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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향유와 이기성/자기성, 타자-환대와 응답/책임-초월)
데카르트로 대표 되는 서양의 근대 철학은 주체 중심의 철학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생각하는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인 주체가 되고, 주체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주체가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과 같은 폭력의 경험은 이러한 철학 사유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체 중심의 철학이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상 앞에 놓였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주체성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타자 중심의 철학을 제안하였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삶은 진정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 곧 초월이라고 보았다.
초월은 a에서 b로의 이행이며, 그의 철학은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타자의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철학에서 주체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끊임없이 환원하는 자기중심적 존재로, 이 주체는 타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했다고 보았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주체를 동일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타자는 동일자의 틀 안에 들어올 수 없기에 주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처럼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성질을 레비나스는 ‘타자성’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타자 개념을 바탕으로 레비나스는 주체성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제시했다.
하나는 ‘향유’의 주체성이고, 또 하나는 ‘환대’의 주체성이다. 그는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향유는 즐김과 누림이며,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체의 고유한 행위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줄 수는 있지만, 그를 대신해서 먹어주지는 못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무엇을 누릴 때 나로서의 모습, ‘자기성’이 성립한다. 이런 점에서 향유의 주체성은 자기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주체성이다. 하지만 향유의 대상인 세계는 불확실하기에 주체의 욕구는 항상 충족되지는 않는다. 이에 주체는 주변의 존재들을 소유해 가며 자기성을 계속 확장해 나간다. 이처럼 향유의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자기 삶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스스로는 초월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만의 갇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초월하기 위한 계기가 요구되는데, 레비나스는 이를 ‘타자의 출현’이라고 보았다.
세계를 향유하던 주체 앞에 낯선 타자가 나타나 호소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호소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할 때 기존과는 다른 참다운 주체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보았다.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환대’라고 하며, 환대의 주체성은 타자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책임을 지는 주체성이다. 타자의 출현으로 인해 주체는 그동안 누려 왔던 자유와 이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타자의 요구에 무조건적인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주체와 타자는 비상호적 관계이며, 타자를 주체보다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비대칭적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타자를 환대하기 위해 자기성은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레비나스는 타자의 출현은 주체의 이기성을 제한하고 책임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이로 인해 자기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타자는 주체의 존재를 침몰시키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성에 갇힌 주체를 무한히 열린 세계로 초월할 수 있게 하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처럼 레비나스는 주체성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했다. 또한 그동안 주체가 마음대로 지배하고 배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했던 타자를 주체보다 높은 위치로 올려놓았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 사유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했으며,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강영안 『타인의 얼굴』(문학과 지성사 2005.12.9)
https://naver.me/FxXAmHhD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강영안, 문학과 지성사, 2005
(*발췌문의 소제목은 발췌자의 것임)
차례
1장 레비나스, 그는 누구인가?
1. 레비나스의 지적, 종교적 배경
2. 레비나스 철학의 배경
3. 레비나스 철학의 프로그램: ‘주체성의 변호’
4. 주체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규정
2장 주체의 물음: 데카르트에서 레비나스까지
1. 근대에 관한 반성과 주체의 문제
2. 주체의 형성과 근대 형이상학
3. 근대 주체와 힘에의 의지
4. 근대적 주체의 이중성: 데카르트와 칸트
5. 탈근대적 주체: 니체, 푸코, 라캉
6. 윤리적 주체: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넘어서
3장 존재, 주체,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시간과 타자』를 통해 본 레비나스 초기 철학
1. 존재론적 분리와 익명적 존재
2. 주체의 출현과 존재 가짐: ‘여기’와 ‘지금’
3. 존재의 무거움과 초월의 욕망
4. ‘존재 너머로’의 초월: 고통과 죽음
5. 시간과 타자: 타자와의 만남
6. 타자성과 여성성
7. 타자성의 철학으로
4장 향유, 거주, 얼굴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본 레비나스의 중기 철학
1. 삶에 대한 사랑과 향유
2. 요소 세계
3. 향유와 주체의 주체성
4. 요소세계의 무규정성과 내일에 대한 불안
5. ‘여성적인 것’과 집과 거주
6. 노동과 소유
7. 얼굴의 현현
8. 인간 존재와 죽음
9. 죽음 저편: 에로스와 출산성
5장 책임과 대속적 주체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를 통해 본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
1.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2.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3.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4. 타인의 얼굴
5.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代贖)의 의미
6. 대소적 책임의 실현과 비움의 주체
7. 제삼자와 책임: 정의와 국가 제도
8. 응답으로서의 윤리학
6장 고통과 윤리
1. 고통과 철학
2. 레비나스 철학과 고통의 문제
3. 고통은 쓸모 없는 것인가?
4. 고통의 현상학
5. 변신론의 몰락
6. 고통, 윤리, 주체성
7. 윤리와 고통, 대속적 고통,나의 고통
7장 결론: 레비나스는 철학에 어떤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는가?
1. 서양 철학 비판과 비판철학의 가능성
2.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3. 신과 종교의 문제
레비나스/가정사와 지적 배경
pp. 19-20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당시 통용되던 율리아나 역으로는 1905년 12월 30일, 요즘 사용되는 그레고리안 역으로는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 코우노(카우나스)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 프랑스 일간 신문 『리베라시옹』(1995년 12월 26일자)은 레비나스를 ‘네 문화의 철학자’라 불렀다.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히브리어 성경과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서 자랐고 독일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하였으며 1923년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서 1930년 프랑스에 귀화한 뒤 줄곧 프랑스 철학과 함께 숨쉬고 생각해 왔다. 히브리어와 러시아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그 문화와 함께 숨을 쉬면서 작업한 철학자였기에 ‘네 문화의 철학자’라 부른 것이다.
레비나스는 코우노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예힐 레비나스Yehiel Levinas와 드보라 구르비치Deborah Gurvitch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동생 보리스(1909년생)와 아미나답(1913년 생)은 2차 대전 때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철학/셰익스피어
p. 20
철학은 모두 셰익스피어에 관한 명상에 지나지 않는다.
레비나스/하이데거/후설
pp. 26-8
레비나스 사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은 히브리 전통의 성경과 탈무드, 어릴 때부터 읽었던 러시아 문학, 그리고 … 후설과 하이데거의 책이었다.
*1927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장 에링Jean Hering(1890-1966) 아래 들어가 현상학 공부를 시작.
- 에링: 『현상학과 종교철학 』1925년(박사 논문)
1928년 여름 학기, 1928년과 1929년 겨울 학기 동안 체류. 후설의 마지막 학기 강의 청강. 후설의 집 방문. 이후 후설의 부인 말비나Malvina의 프랑스어 과외 선생이 됨. 후설의 소르본 강의를 가브리엘 페이베르Gabrielle Pfeiffer와 함께 번역함(『데카르트적 성찰: 후설이 [직접] 소개하는 현상학 Méditations cartésiennes. Introduction à la phénoménologie par Edmund Husserl』(1931))
1929년 3월 18일~30일 프랑스-독일 철학자 회합(스위스 다보스) 참석. 하이데거와 카시러의 공개 토론 목격. ‘존재 사유’의 출현을 목도함.
1930년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 La théorie de l'intuition dans la phénoménologie de Husserl』(박사 논문, 스트라스부르 대학)*
{28}레비나스는 후설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현상학은 삶의 잊혀진 경험을 드러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는 작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타자 및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해되었다. 『존재에서 존재재로 L'existence à l'existant』(1947),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1947), 그리고 『전체성과 무한 Totalité et infini』(1961)은 현상학적 훈련 없이는 기대할 수 없는 작품들이다.
주체성의 변호
pp. 30-3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전체가 빚어낸 파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31}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개체의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로 대치하고 이것을 또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 여기에는 나와 다른 것, 또는 나와 구별되는 다른 이의 다름l'altérité의 성격이 무시된다. … 레비나스는 이러한 철학적 흐름에 대항해서 다른 이, 즉 타인의 존재가 인간 존재에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다른 이L'Autre’, 즉 타인은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임을 강조한다. 다른 이의 존재를 그토록 강조한 까닭은 주체의 주체성을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주체의 존재를 절대화한 근대 관념론 전통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주체의 죽음’ 또는 ‘인간의 죽음’을 운위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주체를 절대화하고, 그런 의미에서 {32}존재 전체를 주체의 권력에 귀속시키는 철학은 물론, 주체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철학도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인격성과 타자성, 인간 존재의 윤리적 의미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전체 속에 귀속될 수 없는 이른바 ‘무한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주체성의 변호’를 시도한다.
레비나스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은 주체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 레비나스는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이론적 활동이나 기술적, 실천적 활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 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33}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주체성/향유와 환대
pp. 40-41
레비나스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인간 주체성을 규정한다. 주체성은 즐김과 누림, 곧 향유를 통해 형성되는 주체성이다. 세계를 향유하고 즐기는 가운데 인간은 ‘자기성’의 영역을 확보한{41}다. 물과 공기와 햇볕 등을 즐길 때 인간은 ‘자기’에게 돌아가고 전체로부터 자기를 분리하여 ‘내부성(내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향유를 개체의 ‘개별화의 원리’로 본다. 거주와 노동을 통해 삶의 지속성과 안전을 확보할 때 내면성으로서의 주체성은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 즉 전체화에 대한 욕망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의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갖는다. 여기에서는 초월이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의 주체성과 구별해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주체성을 말한다. 여기서 타자는 나와 똑같은 위치에 있지 않고 거주하며 노동하는 나에게 윤리적 요구로서 임하는 무한자로, 내가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도 지배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으로 묘사된다. … 즉 ‘환대로서의 주체성’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출현으로 향유의 주체성, 곧 ‘자기성’ 또는 ‘내재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나는 다른 주체가 아니라 세계를 즐기고 거주하며 노동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바로 이 주체가 타자의 출현을 통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적인 주체로 설 수 있다고 본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인간 존재의 애매성에 대해서 누구보다 열린 눈을 가진 철학자이다. 욕구의 질서와 욕망의 질서, 독립성과 의존성, 선택의 자유와 불가피성, 나의 개인적 향유와 타인의 개입, 존재 유지 경향과 자기포기, 이와 같이 인간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들 사이에는 언제나 애매성과 이중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타자와 주체성의 변호
p. 75
레비나스는 전체 속에 귀속될 수 없는, 이른바 ‘무한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주체성의 변호’를 시도하였다.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이론적 활동이나 기술적, 실천적 활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그는 주체가 주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지식 획득이나 기술적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타인을 수용하고 손님으로 환대하는 데 있다고 본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서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주체성을 규정한다면 그것은 나의 나됨을 타인의 존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가? … 사실 레비나스는 나의 나됨, 즉 나의 ‘자기성’의 성립 없이 윤리적 관계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관계’란 개념 자체가 벌써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두 항의 ‘분리la séparation’를 전제한다.
익명성 비판과 대안
pp. 78-9
‘바깥에 섬’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해 열려 있는 존재(개방성)로서의 인간은 존재의 진리로 이르는 하나의 우회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가에게는 ‘순전히 수단적이고 임시적인 역할’만이 있을 뿐이다.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해야할 과제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가 인간을 키우고 지탱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설사 그것이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존재의 구조를 드러낸 뒤, 스스로 물러가기 위해 등장할 뿐이다. 그래서 그 결과 인간의 신화가 깨어진 자리에, 이제 인간적인 것도, 비인간적인 것도 아닌, 익명적 존재 질서가 자리 잡는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 {79}레비나스는 그의 후기 철학에서 발전시킨 주체성의 의미, 즉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주체, 타인의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책임적 주체를 하이데거의 ‘개방성’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레비나스는 ‘개방성’이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개방성이란 상처나 상해에 대해서 아무런 방비 없이 노출된 살갗의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개방성은 노출된 살갗이 상처받을 수 있음la vulnéravilité d'une peau을 말한다. … 이것은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고난을 받거나 낮아지라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경우 그와 같은 자리에 처할 수 있으리라는 뜻이라고 레비나스는 해석한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타인에 의해 사로잡히고, 타인을 위해 고통받고, 타인을 위해 대신 설 수 있다는 뜻이다. 타인을 위해 고통받는다는 것은 타인의 짐을 짊어지고, 그를 관용하고 그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 타인을 위해 책임질 수 있다는 것, 타인을 대신해서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주체성의 ‘의미’라고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초월/존재론적 모험
p. 85/86
익명적 존재에서 주체로, 다시 주체에서 타자로의 이행 … 이 이행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모험’이라 부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초월’이다. 초월은 주어진 삶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넘어가는 운동이다. … 진정한 삶의 부재로부터 ‘형이상학적 욕망’이 발생하고 인간의 삶과 철학은 진정한 삶을 향한 부단히 넘어감, 곧 초월임을 레비나스는 지적한다.
{86}초월을 기술하기 위해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동일자(자기)와 타자’ ‘통일성과 다원성’ ‘내재성과 외재성’ ‘내재와 초월’ ‘존재와 존재와 다른 것’ ‘존재론과 형이상학’ 등 일련의 대립된 낱말짝을 사용한다. 레비나스는 양자를 철저히 분리하고 동시에 그것의 상호연관을 보임으로써 진정한 삶이 부재하는 이때 철저하게 반파르메니데스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다. … 요컨대 레비나스의 철학은 초월의 운동을 기술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것은 존재에서 존재자(주체)로의 이행이고 존재자에서 다시 타자(무한자)로의 이행, 넘어감이다.
고통의 문제와 서양철학
pp. 209-10
서양의 주류 철학은 사실은 고통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철학이 고통에 ‘완전히’ 무관심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물론 과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후기 헬레니즘 철학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의 정념과 고통pathos에 관심을 두었고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 예컨대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에피큐로스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들에게 이론적 활동이기보다는 오히려 실천학, 곧 ‘삶의 기술techne biou’로 이해되었다.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은 인간의 고통을 진단하고 정확한 추론과 논리적 엄밀성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을 실현해 주는 수단으로 수용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서양 주류 철학에서도 고통이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통은 언제나 악의 문제와 더불어 변신론theodicy(신정론(神正論))의 테두리에서 말하잠면 하나의 논리적 문제로 취급{210}되었다. 변신론은 죄 없는 자의 고통과 악의 실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보여주고자 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노력이었다.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버렸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합리적, 이성적 관심이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근대 변신론을 대표하는 라이프니츠와 헤겔도 서양의 이러한 이성 중심적 전통에 서 있고 이 전통을 더욱더 강화하였다.
고통의 성질/칸트/레비나스
p. 217/223
고통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고 수용할 수 없는 것 자체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은 범주상의 애매성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 고통은 ‘성질’이다. 고통도 다른 감각 내용과 마찬가지로 감각 작용이고 감각 작용으로 내용이 주어진다. 고통은 감각 작용이되, 그러나 칸트적 종합이 불가능한 감각 작용이다. 다시 말해 고통은 하나의 의미 전체로 통합이 될 수 없다. 고통은 다른 한편으로는 ‘양태’, 즉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즉 의식 안에 수용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방식 그 자체가 고통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 감성을 통해 주어져 있고 감성을 통해 주어지면서도 견딜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범주적으로 애매한 현상이다.
{223}고통의 현상학을 통해 보여준 것은 고통이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할 뿐이며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도, 어떠한 형이상학적 목적론도 존재하는 고통과 악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본다.
변신론/칸트/레비나스
220-3
변신론은 (1) 하나님은 전능하다 (2) 그의 선하심은 무한하다 (3) 악은 존재한다는 세 면제 가운데 앞의 두 명제와 세 번째 명제가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변신론은 논리적 추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은 악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변신론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위의 세 명제로 표현되는 ‘내용’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고 셋째는 그것을 수행하는 논리적 ‘수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은 예컨대 존재, 무, 제1원인, 목적성, 무한성, 유한성 등과 같은 존재론적 용어들이 의미 있게 작동되는 틀 안에서 가능하다. … 레비나스는 분석철학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변신론의 논리적 형식을 문제삼지 않는다. 변신론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정합적인가, 합리적으로 수용 가능한가 하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 변신론에 대한 논변은 (만일 논변이라 부를 수 있다면) 논리와 합리성의 원천인 인간 이성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칸트와 구별된다. … {221}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악은 도덕적 악밖에 없다고 칸트는 보았다. … 칸트는 자연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통해 물리적 악이 부분적으로는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 이것들은 나의, 또는 이웃의 도덕적 무책임 때문에 빚어질 수는 없는 것인가? 칸트에게서 ‘누구의 고통인가, 누가 책임 있는가? 하는 물음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대량 살상이 가능해졌고 20세기 역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실증해준다. 그렇지만 변신론의 정당성을 부인할 때도 칸트는 이성에 대한 신뢰, 즉 그것의 추론 능력, 문제 해결과 법칙 수립 능력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 레비나스는 칸트와 달리 인간 이성의 신뢰 가능성 자체를 문제삼는다.
20세기에 두 차례나 있었던 세계 전쟁,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 히로시마, 수용소, 아우슈비츠와 캄보디아의 종족 살상, 이 {222}모든 예들이 변신론과 변신론의 합리성을 논박하고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 칸트는 인간이성이나 감성은 그 자체로는 결코 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악은 (인간에게서) 이성과 감성의 결합을 통해서, 그것도 올바른 도덕적 질서의 ‘전도’를 통해 발생하는 사건으로 보았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 이성은 악하며 심지어는 악마적임을 20세기의 경험은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
레비나스는 변신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고자 하지 않는다. 20세기 역사 자체가 변신론의 허위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변신론의 종말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고통에 직면해서 변신론의 정당성을 보여주어야 할 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고통의 철학/레비나스
p. 223
현상적으로 보아서는 전혀 의미 없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모든 고통이 정말 전혀 무의미한 것인가? 고통은 고통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레비나스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 종교성과 인간의 선의 윤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진리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가? 신앙과 윤리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도 열려 있는가? 나는 레비나스 철학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의 선차성
p. 226
먼저 오해의 여지를 없애자.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고통은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생물학적 관점이나 또는 신학적 관점이 고통을 의미 있게 할 수 없듯이, 윤리적 관점도 고통을 의미 있게 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고통과 관련해서 레비나스는 ‘변신론’ 대신 ‘윤리를 변호하는’ 일종의 ‘변윤론’을 펼치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주장은 “고통은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고통은 윤리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윤리적 관점, 바로 이것이 고통에 의해서 열린다는 말이다. 고통에 관심을 둘 때, 고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신음과 한탄에 귀 기울일 때, 바로 그때 삶에 대한 윤리적 전망이 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였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고 그의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나 행복, 또는 공동체의 보존과 같은 것은 윤리에 대해 부차적으로 보는 것이다.
얼굴의 현현/봄
pp. 226-7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왕이나 독재자 또는 부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의 얼굴, 즉 고통 받는 사람의 얼굴이다. 고통 중에 있는 이 얼굴과의 만남이 없는 한 타인에 대한 관심 없이, 타인과 교류하면서, 아무 문제 없이 우리는 살 수 있다. 삶의 이러한 차원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즉 세계 안에서 우리가 거주하는 방식이다. 타인의 얼굴과 접할 때, 그에게 귀 기울일 때, {227}그때 윤리가 경제적 삶에 침입하게 된다. “윤리는 보는 것이다 l'ethique est une optique.” 만일 윤리가 보는 것이라면 뭘 보는 것인가? 하늘에 있는 별과 내 안에 있는 도덕법칙인가? 이 ‘봄’을 나는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의 고통받는 얼굴을 레비나스가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윤리는 봄이고 동시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레비나스/칸트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데는 레비나스도 동의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받는 고통이냐 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고통은 법칙에 대한 존경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여기에서는 감성적 수용과 귀 기울임, 그리고 그에 따른 구체적 행동이 중요하다. 고통받는 타인의 호소에 대한 응답이 없다면 그것에서는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부름은 나의 자율적이고 능동적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타율적이다.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윤리. 즉 ‘책임’으로서의 윤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타율적인 윤리이다. 그러나 칸트와 레비나스는 ‘성화된 삶 Heiligkeit: Sainteté’을 윤리적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없지 않다. ‘거룩함’을 칸트는 도덕적 완전성으로 보았다면 레비나스는 ‘나보다 타자를 앞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본 것을 제외한다면 두 철학자는 다 같이 ‘거룩함’ 또는 ‘성화된 삶’이 우리의 도덕적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고 고통이 여기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형이상학과 존재론/하이데거/레비나스
p. 242
하이데거는 ‘기술적 사유’ 혹은 ‘계산하는 사유’에 바탕을 둔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고 ‘근원적 사유’, 혹은 ‘자각적 사유’를 ‘존재 사유’로 이해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이해와 지배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나의 지배와 소유의 틀 안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사유를 ‘형이상학’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존재 사유’의 필요성을 역설한 반면, 레비나스는 ‘존재론’을 극복하고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자유와 책임/칸트와 레비나스
pp. 246-7
타자의 얼굴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자유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에 오직 윤리만이 권력의지를 의심하고 문제삼을 수 있다. 나의 맹목적 권력 의지가 아니라 힘없는 타인의 얼굴이 나의 자유의 의미를 규정한다. 여기서 자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나의 ‘할 수 있음,’ 나의 ‘힘’에서 나오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며 타인에게 책임지는 가운데 나의 자유도 그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 인격의 가치를 그토록 강조한 칸트조차도 우리의 도덕적 책임의 근저에 자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247]에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명제는 “자유는 책임에 선행한다” 또는 “책임은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핵심 명제는 “책임은 자유에 선행한다” 또는 “자유는 책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나의 자유는 타인에 의해 방향이 잡히게 된다. 따라서 타인의 선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의 존재만을 고려한 자유의 행사는 악이 될 수 있다.
비판철학/레비나스/칸트/하이데거
pp. 250-1
레비나스의 이해에 따르면 현실 이해로서의 존재론은 독단론이다. 그러나 타자의 현존에 의해 나의 존재가 문제시되는 경험, 나의 자유와 나의 지식과 나의 세계를 문제 삼는 일, 다시 말해 ‘회의론’은 타인 없이, 타인에 대한 고려와 배려 없이 이룬 나의 행적과 공적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하도록 길을 터준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필연적으로 독단론에서 회의론으로, 회의론에서 비판철학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존재론 차원에서, ‘외재성에 대한 존경’에서 우러나온 철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형식상으로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1판 서문에서 근대 형이상학의 행로를 독단론에서 회의론으로, 회의론에서 다시 비판철학으로의 이행으로 밝힌 바와 같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유의 과제로서 표상적 사유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존재 사유로 전환했다면 레비나스는 실천적, 윤리적 사유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외재성의 관점, 타인의 얼굴에 의해 내 존재 자체가 문제시된 상황에서 철학은 존재론 비판으로 가능하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자의 사유, 곧 윤리학으로서의 철{251}학이 가능함을 레비나스는 보여주고자 했다. 윤리는, 그리고 윤리학은 레비나스에게 존재론 비판으로서의 비판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선후관계
p. 251
존재론을 통째로 폐기하는 일은 레비나스의 의도와 거리가 멀다. “인간 자싡이 존재론”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우리는 존재론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윤리학)을 앞서게 하고 존재론을 뒤따라오게 하는 일이다.
타자철학의 원천/플라톤, 데카르트, 칸트에서 유대교까지
pp. 251-3
플라톤은 선의 이념을 존재 이념 저편에 놓았을 뿐만 아니라 존재론에 대해 윤리학의 수위성을 선언한 철학자였다. 그래{252}서 레비나스는 “모든 존재 저 너머 선을 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 가르쳐 준 가장 심원한 교훈이요 결정적 가르침이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타자 철학의 또 다른 한 예가 된다. 모두 잘 알듯이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의 존재론적 확실성을 내 속에 있는 무한자의 이념을 통해 그 터를 튼튼하게 닦는다. … 데카르트의 무한자의 이념을 레비나스는 윤리적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중심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칸트의 실천이성의 수위성에 대한 강조가 함께 작용한다. … 존재 지평 안으로 흡수할 수 없는 존재 저 너머의 도덕 세계의 우선성 또는 이론 이성에 대한 실천 이성의 수위성을 강조한 점에서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는 분명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자유에 대한 책임의 선행성을 강조한 반면 칸트는 자유의 선행성을 강조한 점은 두 철학자 사이에 그럼에도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외에도 헤겔, 포이어바흐, 사르트르, 마르셀, 부버 등이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도 간과할 수 없다.
{253}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 중요한 원천이 된 것은 역시 유대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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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리운 102/원재훈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 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남은
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
지는
내가, 내 삶의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줄 몰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