은 다시 <지난날의 회오리> 정도가 될 것이다. 이때 지난 날은 흘러간 젊은 날이고, 젊은 날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져 있던 날이어서 지금 되돌아보면 예측할 수 없는 회오리와 같은 시절로 회상되어 눈먼 열정과 순수의 에너지가 돌개바람처럼 일던, 그러나 그 열정을 다하지 못했던 아쉬움으로 떠오른다. 그러므로 그날의 회오리란 실제의 물리적인 바람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던 바람이고, 지금 돌이켜 회상하면 젊은 날의 마음속의 한 풍경인데 그것을 시인은 현재의 시점에서 나타내 본 것이다. 즉, 앞에서 말한 바처럼 회오리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므로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일종의 혁명과 혁신의 새로움을 불러오는 바람이므로, 시인은 다시 이런 상황으로 돌아가서 당시에는 이루지 못했던 일을 새롭고 활기차게 결단해 봄으로써 오늘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방향을 세워보는 것이다.
시인은 <...리라>의 의지미래형 어조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결단하고 선언한다. <이대로 훨훨 국경을 넘어/ 내 자유의 두루미 되리라> 이 구절을 볼 때 시인이 국경을 넘으려는 이유는 <자유의 두루미>가 되는데 있다. 지금 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국경>이다. 따라서 지난날의 아쉬움(회오리)은 지금까지 자신을 구속해 온 국경을 <훨훨> 넘어가서 <자유>의 두루미가 되어 넓고 높은 하늘에서 마음껏 비상을 하리라는 것이다. 두루미에게는 드넓은 창공으로의 비상이야말로 자신의 존재실현이다. 그는 또 <국경>을 넘어서 <몽고르 초원의 승냥이>가 되고, <시베리아 막수풀의 호랑이>가 되고자 한다. 야성의 승냥이에게는 몽고르의 드넓은 초원이 바로 자신의 본원지이고, 호랑이에게는 시베리아 막수풀이 자아실현의 열린 공간이다. 지금까지 두루미에게는 창공이, 승냥이에게는 초원이, 호랑이에게는 막수풀이 <국경>이라는 벽에 의해서 닫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비본래적인 구속의 상황(국경이라는 테두리 안쪽의)에 갇혀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국경을 넘어 나가고자 하는 곳이 태평양이나 일본 혹은 유럽이 아니라 몽고르 초원과 시베리아 막수풀이라는 점이다. 물론 일본이나 미국 혹은 유럽 쪽의 세계에 대해서는 국경이라는 구속의 한계가 우리에게는 심리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오직 북쪽 국경선이 자유 제한선으로 느껴지고 있고, 또한 몽고르 초원이나 시베리아 막수풀은 바로 우리 민족의 본향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경이란 것도 부자연스러운 남북분단의 의미와 대륙에서 반도 안쪽으로만 좁혀진 우리민족의 삶의 무대로서의 서글픈 역사적 현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두루미>와 <몽고르 초원의 승냥이> 그리고 <시베리아 막수풀의 호랑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자아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경> 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자유>를 실현하지 못하고 구속의 테두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비극적인 자신을 돌아보며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의 <반도의 달을 향해 두 눈 부릅뜨고 포효하리라>는 의지의 표현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 달리 말해서 그 현실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향해서 포효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반도의 달>로 표상되는 쓸쓸하고 아쉬운 정경, 그것은 시적인 희원 속에서 드넓은 대륙의 태양으로 눈부시게 비쳐져야 할 우리의 조국의 비본래적인 모습이다. 그리하여 좁고 폐쇄적인 반도 위에 어두운 밤에나 떠올라 쓸쓸하게 산과 들을 물들이는 달의 이미지는 시인의 젊은 <회오리> 속에서는 포효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도의 달을 향해 호랑이로서 포효하겠다는 이러한 의지를 왜 시인은 90년대 중반이라는 오늘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토로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점이 과연 오늘날 시인이 무엇이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눈앞에 두고 세계의 열강들이 숨가뿐 발전의 레이스를 하고 있는데, 우리의 분단 현실은 반세기 동안 거의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절름발이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 비극적 현실의 극복을 염원하는 시인에게는 그 극복의 의지가 과거 젊은 날의 아쉬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고, 그 열정의 표현이 구속의 국경을 넘어 <자유>의 호랑이가 되어 <반도의 달>을향해 눈 부릅뜨고 포효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단의 조국 현실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민족공동체를 생각하게 되며 지금까지 소홀히 여겨왔던 <자유>와 <분단현실>을 되돌아봄으로써 시인의 시적 초극의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과는 다르지만, 우리 시단의 원로 시인 중의 한분인 김종길의 「봄을 기다리며(현대문학,3월호)」 또한 소품으로서 깊은 울림을 준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본래적인 세계로서의 자연과 그것의 질서를 깊이 있게 통찰하여 우리 인간의 삶과 결부시킴으로써 미적 감동 뿐 아니라, 삶에 대한 인식과 교훈까지도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지배는 철저하다.
눈과 얼음의 철통체제를
감히 거역할 자는 없어 보인다.
나무들은 위축되다 못해
까맣게 질려 눈 속에 곤두박히고
왼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그러나 산골짝 시냇물은
얼음 속에서 공작을 멈추지 않고
가지마다 반란의 창끝을 곤두세운다.
양지짝에 뿌려지는 참새떼들의 산탄!
동백꽃 신호탄이 터지면
대망의 혁명은 온다.
김종길의 「봄을 기다리며」 전문
두말할 필요 없이 봄은 생성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자연은 온통 <눈과 얼음의 철통체제>인 <겨울의 지배> 하에 있다. 이 시의 진술이 감동으로 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자연현상의 묘사를 넘어서서 우리 인간의 사회 정치 문화 등의 제반 현상과 대단히 잘 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적인 시라고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적 표현의 층위가 이루는 절묘한 이미지와 의미의 거의 완벽한 상응에 있다. 겨울은 독재자처럼 산과 들의 모든 나무와 풀꽃들을 처형한 후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눈과 얼음>이라는 반생명적인 <철통체제>를 강하게 구축해놓고 있다. 당장의 그 철저한 철통체제의 지배 하에서는 어떤 생명적인 것도 살아 일어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예컨대 <나무들은 위축되다 못해/ 까맣게 질려 눈 속에 곤두박히고/ 왼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겨울의 황량함과 비생명적인 상황을 인간의 정치적인 체제와 절묘하게 대비시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 독재는 철통체제를 아무리 강화한다 해도 결국은 혁명에 의해 무너지듯이 반생명적인 겨울도 생명의 힘으로 일어난 봄의 도래를 막을 수는 없다. 비록 산은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있는 춥고 적막한 겨울로 점령되어 있지만, 그러나 겨울의 한 복판에서도 <산골짝 시냇물은/ 얼음 속에서 공작을 멈추지 않고/ 가지마다 반란의 창끝을 곤두세>우고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산골짝 시냇물>이 소리없이 스미고 흐르며, 그 <차가운 얼음 속에서>도 겨울을 물리치려는 비밀한 <공작을> 꾸미고 있다. 또한 모든 나무들은 <가지마다 반란의 창끝을 곤두세>우고 그 철통의 반생명적인 독재의 심장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겨울의 복판에서 봄이 시작되는 것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반생명적인 독재(겨울)를 타도하는 반란과 혁명(봄)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지짝에 뿌려지는 참새떼들의 산탄>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시위(참새들의 날아오름)가 새로운 해방과 자유와 승리의 봄을 암시하고, <동백꽃>이 신호탄처럼 터지면 <대망의 혁명>이 와서 생명의 세상(봄)이 이룩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시가 지닌 탁월함은 겨울에서 봄으로 이행되는 계절의 변화를 인간 세상의 정치 사회적인 변혁의 패러다임 속에 절묘하게 재구성하여 형상화한 점이다. 또한 이 시를 시적인 형상화에 있어서 거의 완벽하게 성공하도록 한 것은 전체 4련으로 구성된 형태가 마치 기승전결의 구조로 빈틈없이 짜여진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 1,2련의 起와 承에서 제 3련의 轉(시냇물의 공작과 반란의 창끝)을 거쳐서 제 4련에 오면 3련까지 중첩되던 긴장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폭발된다. 조심스럽게 축조된 긴장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양지짝에 뿌려지는 참새떼들의 산탄!>이라는 이미지는 가히 보기 드문 佳句이며 絶唱이다. 전체적으로 이 시에서는 언어의 속뜻과 겉말이 적당한 긴장과 탄력을 유지하며 쉽고 강하게 주제의식을 표출해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한편의 짧은 시를 읽을 때 겨울에서 봄으로 이행 되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새롭게 표현한데서 오는 재미를 느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정치 사회적인 변화와 역사의 의미 그리고 삶의 교훈까지도 깨닫게 되어 크고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끝)
([문학과 창작] 19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