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장 12절 –18절
주님이 주시는 성령충만은 상태로서의 성령충만과 역동적인 성령충만이 있습니다. 은사와 관계있는 성령충만은 채워지는 성령충만입니다. 상태로서의 성령충만은 거룩한 삶과 관계를 가집니다. 우리가 성결한 삶을 살려면 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비결은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성령님께 친밀하고 예민한 것입니다. 성령의 주관하심과 인도하심이 이 성령충만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의 충만은 역동적인 성령충만입니다. 바로 어느 순간 성령충만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사도베드로도 어느 순간 성령충만하게 되어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역동적인 성령충만은 사역 즉 은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이 역동적인 성령충만이 뜨거운 감자와 같다고 해서 멀리하고 또는 성도들에게 멀리하게 하고 오직 상태로서의 성령충만만 구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큰 잘못입니다. 이 어둠의 나라에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 가는데에는 이 역동적인 성령충만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원수 사단은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성령충만을 통해서 은사를 주십니다. 은사는 도구입니다. 예를 들어 칼이 의사의 손에 가면 수술용 칼이 되지만 강도의 손에 가면 사람을 헤치는 도구가 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은사가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게 하는 것은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은사를 통해 일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의사라도 칼을 다루는 것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신중하면서도 능숙하고 어떤 분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서툽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자체는 계발하고 단련할 수 없지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교육되고 훈련되고 그리고 실재로 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공예배때 이루어 지는 방언의 은사를 말합니다. 사적으로는 방언의 은사가 풍부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공예배 때에는 그 방언이 세상사람들이 보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덕이 되기 어렵고 오해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회중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서 통역의 은사가 부어지고 훈련되어지는 것은 방언의 은사가 공예배때 풍성하게 이루어 지는데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은사를 받는 길을 기도라고 합니다. 방언은 통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어지고 통역의 은사는 묵상의 기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통역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닮은 형태로 부어집니다. 그래서 통역의 은사는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