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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을 책망하는 사울
삼상 22:6-10
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9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삼상 22:6-10 / [제사장들에게 복수하는 사울] 다윗이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유다 땅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사울에게 들려 왔다. 그때 사울은 기브아 산당에 있는 위성류나무 아래에서 창을 들고 앉아 있었으며, 그의 수행원들은 모두 그의 곁에 둘러서 있었다. 7) 사울은 즉각 신하들에게 호령을 하였다. `너희 남쪽 지방 사람들아, 이제는 남쪽에서 왕이 나왔으니 잘되었구나. 그 이새의 아들이 특별히 베냐민 지파의 출신인 너희들에게 밭과 포도원을 선물로 주고, 너희들만 골라서 모두 군대 지휘관으로 삼겠다더냐? 8) 너희가 모두 그 사람과 한 패가 되어 나를 뒤엎으려고 공모라도 할 작정이냐?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작당하였어도 나에게 그것을 일러주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공모하였어도 아무도 그것을 염려해 주지 않았다. 내 자식이 내 신하를 부추겨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그것을 나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9) 사울 곁에 서 있던 지휘관들 중에는 에돔 사람 도엑이 끼여 있었다. 마침 그가 나서서 사울에게 일러바쳤다. `제가 이새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가 놉으로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 제사장과 만날 때였습니다. 10) 아히멜렉은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 묻고, 그에게 먹을 것도 주고,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칼까지 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에서 모압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소식을 듣고서 자기에게 알리는 자가 한 명도 없다면서 자기 신하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때에 도엑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며 그를 고발했습니다.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6-8) 사울은 자신의 왕위 보존을 위하여 다윗을 제거하려 했는데 그가 무리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손에 단창을 들고 자기 신하들을 데리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은 자기 신하들에게 “다윗이 너희에게 밭과 포도원을 주며 천부장과 백부장을 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다른 지파 출신인 다윗이 너희들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내 편에 서는 것이 너희들에게 더 유익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자기 신하들이 다윗과 공모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대적하고 고발하는 자도 한 명도 없고 자기를 해하려 하는 것을 알리는 자가 한 명도 없다면서 분노했습니다. 사울은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면서 자기 신하들의 약한 충성심을 책망했습니다.
음식도 주고 칼도 주더이다(9-10) 에돔 출신인 도엑은 사울이 자기 신하들을 책망하는 말을 듣고 놉에서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일을 고발함으로서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내 보이려 했습니다. 도엑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사실을 말하면서 세 가지를 고발했습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을 위하여 여호와께 물은 것, 둘째는 그에게 음식도 준 것, 셋째는 보관 중이던 골리앗의 칼을 내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하여 여호와께 물은 일은 사무엘상 21장 1-10절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22장 15절에 나오는 아히멜렉의 답변으로 볼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적 용 : 다윗에 대한 질투심으로 가득한 사울은 자기 신하들을 책망했고, 간사한 도엑은 아히멜렉을 고발했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의 질투와 간사함을 어떻게 다스리십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격려는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아내의 격려 한 마디가 ‘자살’을 결심한 남편에게 ‘살자’는 용기를 심어주듯이 사랑은 관심입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격려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만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마음으로 위로와 격려를 해 드리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호크마 주석
=====22:6
사울이 다윗...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 본서 저자는 놉의 제사장들이 대량 학살을 당하는 사건의 초두에서 이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유다에 나타난 이 사실이 대학살 사건이 벌어지게 된 한 요인이었음을 암시하려고 했다. 한편 여기의 '나타났다'는 '야다'(* )의 수동형으로서, '알려졌다'로 번역함이 타당할 듯하다(시 76:1; 잠 31:23; 전 6:10).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 여기의 '높은 곳'은 산당(山堂)을 의미치 않는다. 다만 자신의 왕적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사울에 의하여 선택된 높은 곳의 자리를 가리킬 뿐이다(Keil, Fay). 손에 단창을 들고 - '단창'은 사울이 항상 소지하던 것으로서(18:10; 19:9, 10; 26:7, 8, 11, 12, 16; 삼하 1:6), 왕들이 흔히 지참하는 홀처럼 왕의 위엄을 상징(히 1:8)하는 것이다(Fay). 그런데 사울이 홀 대신에 '단창'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수행하던 왕직(王職)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9:16, 17). 에셀 나무 아래 앉았고 - '에셀나무'(tamarisk tree)는 보통 사막 지역의 와디(Wadi, 건천)에서 자생하는 연질(軟質)의 나무이다. 이 나무는 수많은 가느다란 가지에 비늘과 같은 잎이 달려있으며, 꽃의 색깔은 하얗다. 그런데 이것은 고지대에서 특히 귀하다는 사실때문에, 대부분 산지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히 여겨졌다.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이 에셀 나무 아래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Klein). 더구나 여호와 숭배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이나무를 브엘세바에 심었다는 사실 또한 이 나무를 소중히 여기도록 한 한 가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창 21:33). 또한 후일 사울이 이 나무 아래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은(31:13), 그가 이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다는 증거도 된다.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 이것은 '어전 회의'(御前會議)에 대한 묘사로서, 사울은 중대한 국사(國史)는 이러한 어전 회의를 통해 이견을 듣고, 또한 명령을 시달한 것 같다.
=====22:7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 사울의 신하들이 이처럼 사울의 지파와 동일한(9:1, 2)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즉 (1) 사울의 민족 단합 정책이 거의 실패로 돌아갔으며(Smith), (2) 사울이 자신의 병적인 피해 의식에 따라 편증된 인사(人事) 정책을 실시했음을 깨닫게 해준다(Fay, Keil). 이새의 아들 -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호칭이다<20:30>. 너희에게...밭과 포도원을 주며 - 여기의 '밭과 포도원'은 왕에 대한 봉사.충성의 대가로 하사받는 토지를 가리킨다(8:14). 그런데 사실 여기의 '밭과 포도원'은 왕권(王權)을 이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의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경고했던 바(8:11-18), 곧 왕이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라는 예언이 사울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8:14>.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 사울의 이 말도 역시 사무엘이 예언했던 왕의 직권 남용이 사울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8:12> =====22:8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 이것은 실제로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을 모해(謀害)하기로 음모를 꾸몄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신하들이 다윗을 체포하고 처치하는 데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나아가 이 말은 자신의 신하들이 다윗과 공모하여 고의적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의심의 말이기도 하다(Lange). 맹약하였으되 - 당시 다윗과 요나단 간의 우정과 사랑의 맹약은 너무도 진솔하고 탄탄한 것이었으므로, 사울 뿐만 아니라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다윗의 도피 생활에 분명 요나단이 개입되었을 터인데, 그러한 정보를 신하들 중 한 명도 자신에게 고발하지 않고 있다고 사울이 격노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아들이...나를 치려 하는 것 - 이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피해 의식이 점차 심화되어, 신하들은 물론 자신의 아들까지도 자신을 죽이려 하는 모해자(謀害者)로 의심하는 사울의 병적 증세를 보여 준다.
=====22:9,10
도엑이...신하 중에 섰더니 - 여기서 '신하'(* , 에베드)는 '종이 되다', '종노릇 하다', '섬기다'란 의미를 갖는 '아바드'에서 온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 이 '신하'는 고관 대작만을 의미치 않는다. 즉 상당히 넓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한데, 아마도 여기의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 또는 사울의 근위대장 정도의 지위였던 것 같다(21:7 주석 참조).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 - 21:1 주석 참조.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 이것은 실제로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을 언급하고 있는 21:1-9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엑의 이말은 사실이다(15절). 즉 도엑이 사울에게 고발한 바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하여 여호와의 뜻을 묻고, 식물도 주고, 칼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왕명(王命) 수행을 핑계로 그러한 요구를 했다는 사실(21:2)은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러한 사실까지 말했다면, 정황을 모른 아히멜렉은 무고히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18절)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엑은 혀가 지닌 간사성과 위험성을 가장 잘 보여 준 대표적인 악인이었다(시 52:3-5; 약 3:2-6). 식물 - 성소의 떡상에서 물려냈던 진설병(21:5, 6)을 말한다.
< 설 교 >
아히멜렉과 도엑
본문: 사무엘상 22:6~23
석기현 목사(경향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제가 자랄 때에는 '애국애족'이라는 말을 초등학교 시절의 '바른생활' 교과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폐지된 '국민교육헌장' 등을 통하여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즉 애국심과 애족심은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정신이며 상식적인 소양이라고 교육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당시에는 '이완용 같은 X'이라는 말이 가장 큰 욕이었습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악한 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민족을 배반하고 조국을 팔아먹은 매국노야말로 가장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애국애족' 대신에 오로지 '나 혼자'입니다.
'나라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 됨은 전혀 깨달을 줄 모르고 '나라꼴은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 나한테 돌아오는 공짜 떡 한 개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 아예 상식처럼 통하는 시대입니다.
명백한 종북좌파 정치가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이토록 난리를 치고 있는 판인데도 그들의 '반역적이며 매국적인' 성향과 본색에 대한 비판은 전혀 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에게 연금 한 푼 더 주겠다고만 공약하면 옆집 이웃까지 설득해서 표를 몰아주는 형편인 것입니다.
정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도 물론 있지만 아예 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시 자체를 부인하는 '매국노' 역시 이 땅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과거 사울 왕 치하의 이스라엘에서도 비록 같은 '국적'은 가지고 있지만 '국가관'에 있어서는 이처럼 정반대인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6.25 전쟁' 62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과연 어떤 사람들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하여 진정한 애국자이며 반면에 어떤 무리가 이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매국적 세력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기독신자야말로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실로 애국적인 국민입니다(6-15).
사울 왕은 다윗이 '헤렛 수풀'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의 지경에 있는 헤렛 수풀에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언제라도 반정을 일으키고 자기를 퇴위시킬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다윗 본인은 그런 생각을 꿈에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울 왕은 다윗이야말로 자신의 정권을 위협하는 최대의 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울 왕은 자기 주변의 신하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들을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권력 유지에 급급했던 사울은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와 같은 지파 출신의 '혈연'만 따져서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해 놓은 전형적인 '가신(家臣)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울 왕은 그 베냐민 사람들에게 '만약 다윗이 집권하면 너희들은 국물도 없다.'라고 위협조로 말했습니다.
즉 사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고 충성을 다할 인재를 등용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상통해서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잘 받들어 모셔 줄 꼭두각시'들로만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울 왕의 기분을 제일 잘 맞추어 준 사람이 바로 "에돔 사람 도엑"이었습니다.
이 도엑이란 인물은 바로 앞 장에서 다윗이 도피 중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도움을 청했을 때에 공교롭게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도엑이 사울 왕에게 자기가 보았던 사실, 즉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어서 먹게 하고 그가 보관하고 있던 골리앗의 칼까지 준 사실을 사울에게 일러바쳤던 것이었습니다.
도엑의 고발을 들은 사울은 당장 아히멜렉 제사장을 '이새의 아들과 공모했다'는 반란 동조 죄목으로 붙잡아 와서 직접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살기등등한 사울 왕 앞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변호는 일절 하지 않고 오히려 다윗을 위한 변호부터 시작했습니다.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라는 말이 그의 첫마디였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제일 처음 사울 왕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당시 이스라엘 군대 전체를 위협하고 있던 그 두려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물리친 용장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무수한 전공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라고 극진히 존중했습니다.
나중에 사울 왕이 하나님의 천벌을 받아 죽은 후에도 오히려 그를 위하여 슬피 애가를 지어 부르면서 애도했을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이라는 인간을 진심으로 존경해서가 결코 아니라, 그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조국으로 진정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사울 왕이 자기에 대한 최대 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다윗이야말로 그 자신에게도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인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둘도 없는 최고의 유능하면서도 애국적인 장군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다윗은 충신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자신에게는 사형선고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나 다름없음을 아히멜렉 제사장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신앙양심을 따라 옳은 편에 섰으며 죽더라도 정도(正道)를 따르기로 각오했던 것이었습니다.
놉의 다른 제사장들은 그 문제의 사건이 일어났던 날에 다윗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자초지종조차도 전혀 모르다가 그 자리에 붙잡혀 와서야 알게 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처럼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당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고, 끝까지 진짜 충신 편에 서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의리와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이처럼 사울 왕이 그토록 미워하고 잡아 죽이려 했던 다윗, 그리고 그런 다윗을 옹호하고 자기 목숨을 대신 바치면서까지 지켜 주려 했던 아히멜렉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정말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기독신자는 역사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애국애족하는 국민이었으며 그것은 특히 국난을 당할 때일수록 더욱 보석처럼 빛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 하에 있을 때에 각종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3.1 독립 선언'만 해도 거기에 서명을 한 대표자들 가운데 거의 반수가 기독신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3.1 운동' 후에 따라온 일제의 검거와 탄압에 가장 가혹하고 처절한 박해를 받은 것도 바로 기독교였으며 적어도 100개 이상의 교회들이 파괴 내지는 소각되고 수많은 성도들이 집단학살까지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 때에도 역시 기독교는 구국 운동에 가장 앞장 섰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을 침략한 국가적 원수이기도 했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그 누구보다도 핍박하는 영적 원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공산군 역시 '6.25 전쟁' 당시에 지금에 와서는 확인된 통계를 남기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교회를 파괴하고 신자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산까지 피난을 왔던 신자들이 구국을 위한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바로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때문에 대한민국은 끝내 자유민주주의의 국권을 지키게 된 것이었습니다.
왜 참된 기독신자는 그토록 특별한 애국자가 됩니까?
왜냐하면 신자는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존속할 수 있으며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만이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신자들은 무슨 '노사모'니 '박사모'니 하는 따위의 '사람을 추앙하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오직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그 조국을 굳게 지키고 바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지지하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로 참된 기독교인이 지키고 발휘하는 '정치의 정도'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이런 진짜 애국적인 기독신자들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의 국가관'을 사수하는 이 나라의 '파수꾼'이 되며 '기도로써 조국을 살리는' 이 시대의 '의인 십인'이 됨으로써 진정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영원히 번영케 하는 핵심 애국세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반기독교 선동을 하는 자들이야말로 조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매국적 무리입니다(16-23).
아히멜렉의 당당한 변명을 들은 사울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 당장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그 자리에서 내렸습니다. 하지만 "좌우의 시위자"들, 즉 "왕의 신하들"은 "손을 들어 제사장 죽이기를 싫어"했습니다.
비록 왕명이 추상같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것만은 양심적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측근들조차 꺼려하면서 복종하지 않는 것을 본 사울 왕은 조금 전에 자기에게 아히멜렉을 고발해 주었던 "도엑"에게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도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세마포 에봇을 입은 자" 즉 제사장들 "팔십오 인"과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 즉 그 제사장들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칼로 쳐" 죽였습니다.
사울 왕의 가신들조차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하기 싫어했던 일을 왜 도엑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본래 출신이 '에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방 민족'에 속한 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당시 이미 사울 왕 밑에서 '목자장'(삼상 21:7)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사울 왕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가축들을 총관리하는 책임자로서 상당히 높은 직위였습니다.
그런 도엑으로서는 그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입신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울 왕의 다른 신하들이 아무도 복종하려 하지 않는 왕명을 자기가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나면 이제 '목자장'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아주 간단한 계산이었습니다.
사울은 그처럼 국가의 중요한 관직에 오직 개인의 영달만을 노리는 이방인 출신의 우상숭배자를 임명해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성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집단살해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무서운 살육극을 피해서 간신히 살아남은 유일한 한 사람, 아히멜렉 제사장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을 찾아와서 그 자초지종을 고해 주었습니다.
그 비극적 소식을 들은 다윗의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자기가 아히멜렉 제사장을 만나 도움을 청했던 "그 날" 바로 그 자리에 하필이면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것이라고 다윗도 염려하고 있었는데 그 불안이 그만 현실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라고 진심으로 사과를 했지만, 사실은 물론 다윗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미리 예방할 아무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이 그런 예상, 즉 도엑이 나중에 "반드시" 사울 왕에게 밀고할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그가 "에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제사장을 고발하는 악행을 감히 행할 수 없겠지만, 불신앙의 이방인이라면 그런 일을 조금도 거리껴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는 종북좌파 무리들 역시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도 가장 앞장서서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비록 자기네가 '종북좌파'라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는 인정도 부정도 끝까지 하지 않고 있지만,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최근의 총선 때에 "'oo 통합당'이든지 '통합 xx당'이든지 간에 무조건 통합당을 찍고 복지국가 인민의 낙원으로 날래날래 오시라요."라는 문구와 인공기까지 박혀 있는 대형 플래카드가 시청 앞 어딘가에 버젓이 펼쳐져 있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누가 페이스북에 사진으로 올려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이 '종북'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그들은 창당 첫 행사 때부터 태극기 게양하는 것을 반대했고 애국가 제창은 끝까지 거부했던 자들입니다. 겨우 태극기만은 걸게 되었던 내막도 순전히 '수권 정당이 되려면 이것만은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태극기를 거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대권까지 쟁취하려면 국민들에게 '그래도 태극기는 걸 줄 아는 정당'이라는 인식을 남겨 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으로 마지못해 태극기를 건 그런 자들이 정말 '애국 정치인'들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정말 정신들 좀 차리세요. 그런 종북좌파 무리들이 이 대한민국의 국회의석을 열 몇 개나 차지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아예 대권까지 노리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종속시키는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일념에 있다는 것이 여러분의 눈에 그렇게도 안 보입니까?
같은 당의 당원들이 보아도 부정선거를 한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50퍼센트 이상 부정이 아니면 부정선거가 아니다.'라든지 '부실은 있었지만 부정은 없었다.'라는 기가 막히는 억지논리로써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들이 그네들의 말대로 정말 '수권 정당'이 된다면 이 대한민국을 그들의 '종북좌파적 독재 정권' 아래 영원히 포로로 만들 것이 너무나 뻔하다는 사실을 이 나라에서 스스로 소위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국민들은 그렇게도 못 깨닫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매국적인 종북좌파 정치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아예 노골적인 적대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가 내뱉었던 "기독교는 범죄 집단이다."라는 말은 '종교는 마약과 같다.'라는 공산주의자들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자기네가 정권을 잡으면 '즉시 없애야 할 대형교회 50개'의 명단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은 저 침략자 공산군들이 60년 전에 저질렀던 기독교 박해의 만행을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소리와 도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스스로 소위 '기독신자'라고 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그런 반역적이요 반기독교적인 정당의 후보자들에게 표를 던져 주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도대체 어떤 신앙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에돔 사람 도엑'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거침없이 살해하게 됩니다.
종북좌파 무리가 정권을 잡게 되면 제일 먼저 할 것이 바로 교회와 기독신자부터 없애고 죽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발 똑바로 깨닫고 이 대한민국 안에서 이미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는 '반기독적인 매국 세력'을 지극히 경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애국자'와 '매국노'를 가려내는 것, 이것이 만약 '색깔론'이라면 정말이지 이 나라를 위해 꼭 있어야만 할,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할 '색깔론'이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애국자라면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진보'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진짜 색깔을 숨기고 있는 종북좌파의 매국노들을 가려낼 줄 알아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을 세운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정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빈부의 격차'를 자극하는 공산주의식 선동만을 일삼고, 반공의 국시를 무시할 뿐 아니라 '북한의 세습은 북한의 고유문화일 뿐'이라고 사상 최악의 독재정권을 열렬히 옹호하고 있으며, 하나님 유일신앙 대신에 김일성의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는 이 '국가적 반역자'인 동시에 '신앙의 핍박자'인 정치가들의 정체를 적어도 우리 기독신자들만이라도 눈 똑바로 뜨고 살필 줄 알아야 이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 기독신자들 중에 자신을 '중도적 진보주의'라고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정말 묻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반공 정신에 입각한 진보주의'라고 스스로 말하는 정치인을 단 한 명이라도 보았습니까?
웬걸, 태극기 게양을 거부하고 애국가를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과도 '야권 연대'라는 것은 꼭 해야 하겠다는 것이 이 나라의 소위 '진보적 정당'들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히 사수하는 진보주의'가 정말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라는 글자는 꼭 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이 나라의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아닙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중도적 진보주의'라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애초에 '보수'라는 말 자체가 '전통적 가치관과 기존의 체계를 지키려는 것'이며 '진보'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관과 체계를 이룩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나라의 소위 진보주의 정치가들이 그 '새로운 가치관과 체계'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대체시키려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을 두고 '수구꼴통'이라고 욕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젊은 세대 여러분은 제발 진지하게, 곰곰이 좀 생각해 보세요.
대한민국이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을 버리고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으로 가는 것이 정말 '진보'라고 판단됩니까?
우리가 군사독재를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보수적 가치관'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공산화'로 '진보'시키겠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는 말입니까?
제가 확실히 말합니다. '진보주의'라는 미명의 탈을 쓰고 있는 '종북좌파' 무리야말로 이 대한민국을 저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 혁명 시대'까지 퇴보시키려 하는 진짜 '수구꼴통'인 것입니다.
'애국자'는 자기 목숨까지 대신 바쳐서라도 조국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매국노'는 자기 혼자만의 영달을 위해서 문자 그대로 '나라까지 팔아먹는' 자일 뿐입니다.
62년 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지켜내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물려 준 이 대한민국을 바로 그때 이 조국을 불법남침했던 원수에게 지금 고스란히 넘겨주려 하고 있는 진짜 반역자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직시하는 가운데, 조국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남북의 한민족이 자유민주주의 정권 아래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그 한 날을 위하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이 나라의 진정한 애국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고발자 도엑의 죄
삼상 22장 6~23절 /
들어가는 말
지난봄에 발생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수사해 온 서울중앙지검은 11일 이인규 전 지원관과 김모 점검 1팀장을 구속기소하고 팀원 1명을 불구속기소했습니다. 혐의는 2008년 9월 컴퓨터 블로그에 대통령 비방 동영상을 올린 김종익 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국민은행 관련회사 KB한마음의 사무실을 뒤지고 국민은행을 통해 압력을 넣어 김씨가 대표이사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불법사찰’이라고 하면 보통은 국가의 정보기관에서 정치인들 모르게 개인적인 정보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행하던 일로 독재정권시절에도 인권을 침해하는 아주 나쁜 짓거리인데,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 불법사찰이 일어났다는 것이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더욱이 정치인들을 사찰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을 사찰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더욱 놀랐습니다.
여기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현 정치인들의 부인들까지 불법으로 사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인 남○필 의원은 자신의 부인이 불법 사찰을 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찰’이란 뜻은 조사하여 살핀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남의 행동을 몰래 엿보아 살핀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민간인 사찰이란 그런 내용에서 이른바 아무런 해당이 없는 사람을 몰래 엿보고 살핀다는 내용입니다.
정치인 사찰이든지, 민간인 사찰이든지 남의 행동을 몰래 엿보고 살피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며, 국가에서 부여해 준 권한 이외의 월권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려고 한다면 불법적인 정보 수집을 하거나 그것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이와 같은 행동들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수집까지 막자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울의 병든 자아상은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으로 발전하였습니다.
8절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사울은 늘 불안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신하들을 선동하여 매복하였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사실을 고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울의 병든 자아상이 만든 그릇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릇된 생각에 동조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도엑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도엑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 살펴보고 영적인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몸말
첫 번째, 도엑은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삼상 21:7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다윗이 아둘람 굴을 떠나 놉 땅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피했을 때, 도엑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에돔 사람이었고, 사울의 목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엑은 자신의 신분을 숨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나중에 그곳에서 도엑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22절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의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이 말은 아히멜렉 제사장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도망 왔을 때, 다윗이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도엑의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다윗은 도망자였고, 사울은 현재 왕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편에 서야 자신에게 유리한지 저울질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나 대의보다는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도엑과 같이 기회주의적인 실패자가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성공과 출세를 위해 저울질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돈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대가로 돌아왔습니다.
기회주의는 이와 같이 일관된 입장을 지니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1993년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쉰들러는 체코 출신의 나치 당원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서 히틀러를 찬양하고 독일을 위해 어떤 충성도 다짐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업에 성공을 하려면 인건비가 저렴해야 합니다. 인건비가 높으면 물건의 가격이 올라가고, 물건의 가격이 올라가면 가격경쟁력에 뒤처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업가 쉰들러는 나치 수용소에 있는 유대인들을 아주 저렴하게 자신의 공장에 일군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나치 친위대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반인륜적인 모습들을 목격합니다. 일례로 유대인 수용소의 나치의 장교는 아침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편 후에 총을 들고 수용소 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겨냥해 그 중에 한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립니다. 그 죽임을 받은 유대인도 우리와 똑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인데, 아무 의미 없게 그냥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인을 죽인 나치의 장교는 부인이 끓여 준 모닝커피를 마시면 기분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이런 모습에 충격을 받은 쉰들러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동원하여 유대인들을 구하게 됩니다. 쉰들러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를 쓰는 영화의 장면들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합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명단이 바로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오스카 쉰들러는 실존한 인물이고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묘지를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나치의 반인륜적인 죄를 눈감아 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회주의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잘못된 일이라도 인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옳다는 신념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어떤 손해를 감수한다고 할지라도 지킬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도엑은 남을 감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9, 10절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보았었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한마디로 도엑은 불법사찰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히멜렉 제사장이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여호와께 물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식물을 주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자신의 성공과 출세가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히멜렉과 다윗 사이에서 있었던 내용을 그대로 사울에게 보고합니다. 그는 남을 감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감시하는 사람은 결코 옳은 사람이 아닙니다.
1975년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사퇴를 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의 공화당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야당인 민주당 정치인들을 몰래 도청한 사건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도청기를 이용해서 민주당 의원들의 이야기를 몰래 사찰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민주당에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공화당은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잃어버린 민심과 민주당의 공세를 피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로 시작된 일일 테지만, 민심은 민주당의 잘못을 탓하기 보다는 민주당 의원들을 몰래 도청한 닉슨 행정부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몰래 남을 사찰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결국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에 대통령이 사퇴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고금소총에 나오는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옛날 미모와 재덕을 갖춘 가난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웃마을 양반과 정혼을 하고 그 예를 거행하려고 했는데, 가까운 곳에 사는 이방의 아들이 그녀의 정혼 자를 찾아가서 자신이 그녀와 ‘정(情)을 통한 사이인데, 결혼해도 괜찮겠소.’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결혼이 결국은 파혼하게 되었고, 이 처녀는 관가에 이 이방의 아들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고을의 사또는 이 사건을 심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또는 이방의 아들을 불러 심문하였더니 처녀와 정을 통한 사이라고 주장하며 그 처녀의 용모를 일일이 고하였고, 사또가 확인해 보니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처녀는 이미 이방의 아들의 간계로 사또의 옳은 판결이 어려워진 것을 알고, 사또에게 자신의 은밀한 곳의 신체비밀을 말하게 됩니다. “사또, 소녀는 왼쪽 유방 밑에 밤알만한 점이 있고, 그 점 위에 십여 개의 털이 있습니다. 정말로 이방의 아들이 저와 정을 통한 사이라면, 그것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옛날 처녀로써 감히 말할 수 없는 신체의 비밀을 사또에게 알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사또는 다시 이방의 아들을 불렀습니다. “네가 그 처녀와 정말 정을 통한 사이라면, 남들이 볼 수 없는 은밀한 곳에 별다른 것이 없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이방의 아들이 사또에 물음에 처녀의 유방 밑에 밤알만한 점과 십여 개의 털을 보았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이제 영락없이 처녀와 이방의 아들 사이에 정(情)이 통한 것이 사실로 들어날 것이고, 처녀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처녀는 얼굴을 붉히며 사또에게 가슴을 열어젖히고 유방 밑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십여 개의 털이 난 검은 점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처녀가 고육지책으로 거짓을 사또에게 알린 것이고 누군가 몰래 사또와의 이야기를 듣고, 이방의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이었습니다. 사또는 곧 크게 깨닫고 이방의 아들을 엄하게 신문하자 그제야 할 수 없이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사또는 처녀의 재능과 용모가 무쌍함을 보고 가상히 여겨, 이미 정혼한 자리를 물렀다는 말을 듣고 그의 둘째 아들과 혼인을 시켜 며느리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을 몰래 감시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못된 일입니다. 남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귀 기울이는 것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 성도들이야 남을 감시할 일이 없겠지만, 아무튼 남을 감시하고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 도엑은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을 죽인 사람입니다.
18절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사울 왕은 도엑의 고발을 듣고,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히멜렉을 불러 사실을 알아보니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앞뒤를 가릴 줄 몰랐던 사울은 제사장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17절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협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감히 아무도 나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은 다시 도엑에게 동일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도엑은 서슴없이 제사장들을 죽였고, 세마포를 입은 자 85명과 제사장들의 성읍인 놉 땅을 칼로 쳤습니다.
물론 이 죄를 사울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제사장을 죽이라고 명령한 명령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엑도 그 죄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분명히 하늘나라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제사장을 죽였냐?’ 그러면 도엑은 변명할 것입니다. ‘제가 제사장을 죽였지만,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은 사울입니다.’ 그러나 도엑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도엑의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때 김재규의 명령을 받아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계원, 박흥주, 박선호가 그들입니다. 김재규의 부하들도 직속상관의 명령을 따랐지만, 그들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의 종에게 함부로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의 종에게만 국한된 말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함부로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의 생명을 함부로 한 것은 크게 잘못한 일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일을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주의 일을 위임받은 사람을 함부로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함부로 하거나 무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도엑과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맺는말
새로운 국무총리와 장관 지명자들의 인사청문회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인사청문회가 시작되면 방대한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①직업, 학력, 경력에 관한 사항 ②병역신고사항 ③재산신고사항 ④최근 5년간 소득세, 재산세, 종합토지세 납부 및 체납 실적에 관한 사항 ⑤범죄경력에 관한 사항 등입니다.
특히 재산신고와 관련해서는 부동산 등기부등본은 기본, 보험, 펀드, 예금 등 금융사에 개설된 모든 계좌번호, 잔고 현황, 금융사별 채무 등을 공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등록증, 공동주택확인서, 보험증권, 보유유가증권명세도 포함됩니다. 심지어는 아파트 관리비 내역까지 제출해야 하고, 백화점이나 면세점에서 물건을 구입한 자료까지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드러난 자료만으로 상대방의 흠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불법사찰을 이용한 정보 수집을 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후보자들을 낙마시키기도 합니다.
아무튼 불법사찰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 불법사찰의 중심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도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엑은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어떤 손해와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도엑은 남을 감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몰래 감시하고 남의 말 듣기를 좋아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 하려는 것은 더욱 나쁜 죄질의 사람입니다. 남을 감시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더 좋아 해야 할 것입니다.
도엑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손에 죽기 전에 자신의 병기든 자의 손에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병기든 자는 기름부음 받은 왕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스스로 칼 위에 엎어져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허가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것이 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는 것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금정교회 성도들은 도엑과 같은 잘못된 신앙을 하지 않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히멜렉과 도엑
삼상 22장 6~23절 / 석기현목사
제가 자랄 때에는 '애국애족'이라는 말을 초등학교 시절의 '바른생활' 교과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폐지된 '국민교육헌장' 등을 통하여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즉 애국심과 애족심은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정신이며 상식적인 소양이라고 교육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반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당시에는 '이완용 같은 X'이라는 말이 가장 큰 욕이었습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악한 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민족을 배반하고 조국을 팔아먹은 매국노야말로 가장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애국애족' 대신에 오로지 '나 혼자'입니다.
'나라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 됨은 전혀 깨달을 줄 모르고 '나라꼴은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 나한테 돌아오는 공짜 떡 한 개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 아예 상식처럼 통하는 시대입니다.
명백한 종북좌파 정치가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이토록 난리를 치고 있는 판인데도 그들의 '반역적이며 매국적인' 성향과 본색에 대한 비판은 전혀 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에게 연금 한 푼 더 주겠다고만 공약하면 옆집 이웃까지 설득해서 표를 몰아주는 형편인 것입니다.
정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도 물론 있지만 아예 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시 자체를 부인하는 '매국노' 역시 이 땅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과거 사울 왕 치하의 이스라엘에서도 비록 같은 '국적'은 가지고 있지만 '국가관'에 있어서는 이처럼 정반대인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6.25 전쟁' 62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과연 어떤 사람들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하여 진정한 애국자이며 반면에 어떤 무리가 이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매국적 세력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기독신자야말로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실로 애국적인 국민입니다.
6절부터 15절에 기록하기를 "6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7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9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10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11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12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14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15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 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헤렛 수풀'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의 지경에 있는 헤렛 수풀에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언제라도 반정을 일으키고 자기를 퇴위시킬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다윗 본인은 그런 생각을 꿈에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울 왕은 다윗이야말로 자신의 정권을 위협하는 최대의 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울 왕은 자기 주변의 신하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들을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권력 유지에 급급했던 사울은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와 같은 지파 출신의 '혈연'만 따져서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해 놓은 전형적인 '가신(家臣)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울 왕은 그 베냐민 사람들에게 '만약 다윗이 집권하면 너희들은 국물도 없다.'라고 위협조로 말했습니다.
즉 사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고 충성을 다할 인재를 등용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상통해서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잘 받들어 모셔 줄 꼭두각시'들로만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울 왕의 기분을 제일 잘 맞추어 준 사람이 바로 "에돔 사람 도엑"이었습니다.
이 도엑이란 인물은 바로 앞 장에서 다윗이 도피 중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도움을 청했을 때에 공교롭게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도엑이 사울 왕에게 자기가 보았던 사실, 즉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어서 먹게 하고 그가 보관하고 있던 골리앗의 칼까지 준 사실을 사울에게 일러바쳤던 것이었습니다.
도엑의 고발을 들은 사울은 당장 아히멜렉 제사장을 '이새의 아들과 공모했다'는 반란 동조 죄목으로 붙잡아 와서 직접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살기등등한 사울 왕 앞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변호는 일절 하지 않고 오히려 다윗을 위한 변호부터 시작했습니다.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라는 말이 그의 첫마디였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제일 처음 사울 왕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당시 이스라엘 군대 전체를 위협하고 있던 그 두려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물리친 용장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무수한 전공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라고 극진히 존중했습니다.
나중에 사울 왕이 하나님의 천벌을 받아 죽은 후에도 오히려 그를 위하여 슬피 애가를 지어 부르면서 애도했을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이라는 인간을 진심으로 존경해서가 결코 아니라, 그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조국으로 진정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사울 왕이 자기에 대한 최대 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다윗이야말로 그 자신에게도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인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둘도 없는 최고의 유능하면서도 애국적인 장군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다윗은 충신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자신에게는 사형선고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나 다름없음을 아히멜렉 제사장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신앙양심을 따라 옳은 편에 섰으며 죽더라도 정도(正道)를 따르기로 각오했던 것이었습니다.
놉의 다른 제사장들은 그 문제의 사건이 일어났던 날에 다윗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자초지종조차도 전혀 모르다가 그 자리에 붙잡혀 와서야 알게 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처럼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당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고, 끝까지 진짜 충신 편에 서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의리와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이처럼 사울 왕이 그토록 미워하고 잡아 죽이려 했던 다윗, 그리고 그런 다윗을 옹호하고 자기 목숨을 대신 바치면서까지 지켜 주려 했던 아히멜렉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정말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기독신자는 역사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애국애족하는 국민이었으며 그것은 특히 국난을 당할 때일수록 더욱 보석처럼 빛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 하에 있을 때에 각종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3.1 독립 선언'만 해도 거기에 서명을 한 대표자들 가운데 거의 반수가 기독신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3.1 운동' 후에 따라온 일제의 검거와 탄압에 가장 가혹하고 처절한 박해를 받은 것도 바로 기독교였으며 적어도 100개 이상의 교회들이 파괴 내지는 소각되고 수많은 성도들이 집단학살까지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 때에도 역시 기독교는 구국 운동에 가장 앞장섰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을 침략한 국가적 원수이기도 했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그 누구보다도 핍박하는 영적 원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공산군 역시 '6.25 전쟁' 당시에 지금에 와서는 확인된 통계를 남기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교회를 파괴하고 신자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산까지 피난을 왔던 신자들이 구국을 위한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바로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때문에 대한민국은 끝내 자유민주주의의 국권을 지키게 된 것이었습니다.
왜 참된 기독신자는 그토록 특별한 애국자가 됩니까?
왜냐하면 신자는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존속할 수 있으며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만이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신자들은 무슨 '노사모'니 '박사모'니 하는 따위의 '사람을 추앙하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오직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그 조국을 굳게 지키고 바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지지하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로 참된 기독교인이 지키고 발휘하는 '정치의 정도'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이런 진짜 애국적인 기독신자들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의 국가관'을 사수하는 이 나라의 '파수꾼'이 되며 '기도로써 조국을 살리는' 이 시대의 '의인 십인'이 됨으로써 진정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영원히 번영케 하는 핵심 애국세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반기독교 선동을 하는 자들이야말로 조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매국적 무리입니다.
16절 이하 23절에 "16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17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8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인을 죽였고 19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20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21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22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23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히멜렉의 당당한 변명을 들은 사울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 당장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그 자리에서 내렸습니다.
하지만 "좌우의 시위자"들, 즉 "왕의 신하들"은 "손을 들어 제사장 죽이기를 싫어"했습니다.
비록 왕명이 추상같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것만은 양심적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측근들조차 꺼려하면서 복종하지 않는 것을 본 사울 왕은 조금 전에 자기에게 아히멜렉을 고발해 주었던 "도엑"에게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도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세마포 에봇을 입은 자" 즉 제사장들 "팔십오 인"과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 즉 그 제사장들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칼로 쳐" 죽였습니다.
사울 왕의 가신들조차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하기 싫어했던 일을 왜 도엑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본래 출신이 '에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방 민족'에 속한 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당시 이미 사울 왕 밑에서 '목자장'(삼상 21:7)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사울 왕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가축들을 총관리하는 책임자로서 상당히 높은 직위였습니다.
그런 도엑으로서는 그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입신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울 왕의 다른 신하들이 아무도 복종하려 하지 않는 왕명을 자기가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나면 이제 '목자장'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아주 간단한 계산이었습니다.
사울은 그처럼 국가의 중요한 관직에 오직 개인의 영달만을 노리는 이방인 출신의 우상숭배자를 임명해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성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집단살해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무서운 살육극을 피해서 간신히 살아남은 유일한 한 사람, 아히멜렉 제사장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을 찾아와서 그 자초지종을 고해 주었습니다.
그 비극적 소식을 들은 다윗의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자기가 아히멜렉 제사장을 만나 도움을 청했던 "그 날" 바로 그 자리에 하필이면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것이라고 다윗도 염려하고 있었는데 그 불안이 그만 현실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라고 진심으로 사과를 했지만, 사실은 물론 다윗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미리 예방할 아무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이 그런 예상, 즉 도엑이 나중에 "반드시" 사울 왕에게 밀고할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그가 "에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제사장을 고발하는 악행을 감히 행할 수 없겠지만, 불신앙의 이방인이라면 그런 일을 조금도 거리껴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는 종북좌파 무리들 역시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도 가장 앞장서서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비록 자기네가 '종북좌파'라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는 인정도 부정도 끝까지 하지 않고 있지만,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최근의 총선 때에 "'oo 통합당'이든지 '통합 xx당'이든지 간에 무조건 통합당을 찍고 복지국가 인민의 낙원으로 날래날래 오시라요."라는 문구와 인공기까지 박혀 있는 대형 플래카드가 시청 앞 어딘가에 버젓이 펼쳐져 있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누가 페이스북에 사진으로 올려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이 '종북'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그들은 창당 첫 행사 때부터 태극기 게양하는 것을 반대했고 애국가 제창은 끝까지 거부했던 자들입니다.
겨우 태극기만은 걸게 되었던 내막도 순전히 '수권 정당이 되려면 이것만은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태극기를 거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대권까지 쟁취하려면 국민들에게 '그래도 태극기는 걸 줄 아는 정당'이라는 인식을 남겨 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으로 마지못해 태극기를 건 그런 자들이 정말 '애국 정치인'들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정말 정신들 좀 차리세요.
그런 종북좌파 무리들이 이 대한민국의 국회의석을 열 몇 개나 차지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아예 대권까지 노리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종속시키는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일념에 있다는 것이 여러분의 눈에 그렇게도 안 보입니까?
같은 당의 당원들이 보아도 부정선거를 한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50퍼센트 이상 부정이 아니면 부정선거가 아니다.'라든지 '부실은 있었지만 부정은 없었다.'라는 기가 막히는 억지논리로써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들이 그네들의 말대로 정말 '수권 정당'이 된다면 이 대한민국을 그들의 '종북좌파적 독재 정권' 아래 영원히 포로로 만들 것이 너무나 뻔하다는 사실을 이 나라에서 스스로 소위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국민들은 그렇게도 못 깨닫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매국적인 종북좌파 정치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아예 노골적인 적대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가 내뱉었던 "기독교는 범죄 집단이다."라는 말은 '종교는 마약과 같다.'라는 공산주의자들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자기네가 정권을 잡으면 '즉시 없애야 할 대형교회 50개'의 명단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은 저 침략자 공산군들이 60년 전에 저질렀던 기독교 박해의 만행을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소리와 도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스스로 소위 '기독신자'라고 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그런 반역적이요 반기독교적인 정당의 후보자들에게 표를 던져 주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도대체 어떤 신앙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에돔 사람 도엑'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거침없이 살해하게 됩니다.
종북좌파 무리가 정권을 잡게 되면 제일 먼저 할 것이 바로 교회와 기독신자부터 없애고 죽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발 똑바로 깨닫고 이 대한민국 안에서 이미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는 '반기독적인 매국 세력'을 지극히 경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애국자'와 '매국노'를 가려내는 것, 이것이 만약 '색깔론'이라면 정말이지 이 나라를 위해 꼭 있어야만 할,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할 '색깔론'이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애국자라면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진보'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진짜 색깔을 숨기고 있는 종북좌파의 매국노들을 가려낼 줄 알아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을 세운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정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빈부의 격차'를 자극하는 공산주의식 선동만을 일삼고, 반공의 국시를 무시할 뿐 아니라 '북한의 세습은 북한의 고유문화일 뿐'이라고 사상 최악의 독재정권을 열렬히 옹호하고 있으며, 하나님 유일신앙 대신에 김일성의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는 이 '국가적 반역자'인 동시에 '신앙의 핍박자'인 정치가들의 정체를 적어도 우리 기독신자들만이라도 눈 똑바로 뜨고 살필 줄 알아야 이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 기독신자들 중에 자신을 '중도적 진보주의'라고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정말 묻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반공 정신에 입각한 진보주의'라고 스스로 말하는 정치인을 단 한 명이라도 보았습니까?
웬걸, 태극기 게양을 거부하고 애국가를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과도 '야권 연대'라는 것은 꼭 해야 하겠다는 것이 이 나라의 소위 '진보적 정당'들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히 사수하는 진보주의'가 정말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라는 글자는 꼭 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이 나라의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아닙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중도적 진보주의'라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애초에 '보수'라는 말 자체가 '전통적 가치관과 기존의 체계를 지키려는 것'이며 '진보'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관과 체계를 이룩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나라의 소위 진보주의 정치가들이 그 '새로운 가치관과 체계'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대체시키려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을 두고 '수구꼴통'이라고 욕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젊은 세대 여러분은 제발 진지하게, 곰곰이 좀 생각해 보세요.
대한민국이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을 버리고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으로 가는 것이 정말 '진보'라고 판단됩니까?
우리가 군사독재를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보수적 가치관'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공산화'로 '진보'시키겠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는 말입니까?
제가 확실히 말합니다.
'진보주의'라는 미명의 탈을 쓰고 있는 '종북좌파' 무리야말로 이 대한민국을 저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 혁명 시대'까지 퇴보시키려 하는 진짜 '수구꼴통'인 것입니다.
'애국자'는 자기 목숨까지 대신 바쳐서라도 조국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매국노'는 자기 혼자만의 영달을 위해서 문자 그대로 '나라까지 팔아먹는' 자일 뿐입니다.
62년 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지켜내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물려 준 이 대한민국을 바로 그때 이 조국을 불법남침했던 원수에게 지금 고스란히 넘겨주려 하고 있는 진짜 반역자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직시하는 가운데, 조국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남북의 한민족이 자유민주주의 정권 아래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그 한 날을 위하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이 나라의 진정한 애국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끔찍한 비극도 하나님의 뜻인가
삼상 22장 6~23절 /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들어가는 말]
약 2년 전부터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 세상에는 사건과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났고, 최근에도 비극적인 일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에는 지난 12월 10일 미국 중부 6개주에 불어 닥친 토네이도로 인하여 100명 가까이 사망했고, 100여 년 만에 가장 긴 지역에 걸쳐 발생한 최악의 토네이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번에 재난지원헌금도 함께 했습니다. 또 새해 들어 1월 15일 남태평양 통가 해저 화산 폭발로 최소 7명 사망했고, 600명이 실종되었다고 하니까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에서도 작년 6월 광주에서 철거 중이던 건물이 무너졌는데, 그 건물 바로 앞에 있던 버스 하나가 출발해서 가자마자 바로 건물이 무너져서 그 뒤에 머물러 있던 버스를 덮쳐 거기 타 있던 사람들 중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난 1월 11일 또 다시 같은 광주에서 아파트 붕괴로 6명의 인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2004년 인도양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와 2011년 일본 쓰나미 발생 때도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두시는가?’
그런데 사실 역사를 보면 그러한 자연재해로 인한 어려움보다도,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태인 학살 사건을 비롯해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도 있고, 2001년 9.11 테러 공격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잔인한 테러 공격이나 살인사건 같이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이런 비참한 사건이 벌어질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막지 못하시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지 못하십니까? 이런 끔찍한 비극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선한 신이 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그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학살당하는 아주 참혹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그런 끔찍한 죽임을 당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다는 말입니까? 왜 막아주지 않으신 것입니까?
1. 사울의 피해망상과 간교한 도엑 (6~10절)
지난주 본문인 22장 앞부분에서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든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다윗은 유다 땅으로 들어가고, 이 소식은 사울에게 즉시 보고됩니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6-7절)
이 모습을 보면 사울이 겉으로 뭔가 센 모습으로 보이려고 단창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굳이 들 필요가 없는 것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이때 사울은 곁에 있는 베냐민 지파 출신 신하들에게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말을 합니다. 사울도 열두 지파 중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측근들에게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들을 다그치면서 ‘이새의 아들’ 즉 다윗과 그들이 내통한다고 보았거나, 앞으로 내통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경고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울의 피해망상일 뿐입니다. 누가 이들 중 다윗과 내통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사울은 더욱 확신에 찬 말투로 그들이 공모해서 자신을 대적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8절)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들 나만 미워해’입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요나단도 매복했다가 자기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정말 심한 피해망상증입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 그것도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의심하고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와 같은 베냐민 출신 신하들을 의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들인 요나단이 자기를 치려 한다고 의심합니다. 아주 심각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결국 이런 극단적인 피해망상 때문에 제사장 학살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사울이 피해망상적인 불평을 쏟아놓던 바로 그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에돔 사람 도엑입니다. 그는 성소가 있는 놉에 갔다가 자기가 본 것을 사울에게 보고합니다.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9-10절)
도엑은 이스라엘 남동쪽에 위치한 에돔 사람입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다윗)이 놉에 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구하자, 아히멜랙이 다윗이 해야 할 일을 주님께 여쭈어보고 나서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었다고 증언합니다.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라는 말은 도엑이 지어낸 말입니다. 물론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기도해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도엑이 더 극적으로 만들려고 붙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엑은 여기서 아무런 정치적 의도 없이 일어났던 다윗과 아히멜렉의 만남을 의도적인 반역으로 슬쩍 몰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정치공작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요즘만 있는 게 아니라 옛날은 더 심했습니다. 요즘은 그래도 법에 호소하며 고소를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증거도 필요 없고 그냥 죽이라고 하면 죽는 겁니다. 지금 도엑은 정치공작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21장 7절을 보면, 도엑을 가리켜 ‘사울의 신하’이자 ‘사울의 목자장’이라고 묘사합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하면 사울의 비서실장내지 비밀정보대장 쯤 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울의 신하였고, 목자장으로 사울의 가축들을 돌보던 측근이었습니다. 도엑은 사울의 왕궁에서 일하던 신하로서, 다윗이 와서 노래하며 연주하던 것, 또한 사울이 다윗을 좋아하다가도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그를 죽이려 창을 던진 것도 다 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필 다윗이 놉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왔던 그날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연치고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그가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라고 기록합니다(21:7). 그러니까 뭔가 어떤 종교의식을 하려고 놉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 와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는 속죄 의식이나 정결 의식 같은 것을 행하려고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날 그 시간 도엑은 놉의 성소에 있다가 갑자기 등장한 다윗을 보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왜나하면 자신의 주군인 사울이 죽이려고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을 얻어먹는 것도, 골리앗의 칼을 받아 들고 나가는 것도 다 보았습니다. 다윗도 그가 거기 있는 것을 보았지만, 도엑이 일대일로 감히 다윗에게 맞설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굴하고 음흉하게 뒤에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에게 그것을 보고합니다.
곧 밝혀지게 되지만, 도엑은 사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의 유익만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성소에서 종교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는 했지만, 도엑은 그때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 종교적인 장소에 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면 도엑 같은 사람에게는 성소에 간 것이 자신의 변화나 성화나 영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치장하는 장식품 정도였습니다. 뭔가 죄만 계속 짓다가 양심에 찔려서 성소 제사 의식을 통해 자기 죄 용서를 받고 또 가서 죄를 짓겠다는 생각으로 온 게 확실합니다. 도엑 같은 사람에게는 성소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찾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위장하는 가면을 얻는 장소였을 뿐입니다.
그때 도엑과 다윗 둘 다 성소에 있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도엑의 동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도엑이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었다면 수백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그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도엑은 이름뿐인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문조사에서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하면 ‘기독교’라고 쓰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천주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천주교’ 또는 ‘불교’라고 써놓고는 성당에 안 가고 절에 안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엑도 ‘기독교’라고 써놓았지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에게 종교라는 것은 그저 직업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이득을 얻기 위한 것뿐입니다. 도엑은 원래 성소에 올 사람도 아니고 거기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예배할 사람도 아닙니다. 사실 예배하는 때보다 예배를 안 하는 때가 훨씬 많은 사람입니다. 어쩌다 한 번 오는 건데, 그 한 번이 그날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뭔가 자신을 위한 일이 있어서 성소에 갔다가 거기서 다윗을 마침 보게 되었고, 또 다윗이 하는 일을 다 보았습니다. 그때 도엑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야, 내가 정말 운이 좋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지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잘 풀리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울도 나중에 똑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다윗을 잡게 되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라고 생각합니다.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도엑은 사울이 죽이려고 하는 다윗을 없애고 사울 밑에서 출세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아주 가치 있는 정보를 거기서 입수한 겁니다.
사울의 궁전으로 돌아간 도엑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기회가 곧 찾아옵니다. 사울이 신하들에게 다윗이 광야에 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느고 분통을 터뜨리며 분노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신하들을 향해 자신에게 대항하여 다윗과 내통하는 자들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요나단까지도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막 나가고 있습니다.
기회주의자였던 도엑은 이 기회를 탁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실제로 본 것에다 약간 말을 덧붙여서, 다윗이 그곳에 도움을 구하러 왔었고 아히멜렉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사울에게 보고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 앞에서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도엑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제사장들이 죽든 말든 내가 잘되면 된다. 내가 출세하면 된다.’라고 거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합니다. 더 나아가 제사장들을 다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냉혹함을 보여줍니다.
이게 지금 옛날이야기입니까? 다윗이 BC 1000년경 활동하던 사람이니까 3천 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는 것을 봅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내가 나를 가리켜서 ‘야. 내가 도엑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도엑 같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엑과 같은 면이 과연 없는가 돌아봐야겠습니다.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슬쩍 고발한 적이 없느냐는 겁니다.
도엑처럼 이렇게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엑도 예배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예배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몸만 와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몸이 여기 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시간을 내서 주일 아침의 황금 같은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온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정말 잘 오셨습니다. 온라인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내서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먼저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몸만 와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몸은 와 있는데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 끝난 다음에 OOO을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몸이 일단 와야 하지만 마음을 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저 내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유익이 있으면 오고 유익이 없으면 안 온다면 그것이 도엑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찢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 마음을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핵심은 와서 눈물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예배이지만 예배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은혜를 받고, ‘이렇게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니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은 결단이고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으며 쇠퇴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들이 많겠지만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예배를 많이 드립니다. 한국교회처럼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교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예배를 많이 드리고, 성경도 많이 읽고, 프로그램도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좋은 프로그램들이 너무 많고, 선교도 아주 열심히 합니다.
그런 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아주 좋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고 많이 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삶이 어떤가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은혜롭게 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삶이 일상생활에서 나와야 하는데, 교회에 모였을 때는 거룩하고 경건하고 영적이고 뜨겁고 좋지만, 끝나고 나가서 자기 삶으로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삽니다. 안 믿는 사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윤리적으로 더 못합니다. 그러니까 쇠락하며 비난을 받고 있는 겁니다.
예배에서 결단은 안 하고 은혜 받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니까, 나가면 끝입니다. 사실 받은 은혜대로 살겠다고 하고 나가도 쉽지가 않은데, 헌신이 없이 그냥 끝나고 나가니까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를 제대로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를 드렸으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자마자 ‘그 인간 말이지...’ 하면서 남을 험담하고 미워하고 그런다면 도엑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없는 이야기를 슬쩍 갖다 붙이고 중요한 것은 살짝 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도엑입니다. 우리가 도엑이 아닙니까? 도엑이 아니라 다윗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사울과 도엑의 제사장 학살 만행 (11~19절)
이제 도엑의 보고를 들은 사울은 즉시 아히멜렉과 모든 제사장들을 소환하여 아히멜렉을 다그칩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11-13절)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왜 자신의 대적 다윗과 공모하여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먹을 것도 주고 칼도 주었느냐고 추궁합니다. 사울은 제사장을 다윗과 함께 음모를 꾸민 자라고 몰아붙입니다. 아히멜렉이 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14-15절)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 왕의 사위이자 충성된 신하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굉장히 바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올바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적개심과 살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그것은 잘못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도엑이 강조한 것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 즉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안 했는데 했다고 한 게 아니라, 기도하면서 그를 위해 정치적으로 어떻게 하면 사울을 물리치고 왕이 될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식으로 몰아간 겁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자기가 다윗을 위해서 평소에도 기도했고 항상 주님이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장군인데, 그가 잘못되면 나라도 위험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의 제사장 가문에 죄를 전가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다시 말해, 아히멜렉 자신은 다윗에게 일상적인 영적 자문을 제공하며 기도해준 적은 있지만,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즉 사울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다윗과 같이 음모를 꾸민 적이 없으며, 그런 계획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고 다윗에게 그런 것을 전혀 들은 적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히멜렉의 진실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은 안 듣는 확증편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6-17절)
사울은 분노하면서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모든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것도 막 나가는 겁니다. 아히멜렉 한 사람이 다윗을 만난 것인데 모든 제사장을 다 죽이라고 하니 말이 안 됩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영적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종들인 제사장들을 죽이기를 꺼려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도엑에게 명령하고 도엑은 그 명령을 철저히 이행합니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18-19절)
도엑은 사울의 명령을 받아 제사장 85명을 쳐 죽입니다. 더 나아가 놉 주민 전체 즉 거기 있던 다른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 심지어 젖 먹는 아기들까지 또 가축들까지 전부 다 죽여 버립니다. 사울의 잔인함과 기회주의자 도엑의 잘못된 충성으로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던 다윗을 도와준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은 반역자이며, 그들을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이 더 안전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보면 그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묻는 자들이었습니다. 즉 다윗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이 나라의 장군인 다윗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했다면, 이 나라의 왕인 사울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했겠습니까? 다윗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사울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사울을 위해서는 더 기도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었는데, 사울이 그들을 다 죽여 버린 겁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제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이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승리의 삶을 살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자기가 조금 악하게 해도 제사장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니까 이 정도로 버텨온 겁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던 사람들을 싹 죽여 버리니까, 기도의 능력 없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제대로 이끌 수 있고 또 어떻게 블레셋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자신의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제사장들을 다 죽여 버림으로 결국 자기가 망하는 길을 더 재촉하게 된 것입니다.
망하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겁니다. 자기가 망하는 길을 선택해서 나가는데 그걸 모릅니다. 자기는 잘하는 줄 압니다. 가끔 망하는 회사들을 보십시오. 어떤 결정들 때문에 회사가 무너집니다. 잘못된 결정들이 쌓이면서 무너지는데, 자기들은 잘하는 결정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잘못된 결정이었던 겁니다. 보는 눈이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 오늘로 치면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많은 분들이 요즘 제사장은 목사라고 합니다. 또 많은 목회자들이 ‘목사가 제사장이다.’라는 식으로 은근히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놓고 이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보십시오. 목사를 공격하면 안 됩니다. 목사는 공격하면 안 되고 공경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목사도 제사장 맞습니다. 제사장에 목사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2:9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너희’ 즉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 제사장입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저도 제사장이고, 여러분도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제사장의 대표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품고, 이 세상을 품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장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즉,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사울이나 도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분 나쁘다고 이렇게 학살을 자행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제사장이 내 마음에 안 드는 말과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장을 죽이겠습니까? 그럼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 없어지는 겁니다.
‘아니, 내가 무슨 누구를 죽였다고 그러나?’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형제자매를 향하여 뒤에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안 보는 데서 해야 할 것은 험담이나 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한 칭찬과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없으면 불행합니다. 있어야 합니다. 특히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 ‘모태신앙’인 것이 요즘은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게 되었는데, 그래도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한 게 한 가지는 있습니다. 나를 위해 부모님이 기도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우리 중에 늦게 믿은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안 믿으셨기 때문에 나를 위해 기도를 못해주셨다.’ 하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나는 그랬지만 내 자녀는 어떻습니까? 내 기도를 받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기도를 믿고 나아가야 기도로 어려움이 해결되는데, 기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사탄의 역사를 물리치며 나아갈 텐데, 예배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온라인으로 하고 이제는 마스크 쓰고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전혀 예배를 안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손해입니까? 교회 손해입니까? 완벽한 자기 손해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면 괜찮은데,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게 되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서 가면 잘못된 길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사탄의 속임수인데, 거기에 넘어가서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하며, 나 자신이 제사장임을 깨닫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다른 성도들도 제사장임을 기억하며 그들을 존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악한 상황에 대한 다윗의 대답 (20~23절)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20-21절)
제사장들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지던 와중에 아히멜렉의 아들 중 아비아달 한 사람이 간신히 도망하여 다윗 진영으로 와서 이것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아히멜렉 가문 제사장 학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비아달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를 안심시킵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22-23절)
다윗은 ‘내 탓이다. 내가 책임이 있다.’라고 인정합니다. 놉 제사장 대량 학살을 총지휘한 에돔 사람 도엑은 다윗의 생애에 걸쳐서 가장 강한 분노를 일으킨 최고의 악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였던 존 캘빈(장 칼뱅, John Calvin)도 도엑을 ‘최고의 악한’이라고 불렀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이 도엑 때문에 지은 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52편입니다. 시편 52편은 최고의 악인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다윗의 신앙적 대답입니다. 엄청난 비극이나 끔찍한 사건이 터질 때 사람들이 하는 질문, ‘도대체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왜 막지 못하셨는가?’에 대한 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편 52편에는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로 가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와 있다고 알렸을 무렵에 다윗이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편 52편을 보십시오.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52편>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아히멜렉을 방문한 것을 정치적인 반역 음모라고 중상 모략하여 놉의 제사장들을 다 죽여 버린 도엑의 만행에 대한 다윗의 분노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도엑을 가리켜 여기서 ‘포악한 자’(1), ‘날카로운 삭도’(2), ‘간사한 혀’(4)라고 묘사하면서,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지 않고, 제가 가진 많은 재산만을 의지하며, 자기의 폭력으로 힘을 쓰던 자’(7)라고 정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인을 멸하시고 땅에서 뿌리 뽑아 버리실 것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5). 그에 반해 자신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8) 같다고 묘사합니다. 푸른 감람나무는 싱싱한 올리브기름을 만드는 나무로서,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함으로 어떠한 악도 행하지 않는 의인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은 사건들이나 의인 또는 악인들의 행동을 보고, 신앙적인 원칙과 지혜를 깨달으며 터득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점점 더 잘 배우며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권력과 재물을 의지하는 도엑의 길은 반드시 망할 것을 믿으면서, 자신 때문에 학살당한 놉 제사장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는 이처럼 애매하고 죄 없는 희생이 꽤 많이 벌어집니다. 놉 제사장들은 악한 자들에 의하여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암매장당한 아담과 하와의 아들 아벨 계통의 희생자들인 것입니다. 아벨은 사람들에게는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께는 죽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살해당한 아벨의 피 소리가 하나님께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창 4:10).
이처럼 끔찍한 비극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이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악이 많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악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변화시켜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피 소리는 정의로운 역사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며,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선지자 이사야와 다니엘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의인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이사야 26:19, 새번역)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다니엘 12:2, 새번역)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의 스타였던 요기 베라(Yogi Berra)가 한 말이 아주 유명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끝났다고 하실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의인을 분명히 빛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왜 이렇게 악이 많은지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의인을 분명히 인도해주시고 그 억울함과 아픔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사울이나 도엑의 악한 길이 아니라, 비록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간절히 주님을 찾고 신뢰하며 나아간 다윗의 길을 걷기로 결단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모든 불행은 나의 탓이로다
삼상 22:6-23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사울의 명령을 받은 에돔 사람 도엑이 무자비하게 놉에 사는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6-8절에, 놉 학살사건의 배경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지난 본문에서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불행한 삶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처음에는 2절에 400명가량이었지만, 23:13에는 600명가량으로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왕이었음에도 7절에 오직 자신이 속한 베냐민지파 사람으로만 신하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민심이 이미 사울을 떠났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믿을 수 없어서 혈육으로 이어진 자기 지파의 사람으로만 신하로 삼은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7-8절에 의하면, 자신이 선발한 베냐민 지파 사람들조차도 믿지 못했습니다. 신하 중에 다윗과 공모하여 자신을 해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습니다. 사울은 신하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윗을 따를까 하여 늘 신하들의 행동을 주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의 삶을 점점 더 깊은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다윗과 사울의 모습은 의롭게 살기에 힘쓰는 사람에게는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반면, 악인은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을 세우고도 안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의눈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고 다가 올 수 있도록 그들이 볼 때 의롭게 살기에 힘쓰는 사람으로 비춰져야 합니다. 사울처럼 불의에 빠져서 오직 자신의 안일을 위해 사는 사람을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나는 과연 의롭게 살기에 힘쓰는 사람인가?” 스스로를 살피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나는 과연 다윗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9-10절에, 에돔사람 도엑은 사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준 것을 보았다고 보고 합니다.
그런데 도엑의 보고에는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사울 왕의 명령을 따라서 놉 땅에 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21:2, 8). 도엑은 다윗이 사울 왕을 핑계로 아히멜렉을 속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키고 보고했습니다.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거짓말 하나로 아무 죄 없는 놉 땅의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말았습니다.
거짓말은 누구나 가장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악 중의 하나입니다. 거짓말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큰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해도 당장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사소한 거짓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거짓말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자기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제로는 싫으면서 좋다고 하기도 하고, 좋으면서 싫은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일일지라도 세상적인 이익 때문에 괜찮다고 말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장사꾼들은 밑지는 장사를 한다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오늘 본문의 도엑처럼 권세있는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는 것인데, 이런 거짓말에 대해 죄의식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죄를 싫어하면서도 거짓말하는 것은 별로 꺼리지 않습니다. 거짓말은 너무 쉽게 할 수 있기에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잠언 19:9에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라고 경고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21:8에는 더 무시무시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말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처럼, 때로는 그 어떤 죄보다 더 큰 파괴력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거짓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입술을 제어해야 합니다. 작은 거짓말이라도 죄라는 부담을 가지고, 혹 실수로 거짓말을 했을 때 같은 거짓말을 반복하지 않도록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사소한 거짓말까지도 자제하고, 할 수 있는 한 진실만을 말하게 하옵소서.” 기도하며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절에, 다윗은 도엑을 피해 도망 온 아비아달에게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놉 땅의 학살 사건을 듣고 나서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놉에서의 학살은 도엑의 거짓말과 사울의 끝없는 의심과 그것을 막지 못한 신하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분명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원인은 자신이 제공한 것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놉으로 피신하여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고, 무기를 요구했을 때, 그를 파멸로 몰아넣으려는 어떤 악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참사에 대하여 얼마든지 도엑을 저주하고 사울을 비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이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의 도움을 받은 것이 이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23절에, 자신에게로 피신한 아비아달을 보호해 줄 것을 다짐했습니다. 자기가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큰 불상사를 불러온 것을 인정하고 회개한 후 그 회개를 삶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늘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그는 범죄했을 때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깊이 회개하고, 지난 행위를 돌이키고 삶의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의 모습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와 함께 동행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다윗의 회개를 본받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의롭게 살기에 힘쓰는 사람과 악인의 삶에 대하여 상고하면서 저희의 삶은 의로운 삶인지 돌아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경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다윗과 같이 진정한 회개와 회개의 열매를 맺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도엑이 놉에서 본 일을 보고하다
삼상 22:6-10
[오늘의 묵상]
1. 망상
망상에 빠져 사는 사람은 베냐민 사람들이 아니라 사울이었다.
기브안 산등성이, 에셀 나무 아래, 창을 들고 있는 왕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는 독재자며, 점점 폭군이 되어 가고 있다.
신하들은 벌벌 떨며 그에게 참된 조언을 하지 못한다.
진실을 말하면 죽는다.
실제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다.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참된 조언이 없으니, 사울의 망상은 부풀어 오른다.
마음이 죽은 자의 생각은 허망하여서 작은 불신이 거대한 망상의 스크린으로 바뀐다.
자신만의 영화에 빠져 극장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왕국은 망가지고 시체만 늘어난다.
망상을 가진 사람이 현실에도 있다.
무당과 법사의 말로 영화를 만들어 용산과 한남동에서 줄곧 상영해 왔다.
권좌에서 물러났음에도 여전히 그 망상의 극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배신에 몸서리 친다.
숱한 사람을 죽이려고 했음에도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다.
자신의 행동이 민주 공화국의 현실을 우그러뜨리고 뭉갰는데도 미안한 기색은 찾으려야 한 톨도 없다.
인종청소급 살상이 일어나기 전에 계엄 사태가 끝난 것이 천만 다행이며 하늘의 도우심이다.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
2. 간신
에돔 사람 도엑은 이 때다 싶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망상의 빠진 권력자의 영화에 등장하여 그가 원하는 도움을 살짝만 얹어도 입신양명을 누릴 수 있다.
에돔 사람이라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었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있는데, 이방 사람이 어떻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는가!
결국 약한 고리를 파고 들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달성한다.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결정한 사람이 도엑이다.
이스라엘을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은 사울과 다윗의 화해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이스라엘은 대내외적으로 안정과 번영에 도달할 수 있다.
최초의 왕과 최고의 장군이 대립하면 나라는 불보듯 뻔하다.
다 타고 검은 재와 그을린 뼈대만 남을 뿐.
간신이 나라를 생각하겠는가!
그저 자기 한 몸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
내란 내각의 사람들은 그 불타는 열차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쩔쩔맨다.
그 중 최악은 한덕수라고 봐야 한다.
무엇이 평생 공무원이었던 그를 저런 무대뽀 용기를 가지게 했을까?
분명히 윤석열에게 보고 배웠다.
헌법과 법률을 어겨도 된다고 배웠다.
아님 그 전부터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방법을 터득한 걸까?
내란 세력들은 더는 정치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제발 조용히 반성하면서 살 수 없을까?
자기 반성이 안되는 권력욕 덩어리들에게 너무 큰 바람일 수 있겠다.
사무엘상을 통해 사울과 다윗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상상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적절하다.
망상과 간신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도할 수 밖에!!
[오늘의 기도]
새벽부터 비가 내립니다.
메말라 비틀어진 우리 영혼에 단비를 뿌려 주옵소서.
생명의 물이 공급되어 뿌리부터 가지 말단까지 피가 통하고 영양이 흐르게 하소서.
맑은 정신과 바른 이성으로 상황을 영민하게 판단하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을 행하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이끄소서.
안OO 형제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회사 생활에 지치지 않게 하시고 회사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기여하게 하소서.
아내 김OO 자매에게 운동하려는 의지를 더 하시사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길어져 올리는 아름다운 시상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자녀에게 복을 더하사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자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